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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최일환목사

[스크랩] 사람이 없습니다. /요5:1~9/ 2004년 2월 1일

사람이 없습니다.

요5:1~9

2004년 2월 1일 최일환 목사 주일낮 설교

5:1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5: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5:3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5: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5:5 거기 삼십팔 년 된 병자가 있더라

5: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5: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5: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설교:

성경에 나오는 이름은 다 뜻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비, 모세는 건져내었다, 베드로는 반석이란 뜻이 있습니다. 베들레헴은 떡집, 브니엘은 하나님의 얼굴 등의 뜻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연못은 "베데스다"라고 불렀는데 그 뜻은 "자비의 집", “은혜의 집”입니다. "베데스다"란 히브리말로 “벧”와 “에스다” 즉 집과 자비, 은혜란 두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그런데 실상 이곳은 자비의 집, 은혜의 집이란 이름에 맞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이 자비의 집이란 이름을 가진 못 가에 누가 모여 있었습니까?

시각장애자, 지체장애자, 혈기 마른 자들 같은 병자들이 누워 있었습니다. 언뜻 보기에도 불치의 병자들입니다. 그들이 무엇을 바라고 이곳에 진치고 있었습니까?

그들은 전해 내려오는 전설을 믿었습니다. 가끔 천사가 내려와 물을 動하게 한다고 믿었는데 아마도 간헐천처럼 물이 부글부글 끓었는가 봅니다. 그때 그 연못에 제일 먼저 들어간 자는 어떤 병이든지 낫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각가지 불치환자들이 진을 치고 있는 곳이 바로 베데스다 못이었습니다. 자비의 집이라고 했지만 이름과는 달리 비참한 인간 군상들이 모인 곳이었습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몇 달 혹은 몇 년 동안이나 이곳에 진치고 있는 병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불치의 병자들이 이곳에서 먹고 자고 누워 자는 곳이니 악취도 나고 지저분할 게 뻔한데 <자비의 집>이란 말은 얼마나 역설적입니까? 차라리 <무자비의 집>이라고 해야 옳지 않겠습니까?


지금도 우리나라와 세계 각국 여러 곳에서 베데스다란 명칭을 사용하는 곳을 봅니다. 그런데 대부분 그런 시설이 어떤 곳인 줄 아십니까? 아주 건강한 사람들이 모여서 멋진 집에서, 아주 아름다운 경치를 바라보며 멋있게 사는 곳이 아닙니다. 정말 은혜 받아서, 축복을 받아서 즐겁게, 멋지게 사는 집이 아닙니다. 무허가 건물에서, 그야말로 구질구질한 곳에서 버림받은 인생들이 모여 겨우 굶주림과 추위를 면하며 구차한 삶은 이어가는 보호시설에 <베데스다>란 간판이 붙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부모들이 내다버린 정박아들이 모여 살거나, 혹은 자식들에게 버려진 늙고 병든 노인들이 모여 사는 곳인데 <자비의 집>이라면 역설적이지 않습니까?


이 베데스다 못에 물이 동하여 불치병자들이 낫는 일이 없다면 이곳은 은혜의 못이 아니라 거짓의 못, 사기의 못일 것입니다.


주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을 때는 명절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데스다에는 이런 명절과는 상관없는 곳이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이런 명절에 더 소외되고 더 괴리감을 느끼는 되는 곳이 이곳일 것입니다.

성한 사람들은 저렇게들 몰려들어 하나님께 경배도 하고 오랜만에 반가운 사람들과 만나 회포도 풀고, 필요한 물품들을 구입하기도 하고…모두들 희희낙락하건만 베데스다 못가의 병자들에겐 아무 상관없는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현재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 못 가에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여러 환자 중에서도 38년 동안이나 중풍으로 신음하는 병자에게 다가서셨습니다. 그리고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병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기 전에 다른 사람이 먼저 가나이다."


이 사람이 말하는 말을 들어보십시오. "사람이 없어…" 했습니다. 저는 이 짧은 한구절이 마음에 걸립니다.

자기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다는 말입니다. 하긴 이 못 가에 병자들 중에 누가 이 중풍병자를 도울 사람이 있겠습니까.  "물! 물이 움직인다!" "물이 끓는다!"

누가 소리치기라도 하면 모두들 자기가 먼저 들어가려고 난리일 것입니다. 혹시 병자들의 가족이 곁에 있다고 해도 자기 가족부터 끌고 들어갈 것입니다. 그래서 이 중풍병자는 사람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 이 사람의 부인은 어디 갔을까요? 가족은 어디 갔을까요? 가족은 없는가? 부모는 죽었는가? 자식은, 형제들은, 친척들은?  모르긴 몰라도 부모는 죽지 않았을까요? 이 사람이 중풍병에 걸린지가 38년이라니 나이 20세에 병에 걸렸어도 60이나 되는 나이입니다. 부인이나 자식도 없었을 것 같습니다. 아예 결혼을 못했거나 결혼을 했었어도 부인이 38년 동안 그의 수발을 들기도 어려웠을 것입니다. 아마 도망갔겠죠. 하여튼 그는 자기를 도울 사람이 없다고 하소연합니다.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당시만 해도 예루살렘에 사람이 많았습니다. 제사장이나 율법학자 같은 종교인도 많았고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 같은 상류층에서부터 하류층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더구나 명절을 맞아 예루살렘은 인파로 넘쳐 났습니다. 그런데 이 병자에게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어떻습니까? 사람이 많습니다. 도시마다 사람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서울에만 1천만 명이 넘는 인구가 북적대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 수원만해도 100만이 넘게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없다면 맞는 말이겠습니까?


그러나 사실입니다. 사람은 많으나 사람이 없습니다.

내 딱한 사정 들어 줄 사람이 없고, 내 어려운 처지 도와줄 사람이 없습니다.


"사람이 없나이다."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여러분 주변에는 누가 있습니까? 여러분이 힘들고 어려울 때 사람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남의 도움이 필요할 때 진정으로 도울 자가 있었나요?


우리는 이 본문에서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할까요?

1. 사람은 진정한 도움자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38년된 환자는 자기를 도와 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사람은 많은데 힘들고 어려울 때, 도움이 꼭 필요한 때,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변은 어떻습니까?


연단 받던 욥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평탄할 때, 건강할 때, 거부로 지낼 때는 그의 주변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들끓었겠습니까? 아내와 10명의 아들딸들이 있었습니다.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이웃들도 있었고 친척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의 집에서 부리는 수십 수백 명의 종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의 태풍이 불어닥치니 그 주변의 사람들이 다 날아가 버리고 맙니다. 자식들은 하루아침에 떼죽음을 당해 사라지고 말았고 그의 아내도 욕하며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친구들도 떠나고 이웃들도 사라졌습니다. 그 때 욥이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욥기19: 17절 이하에 "내 숨을 내 아내가 싫어하며 내 동포들도 혐의하는구나, 어린아이들이라도 나를 업신여기고 내가 일어나면 나를 조롱하는구나. 나의 가까운 친구들이 나를 미워하며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돌이켜 나의 대적이 되었구나."

그 많던 재산 하루아침에 다 날아가고 자식 다 죽고 건강마저 사라지니 그 많던 사람들이 다 사라지고 혼자 남은 것입니다. 이것이 욥의 시련이었습니다.


때로 하나님이 사람들을 끊어놓으실 때가 있습니다. 내 주변에 많던 사람들이 다 사라지게 합니다. 그때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 하나님이 끊어 놓으실까? 이유는 하나입니다.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시려고 다 끊어놓으실 때가 있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시편146:3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그래서 하나님은 다 끊어 놓으실 수 있습니다.


아마 베데스다의 이 중풍병자에게도 처음엔 누가 있었는지 모릅니다. 부모가 있었는지, 형제가 곁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며칠이나 붙어 있겠습니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몇 달 몇 년을 곁에 있을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그렇다고 그들을 욕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사람이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을 전하던 바울도 "사람이 없다"고 안타까워했습니다.

빌립보서 2:19-21에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안에서 바람은 너희 사정을 앎으로 위안을 받으려 함이니 이는 뜻을 같이 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 밖에 내게 없음이라”

여기서 바울이 몹시 외로워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 그의 주위에 늘 사람이 있었습니다. 디모데, 실라, 누가, 마가, 바나바, 브리스길라 아굴라 등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돕고 그 곁에 있지 않던가요?


그러나 종종 바울이 슬픔과 외로움에 잠긴 것을 우리는 압니다.

때론 만나서 도와주고 힘이 되기도 했지만 이곳저곳으로 흩어져 복음을 전해야 하니 종종 사람이 그리운 것입니다. 정말 힘이 되어줄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 옥중에 있을 때에도 그 곁에 사람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갔고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딤후4:9)


사람은 많은 것 같은데 진심으로 바울과 함께 살고 죽고자 하는 자는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현재 나에겐 디모데 밖에 없다고 토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도 중국 선교를 하는데 참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교수를 구해서 보내는 것도 그렇고 교회 비젼 트립을 가는 것도 그렇습니다. 선교여행을 같이 가자고 그렇게 얘기 하는데도 목사마음을 헤아리고 동참하는 성도가 없습니다. 마치 도수장에 끌려가는 양같이 질질 끌려가는 모습만 보이니 속이 탑니다. 


왜 그럴까 생각합니다.

그것이 하나님만을 의지케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그러기에 사람을 믿지 마시고 사랑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예수님이 참 도움자임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사람이 없습니다. 사람은 많으나 사람이 없습니다. "사람이 없나이다." 도움 될 만한 사람, 믿을 만한 사람,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한탄하고 하소연하는 이 병자 앞에 참 사람이신 주님이 서셨습니다. 사람 중에 사람이신 주님께서 서신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타락하여 온전한 인간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참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인자 중에 인자로 오셨습니다. 참신이시자 참 인간의 형상으로 오셨습니다. 그분은 온유합니다. 은혜와 진리가 가득하십니다. 능력이 있고 권세가 있어 못 이루실 일이 없습니다. 자비와 矜恤이 한없으십니다. 완전한 인격체이십니다. 그 주님께서 38년 된 중풍병자 앞에 서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患者에게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그 환자는 안 일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자력으론 일어설 수 없던 그가 주님의 말씀에 의해 일어섰습니다. 그 누더기 침상을 메고 걸었습니다. 기적이 일어나는 순간, 그의 인생이 바꿔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여러분 앞에 서신 주님을 보십시오. 사람 중에 사람이신 그분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사람 없다고 한탄하지 말고 참 사람이신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자주 주저앉지 않습니까? 들어 누워 움직이지 못하는 중풍병자처럼 늘 낙심하고 좌절하지는 않습니까?

내 곁에 돈 많이 사람이 없다고, 내 곁에 팔자 고쳐줄 사람이 없다고 한탄하지는 않습니까? 내 곁에 사람들 바라보며 실망하지는 않습니까? 우리에게 세상 사람은 다 떠나도 우리의 참 친구이며 참 사람이 계십니다. 그분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분이 계신 곳은 어디나 자비의 집입니다. 거기는 기쁨이 있고 고통이 사라지는 곳입니다. 


내가 변하면 우리 주변에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만이 우리를 도우실 친구입니다.

기도합시다.

 

출처 : 최일환 목사(장안중앙교회)설교 카페
글쓴이 : 최일환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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