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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계2:8-11 서머나 교회에 주신 말씀

계2:8-11 서머나 교회에 주신 말씀


계2:8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계2: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계2: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계2: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오늘 우리는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 기록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들 가운데서, 그 두 번째에 해당하는 서머나 교회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주일 우리가 살펴본 대로, 에베소 교회는 예수님의 칭찬을 많이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에베소 교회의 행위, 수고, 인내, 영적 각성, 영적 분별력, 올바른 동기, 그리고 성결한 삶에 대해서 칭찬하셨습니다. 그러나 에베소 교회는 그의 처음 사랑을 버렸기 때문에, 예수님의 엄한 책망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반면에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서머나 교회는 그의 처음 사랑을 끝까지 잘 지켰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무서운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머나 교회는 한 순간도 그 처음 사랑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서머나 교회는 예수님의 칭찬만 받았습니다.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들 가운데서 예수님의 책망을 전연 받지를 않고, 칭찬만 받았던 교회는 두 교회였습니다. 하나는 서머나 교회였고, 또 다른 하나는 빌라델비아 교회였습니다.

이와는 달리 예수님의 칭찬은 전연 받지를 못하고, 책망만 받았던 교회도 있었습니다. 마지막 일곱 번째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였습니다. 그 나머지 네 교회는 예수님의 칭찬도 받고, 동시에 책망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불꽃과 같은 눈으로 우리의 모든 것을 환하게 살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정확하게 꿰뚫어보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눈앞에서 우리의 삶은 그대로 적나라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예수님의 눈에 비쳐진 우리의 모습은 어떠하겠습니까? 행여 우리도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그저 책망 받을 일로만 가득 차있지는 않겠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의 칭찬과 책망을 동시에 받았던 네 교회처럼 그래도 칭찬을 받을만한 일이 조금은 남아있습니까?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책망 받을 일들은 고치도록 합시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예수님이 칭찬하실 일에만 힘써 충성하십시다. 그리해서 우리 모두 궁극적으로는 서머나 교회처럼, 빌라델비아 교회처럼 예수님의 칭찬만을 받는 복된 모습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에 나타난 서머나 교회의 모습을 여섯 가지 항목으로 나누어서 차례대로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1) 도시 서머나(the city), 2) 서머나 교회(the church), 3) 발신인(the correspondent), 4) 칭찬(the commendation), 5) 명령(the command), 그리고 6) 권고(the counsel).


첫째로, 도시 서머나에 대해서 살펴봅니다(The City).


서머나(Smyrna)는 에베소에서 북쪽으로 약 60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는 항구 도시였습니다. 에베소에서 부지런히 가면 하룻길 되는 거리였습니다. 오늘날 터키에서는 이곳을 이즈밀(Izmir)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서머나에는 예수님의 칭찬만을 받았던 귀한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요한계시록을 제외하고서는 그 어디에서도 서머나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 이외의 자료를 통해서 도시 서머나의 모습을 살펴볼 수밖에 없습니다.

고대 헬라의 역사가요 지리학자였던 스트라보(Strabo, 64/63 B.C.~A.D. 23)는 그가 쓴 『지리학』에서, 서머나를 소아시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묘사했습니다(XIV.1.37). 그 당시 서머나의 모든 건물들은 이미 도시 계획에 의해서 아름답게 건축되었다고 합니다.

서머나 시내에는 우리 나라의 남산처럼 그다지 높지 않은 파고스(Pagos) 산이 우뚝 서있었습니다. 그곳 정상에서부터 산을 빙글빙글 돌면서 아래로 내려오는 큰길이 있었습니다. 이른바 “황금의 거리”(the Street of Gold)라고 불리는 유명한 길이었습니다.

바로 이 황금의 거리를 따라서 파고스 산의 기슭에는 여러 신전들이 화려하게 서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주변에 도서관, 공연장, 기념관등의 공공건물들이 도시 계획 따라서 질서정연한 모습으로 아름답게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의 파고스 산을 서머나의 앞 바다 멀리서 바라보면, 그 모습은 마치 사람의 머리에 아름다운 면류관을 씌워놓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서머나는 “아시아의 면류관”(the Crown of Asia)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서머나는 로마에 충성을 다했던 도시였습니다. 주전 195년 이미 서머나에는 로마를 신으로 섬기기 위한 신전이 세워졌습니다. 원정을 갔던 로마군인들이 추위에 떨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서머나 사람들은 옷을 모아 그들에게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의 정치가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106~43 B.C.)는 서머나를 가리켜서 로마의 가장 신실한 동맹이라고 극찬을 했습니다. 서머나는 로마에 의해서 자치 도시로 지정을 받았습니다. 많은 로마인들이 그곳에 와서 휴양을 즐기기도 했습니다.

로마의 제2대 황제 디베료가 가이사의 자리에 올랐을 때였습니다. 그 때부터 로마는 황제 숭배를 본격화하기 시작했습니다. 로마는 황제 숭배를 위한 신전의 자리를 공개적으로 물색했습니다. 모두 11개의 도시가 지원을 했는데, 서머나도 그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로마는 자신의 신실한 동맹이었던 서머나에 황제 숭배의 신전을 짓도록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주후 26년, 서머나에는 로마 황제를 위한 신전이 세워졌습니다. 그 결과 서머나는 명실공히 로마 황제를 숭배하는 중심 도시가 되었습니다.

한편 서머나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유력한 인사들도 많았습니다.


마24:2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이 말씀은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을 보시면서 자신의 제자들에게 예언적으로 주셨던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주후 70년 예루살렘은 로마군에 의해서 함락을 당하고 수많은 유대인들이 학살을 당했습니다.

그 때 많은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을 떠나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그 가운데 상당수가 서머나에 이르렀습니다. 유대인들은 서머나에 회당을 짓고, 전통적인 유대주의 사상으로 단단히 무장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들의 세력을 점차로 강하게 펼쳐나갔습니다.

이처럼 서머나는 황제 숭배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리고 유대주의 사상이 강하던 곳이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곳에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스러운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서머나 교회였습니다.


둘째로, 서머나 교회에 대해서 살펴봅니다(The Church).


우리는 서머나 교회가 어떻게 해서 세워졌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를 못합니다. 서머나 교회에 대한 기록은 요한계시록에만 남아 있을 뿐, 사도행전에는 전연 나타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행전에 있는 다른 기록을 통해서 추측해볼 수 있을 뿐입니다.


행19:10 이같이 두 해 동안을 하매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사도 바울은 제3차 전도 여행 때에, 에베소에서 삼 년간을 머물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처음에는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다가 유대인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혀서, 바울은 복음사역의 장소를 두란노 사원으로 옮겼습니다.

바울은 두란노 서원에서 두 해 동안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했습니다. 그 결과 아시아에 사는 자들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역사였습니다.

이 기간 동안 바울은 잠시 서머나로 가서 그곳에서 복음을 전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서머나는 에베소에서 하룻길밖에 되지 않는 가까운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바울은 서머나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자신이 직접 그곳에 교회를 세웠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서머나 사람들이 에베소에 갔다가 두란노 서원에서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후에 자신들의 마을인 서머나로 되돌아온 사람들에 의해서 서머나 교회가 세워졌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서머나 교회는 바울이 직접 세웠을 수도 있습니다. 또는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들었던 사람들에 의해서 세워졌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든 저렇든 서머나 교회는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삼 년간 사역을 하는 동안에 맺혀진 열매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서머나는 황제 숭배의 중심 도시였습니다. 서머나에 사는 사람은 누구라도 일년에 한번은 의무적으로 황제를 섬기는 신전에 올라가야만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곳에 있는 제단에 분향을 하면서, 이러한 말로 황제에 대한 충성을 맹세해야만 했습니다.

“가이사는 나의 주(主)이십니다.”

황제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 사람에게는 증명서가 발급이 되었습니다. 일단 그 증명서를 받고 나면, 그 뒤에는 각자 자기의 신을 마음대로 섬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증명서가 없는 사람은 로마에 대해서 반역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처형을 당했습니다.

자연히 서머나 교회는 많은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사도 요한의 제자로서 서머나 교회의 사자가 되었던 폴리갑(Polycarp, A.D. 70~156)의 순교였습니다. 주후 156년, 폴리갑은 86세의 나이로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그 때는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지 대략 60여 년이 지났을 때였습니다. 그가 순교한 것은 서머나 교회에서 12번째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이전에도 서머나 교회에서는 이미 11명의 순교자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폴리갑이 순교하고 나서 얼마 안되어, 서머나 교회는 인근에 있는 한 교회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 편지는 이른바 『폴리갑의 순교기』(Martyrdom of Polycarp)라고 불려집니다. 그 편지를 통해서 우리는 폴리갑이 순교할 때의 모습을 자세하게 전해듣고 있습니다.

폴리갑은 체포를 당해, 서머나의 노천 극장으로 끌려갔습니다. 그 때 로마의 총독은 폴리갑에게 회유의 말을 던졌습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면 용서해주겠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러자 폴리갑은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86년 간 그 분을 섬겨왔는데, 그 분은 단 한번도 내게 해를 끼치신 일이 없소. 그러니 내가 어찌 나의 왕과 나의 구세주를 훼방할 수 있겠소?”

로마의 총독은 폴리갑에게 최후의 통첩을 했습니다.

“만일 당신이 끝내 마음을 돌이키지 않는다면, 나는 불로 당신을 태워 죽일 것이요.”

그 때 폴리갑은 또다시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당신은 한 시간 타다가 꺼지고 말 불로서 나를 위협하고 있지만, 당신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를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심판의 불에 대해서는 알지를 못하고 있소. 무엇을 주저하고 있소? 당신이 원하는 대로 시행하시오.”

그 날은 유대인들의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곳에 있던 많은 유대인들은 안식일의 규례를 어겨가면서까지, 자진해서 나무들을 잔뜩 들고 왔습니다. 얼른 폴리갑을 처형해버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폴리갑은 86세의 나이로 화형에 처해져서 순교했습니다.

여러분, 혹시 “서머나”(Smyrna)라는 이름의 뜻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헬라어 “서머나”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몰약”(myrrh)입니다. 몰약은 산 사람을 위해서는 향수로 사용되고, 죽은 사람을 위해서는 썩는 냄새를 방지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향기로운 물질입니다.

몰약은 향기를 내는 식물을 짓이겨서 만듭니다. 마찬가지로 서머나 교회는 핍박으로 짓이겨져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서머나” 곧 “몰약”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짓이겨지면 짓이겨질수록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향기를 더욱더 진하게 발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서머나 교회는 극심한 핍박 가운데서도 그 처음 사랑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으로 죽도록 충성했습니다. 그리해서 그들은 예수님의 칭찬과 함께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의 면류관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서머나 교회에 비하면 우리는 너무 안일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너무 나태한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제는 영적 잠에서 깨어납시다. 정신을 차립시다.

우리도 서머나 교회처럼 생명의 면류관을 쓰는 그 날까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도록 충성합시다. 그리해서 우리 모두는 우리 승동(勝洞)교회의 이름처럼 이기는 자, 승리하는 자들이 다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편지의 발신인에 대해서 살펴봅니다(The Correspondent).


계2:8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요한계시록 1장에는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이 여러 가지로 묘사되었습니다. 각 교회마다 예수님은 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이는 각 교회마다 사정과 형편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계1:17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계1:18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두 가지로 묘사되었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자신을 처음이요 나중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을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라고 칭하셨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서 “처음이요 나중”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신성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처음과 나중”(the First and the Last)이라는 칭호는 본시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이 스스로를 가리키실 때 사용하셨던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사44:6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속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사48:12 야곱아 나의 부른 이스라엘아 나를 들으라 나는 그니 나는 처음이요 또 마지막이라


우리는 이 사실을 통해서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은 이 칭호를 통해서, 자신은 시간과 공간과 역사를 초월해서 “영생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서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인성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근본은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기 때문에 그 본질상 결코 죽으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시려고 인성을 가지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흘만에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살아나셨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은 이 칭호를 통해서 자신이 “부활의 주”가 되심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서머나 교회에 처음과 나중으로, 또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로 나타나셨습니까? 이는 핍박당하는 서머나 교회를 위로하시며, 그들에게 용기를 북돋우어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당시 서머나 교회에는 핍박으로 인한 죽음의 짙은 그림자가 늘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처음이요 나중이심을 밝히셨습니다. 예수님은 영생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그 어느 때라도 변함없이 그들과 함께 하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서머나 교회에게 자신이 죽으셨다가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깨우쳐주셨습니다. 이는 비록 그들이 순교하더라도, 그들도 예수님처럼 부활하게 될 것임을 말씀해주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서머나 교회의 형편에 맞는 모습으로 그들을 찾아주시고, 그들을 위로해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우리 각자의 형편에 맞는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주시고, 우리를 위로해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도 얼마든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실패로 죽었다가도 성공으로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패배로 죽었다가도 얼마든지 승리로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처음이요 나중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죽었다가 살아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이와 같은 회복의 역사가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넷째로, 서머나 교회가 받았던 칭찬에 대해서 살펴봅니다(The Commendation).


계2:9 내가 네 1) 환난과 2)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3)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예수님은 교회를 위하여 친히 모든 아픔을 겪으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교회가 겪는 아픔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아십니다. 예수님은 서머나 교회가 예수님을 위하여 겪고 있는 세 가지 아픔을 알아주시면서, 그들을 인정해주시고, 칭찬해주셨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그들의 환난을 알아주셨습니다.

서머나는 황제 숭배의 중심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서머나 교회는 황제 숭배를 철저하게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결코 가이사를 자신의 주라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주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서머나 교회는 많은 핍박을 받아야 했습니다. 핍박은 여러 가지 형태의 환난으로 주어졌을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 당시 성도들이 예수님을 위하여 당했던 여러 가지 환난들을 이렇게 열거하고 있습니다.


히11:36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히11: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둘째, 예수님은 그들의 궁핍도 알아주셨습니다.

그 당시 서머나는 부요한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서머나 교회는 궁핍했습니다. 왜 부요한 도시 서머나에서 서머나 교회만큼은 궁핍해야만 했습니까? 가난한 사람들만 그곳에 모였기 때문입니까? 만일 그러했다면, 그것은 예수님이 일부러 칭찬하실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히10:34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서머나 교회가 궁핍했던 이유는 핍박 때문이었습니다. 핍박자들이 그들의 산업을 빼앗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서머나 교회를 향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서머나 교회가 물질적으로는 궁핍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영적으로는 부요했습니다. 그들은 믿음에 부요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향한 사랑에도 부요했습니다. 그들은 하늘 나라에 대한 소망에도 부요했습니다.

비록 그들은 이 땅에 보물을 쌓아두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늘 나라에 많은 보물을 쌓아두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가리켜서 그들이 실상은 부요한 자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책망만 받았던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과는 정반대였습니다.


계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예수님은 물질적으로 부요한 라오디게아 교회를 칭찬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영적으로 부요한 서머나 교회를 칭찬하셨습니다. 우리도 서머나 교회처럼 영적으로 부요한 자,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가 되어서 예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기 바랍니다.

셋째, 예수님은 그들이 유대인의 훼방을 받는 것에 대해서도 알고 계셨습니다.

당시 서머나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정착해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선민의식에 사로 잡혀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 유대인들만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여호와의 총회”에 속했다고 보았습니다.


신23:3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대뿐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가리켜서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자칭 유대인이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의 모임을 가리켜서 “여호와의 총회”가 아니라, 실상은 “사단의 회(會)”일 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단은 서머나 교회를 쓰러뜨리기 위해서 이들을 자기의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예수님이 요8:44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사단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입니다. 자연히 사단의 사주를 받은 유대인들도 여러 가지로 거짓 참소를 하면서 서머나 교회를 대적했습니다.

예컨대 그들은 기독교인들이 로마에 대해 반역을 꾀하고 있다고 참소했습니다(rebellion). 기독교인들은 가이사를 숭배하지도 않았고, 가이사에게 충성을 맹세하지도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기독교인들을 방화범이라고 참소했습니다(arson). 기독교인들은 불로 세상이 심판 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기독교인들을 식인종이라고 참소했습니다(cannibalism). 기독교인들이 성만찬을 하면서 사람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롬2:28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결국 이들은 표면적 유대인이며, 자칭 유대인이었을 뿐입니다.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총회가 아니라, 실상은 사단의 회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은 사단의 도구가 되어 거짓 참소함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쓰러뜨리려고 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서머나 교회는 환난과 핍박과 유대인들의 훼방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서머나 교회는 예수님을 향한 처음 사랑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리해서 그들은 예수님의 칭찬을 받았습니다.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실상은 네가 하나님의 백성이니라.”

서머나 교회처럼 우리 모두도 예수님에게서 이러한 칭찬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섯째로, 서머나 교회를 향하신 예수님의 명령입니다(The Command).


계2:10 1)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2)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서머나 교회를 향하여 두 가지를 명하셨습니다.

첫째,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고 예수님은 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서머나 교회가 지금도 환난과 궁핍과 유대인의 훼방으로 인하여 극심하게 시달리고 있는 사실을 알고 계신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지를 않으셨습니다.

“안심하라! 이제는 곧 상황이 좋아질 것이다.”

오히려 예수님은 이와는 정반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서머나 교회가 장차 받아야 할 고난이 있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서머나 교회가 장차 받아야 할 고난의 내용과 고난의 목적과 고난의 기간을 차례대로 말씀해주셨습니다.

먼저 고난의 내용입니다. 마귀는 장차 서머나 교회 가운데 몇 사람을 옥에 던져 넣을 것입니다. 서머나 교회를 대적했던 자들이 유대인이었든지, 로마인들이었든지 간에 그 궁극적인 주체는 결국 마귀 곧 사단이었습니다.

고난의 목적은 시험을 받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시험은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허락 하에서만 성도를 시험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하나님은 사단에게 욥을 시험토록 허락하셨습니다. 사단은 시험을 통해 욥을 쓰러뜨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욥을 쓰러뜨리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사단에게 시험의 조건을 거시면서, 욥을 든든히 붙들어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마귀는 시험을 통해 서머나 교회를 쓰러뜨리려 했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결코 서머나 교회를 쓰러뜨릴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서머나 교회를 든든히 붙들고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고난의 기간은 십 일 동안이었습니다. 여기서의 십 일은 짧은 기간을 의미합니다. 사실 십 일이 아니라, 십 주, 아니 십 년 동안의 고난이라 하더라도 장차 우리가 살아가게 될 영원한 삶에 비하면 지극히 짧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서머나 교회는 이제 곧 고난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그 고난을 두려워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세 가지의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 고난은 그 고난을 감당할 수 있는 몇 사람에게만 임하기 때문입니다(not universal). 또한 고난의 목적이 선하기 때문입니다(well-intentioned). 아울러 고난은 일시적이기 때문입니다(not perpetual).

둘째,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고 예수님은 명하셨습니다.

서머나 교회가 장차 받을 십 일 동안의 환난이 끝나고 나면, 그 결과는 두 가지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옥에서 풀려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처형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 결과가 어떠하든지 예수님은 서머나 교회를 향하여 죽도록 충성하라고 명하셨습니다.

만일 옥에서 풀려난다면, 아직도 해야 할 사명이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생명 다해 충성해야 할 것입니다. 이 때의 “죽도록”은 충성의 강도(degree)를 의미할 것입니다.

만일 처형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죽음을 두려워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순교하는 그 순간까지 충성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이 때의 “죽도록”은 충성의 기간(duration)을 의미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도록 충성하는 자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충성했으니까 영화로운 “면류관”이 주어지고, 예수님을 위하여 목숨을 바쳤으니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고후4:17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뒤를 따라 십자가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환난은 잠시입니다. 그러나 장래 우리가 누릴 영광은 영원합니다. 현재의 환난은 경한 것입니다. 그러나 장래의 영광은 지극히 크고 중한 것입니다.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우리 모두 예수님의 명에 순종합시다. 그 어떤 핍박과 환난에도 두려워 맙시다. 예수님을 위하여 죽도록 충성합시다. 그리함으로서 우리 모두 예수님이 허락하시는 생명의 면류관을 받읍시다. 이러한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섯째로, 서머나 교회를 향하신 예수님의 권고입니다(The Counsel).


계2: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의 권고는 두 가지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순종에 대한 요구와 축복에 대한 약속입니다.

첫째, 예수님은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예수님은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편지하시면서 언제나 이 말씀을 똑같이 하셨습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대필한 이는 사도 요한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편지가 각 교회에 전해질 때, 그 편지를 성도들 앞에서 읽어줄 사람은 각 교회의 사자입니다.

그러면 각 교회의 사자가 성도들에게 예수님의 편지를 읽을 때, 교회의 사자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분은 누구이십니까?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듣는 이의 귀를 열어주시고, 듣는 이의 마음을 열어주시는 것은 성령님의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각 교회의 성도들이 그 교회의 사자를 통하여 성령님이 하시는 말씀을 진지하게 듣고 순종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지난 주일에 이미 우리가 살펴본 대로 “이기는 자”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 성도 곧 진정한 그리스도인을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사단의 권세를 이기며,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기는 자에게 약속된 축복은 무엇입니까?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서머나 교회의 성도들은 핍박으로 인해서 첫째 사망의 고통은 당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둘째 사망의 해는 받지 않을 것입니다.


계20:6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하리라


이기는 자, 곧 죽도록 충성하여 생명의 면류관을 쓰는 자들은 어떻게 됩니까? 그들은 한번 죽을 뿐입니다. 그들은 첫째 부활에 참예하기 때문에, 둘째 사망의 해를 결코 받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로 더불어 세세토록 왕 노릇하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은 어떻게 됩니까?


계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그들은 겁쟁이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흉악한 자들이요, 살인자들입니다. 그들은 니골라당의 교훈을 따르는 행음자들입니다. 그들은 술객들입니다. 우상 숭배자들입니다. 그리고 거짓의 아비 사단을 따라서 거짓으로 참소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결국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할 것입니다. 그들은 지옥 불에서 영원한 고통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겪어야 할 둘째 사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는 이처럼 두 번 죽게 됩니다.


눅8:15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서머나 교회는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지켰습니다. 그들은 극심한 환난과 궁핍과 유대인의 훼방 가운데서도 인내하면서 예수님을 위하여 죽도록 충성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생명의 면류관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있는 교회는 서머나 교회뿐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폴리갑 기념 교회로 오늘날도 그대로 존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나머지 여섯 개의 교회는 모두 사라지고 빈터만 남았습니다.

서머나 교회처럼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 agaser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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