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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마당/목회처신법

[스크랩] 성도의 가슴에 말씀을 꽂으라

성도의 가슴에 말씀을 꽂으라

 

 

 

차 례
서 론

제 1 장 설교의 전통
제 2 장 성경의 중요성
제 3 장 설교의 인격적 차원
제 4 장 설교 작성
제 5 장 설교의 시작과 끝
제 6 장 설교의 예화
제 7 장 설교의 스타일과 전달
제 8 장 설교의 주제
제 9 장 설교 배후의 설교자 인격




역 자 소 개
곽 주 환
*감리교 신학대 졸업
*구로중앙감리교회 행정목사
*클레어몬트신학대학원 목회학석사 (M.Div)
*클레어몬트신학대학원 목회학박사 (D.Div)

논문: 설교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존 웨슬리와 칼 바르트를 중심하여
서 론

설교는 느껴지고, 동화되고, 연구되고, 경험되는 것이다. 설교는 명상, 청취, 기도, 재평가와 끊임없는 노력에 의해서 성장된다. 비록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청중들 속에 임재하고 있다 할지라도, 설교는 청중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삶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존재한다.
내게 있어서 설교는 언제나 지도없이 죽음의 바다를 항해하는 또 하나의 새로운 경험과도 같다. 장사하는 데에도 늘상 사용하는 판매 방법이 있고, 생각하는데에도 습관이 있고, 경험돼 되풀이되는 것이지만 소금처럼 가치가 있는 설교는 신선하고 새로운 창조행위이며, 한 번도 반복되지 않는 진기한 경험이다.
이 책에서 나는 매우 대중적인 두 가지 설교방법에 관해서 토론하는 일에 매우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는데, 그 중의 하나는 인상주의적인 설교방법 또는 기사 전달식 설교방법이다. 그것은 뉴스나 텔레비전의 저널리스트가 하듯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그리고 보다 편한 방법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인, 본질적으로 성경본분에 대한 감동과 그것을 자세히 설명하는 방법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이야기식 설교방법은 회중의 마음과 생각을 보다 완전하게 이해하며 그 안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근거를 발견할 수 있는 보다 나은 기회를 갖게 하는 것이다.



제 1 장 설교의 전통
이스라엘 민족은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형성되고 보존되어 왔다. “쉐마 이스라엘” (Shema, Israel 이스라엘아, 들으라!). 장막의 한가운데 솟은 기둥처럼 제사장 혹은 선지자들의 말씀선포 행위는 백성들의 삶 한가운데 존재했다. 말씀선포는 그들의 중심이요, 존재 근거였다. 그 말씀을 듣고 믿음을 지켰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었고, 그렇지 않았을 때, 호세아가 말한것처럼,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다 (호1:9).
그들은 하나님과 그들의 관계를 서술하고 있는 역사(歷史)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했다. 이야기 신학(Recital theology)이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서 그들에게,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 이루신 일들을 진술하는 것이다. 이것을 설교 혹은 선포라 한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말씀에 따라 형성되었다. 이러한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한 말씀들이 초대 기독교 설교자에게서 계속 반복되고 있음을 신약성서에서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전통은 역동적으로 존속하고 있다. 중세까지만 해도 하나님이 신앙공동체를크게 축복하셔서 그들이 예루살렘 대신에 로마로 활동기지를 삼을 정도로 세계 도처에 퍼지게 되었음을 기억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다. 종교개혁 이후에 사람들은 위클리프, 후스, 쯔빙글리, 칼빈, 루터 등을 통해 하나님이 이루신 일과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방법으로 활자화되어 그들의 언어로 읽을 수 있게 되었는가를 기억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18세기 복음 운동 이후에는 농부들과 광부들,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혀에 성령께서 어떻게 임하셨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19세기와 20세기에는 사회 복음(social gospel)이 교회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기관이나 단체로 확산되었다. 오늘날 21세기에도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말씀이 언제나 덧붙여지고 있다. 말씀이 선포될 때에 장막의 기둥이 세워지고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절대로 스스로를 단독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사도들과 그들 이전의 이스라엘 예언자에게서 이어지고 있는 설교자들의 위대한 전통 한가운데서 설교하는 것이다. 설교할 때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강단이 아니라 공동체의 강단에 서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하나가 되라고 사람들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시작되고, 하나님에 의해서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에 의해서 지속되며, 하나님에 의해서 돌보심을 받고 있는 하나님의 공동체와 하나가 되라고 사람들을 초청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는다면 무엇을 설교하고, 그 일을 수행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관한 기존의 우리의 이해와는 큰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한 사실은 설교에 대한 우리의 두려움을 사라지게 하고, 우리의 청중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해주며, 우리가 어떤 메시지를 전해야 할 것인지를 결정해 주며 그리고 우리의 성공을 보장해 준다.
우리는 측량할 수 없이 귀한 이 보화를 깨어지기 쉽고 결코 영원히 사용되지도 못할 질그릇 속에 가지고 있는데 이는 신앙공동체를 세우고 계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다. 그렇다고 해서 설교자의 특성이 잠시라도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비록 보잘것없는 질그릇이라도 나름대로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필립 부룩스(Phillips Brooks)가 말한 것처럼 “설교는 설교자의 특성을 통해서 전달되는 진리”란 주장은 참으로 옳다. 그러나 설교자의 그러한 특성은 옛 신앙공동체에서 전해 내려오고 있는 전통 안에 있는 것이다.
공동체에 관한 개념은 고린도 전서 12-14장에 나타난 바울의 방언에 대한 이야기의 배경이 되고 있다. 만일 설교자의 어떤 특별한 행동이 공동체를 세우는 일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거나 누구도 그의 설교나 행동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런 경우 공동체의 예배는 아무 가치도 없게된다. 공동체는 평가의 기준이며 또한 통전성, 예를 들면 신학의 통전성, 지식의 통전성, 목적의 통전성, 열정의 통전성을 향해 나아간다. 이러한 이유로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언급했던 교회 분열의 문제를 13장에서는 사랑에 대한 주제로 바꾸었다.
그러므로 설교자에게 있어서 첫 번째 소명은 사랑하는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설교자는 공동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설교할 내용이 없다. 우리는 공동체와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을 사랑해야만 한다. 설교하기를 원한다 해도 설교 자체만을 사랑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기독교 철학을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부족하다. 우리는 사람들을 사랑해야 하며 공동체를 통한 하나님의 비전을 사랑해야 한다. 그 후에야 우리는 설교할 수 있다. 물론 이 일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공동체의 소속원들이 처한 상황을 알게 될 때, 끔찍한 일들을 경험하고 삶의 유한성을 느낄 때, 우리의 사랑은 시작된다. 즉 끓는 듯한 야심, 미움, 욕심, 실망 등 우리 안에 있는 욕구와 똑같은 것들을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서 발견하게 될 때 우리는 그들을 사랑하게 된다. 하나님의 가족공동체는 성령께서 함께하시사 사랑과 기쁨을 나누며 더불어 살아가게 되는 놀라운 공동체이다.
우리 설교자들은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신앙공동체를 형성하고, 이땅에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기 위한 방법들을 보다 많이 발견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 설교자들은 하늘의 보화를 담고 있는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이다. 그러나 우리는 보화를 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배워야 한다.
제 2 장 성경의 중요성

위대한 설교자들은 언제나 성경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성경적 개념과 성경본분에 근거해서 설교한 사람들은 좀처럼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거기에는 확고하고 영속적으로 성경에 근거하고 있는 어떤 것, 아주 평범한 설교적 단상일지라도 그것을 단편적이거나 모호하지 않게 만드는 무엇인가가 있다.
성경은 공동체의 책이다. 설교를 잘하기를 원하는 목회자는 성경을 사랑해야만 하며, 말씀이 그의 전 인격에 배어들 때까지 날마다, 해마다 성경과 함께 살아야만 한다. 오늘날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 중의 하나는 우리에게 뿌리가 없으며 또 그것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우리 사회는 너무나도 새롭고, 너무나도 쉽게 변하고, 너무나도 순간적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일시적이며 뿌리가 없고 고독감을 느끼게 된다.
와이어트 쿠퍼(Wyatt Cooper)는 조상의 묘소에 나가 식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다음음과 같이 말했다. “전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어린아이들은 조상들의 무덤 위를 덮고 있는 흙을 맨발로 밟고 서서 그들의 육체와 뼈가 영원히 그 땅의 일부가 되었듯이 그들이 고통과 좌절, 시련과 승리가 모두 자신의 일부가 되었음을 깨달아야 했다. 나는 이 세상이 나로부터 시작되지 않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전에 이미 존재했던 사람의 일부이며, 사라져간 수천 명의 사람들도 역시 영원히 현재의 나와 장래의 나의 일부임을 깨닫게 되었다. 어린아이가 그것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세상은 그와 더불어 시작되거나 그로 인해 끝나지 않는다. 그들의 태어남과 죽음의 사이에서 우리는 영원과 연결된다. 그들은 도전과 책임을 지니고 살아간다.”

만약 당신의 설교가 성경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통전성, 신비, 기쁨이 없는 설교가 된다. 그것은 마치 꽃을 꺽어 저녁이 오기 전에 시들어 버리게 하는 것과 같다. 신앙공동체와 성경에 뿌리를 두지 않으면 하나님이 백성이 되려 하고 세계를 구원하고, 거룩하신 보좌 앞에 나아와 예배하려는 사람들의 끊임없는 노력에 대해서 깨닫게 되거나, 그것을 전할 수 없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 있어서 가장 긴급한 주제는 무엇인가? 전쟁? 생태학? 사회의 복지? 가정의 불화? 성경에 언급되지 않은 주제란 없다.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고 또 다루어질 수 있는 주제들이 이미 성경 안에 모두 있으므로 사려깊은 설교자라면 우리의 전통과 현재의 삶 사이의 관련성을 즉시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은 삶에 관한 책이며, 주제가 얼마나 현대적이냐 또는 전문적이냐에 상관없이 모든 중요한 주제들이 삶의 문제들과 연관을 맺고 있으며,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들을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을 중심에 두라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성경은 신앙공동체에 관한 내용이며 동시에 하나님에 관한 말씀이다. 이러한 것이 설교에 독특성을 부여한다. 책이 대량으로 팔리고, 텔레비전 오락 프로그램, 컴팩트디스크와 컴퓨터 등이 필수품이 되어 버린 이 시대에 시골교회의 작은 강단 위에서 선포되는 평범한 설교자의 말씀을 사람들이 아직도 하나님의 권위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에 관하여 말씀한다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사람을 위하여 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도 더욱 중요하다. 칼 바르트(Karl Barth)는 “사람들이 도움을 얻으려고 우리에게로 올 때 그들은 삶에 관해서 보다는 그들의 삶을 넘어선 곳에 계시는 하나님에 관해서 많은 것을 배우기를 원한다” 고 말했다.
사람들은 비록 화려하고 예술적으로 표현되었다고 하더라도 목회자 개인의 철학 또는 윤리이론을 듣기 위해서 바쁜 일정을 쪼개 주일날 교회에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공동체 안에서 예배가 행해지고 그 예배 한가운데서 그들의 매일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말씀을 듣고 깊이 생각하면서 하나님과 만나기 위해서 공동체가 위임한 목회자의 말씀을 들으려고 교회를 찾아오는 것이다.
성경의 말씀이 선포될 때 그리고 그 말씀 곳에서 역사의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을 깨닫게 될 때, 우리 마음은 뜨거워지고 어려운 세상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힘차게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설교자가 시시하고 감상적인 내용으로 시간을 허비하고 하나님에 대한 말씀을 분명하게 언급하지 않으면 회중은 채석장의 노예처럼 매주 교도소로 끌려가는 기분이 되고 그들이 영은 아주 약해지고 좌절하게 된다.
교양이 있는 설교자는 항상 자신의 의견을 전하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교육을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유혹이 더 심해진다. 그러나 특히 주제와 관심사들에 대해 신학적인 관점을 갖고 깊이 묵상할 때 사람들의 필요에 대하여 가장 분명하고 신뢰할 만한 말씀은 제공하는 것이 바로 성경이다. 마틴 루터는 성경을 지속적으로 가르칠 것을 강조했다. 또한 설교에 대해서 배우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분명하고 확고한 성경의 말씀에 너 자신을 심어야 한다. 그러면 너는 너의 근거를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성경본문 정하기
성경적인 설교는 어떻게 시작하는 것인가? 만약 성경적 개념에 완전히 젖어 있다면 어떤 특정한 본문을 이끌어내지 않고도 성경적인 설교가 가능하다. 성경을 인용했다고 해서 모든 설교가 성경적인 설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대개 성경적인 설교를 원하는 설교자는 특정한 본문을 설교의 기초로 삼는다. 그 성경본문이 충실하게 다루어진다면 성경적 초점을 설교에 맞울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성경본문에 근거한 설교를 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하나의 생각이나 또는 하나의 주제를 설교를 시작하고 그것을 뒷받침할 중요한 본문을 찾기 위해서 성경을 상고하는 것이다. 둘째는 본문 자체에서 시작하는 것으로서 설교자 임의대로 본문을 선택하는 방법과 매주일마다 읽을 본문을 지정해 놓은 성구집을 따라서 선택하는 방법이 있다.

1. 한 가지 생각이나 한 가지 주제로 시작하는 방법
이 방법은 많은 위대한 설교가들이 즐겨 사용하는 것이다. 그들 대부분은 책을 읽거나 사람들과 대화하거나 삶에 대해 고찰하는 동안 일어나는 독창적인 생각, 개념, 영감을 기록해두는 노트를 갖고 있다. 이러한 생각이 언젠가는 싹을 틔우고 자라서 완전한 설교가 되는 것이다. 생각이 익어가는 동안 설교자는 다음과 같은 질문의 해답을 구하기 위하여 성경을 상고한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도움을 주거나 나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깨우쳐 주는 성경본문은 어떤 것인가?” “나의 생각이 조망해야만 하는 성경적 신앙의 더 큰 요소들은 무엇인가?” 그리고 설교가 익어서 거의 열매를 딸 때가 되면 그의 뿌리는 성경의 맥에 깊이 박히게 된다.
2. 본문 자체로 시작하는 방법
이 방법은 특히 젊은 설교자나 경험이 많지 않은 설교자들이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다. 설교자는 개인적인 성경 연구에 근거하여 자기 임의대로 본문을 선택할 수도 있고 3년이나 4년 주기로 신구약 전체를 한 번 읽도록 짜맞추어 놓은 성구집에 따라서 선택할 수도 있다. 성구집을 사용하면 유리한 점이 있는데, 설교자는 언제나 새로운 생각이나 교리를 다룰 수 있다는 것이다. 혹은 설교자가 좋아하는 구절에 안주해서 그 구절만을 과다하게 사용하는 대신에 조지 버트릭이 말한 “믿음의 전체 궤도”를 한 바퀴 돌게 되는 이점이 있다.
나는 설교학 시간을 통하여 학생들에게 성구집을 사용하는 방법이 새로운 설교의 기초를 마련해주기 때문에, 적어도 처음 5년 동안은 이 성구집을 사용하도록 권하고, 그 후에 게속한다든지 다른 방법을 선택하도록 가르친다. 왜냐하면 이 방법은 성경을 더욱 깊이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각이나 경험에 기초해서 설교를 시작하게 되기 전에 먼저 성숙한 신학자가 되게 해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 경 본 문 연 구
특별한 본문을 독창적으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성경 전체에 흐르는 다양한 주제와 소주제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필요하다. 설교자가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성경의 각 책은 문학적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분명히 어떤 내적인 법칙과 규칙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놓치면 결국 본문의 중요한 메시지를 잃게 된다. 한 예로 마가복음 6장부터 8장까지에 있는 이야기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이 이야기들의 윤곽은 다음과 같다.
* 광야에서 오병이어로 5천 명을 먹이셨다(막 6:30-44).
* 예수께서 바다에게 명령하셨다(막 6:45-52).
*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비판은 그들이 예수를 이해하지 못했음을 보여 준다 (막 7:1-23).
* 예수는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을 고치셨다(막 7:24-30).
* 예수께서 벙어리 한 사람을 고치셨다(막 7:31-37).
* 광야에서 4천명을 먹이셨다(막 8:1-10).
* 바리새인들이 논쟁하기 위해서 예수를 찾아왔다(막8:11-13).
* 제자들이 배에 빵을 가지고 오지 않은 것에 대해서 토론했다(막 8:14-21).
* 예수께서 장님 한 사람을 고치셨다(막8:22-30).
* 베드로가 “예수님은 그리스도”라고 고백했다(막8:27-30).
* 예수는 그의 죽음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는 베드로를 사단이라고 불렀다(막8:31-33).
언뜻 보면 이 이야기들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성급한 설교자라면 4천명을 먹이신 기록(막 8:1-10)에 대해서 고찰하고 나서 “이것은 예수께서 삶의 광야 속을 살아가는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적절한 이야기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또는 수로보니게 여인(막 7:24-30)에 관한 이야기로 건너가서 “이것은 딸을 위해서 간청하며, 예수에 의해서 심지어는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부르는 용어인 ‘개’라고까지 불리우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은 한 인간의 놀라운 이야기이다”라고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본문들을 전체 맥락에서 자세히 연구해 보면 그것은 본문이 가지고 있는 의미들 사이에 있는 역동적인 상호작용을 계시해 주고 있다.
당신은 내가 성경본문들이 함축하고 있는 것을 이해하고 오늘날 우리의 상황을 조망하기 위해, 본문이 가지고 있는 참된 능력과 발상을 드러내기 위해 성경분문을 연구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가? 만일 우리가 전에 들었던 설교이거나 몇 년 동안 계속해서 읽은 성경구절이라면 그것을 읽거나 정확하게 이해하는 일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본문을 우리 자신의 상황에 비추어 그 의미를 깨닫고, 설교를 만들기 위한 복잡한 작업 속에서 본문이 가진 참된 가치에 대한 평가를 내리기 위해서는 성경을 철저히 탐구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성경본문을 좀더 ‘자유롭고 폭넓게 그리고 조직적으로 다루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성경의 모든 부분을 연속적으로 설교하는 것이다. 이 방법에 있어서 설교자는 복음서, 서신, 예언서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하는데 시간을 투자해야 하고 그 후에 각각의 연구 결과가 필요한 몇 편의 설교를 개발하면 된다.

몇 가지 주의할 점
* 설교자는 설교하기에 앞서 성경본문에 대해 철저히 연구해야 한다.
* 본문과 상황과의 연관성을 보여주기 위하여 성경적 배경에 대하여 개요를 설명하라. 그러나 설교와 상관이 없는 문장구조나 고고학과 같은 사소한 내용으로 회중을 지루하게 만들지 말라. 본문에 정직하라.
* 성경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개방적이고 비평적인 태도를 갖는 것은 중요하다.
* 이스라엘과 초대 교회의 믿음이 우리의 조상들에게 주어지기까지는 고통과 몸부림이 있었고, 그 신앙의 조상들 역시 완전한 사람이 아니었음을 오늘날 회중들이 아는 것도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은 우리가 걷고 있는 순례의 길과 선교의 중요성에 대해서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말씀을 들음
설교자의 전문성이 가져다 주는 위험 중 하나는 성경을 순전한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는 사실에 무감각해져서 회중들이 듣는 생동감 있는 나팔 소리를 우리 스스로는 듣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도들이 강력한 증언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의 삶이 성령에 사로잡혔기 때문이지 그들이 설교학이나 전달방법에 대하여 잘 알았기 때문이 아니다.
성경을 읽을 때에 침묵하며 기다리라. 눈을 감고 어떠한 이미지가 마음속에 떠오르도록 하라. 성경 말씀 속에 거하는 말씀의 임재를 깨닫고 전율을 느끼라. 주석을 통하여 확실한 배경을 파악하고 사전으로 지식을 쌓으라. 그러면 무엇인가 특별한 것, “주께서 말씀하시느니라”와 같은 음성이 메아리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강단으로 향하게 될 것이다.


제 3 장 설교의 인격적 차원

설교에는 몇 가지 차원이 있다.
1. 역사적 차원: 이는 설교가 초대교회와 그 이전의 이스라엘의 예언자에게 까지 이르는 위대한 전통 속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2. 성경적인 차원:성경은 우리의 믿음의 근원을 설명하고 있고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어떤 주제나 문제에 접근하는 방법에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3. 신학적인 혹은 주석적인 차원 : 설교는 역사적, 성경적 차원을 고찰하고 그 것들을 오늘날 우리의 상황에서 해석하는 교리적, 또는 분석적인 입장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4 인격적인 차원 : 사람들이 우리의 설교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것은 주 로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하는 것과 듣고 있는 말씀에 대한 그들의 체험 과 이해 그리고 메시지를 형성하고 있는 그들의 정체성과 체험과 이해에 대해 알고 있는 것들을 우리가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달린 것이기 때문이다.
참된 설교는 목회 사역들을 통해서 계속 이어진다. 참된 설교는 상담, 회의, 심방, 식당이나 가게에서의 우연한 만남을 통해 완성된다. 한 주간 동안 사람들과 만나서 그들로부터 발견하게 된 내용을 이야기해야 한다. 그리고 참된 설교는 복음과 인간의 상황을 연결시키며 마치 베틀처럼 그 둘 사이를 왕래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 설교는 참된 설교가 아니며, 복음의 본질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복음은 예식서나 교리에 의해 정리 될 수 없다. 그렇게 해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상황이 다르면 그에 따라 설교 형태도 달라야 한다. 복음은 사람들의 실생활에 대하여 말하고 있으며 그것을 전제하고 있다. 이론적인 것도 아니요, 학문적인 것도 아니다. 살이 있고, 뼈가 있고, 소화기관이 있고, 골수가 있다. 복음은 인간의 상처와 소망, 특별한 요구와 가능성에 대해서 말을 건넨다. 회중에게 필요한 복음을 설교하기 위하여 설교자는 그들과 접촉하고 귀를 기울이고 관찰하면서 그들 속에서 함께 움직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복음은 없고 단지 복음의 가면만 있을 뿐이다.

청취의 중요성
설교는 말하는 것 뿐만 아니라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것도 포함된다. 외적으로 표현하기에 앞서 내면화 과정이 필요하다. 숨을 들이마셔야 내 쉴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영적인 지도자인 목회자의 특성이기도 하다. 또한 설교를 듣는 회중에게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단지 성경의 특성이나 신학적인 개념에만 귀를 기울이고 회중의 구체적인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그것은 적절하지 못한 설교가 되고 만다.
좋은 설교자는 잘 듣는 사람이다. 설교자는 회중들의 표정과 무심코 하는 말들을 신중히 생각하고 그런 표현의 배경을 잘 검토하여 왜 불안과 외로움을 느끼는지, 왜 앙심을 품거나, 행복을 느끼는지 파악해야 한다. 인간의 본성, 특히 예민한 목회자에게 있어서의 문제란 그 중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하는 고충이 있을 뿐이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교인들과 대화하지 않고 또 설교 준비과정에서 그들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감히 강단에 설 수 있는가? 시인 쉘리(Shelley)는 “정말로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열정적이고 포괄적으로 상상하며, 자신과 다른 사람의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해 봐야 한다. 그들의 기쁨과 고통이 자신의 것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설교자도 마찬가지다. 우리를 다른 사람들의 입장에 놓고 그들의 자리에서부터 삶을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을 과녁으로 삼을지라도 아무것도 맞추지 못하여, 결국 복음을 보잘것없는 것으로 만들고 만다.

권위의 새로운 근거

설교자들은 종종 그들의 설교를 성공적으로 만들기 위해 목사로서의 권위에 의존한다. 그들이 말할 때에 사람들은 듣는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아니다. 세상은 점차 민주화되어 왔으며 모든 권위체계는 변하고 있다.

만일 설교자가 성공적으로 설교하려면 대화식으로 설교하면서 회중의 근심과 관심사에 대해서 언급해야 한다. 모든 해답을 가진 권위자로 나서는 대신에 우리의 회중들과 함께 해답을 찾기 위해서 애써야 한다. 판에 박힌 설교로 강단에 나타나기보다는 똑같은 인간적인 모습으로 회중들 앞에 서서 그들과 함께 어떤 결론을 얻으려고 함께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같이 함께 노력할 때 그 결론은 그들 각자에게 개인적인 것이면서 괴리되지 않는 것이 된다.
해리 포스딕은 [하퍼 잡지]에 실린 한 기사에서 설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평범한 설교가 가지고 있는 한 가지 분명한 문제점은 비록 해롭지는 않다 해도 흥미를 유발시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회중은 그런 설교에 대해 아무 소리 안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공허하고 무익한 결과를 초래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회중들의 실제 관심과 어떠한 관계도 맺지 못하기 때문이다. 회중들의 생각을 마음에 두지 않으면 중요한 관심을 놓치게 되고 결과적으로 접근방식이 적절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주일날 강단에서 복음을 선포하면서도 회중들의 생각과 실제적인 관심을 놓치고 마는 많은 설교자를 보게 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깝다”

이야기체로서의 설교
설교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한 가지 방법은 이야기꾼의 기술적인 측면에 있다. 뛰어난 이야기꾼은 인간본성을 잘 알기 때문에 항상 회중들과 관련되고 그들의 이야기가 될 만한 이야기를 한다. 사람들이 이야기를 듣는 것은 그것이 환상적이거나 재미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이야기가 자기들 삶의 깊은 요구와 상황에 연관된 내용이기 때문이다.
설교자가 개인의 문제를 파악해서 그것을 복음과 신앙 역사의 이야기와 연결시킬 때 그 설교는 효과적인 것이 된다. 그런 방법을 통하여 각 개인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 삶을 새롭고 즐겁게 살 수 있는 새로운 원천을 발견하고 그래서 계속되는 믿음의 이야기에 동참하게 된다. 이런 설교는 그 자체로 하나의 긴 이야기일 수 있고, 예화로 사용되는 짧은 이야기들로 구성된 것일 수도 있다.
이 중 예전에는 금기시되어 왔던 설교자 자신의 삶의 이야기는 중요한데 그것은 마치 복음의 광선을 잡아서 그 광선을 특정한 삶의 상황 속으로 굴절시키는 프리즘과 같은 역할을 한다.
설교자가 주의해야 할 것은 자신에 관해 아주 좋게 말해 자칫 자신을 포장하거나 자화자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들은 자기 만족처럼 보여서 종종 설교자의 메시지에 대한 회중의 신뢰를 떨어뜨리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설교자를 인간적으로 보이게 하는 이야기는 설교를 위해 잠재적으로 도움이 된다. 왜냐하면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복음이 다양하고 특수한 인간 실존에 적용된다는 것을 알게 해주기 때문이다.
또한 고백적인 설교를 하는 설교자는 자신을 의로운 행동을 하는 모델로 제시하지 않고, 교인들과 함께 노력하여 하나님을 경험하려 한다. 그 결과 회중은 삶과 복음이 교차되는 것을 보며, 삶과 복음이 일치됨을 인식할 수 있는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된다.

심리학의 도움
설교가 인간의 요구에 참되게 부응하기 위해선 심리학이나 인격이론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전 세대의 위대한 설교가들은 인간의 본성을 열정적으로 연구하였기에 교실에서 심리학적인 연구를 하지 않았어도 삶에 대한 고귀한 통찰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프로이트 이후로 행동이론에 대한 중요한 연구가 많이 진전되어 어느 목회자든지 젊거나 경험이 없는 자라도 예전에 평생 목회한 대부분의 목회자들보다 더 많이 알게 되어 인간의 반응형태와 발달과정에 대하여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요즘 인간 생활에서 일어나는 규칙적인 위기를 다룬 책들이 많이 나오고 있는데 에모리 대학의 제임스 파울러(James W. Fowler)교수는 인간의 발달단계를 영적 성장과 관련시킨 연구물들을 [믿음의 단계]와 [신앙 발달과 목양]이라는 책으로 출판해 거기에서 그는 교인들의 인격 발달과 관련해서 목회자가 인식할 수 있는 영적 발달단계가 있음을 고찰하고 있다. 이러한 발달론을 다루고 있는 책들은 설교자에게 많은 유익을 준다. 설교자가 자신의 예상되는 위기를 예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회중의 다양한 연령층에 대한 발달의 문제를 예견하고 설교를 계획하는 데 도움을 주며, 따라서 성경적 신앙과 신학의 구조를 세우는 데 중요한 도움을 제공한다.
우리 교인 중에 많은 사람들은 심리학의 연구를 신선하고 흥미 있게 받아들였으며 인간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됨이 입증되었다. 이런 심리학에 관하여 폭넓게 책을 읽는 사람들은 심리학과 신학의 연관성을 통하여 하루하루의 생활 속에 나타난 믿음의 자리를 새롭게 이해하는 데 도움을 받는다. 그들은 심리학을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인간의 한 분야로 생각하는 대신에, 실제로 그들의 삶 속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재발견하는 자기 분석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심리학과 신앙
물론 설교가 인간의 심리학에 관한 강연이 되어서는 안된다. 심리학이 주는 통찰은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데 어려운 점을 밝혀 주지만, 그것을 인류를 구하기 위하여 세상에 오신 ‘빛’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설교자는 인간의 학문과 성서신학 사이에 창조적인 긴장을 유지하며 그 심리학적인 이해를 오늘날 복음의 의미를 해석하는 데 충분히 사용한다. 물론 두 요소가 서로 상반되는 경우도 있다. 중요한 것은 성경의 주요한 내용인 사랑, 믿음, 공동체, 그리스도 안에서의 생활, 하나님의 통치와 같은 주제가 계속하여 설교자의 기둥이 되어야 하는데, 심리학과 정신의학의 연구결과가 이를 설명하는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설교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는 주로 그 설교자에 대한 개인적인 믿음에 의존한다. 만일 설교자가 경건생활에 충실하다면, 그것은 설교 전체를 통해 드러날 것이다. 그리스도같은 분위기나 정신이 지배할 것이며, 성경적 신앙의 분위기가 설교의 모든 부분을 바꾸게 될 것이다.
설교 준비를 위하여 심리학의 자료나 통찰을 이용한다고 하여 “대중적인” 심리학자가 되어 버려서는 안된다. 심리학은 복음을 소개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서 사용되어야 한다. 만일 설교자가 자신을 이해하고 회중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심리학의 연구와 자료를 손쉽고 무책임하게 사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포스딕의 예
포스딕은 각 설교에 네 가지를 시도하였다.
1. 인간의 긴급한 문제가 무엇이며 회중 각각의 개인적인 관심이 무엇인가를 파악했다.
2. 보통 사람들이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한 해결방식의 측면에서 그 문제점들을 이해한다.
3. 그 문제들을 성경적 관점에 맞추고 이 관점이 다른 방법보다 얼마나 더 풍요롭고 만족스러운가를 발견하도록 회중의 협력을 구한다.
4. 회중에게 이 문제에 대한 성경적 해결을 받아들이고 실천함으로써 그 문제를 극복하 고 더 높은 차원의 삶을 준비하도록 격려한다.
복음은 여전히 해결과 도전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는 다만 “문제와 복음”을 함께 접목시켜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와 기대를 갖고, 사람들이 그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방법으로 설교해야만 한다.


제 4 장 설교 작성
이제 우리는 설교자가 설교의 직무에 헌신하고 있는가, 즉 그가 즐거운 마음으로 설교를 작성하는가를 실제로 시험해보는 단계에 이르렀다.
제임스 파이크(James Pike)와 같은 재기와 재능을 가지고 있는 설교자는 드물다. 원고도 없이 그가 생각하고 구상해 온 것들을 즉석에서 이야기하는 식으로 설교했다. 파이크는 토요일 저녁에 설교의 주제를 생각하고, 주석을 참조하고, 그의 마음속에 설교의 윤곽을 그린다.
잠자리에 든 후에 그 윤곽에 대하여 생각하고 아침에 또 생각한다. 그리고 나서 대개 원고도 없이 설교한다.
그러나 유명한 설교가들은 파이크의 평가에 좀처럼 동의하지 않는다. 대부분 그들은 설교를 열심히 준비했는데 마치 유명한 소설가가 소설을 쓰듯이, 시인이 시를 쓰듯이 했다.
재능있는 설교자라면 간혹 단 몇 분만에 흠잡을 데 없는 설교를 만들어 즉석에서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양심적으로 설교의 기술을 익혀온 연조에 비례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는데 6일이 걸렸다면, 설교자가 한 편의 설교를 창조하는데 2-3일이 걸리는 것은 결코 불명예스러운 일이 아니다.

아이디어 찾기
설교 작성에 있어서 가장 우선적인 것은 아이디어이다. 설교의 아이디어는 두 가지 방법으로 얻을 수 있다. 만일 성구집을 이용하면, 설교 본문이 미리 결정되기 때문에 보통 그 성경본문을 숙고하는 동안에 아이디어가 떠오를 것이다. 마치 창조 때에 하나님의 영이 공허한 곳에 운행하신 것같이 설교자의 마음도 본문 위를 배회하다 갑자기 한줄기 빛이 어두움을 꿰뚫고 들어와 세상을 밝히게 된 것처럼, 설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성구집을 따르지 않는 경우라면, 아이디어는 언제라도 떠오를 수 있다. 경험 많은 목회자는 노트를 휴대하여 설교가 될 수 있는 영감을 메모한다. 어떤이는 심지어 침대 머리맡에 노트를 놓아두고 자다가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적기도 한다. 안타깝게도 많은 목회자는 이같은 설교 준비의 첫 단계를 게을리한다. 빠르게 지나가는 영감을 기록하는데 실패하여 아주 훌륭한 설교의 아이디어 90%를 상실하고 만다. 나는 많은 약자를 사용하여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스케치하듯 대충 적는다. 어떤 것들은 친구나 낯선 사람과 이야기하다가 생각났고, 어떤 것들은 하루를 보내면서 관찰을 통해 얻은 것이고 또 어떤 것들은 그냥 생각난 것이다.

설교의 목적
아이디어가 사용하기에 적절하게 맛이 들어 설교에 사용될 준비가 된 경우는 설교를 완성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단계, 즉 설교의 주목적을 확정하는 단계로 들어간다.
종종 설교가 갈팡질팡하는데, 이는 설교자가 설교를 시작하기 전에 그 목적은 정확하게 설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분명한 목적이 없으면 설교자는 많은 것을 성취하겠다는 희망을 갖기 어렵다. 처음부터 메시지 내에서 의미의 지침으로 존재하는 설교의 목적은 설교의 요점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나서 설교의 다른 요소들이 이 지침하에 놓일 수 있다. 즉 설교의 강조점과 아이디어가 그 목적 아래 놓일 수 있으며, 중요한 핵심으로부터 벗어난 예화들은 제외시킬 수 있게된다. 그래서 그 목적에 충실한 방향으로 설교를 구성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분명한 목적 설정이 주는 첫 번째 이점이고, 두 번째 이점은 설교자가 그 목적의 가치를 평가할 수 있고, 필요할 경우 설교 윤곽을 잡거나 작성하기 이전에 그 목적을 변경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 설교 준비를 많이 해 놓고서 그 목적이 설교할 가치가 없다고 느끼게 되면 얼마나 허망하겠는가? 그러나 실제 설교 준비에 들어가기 전에 목적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면 이런 어려움을 피할 수 있다. 그 목적을 분명하게 하고 나서 설교자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이것이 내가 준비한 것과 회중의 요구에 맞는 주제인가? 회중에게 중요한 목적이 될 수 있는가? 이 설교의 초점을 명확하게 하기 위하여 어떤 식으로든 그것을 더 좋게 만들 수 있는가?

존 헨리 조왯(John Henry Jowett)은 “어떤 설교도 우리가 그 주제를 수정같이 명료한 짧고 함축적인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기 전까지는 작성할 준비도, 선포할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나는 연구를 통해서 이런 문장을 얻는 것이 가장 어렵고 가장 엄격하고 가장 결실 있는 작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목적을 말하는 것은 설교를 시작하는 예화나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성경본문에서 표현하고 있는 신학적인 핵심과 항상 같은 것도 아니다. 때로 그 목적은 본문의 의도와 조금 상이할 수도 있다. 설교를 통해 우리가 정말로 성취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마음속에 확정할 수 있기까지 우리는 종종 본문과 여러 아이디어를 두고 씨름한다. 그러나 일단 목적이 확정되면 설교 준비는 수월하게 진행된다. 우리가 가진 모든 자료를 다룸에 있어 구성의 원칙이 있다. 마치 자석이 흐트러진 쇳조각을 정돈시키듯이, 목적을 써보면 바르고 도움이 되는 설교를 작성하는 데 필요한 자료들을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설교형식의 다양성
창의적인 설교자라면 주로 한가지 형식을 사용하면서도 만일 설교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면 때때로 다른 형식을 시도할 것이다. 주기적으로 다양하게 시도해보면 매주 설교를 듣는 회중에게 신선함과 다양성을 주며, 설교 자료들을 새로운 관점에서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늘상 사용하는 형식과 방법에 대해 평가할 수 있게 된다. “표현방법이 곧 메시지다”라는 마샬 맥루한(Marshall Mcluhan)의 말이 전적으로 옳다면, 혹은 그의 말이 부분적으로만 맞아서 표현방법이 메시지에 영향을 준다면, 설교자들은 새로운 관점에서 자신의 설교를 평가해보고 다른 형식이 메시지에 끼치는 영향을 발견하기 위해 때때로 설교형식을 바꿀 의무가 있다. 요즘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몇가지 설교 형식을 다루어보자.
1. 강해 설교(Expository Sermon) : 강해라는 단어는 라틴어 ‘expositio'에서 유래했는데 본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가리킨다. 수세기 동안 서방세계에서는 강해가 없으면 설교로 간주되지 않았다. 이렇듯 강해 설교가 기독교 설교의 본래적인 방법이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신약성경의 모든 증거들은 구약성경을 사용하여 사실을 설명하는 강해가 규범적인 설교방법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바울의 출현으로 기독교 설교에 새로운 요소가 도입되었다. 그는 그리스와 로마의 수사학 교육을 받았으며 키케로와 다른 유명한 수사학자들의 논증방법을 가지고 자신의 이야기를 표현하는 방법을 배웠다.
수사학적 설교는 비록 성경본문을 중요시했지만, 철학적 이성을 사용함으로써 듣는 이에게 확신을 주려는 데 비중을 두고 있기 때문에, 종교개혁 이전까지는 설교방법의 주 요소였으나, 마틴 루터, 울리히 쯔빙글리, 존 칼빈과 그 밖의 사람들은 설교에서 성경을 더 많이 강조하는 쪽으로 돌아섰고, 따라서 의도적으로 성경이 스스로 말하도록 하였다. 19세기의 위대한 설교자들, 즉 경전과 성서신학을 매우 존중한 찰스 스펄전, 헨리 워드 비처와 필립 브룩스와 같이 놓이 칭송받는 인물들조차도 단지 초대교회의 강해식 방법보다는 헬라와 로마의 수사학적 방법을 더 많이 사용한 설교를 하였다.
보수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신학교의 설교학자들은 자기 학생들에게 강해 설교가 기독교의 유일한 설교 방법이며, 다른 모든 방법들은 인간의 논증과 목적에 의해 오염되었다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
강해설교는 처음에는 본문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요하는데 그것은 주의 깊은 연구와 주석을 통해 얻게 된다. 그리고 설교자가 유식한 사람이라는 결론으로 강해가 끝나지 않고 회중에게 의미 있는 결론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인간의 본성과 경험에 대한 풍성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극적인 전개가 필요한데, 그렇게 됨으로써 설교는 한편으로는 여전히 본문 중심적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알맞는 클라이막스와 결론에 이르게 되며, 회중의 정서적이고 미적인 요구를 충족시켜주게 된다.
2. 발달 단계식 설교(Developmental Sermon) 중심되는 아이디어나 목적이 몇 단계를 통하여 전개되다 절정에 이르게 되는 형식의 이 설교는 바울, 오리겐, 크리소스톰과 어거스팉의 수사학적 설교의 후예로서 기독교 강단을 지켜온 설교 형식이고, 신학교와 교회학교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방법이다. 강해 설교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발달단계식 설교를 주제 중심적이고 인문주의적이며 설교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 대신 자기가 좋아하는 생각을 전하게 만든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금세기 이 방법을 사용했던 탁월한 대부분의 설교가들은 성경본문에 끝까지 눈을 떼지 않고 설교를 작성한 신실한 성경 연구가들이었다.
서론, 두세 개 혹은 네 개의 요지, 재치 있는 결론으로 구성된 고전적인 이 설교형식이 19세기부터 현재까지 지속되는 이유는 그것이 중세부터 종교개혁을 거쳐 오한 웨슬레와 조지 휫필드의 시대에까지 지속되는 이유와 같은데, 그것은 메시지를 준비하고 전달하는 데 있어서 탁월하게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대를 지나면서 특별히 단순화라는 측면에서 미세한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경험상 복음의 진리를 가르치는 방법으로서 효과적이었기 때문에 전 시대를 통해 가장 중요한 설교 준비방법으로서의 자리를 지켜왔다.
3. 기사전달식 혹은 인상주의적 설교(Discursive or impressionstic Sermon)
이것은 아무 형식이 없는 설교로서 단지 설교자가 자연스럽게 말하는 간단한 구조를 갖고 있다. 미술에서 이런 형태는 스케치와 같고, 음악으로 보면 단순한 선율이나 단곡으로서 완전한 오케스트라 작곡과 반대된다. 설교자는 주제, 아이디어 혹은 받은 인상에 대해 간단히 몇 구절이나 혹은 몇 페이지를 준비하여 주어진 시간 동안 이것을 설교한다. 1960년대와 70년대 이래로 많은 설교가들이 이 방법ㅇㄹ 사용하였는데 자유를 중요시하는 시대에는 이런 방법이 설교하기에 자연스럽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런 방법의 설교는 보다 오래된 전통적인 설교방법보다 형식적이거나 지루하지 않다. 많은 설교 방식 중에서 이 방법을 주장하는 것은 설교를 준비하는 시간이 가장 적게 들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4. 이야기식 설교(Narrative Sermon) 설교자가 회중들에게 하나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식으로 설교하는 것이다. 이 설교에는 주석이나 해석이 없고 오로지 이야기만이 있을 뿐이다. 이야기는 성경이거나 성경 이외의 것이 소재가 될 것이다. 이 설교의 목적은 회중들로 하여금 하나의 드라마 또는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서 결국 자기 탐구, 성경적 또는 신학적 진리에 대한 고찰, 하나님의 영을 받거나 또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새롭게 헌신하기 위한 방법들을 모색하게 하는 것이다.
이야기식 설교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 아브라함과 이삭, 이스라엘의 왕과 예언자들로부터 메시아의 초림과 초대교회의 형성에 이르기까지 성경의 메시지들 자체가 이야기 형식으로 되어 있음을 주장한다.
이야기식 설교에 대한 비판은 현대교회와 신학 안에서 발견한 사상적 빈곤에 대한 분석과 미국적 생활양식으로 자리잡고 있는 개인주의의 증가에 대한 반성으로서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에 나타났다. 이야기식 설교는 사람들 자신이 이야기의 결론과 결정을 내리게 한다.
목회자들이 성경 이야기를 보다 잘 전달하기 위하여 이야기식 설교의 기술을 향상시킨다면 그리고 때로는 교회의 역사와 경험 속에서 사용되어 왔던 보다 전통적인 설교방법들과 함께 이야기식 설교도 한다면 아마도 이 방법은 매우 유용할 것이다.
5. 유형별 설교(Classification Sermon) 유형별 설교는 서류 정리함처럼 깔끔하다. 즉 모든 것에는 적절한 위치가 있고 또 그것들은 그 위치에 놓여있다. 그러나 유형별 설교의 그런 능력은 때로 지나치게 제한적이다. 발달단계식 설교와 유형별 설교의 차이점은 전자에서는 설교가 이어지는 톱니바퀴처럼 전개된다면 후자에서는 독립된 방이 연결된 것처럼 설교가 전개된다는 점이다. 유형별 설교는 만들기 쉽기 때문에 매우 많이 사용된다. 이 방법에 집착하게 되면 설교자는 나이, 지리, 민족성 등 모든 범주로 나누어서 그 방법을 지나치게 많이 사용하게 된다. 그러나 너무 자주 사용하다보면 설교는 판에 박은 것이 되고 사람들은 그것에 식상하게 된다.
이 설교방법의 이름은 생스터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그는 이 이름을 보석세공술에서 따왔다. 마면이란 세공자들이 보석의 표면을 깎아서 값비싼 보석이 되도록 하는 작업에서 나온것이다.

6. 마면적 설교(Faceting Sermon) 이 설교방법의 이름은 생스터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그는 이 이름을 보석세공술에서 따왔다. 마면이란 세공자들이 보석의 표면을 깎아서 값비싼 보석이 되도록 하는 작업에서 나온 것이다. 마면적 설교도 마찬가지다. 설교자는 거친 보석의 표면을 깎아내듯이 대주제를 나누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나서 진리의 거대한 단면이 드러날 때, 설교자는 처음에 언급된 대주제가 여러 각도에서 찬란히 빛날 때까지 그 진리를 여러 측면에서 나누고 다듬는다. 마면적 설교는 교육적인 설교로 매우 적합하다. 왜냐하면 중요한 주제를 여러 방면에서 보강하여 주기 때문이다. 한 가지 위험한 점은 중심 요지가 언급되고 나면 회중들은 흥미를 잃게 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일단 긴장이 없어지면 회중은 다른 생각에 빠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잘만 사용된다면, 설교의 단일한 주제를 이해시키고 주입시키는 데는 이 방법에 필적할 만한 것이 없다.

7. 실험적 설교(Experimental Sermon) 이것은 지난 20-30년간 설교의 현장에서 사용된 여러 다양한 형식을 포함하는 일반적인 방법이다. 대화 설교, 극적인 독백 편지 형태의 설교, 비유 설교, 소설과 연극에서 얻은 설교, 시적인 설교, 무언극 설교, 스라이드 쇼설교, 뉴스식 설교 음악 설교등이 포함된다.
설교자의 측면에서, 전통적인 설교보다 자유로운 형태이기 때문에 과거에 듣고 보지 못한 방법으로 듣고 볼 수 있다. 회중의 측면에서 새로운 설교의 형식은 전달과정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한다. 때때로 모든 설교자는 실험적 설교를 시도해야 한다. 비록 효과가 없다고 하지라도, 설교자의 영적인 창조성을 유지하게 함으로써 모든 주제에 접근할 때에 한 가지 판에 박힌 설교방법에 빠지지 않게 한다. 특히 매체를 이용하여 설교하거나 다른 사람과 예행연습을 해야 할 때에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예리한 지식과 새로운 발견을 위하여 그러한 노력은 가치가 있다.

윤곽(Outline)잡기의 중요성
설교의 윤곽을 잘 잡으면 몇 가지 유익한 점이 있다.
1. 설교가 전체적으로 온전한지 판단해 볼 수 있으며, 설교 내용을 쓰기 전에 만일 필요하다면 윤곽을 고칠 수 있다. 완성된 내용을 고치기보다 윤곽을 조정하는 것이 훨씬 쉽다.
2. 윤곽이 잘 잡힌 경우에는 설교를 작성하거나 설교할 때에 설교의 내용을 확실히 이해하도록 돕는다. 편리한 점은 설교를 중간쯤 해나가다가 어떤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느라 방향을 잃을 경우 윤곽을 보면 해야 할 말이 무엇인지 금방 알 수 있다.
3. 잘 구성된 설교의 윤곽은 설교자의 마음속에 설교의 핵심과 흐름을 명확 히 인지시키며, 회중에게는 설교의 전개과정을 예측케 하고, 그들의 기억 속에 남게 됨으로써 회중은 그 설교를 가지고 간다.

브레인스토밍(Brainstorming)
여러 아이디어를 내놓아 그 중 최선책을 결정하는 창조적 능력 개발법
브레인스토밍은 특별한 주제를 위해서 모을 수 있는 지식의 다양한 단편들과 마음속에 숨어 있는 생각들의 표면을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그것들을 표출해내기 위해서 애쓰는 사고의 한 작용이라고 말할 수 있다. 브레인스토밍을 통하여 아이디어 목록 만드는 것이 어려운 설교자는 책상에 앉아서 몇 시간 동안 애쓰기보다는 다른 방법을 시도하는 것이 좋다. 예를 들면 그 주제를 그냥 덮어 두었다가 다음날 다시 생각해본다. 이런 방법을 통하여 무의식적으로 좋은 생각이 떠올라 의식적인 단계로 발전되기도 한다. 또한 어떤 이는 한 주간의 업무를 시작할 때 목록을 만든다. 작은 수첩은 비록 설교 아이디어를 메모하는데 사용되는 것이라도,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들을 기록하는 데 손쉽게 사용할 수 있다.
최근 들어 많은 목회자들은 브레인스토밍 계획에 도움이 될 회중 그룹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주제에 관해서 개인적인 경험보다 그룹의 경험이 얼마나 더 풍부한지 아주 놀랍다. 이러한 브레인스토밍의 자료 목록이 풍부하면 할수록 그 설교 자체가 훨씬 더 풍요로워질 것이라는 점은 말할 나위도 없다.
설교 윤곽 만들기
일단 좋은 브레인스토밍 목록을 확보하면, 이것으로부터 설교의 윤곽을 잡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1.간접적인 방법 : 설교의 윤곽이 마음에 떠오를 때까지 그 자료들을 곰곰히 생각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에서 목록은 윤곽을 만들기 위한 출발점이지만 최종적인 윤곽을 만들기 위해 많은 자료를 수집할 필요는 없다. 그 목록은 하나의 자료일 뿐이지 윤곽의 형태나 내용을 결정하지 않는다.
2. 직접적인 방법 : 그 자료들을 하나로 묶는 방법이다. 즉 그 목록에 있는 다양한 자료 가운데서 관련성을 찾아 그 관련성에 따라 자료를 분류하고 각 그룹마다 이름을 정해둔다. 그리고 그룹중 내용이 사소한 것부터 배열을 시작하여 계단식으로 그룹을 정리한 뒤 불필요한 그룹을 제거해가며 전체적인 분위기가 고조되는 느낌을 만든다. 그리고 알맞은 결론을 내리면 된다.

설교 윤곽 검토
설교의 윤곽을 검토할 때에 어떤 점을 관심 있게 보아야 하는가?
1. 설교 전체에 신학적인 타당성이 있는가 보아야 한다.
이 설교가 성경본문을 잘 표현하고 있는가? 설교를 통하여 본문 전체의 신학적인 의도가 전달되도록 요약되어 있는가? 또는 본문을 부분적으로 다루고 있지는 않는가? 분명히 본문의 일부분만 의도적으로 다룰 때도 많이 있다. 그러나 윤곽에 대한 세심한 검토를 통해 본문을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2. 설교는 개인적인 도움을 주어야 한다.
이미 진술한 설교의 목적에 정말로 도달하였는가? 회중의 마음을 괴롭히는 중요한 문제에 대하여 어떤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는가? 이 단계에서 설교자는 종종 자신이 본문의 신학적 관점이나 윤곽의 수사학적 표현에 사로잡혀, 복음을 실제적이고 유용한 방식으로 설명하지 못했음을 발견한다. 만일 그런 경우라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3. 윤곽은 설교의 명료성을 처음으로 파악해 볼 수 있는 부분이다.
만일 윤곽이 간단하거나 명료하지 않으면, 그것에 기초해서 작성한 설교가 간단명료해질 수가 없다. 윤곽의 중요한 요지를 표현하는 단어는 설득력이 있고 직접적이어야 하고, 모든 어구는 정렬되어 있고, 모든 문장은 가능한 한 간단하고 알아보기 쉬워야 한다.
4. 설교의 윤곽이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가를 알아본다.
설교의 각 부분이 적당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가? 한 부분이 다른 부분에 비해 시간적으로 지나치게 길지는 않은가? 서론이 뒷부분과 비교하여 적당한가? 이러한 것들이 잘 배열되었는가를 결정한다.
5. 설교의 윤곽에 심리적인 전개과정이 있는지 고찰해본다.
설교의 변화에 맞추어 회중들을 몰아가고 있는가? 한 곳에서 회오리치는 듯한 형태의 설교보다 어디론가 가고 있는 듯한 설교가 훨씬 호소력이 있다. 영국 버밍햄에 있는 카스 래인교회의 레슬리 티자르드(Leslie Tizard)목사는 “일단 구성이 잘 짜여진 설교는 엉켜진 털실의 매듭을 푸는 것과 같다. 철저하고 자연스러운 전개과정은 한 아이디어에서 다음 단계로 쉽게 넘어간다” 고 말했다.

윤곽의 자연스러운 전개과정
설교를 전개하는 과정이 자연스러운 경우에는 필연성이 느껴진다. 이것은 어떤 형식의 예술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하다. ‘자연스러’움과 ‘필연성’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물 속에는 내적인 리듬과 그것들이 외부세계에 그들의 비밀을 드러내 보이는 자발적인 방식이 있다. 그리고 이것은 소설이나 드라마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설교에서 추구하는 것이다. 만일 그 리듬을 깨뜨리거나 그 자발성을 무시한다면, 우리는 무엇인가 잘못되었고 인위적인 느낌을 복음에 집어넣게 되며 회중들의 관심을 잃게 된다. 설교의 참 권위는 공유된 권위이다. 그것은 우리가 똑같은 구속을 희망하며 회중과 함께 설교 속을 여행할 때, 그들과 더불어 갖게 되는 그 무엇이다.

결정적인 은유
앞 문단의 말을 보니 설교학에 관한 최근의 논의에서 제시된 설교를 위한 가장 효과적인 은유 가운데 하나가 생각난다. 크리스틴 스미스(Christine M. Smith)가 자신의 책 [설교 짜기:여권주의의 관점에서 본 설교]에서 말한 것이다. 뜨개질은 지난 20년 동안 많은 여권주의 작가들에 의해서 여성다움을 대표하는 과거의 이미지로서 확증되었다. 그것은 또한 끊임없는 바느질의 움직임 속에 기록되어진 그들의 절망과 희망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였다.

뜨개질의 은유 속에는 설교에 대한 놀라운 의미가 들어있다. 왜냐하면 뜨개질이란 분명히 한 편의 설교를 작성하기 위해 성경본문, 역사, 전통, 개인적경험, 새로운 사상이라는 다양한 실타래를 가지고 우리 설교자들이 현재하고 있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빛나는 주석 작업을 할 수 있고, 고대 성경본문과 현대 상황이 교차되는 방식을 가지고 치열하게 씨름할 수도 있고, 자신의 설교와 그 스타일을 갈고 닦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한 것은 결코 아니다. 만약 선포된 말씀이 한편의 예술작품이 아니라면, 의미와 능력있는 아름다운 편직물로 짜여지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름다움을 상실하고 그 핵심은 변형되고 만다. 뜨개질이 이 섞어짜는 성질을 가지고 있을 때 그것은 기술이 만들어낼 수 있는 최상의 것이다. 설교가 기독교 신앙과 희망의 비전과 근본적인 능력에 대한 증언들로 짜여질 때, 선포된 그 말씀 또한 그 기술이 만들어낼 수 있는 최상의 것이 될 수 있다.”고 말한 스미스의 말은 사실이다. 이 모든 것이 너무나 인위적이고 계산적이어서 성령께서 사용하실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가? 그 반대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마음대로 설교할 수 있다. 단 우리가 사실의 세계로 들어가서 무엇이 가능하고 무엇이 불가능한지 배울때까지만. 그때에 우리는 설교 윤곽의 기본적인 법칙으로 되돌아올 것이다. 우리의 참 자유는 우리가 사용하는 자료와 설교방식을 통해 나타나는 우리의 개성에 놓여 있는 것이지, 효과적인 설교 규칙을 조롱할 수 있는 능력에 달린 것이 아니다.



제 5 장 설교의 시작과 끝

생스터는 “ ‘설교의 시작과 끝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라는 질문은 무의미하다. 회중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무슨 말을 해도 감화력이 없다. 만일 회중들의 주의를 집중시키기 위해 설교의 시작과 끝을 최대한 활용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을 위한 최대의 기회를 놓치게 된다” 고 말했다.
설교에 있어서의 잘된 시작은 골프에서 잘 친 어프로우치 샷과 같고, 마무리를 잘한다고 하는 것은 마치 정확하게 공을 구멍 속에 집어 넣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설교자들은 설교의 시작과 끝을 위하여 될 수 있는 대로 재치있고 효과적인 방법을 연구해야 한다.
설교의 시작
랜달 니콜스(Randall Nichols)는 [말씀 세우기]라는 책에서 서론은 설교자와 회중 간의 약속이라고 말했다. 서론을 통하여 설교자는 다루고자 하는 내용을 제시하고 회중은 그 설교에 따르며 참여하도록 유도된다. 설교자의 분위기조차도 서론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만일 서론이 효과적이면 설교자는 자신감을 느끼고 안정된다. 다음 단계로 쉽게 넘어가고 자연스럽게 본론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불안하게 시작된 설교는 계속 심적인 에너지를 많이 빼앗아간다. 설교자는 뭔가 어색하고 부족하고 회중과 호흡이 일치하지 않음을 느낀다. 그리고 출발선에서 균형을 잃은 육상선수처럼 설교자도 다시 균형을 잡기까지 어려움을 겪는다.

효과적인 서론의 특징
서론은 설교자가 개발함에 따라 다양해 질 수 있다. 효과적인 서론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염두에 두는 것이 설교의 서론을 구상할 때에 도움이 될 수 있다.

1. 가장 좋은 서론은 대개 간결하다.
서론은 공식 집회의 사회자처럼 다음 손님을 위하여 회중을 정돈시키고 물러난다.

2. 좋은 서론은 대개 주의를 끈다.
흥미있는 내용이나 신선한 표현으로 주의를 끌고 있다. 작가들의 말대로, 좋은 서론은 회중을 갈고리로 낚아챈다.

3. 훌륭한 서론은 회중들을 본론 속으로 잘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서론에서 이야기한 이미지나 아이디어를 고정시켜 놓음으로써 사람들의 관심을 설교의 도입부에 묶어두지도 않는다. 이후에 본론에서 어떤 실질적인 내용이 뒷받침되지 못하면 회중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간혹 매혹적인 서론과는 맞지 않더라도 훌륭한 본론이 선포된다고 해도 회중은 듣지 않은 것이다. 회중들은 경험을 통하여 약속한 서론과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서론의 예

1. 서론에 초점을 맞추는 방법
이 방법은 주로 성경적 교훈을 제시하는 설교에서 사용되는데 그것은 회중들로 하여금 설교자가 본론을 통해서 다루고자 독특한 관점에 초점을 맞추도록 돕기 위한 것이다.
2. 정보를 전달하는 서론
이 방법은 일반적인 서론 형식으로 회중이 본문을 이해하거나 설교 내용을 잘 따라오도록 배경 설명을 제시해 준다. 대개 이 서론은 회중들이 일반적으로 알지 못하는 내용이나 본문 해석에 필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3. 통찰력이 있는 서론
이런 형태의 서론은 설교의 전개과정에 있어서 중요한 인간의 통찰력을 담고 있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이런 통찰은 책을 참조하거나, 인용, 우연히 들은 설명, 벽에 아무렇게나 쓴 낙서, 만화, 비석의 비문, 강단으로 오는 도중에 일어난 일 등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얻어진다.
4. 충격적인 서론
설교자는 때로 서론에서 충격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말을하여 설교에 집중하도록 만들고 싶을 것이다. 어떤 통계를 인용하는 것도 충격을 주는 또 하나의 방법이다. 이러한 방법은 적절하게 좋은 의도로 사용된다면 매우 효과적이다. 특히 ‘잘 듣지 않는’ 회중들에게는 효과적이다.
5. 고백적이거나 개인적인 내용의 서론
한때는 설교자가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을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간주했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는 대화에 있어서 친밀함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회중은 목회자들 자신의 믿음생활과 신앙에 대한 의혹에 대하여 좀더 알고 싶어하고 그들이 일상적인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알고 싶어한다.
예를 들면, 설교자의 고소공포증, 기계조작에 있어서의 어려움, 관료적 형식주의와의 투쟁, 작은 버릇 등 별로 중요하지 않은 개인적인 이야기로 시작될 수 있다. 이런 서론은 몇 가지 효과가 있다. 설교자가 자신에 대해서 공개하기 때문에 회중은 편안함을 느낀다. 설교자와 회중 간에 가까움을 느끼게 한다. 또한 설교자와의 일체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6. 자극적인 서론
자기 자신에 대해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수긍하게 만드는, 인간 본성에 관한 이야기를 주된 특징으로 하는 넓은 범위에서의 서론을 가리키기 위해 이 용어를 사용한다. 이 그룹에도 속하지 않고 또 다른 그룹에도 속하지 않는 특별히 자극적인 서론이 이 범위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7. 문제 중심의 서론
교인들이 직면한 특정한 문제를 다루는 설교는 어떤 방법으로든지 그 서론을 시작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설교의 본론에서 다루려는 문제를 초점으로 삼아 서론은 시작하는 것이 좋다. 문제 중심의 서론을 훌륭하게 만드는 방법은 다루고 싶은 문제의 핵심에 가능한 한 신속하게 들어가는 것이다. 회중이 논의될 문제를 쉽사리 글고 재빨리 간파할 수 있어야 한다. 이같은 서론에 있어서 내가 터득한 효과적인 방법은 문제를 겪고 있는 어떤 사람의 경우를 예로 들어서, 회중들로 하여금 그런 문제가 이론이 아니라 실질적인 문제임을 실감하게 하는 것이다.
8. 유머러스한 서론
어떤 설교자들은 유머를 자연스럽고 효과적으로 사용하며, 종종 재미있는 말이나 얘기로 설교를 시작하기 때문에, 유머러스한 서론은 그 자체가 하나의 범주로 여겨질 가치가 있다. 유머는 벽을 허물어서 설교자와 회중 간에 의사소통을 아주 원활하게 한다. 그렇지만 유머러스한 서론은 우리를 설교 속으로 이끌기 위한 것이지 설교자가 재치 있다거나 성격이 좋다는 것을 보여주기만 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회중은 목사가 설교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과 관계없이 유머는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재미있는 말이나 이야기가 누구에겐가 상처가 되지 않도록 잘 살피는 것도 물론 매우 중요하다. 민족적, 인종적, 종교적, 성적 특성이나 생활방식의 어떤 습관에 대한 분명한 모욕은 설교자가 설교를 시작하기도 전에 설교의 기회를 완전히 없앨 수도 있다.

결론에 대하여
설교의 결론은 다른 부분에 비해 그리 중요하게 보이지 않지만 그러나 아주 중요하다. 적절한 결론 없는 설교는 미완성된 설교요, 꼬리 없는 고래와 같다. 무엇보다도 설교의 결론은 회중과 함께 할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이요, 영원한 진리가 자리잡도록 하며 매력적인 이상을 고취하고 회중이 거룩한 의무를 감당하겠다는 의지를 갖도록 유도해야 한다. 결론은 회중들이 직면한 문제로부터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 보고 결단하도록 유도하는 단계이다. 효과없는 결론이나 용두사미격의 결론은 서론과 본론에서 말한 모든 효과적인 내용을 무효화한다.

결론을 내리는 방법
1. 마지막 요지가 결론이 되게한다.
마면적 설교방법에 적절하다. 마면적 설교의 거의 항상 일반적인 맺음말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요지를 제시하면서 끝나기 때문이다.
2. 앞의 내용을 요약한다.
분석적이고 논쟁적인 설교에서는 결론에서 내용을 요약해주는 것이 좋다. 옛 설교자들이 한 것처럼 “첫째로 내가 말할 내용이 무엇인지 말해준다. 다음에 그 내용을 말한다. 그리고 나서 내가 말했던 것이 무엇인지 말한다” 이런 방법은 설교의 내용을 명료하게 하는 데 도움을 준다.
3. 예화로 결론을 맺는다.
설교의 가르침을 실제 상황 속에서 구체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을 보여주는 짧은 이야기나 예화로 설교를 결론짓는 것이 종종 도움이 될 것 같다. 이 방법은 부흥사들이 자주 쓰는데, 회중의 의지를 사로잡으며, 회중이 머리로 분석하고 주저하는 것을 뛰어넘게 하기 때문이다. 이 방법은 적절히 사용하면 설교를 끝맺는데 효과적이고도 중요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회중은 이론보다는 이미지를 더욱 잘 기억하며, 따라서 예화를 가지고 설교의 끝을 맺으면 회중에게 이미지를 심어 주어서 설교를 오래도록 생생히 기억하게 할 수 있다.
4. 인용문을 사용해서 결론을 맺는다.
설교의 요점을 반영하는 찬송가의 몇 구절을 언급하거나 또 그것이 설교에서 언급된 몇 가지 요점을 반복 또는 부연하고 있다면 그것은 효과가 있다. 너무 긴 인용은 효과가 적으며 자주 사용하는 것도 적절하지 못하다.
5. 본문으로 결론을 맺는다.
본론에서 사용했던 성경말씀으로 결론을 내리는 방법이 가장 적절할 때도 있다. 본문을 처음부터 다루는 대신에 아이디어나 어떤 문제로부터 시작하여 서서히 본문에 접근하고 그 본문을 통해서 절정에 이르게하여 결론을 내린다.
또한 주보에 나와 있는 성경본문을 그대로 인용하는 것도 효과적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회중들은 그 본문을 마음에 새기고 생각하며 집에서 암송 할 수도 있다. 이런 방식으로 설교가 그들의 생활 속에서 생명력을 갖게된다.
6. 시작할 때 짜여진 윤곽에 따라 결론을 맺는다.
이 방법은 설교의 자연스러운 과정을 느끼게 하며 그에 따른 필연적인 결론에 이르게 한다. 이 방법에는 감수성이 필요하다. 실제로 설교를 듣고 설교가 흘러가는 곳으로 보조를 맞추어야 한다. 때로는 처음 윤곽을 만들 때 의도했던 것과 다른 쪽으로 결론에 이르기도 한다. 모든 것은 설교의 내적인 방향에 따라 달라지고 그 과정이 기록된다. 이것은 설교를 마무리짓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이다. 회중은 마치 식사를 잘하고 나서 커피와 후식까지 잘 먹은 것 같은 만족을 느끼게 될 것이다.
7. 결론없이 결론을 맺는다.
설교의 실제적인 결론을 내리지 않고 설교를 끝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회중의 생각과 삶 속에서 설교가 계속 작용하게 하기 위하여 이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
8. 성찬과 관련해서 결론을 맺는다.
칼빈은 성찬식이 빠진 예배를 드릴 경우, 성찬식이 빠진 것 말고는 모든 것이 완벽하게 그 성찬에 맞춘 성례전적인 예배가 되게 하라고 했다.

결론에 관한 몇 가지 일반적 설명
설교방법에 따라 결론의 길이는 다를 수 있다. 때로는 결론이 길어지기도 하며 짧아지기도 한다. 마치 정글에 사는 동물의 꼬리가 모두 다른 것처럼 말이다. 결론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설교 내용에 얼마나 적합한가 하는 것이다. 마치 하나의 서론이 특정한 한 편의 설교를 소개함으로써 전체의 설교 속에 속해 있어야 하는 것처럼 결론도 그 설교에 속해 있어야 한다. 만일 서론에서 문제를 제기했으면 결론에서는 그 문제와 발견된 대답을 제시하면 좋다.
런던 교회의 주교인 윌리암 완드(William Wand)는 [설교에 관한 글]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설교자는 설교의 내용을 잘 마무리하여 회중들이 언제나 행복한 감정을 느끼게 하라. 시작할 때의 주제를 기억하게 하는 방법으로 어떤 구절을 반복하거나, 시작할 때 사용한 함축적인 의미를 지님 한 단어를 다시 제시하는 것이 좋다. 또는 설교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하거나 성경본문을 반복하는 것도 좋다.
어떤 경우든지 회중은 설교자가 강조한 중요한 포인트를 기억할 뿐만 아니라 설교자가 무슨 말을 하려 하였는지 분명히 알고, 설교자가 심사숙고하여 내린 결론을 그들이 기억한다고 확신하게 된다. 이런 결과 회중은 설교자를 신뢰하게 되며, 이것은 목회의 다른 부분에도 중요하다는 것이 밝혀지게 될 것이다”
설교의 결론은 단순히 처음 생각처럼 보잘것없는 기교를 통해서 설교가 끝났음을 알리는 것이 아니다. 이제는 서론을 올바로 시작하는 법 뿐만 아니라, 멜빌의 말대로, 꼬리를 찬미하는 법도 배워야 한다.


제 6 장 설교의 예화
성경이나 설교자의 경험에서 나오는 이미지가 가지고 있는 능력과 아름다움이 없이는 설교시에 깊고도 명료한 메시지를 선포하기 어렵다. 이미지와 이야기는 신앙의 한 부분이며 믿음은 또 다른 이미지와 이야기를 야기시킨다.
오늘날 뇌의 연구에 따르면, 뇌에는 정신활동을 하고 있는 두 개의 반구형태가 있는데 각 반구마다 특이한 기능이 있다. 좌측 죄는 육체의 오른쪽을 지배하는데 실용적이고 분석적이다. 육체의 왼쪽을 지배하는 우측 뇌는 명상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하다. 전체적으로 사람은 양쪽 죄가 모두 필요하다. 사람은 합리적으로 기능하고, 직관이 필요할 때는 직관적으로 활동한다.
좋은 설교는 논리적인 면과 이미지의 균형이 잘 이루어진 설교이다. 이런 설교는 이해가 쉬우며 진리를 받아들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명확히 전달되며 또한 내용을 이미지로서 받아들이려는 사람들에게도 잘 전달될 수 있다. 성경은 이 두 가지의 균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이미지와 이야기, 율법과 역사, 잠언과 철학이 있다. 이성적인 골격에 이야기가 첨부되고 중요한 요지는 예화와 함께 설명된다.
그러므로 유능한 설교자는 먼저 확실하고 조직적인 윤곽을 만들어서 그 설교가 논리적이며 신학적인가를 확인한다. 다음에 우측 뇌를 작용시켜 중요한 내용에 예화를 첨가시키고 삶에서 구체적으로 그릴 수 있는 이미지로 변모시킨다.
설교자가 자신이 구성하고 있는 설교에 대해서 연구할 때 다음과 같은 질문이 필요하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회중들은 어떤 경험을 해야 할까?’ ‘명확히 이해하고 오래 기억되도록 하기 위해서 어떤 이미지를 제공할까?’
이야기와 이미지를 들은 후의 반응으로 판단해보면 회중의 대부분은 좌측 뇌보다는 우측 뇌를 통하여 더욱 잘 청취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분명히 예수님도 다시에 이 점을 경험하였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교훈을 가르칠 때 많은 비유를 사용하였다.

예화가 설교에 미치는 영향

1. 예화는 설교를 분명하게 한다.
신문이나 소설을 읽을 때에는 뭔가 분명하지 않으면 그 문장을 다시 읽고 이해하여 다음 문장으로 넘어갈 수 있다. 설교를 들을 때에는 그렇지 못하다. 움직이는 혀로 말하고 이미 말한 것은 지나가 버린다. 예화는 의미를 명확하게 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유능한 설교자는 이해하기 어렵거나 혼돈될 만한 부분에서 예화를 사용한다. 예화는 순간적으로 설교의 흐름을 정지시킴으로 생각할 기회를 줄 뿐만 아니라 생각을 명료하게 한다.
2. 예화는 설교를 흥미롭게 한다.
모든 사람은 이야기를 좋아한다. 회중들도 예외가 아니다. 설교자가 예화를 시작하면 회중들의 반응도는 높아진다.
3. 예화는 신학을 삶과 연결시킨다.
예화는 마치 설교가 작업복을 입은 것과 같으며 삶의 자리로 나아가게 한다. 회중들은 예화를 통하여 그 설교의 내용이 실제적인지 아닌지를 판단한다. 신학 그 자체는 쉽게 잊혀지지만 예화속에 나타난 신학적인 의미는 기억에 남는다.
4. 예화는 회중들에게 휴식을 준다.
설교의 전개는 연극의 전개와 같다. 절정의 단계에 이를 때까지 흥분의 강도가 쌓여 가다가 끝나기 직전에 흥분을 약간 가라앉힌다. 설교의 요지로 몰아넣기 이전에 예화를 통하여 회중이 잠시 안도의 숨을 쉬게 한다. 회중들이 좀더 깊게 숨을 쉬고 다시 긴장을 유지하여 설교의 요지를 따르게 된다.
5. 예화는 감정을 고조시킨다.
모든 회중은 두 가지 면을 가지고 있다. 지적인 면과 감정적인 면이다.
설교에서의 논리와 신학은 회중의 지적인 집중을 필요로 하는데, 바로 여기에서 예화를 통해 잠시 여유를 갖게 한다. 그러나 반대로, 예화는 회중의 감정적인 면에 영향을 준다. 예화를 사용함으로 감정을 고조시켜 회중들의 삶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으로 변화되도록 유도한다.
6. 예화는 설교의 내용을 기억나게 한다.
우리는 이야기와 예화를 기억한다. 평범한 말이라도 형상화된 말은 설교하는 시간이건 나중에 그 설교를 기억할 때이건 간에 잊혀지지 않는다.
7. 예화를 통해 설교자는 종종 복음을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하게 된다.
좌측 뇌로부터 나온 명제는 우측 뇌로부터 그림을 끌어내며, 또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예화를 사용하게 되면 설교자가 자신이 너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예화의 종류들
예화를 구분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즉 직업, 연령, 주제, 출처 등에 따라 나눌 수 있다. 대부분 설교자들은 예화를 종류에 따라 분류하는 것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단지 예화가 내용 전개에 적절한가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그러나 폭넓은 예화의 형태를 부분적으로 나누어 생각한다면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1. 성경적인 예화
성경의 인물, 사건, 가르침을 가지고 설교 예화로 삼는 방법이다. 예를 들면, 기쁨에 관한 내용일 때에 출애굽 후에 기쁨을 노래한 출애굽기 15장의 미리암의 노래를 인용한다. 성경은 많은 예화의 자료를 담은 복과 같으며 이같은 자료를 인용하면 회중이 성경의 내용과 친숙하게 되어 성경을 어느 정도 아는 공동체가 된다.
2. 역사적인 예화
역사를 잘 아는 설교가가 그 역사적인 자료를 설교에 인용하면 커다란 이점이 있다. 모든 설교시마다 설교 내용을 보강할 만한 과거의 사건이 떠오른다면 설교자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겠는가?
3. 전기(傳記)를 이용한 예화
전기는 설교 예화의 자료로 중요하게 생각되어 왔다. 위인들의 생애를 읽으면 적어도 다섯 혹은 여섯 개의 인용할 만한 자료를 얻을 수 있다.
4. 유머 예화
유머는 삶의 통찰력을 표현하기 때문에 설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유머는 재미있는 말, 만화영화, 연재만화, 특이한 경험, 심지어 농담 등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모든 유머는 분노를 가시게 한다. 우리가 바라보지 못하는 면을 보게 하며 예상하지 못하는 진리를 나타내기도 한다. 유머는 예민한 문제도 효과적으로 다루어 그 농담에 대해 쉽게 공격하지 못하게 한다. 복잡한 상황도 단순화시키며 어려운 문제도 쉽게 다가가도록 한다.
5. 과학적인 예화
우리는 기술과학의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설교자가 성경의 내용을 화학, 물리학, 지질학, 우주론, 생물학, 심리학, 사회학, 의학 등 자연과학이나 생확과학의 예화를 통하여 표현하는 것도 중요하다.
6. 지리적이거나 지형적인 예화
설교자는 종종 어느 지역이나 다른 나라를 여행하면서 매우 극적이거나 이해에 도움이 될 만한 예화 자료를 발견하기도 한다. 바다, 강, 산, 외국의 도시나 시골, 심지어 낯선 곳의 하늘을 통하여 만들어진 예화를 통해 얼마나 많은 도움을 받고 있는가?
7. 시적이거나 수사학적인 예화
좋은 예화감으로 인용할 만한 시나 산문 구절들이 많다. 이런 예화들은 간략하게 사용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현대인들은 긴 인용문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용문은 짧은 순간에 주제를 더욱 선명하게 해준다.
8. 소설로부터의 인용
짧은 이야기나 소설은 많은 설교 예화를 제공한다.
9. 스포츠에 관련된 예화
현대는 스포츠에 의해서 중독되어 있는 시대이다. 많은 사람들은 교회에 가기보다는 스포츠 경기에 더 열중하고 있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가끔 스포츠 세계로부터 예화를 선택하는 것이 좋다. 사도 바울은 그의 편지에서 육상이나 검투와 같은 그 당시의 운동 경기를 언급하였고 그런 비유는 바울의 글에 자주 인용되었다.
10. 미술이나 음악을 이용한 예화
교인 중에는 스포츠 만큼이나 예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도 많다.
그들은 조각, 그림, 음악, 무용과 관련된 예화에 좋은 반응을 보인다. 그들은 미적 감각을 통해서 신앙의 세계를 발견하기도 한다.
11. 연극으로부터 얻은 예화
연극, 영화, TV드라마는 많은 설교 예화를 제공한다. 처음에 서부영화는 주일날 교회에서 야외극으로 상연되었다. 설교자는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극작가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영화의 한 장면을 예로 들 때 회중이 본 영화가 언급되면 많은 도음을 얻는다. 그러나 이것이 항상 필요한 것은 아니다. 기술적으로 영화 장면을 적절하게 묘사하면 회중은 많은 인상을 받는다.
12. 그 외의 문학적인 예화
많은 현대 문화는 설교 예화자료를 제공한다. 광고, 게임, 소설, 신문의 만평, 서평, 코미디, 텔레비젼, 특별프로 등은 단지 커다란 모자이크의 한 조각처럼 문화의 일면만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예화를 사용함으로써 시대의 정신을 파악하여 사회적 환경의 취약점을 발견하며 그것으로부터 극복하게 된다.
13. 편지의 예화
설교자가 받은 편지를 인용함으로써 설교가 훨씬 돋보일 수 있다.
14. 개인적인 예화
사람들이 자기에게 일어난 다양한 경험을 말하고, 설교자는 그것을 공유한다. 이 경험들에는 훈훈함과 호소력이 있다. 그것들은 다른 데서는 볼 수 없는 복음을 향한 정직한 고백이다. 그것들은 복음을 실제적인 것이요, 만질 수 있고, 실제로 성육화 시킨다. 사람들의 삶을 증거하고 있다.


어디에서 예화를 찾는가?
다른 설교문에서 인용된 좋은 이야기를 자주 사용하게 되면 결과적으로 의존성이 생겨나고 다른 설교자에 비해 열등하게 된다. 그러므로 스스로 예화를 찾는 법을 배우는 것이 매우 좋다.
1. 독서를 통하여
예화의 반은 읽은 내용에서 찾을 수 있다. 책, 잡지, 혹은 신문 등등 현명한 설교자는 좋은 설교 예화를 제공하는 자료를 알고 있고, 찾은 자료를 정리하는 데 시간을 보낸다.
2. 청취를 통하여
설교자가 청취하는 방법을 배운다면 회중들이 많은 이야기와 중요한 내용을 가지고 있고, 그것들은 설교를 위한 좋은 자료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설교자는 이 꽃에서 저 꽃으로 꽃가루를 옮기는 벌과 같다. 이것이 목회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이다.
3. 관찰을 통하여
관찰은 예화를 찾기 위한 또 다른 방법이다. 설교 자료들은 우리 주변에 많이 있는데 집중적으로 관찰하지 않기 때문에 많은 것을 놓치고 만다. 이정표, 광고, 재미있는 건물, 꽃꽂이, 교통신호, 운동경기, 자연, 곤충들의 행동, 짐승과 사람들… 이 세상은 우리가 설교에 사용될 만한 자료로 가득 차 있다.
4. 생각을 통하여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있는 내용이나 이미지를 생각하고 명상하는 것도 중요하다. 설교자가 이런 능력을 배우고 그래서 과거의 경험이나 생각을 찾아낼 수 있을 때, 과거의 경험은 설교 자료를 위한 귀한 저장소가 된다.


예화 모으기
예화를 모으는 방법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을 수는 없다. 중요한 점은 설교자가 적절한 방법을 찾아 그 방법에 맞춰 예화를 모으는 일이다. 일관성 있는 것이 중요하다. 일관성 없이 자료를 모아 놓으면 마치 터진 그물의 물고기처럼 가장 좋은 자료는 항상 우리 곁을 빠져나간다. 예를 들면 소장하고 있는 책에 대하여 색인 카드를 만들라. 책의 여백이든지, 책 표지의 안쪽 면을 사용하라. 기억하기 쉽도록 중요한 구절을 간단히 노트하거나 나중에 사용하기 쉽게 페이지 번호를 정확히 기록해 놓으라. 그러면 설교를 작성할 때 그 책에 이러이러한 아주 좋은 예화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책꽂이로 가서 그 책을 찾아 정확한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얼마나 많은 예화를 사용해야 할까?
오늘날 대부분 15분 내지 20분 정도 설교하는 것이 거의 원칙처럼 되어버렸다. 그러므로 설교의 예화를 짧게 만들고 중심 주제나 각 요지에 예화를 한 개 정도 사용하는 것이 적절하다. 물론 이것이 불변의 법칙은 아니다. 만일 간단한 두 가지의 예화가 있다면 하나의 긴 예화를 대신 할 수 있다. 설교자가 적절하게 사용하면 되는데 그러나 예화를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설교자의 연령이 노년기에 있을 때는 젊었을 때보다 훨씬 예화가 길어진다.

예화에 관한 그 밖의 제안
1.예화를 선택할 때에 목적에 정확하게 들어맞는 것을 찾고, 대략 비슷한 것 은 찾지 말라.
2. 단지 예화가 매우 훌륭한 일화이기 때문에 사용하는 것은 피하라.
3. 예화가 설교를 삼키지 않게 하라.
4. 예화를 사용할 때에 의도하지 않았던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5. 설명이 필요한 예화는 피하라.
6. 예화를 통하여 필요 이상의 의미를 전달하려 하지 말라.
7. 정서적인 예화를 사용하되, 감상주의에 푹 빠진 예화는 피하라.
8. 감동이 사라지지 않고 점차 고조되도록 예화를 잘 배치하라.
9. 예화를 장소와 회중에게 적합하게 사용하도록 하라.
10. 다른 사람을 부정적인 눈으로 쳐다보게 하는 예화는 절대 사용하지 말라.
11. 자기 교인의 예화를 사용할 때는 본인으로부터 반드시 허락을 받으라.
12. 실제로 일어나지도 않은 내용을 사실처럼 꾸며 사용하지 말라.
13. 케케묵은 예화를 사용하지 말라.
14. 예화의 출처를 밝히고 사용하라.
15. 회중들로 하여금 당신이 왜 그 예화를 사용하는지를 깨닫게 하라.

제 7 장 설교의 스타일과 전달
어떤 분야에서 노력하여 대성한 사람은 나름대로의 특이한 스타일을 지니고 있다. 소설의 헤밍웨이, 시의 디킨슨, 조각의 로댕, 음악의 번스타인, 야구의 디마지오, 그림의 피카소 등… 그들이 대가가 될 수 있었던 요소 중의 하나는 그들의 삶과 예술이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들의 작품들은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가를 그대로 보여준다.
위대한 설교자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설교는 그들 자신의 삶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19세기의 위대한 설교가를 생각해보라. 비처, 스펄전, 브룩스, 로버트슨, 그리고 오늘날 위대한 설교가들도 생각해보라. 고십, 스튜어트, 웨더해드, 포스딕, 버트리그 쉐러, 킹. 그들의 설교는 특징이 있기 때문에 한 단락만 떼어서 들어보더라도 누구의 설교인지 충분히 알 수 있다.
설교자가 자신의 교유한 스타일을 일찍 발견하면 할수록 매우 생산적이고 유익한 설교를 할 수 있다. 가장 적절한 설교방법과 자신의 이야기 스타일 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된다고 하는 것은 마치 기계가 워밍업을 끝내고 덜덜 떠는 잡음이 멈추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 앞에 놓인 임무에 전념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설교할까?’하는 고민 대신에 ‘무엇을 설교할까?’하고 생각하는데 에너지를 쓸 수 있다.


자신의 고유한 설교 스타일 찾기
스타일은 노력의 결과이기도 하다. 가장 적절한 것을 발견하고, 계속하여 효과적인 기술을 개발하고, 마음의 생각을 설교에서 적절한 말과 이미지로 표현하도록 배우는 데에는 몇 가지 방법이 있다. 어떤 설교자가 우연히 발견한 것을 다른 이는 노력으로 발견할 수 있다. 자신의 설교 스타일을 발견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두 가지는 노력과 깊은 생각이다. 두 가지를 깊이 염두에 둔 설교자는 새로운 단계에 이른 것을 경험하게 된다.
1. 목회를 시작할 때부터 설교 원고를 작성하기 위해서 지속적인 훈련을 하라.
이를 위해서 적어도 일 년 이상 설교의 전문을 쓰라. 자신의 설교를 녹음한 테이프를 듣거나 기억을 더듬어 보는 것보다 원고를 손으로 직접 쓰거나 타자기로 치는 것이 자신의 스타일을 더 쉽게 관찰할 수 있는 방법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설교를 작성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스타일을 개발할 수 있다.
2. 자신의 설교 스타일을 찾기 위해 진지한 노력을 기울이라.
자신의 설교 스타일을 향상시키겠다는 분명한 의도를 갖고 새로운 방법들을 추구하라. 그러한 방법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와 효과를 적절하게 평가하기 위하여 여러 설교에 적용해 보라.
3. 일단 하나의 스타일이 맘에 들면, 때때로 다른 스타일을 개발하기 위해 그것을 포기하라.
전에 익숙하지 않은 다른 스타일을 주된 방법으로 사용하라. 당신의 다른 스타일처럼 그것들도 자라서 꽃이 필 수 있게 기회를 부여하라. 그러면 자신의 설교 스타일이 다양해지고 이미 사용하고 있는 스타일에 대해서 참으로 만족하고 했는지를 시험해 볼 수 있다.

설교 스타일의 중요한 요소들
설교는 최종적으로 회중의 반응에 따라 성공 여부가 결성되는 구술 행위이기 때문에 다른 예술에서 찾아볼 수 없는 부담이 있다. 사람들에게 호소력이 있어야 하고, 삶과 연관성이 있어야하고, 회중이 쉽게 알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설교 스타일은 설교자 자신 뿐 아니라 회중에 의해서 만들어 진다. 회중은 매우 다양하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설교를 듣는 대상이 누구인지를 잘 파악해야 한다.
1. 설교 원고를 쓸 때 구어체로 쓰고 문어체로 쓰지 말라.
설교는 이야기 하는 것이지 읽는 것이 아니다. 구어체의 설교문을 쓰면 두가지 유리한 점이 있다. 첫째로, 회중은 문어체보다 구어체 문장을 쉽게 이해하고 문어체에서 발견하지 못하는 신선함을 경험한다. 둘째로, 문어체보다 구어체의 설교문이 훨씬 전달하기 쉽다. 용어가 쉽게 떠오르고 회중들도 쉽게 알아 듣는다.
2. 간결하게 하라.
설교에서 사용되는 용어들은 간결하면서도 깊은 의미를 담고 있어야 한다.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켜야 한다. 회중들은 복잡한 겉치레를 싫어하고 솔직한 문장을 선호하기 때문에 꾸밈없는 어휘, 일관성이 있고 흥미를 끄는 내용이 좋다. 주목을 끌기 위해 멋진 표현을 사용하려고 하지 말고 예수님의 비유처럼 하나님의 말씀에만 관심을 집중시킬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가 있다면 삭제하라. 중요한 요지를 놓치지 않을까 염려하지 말라. 만일 내용이 좋다고 한다면 좀더 단순하고 간결한 말을 통해서 그 의미가 되살아나게 될 것이다.
3. 내용이 아주 명쾌해지도록 노력하라.
설교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주제를 다룬다. 하나님, 사랑, 의, 믿음, 영원, 그러나 이같이 신비한 내용을 더욱 신비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 설교자의 의무인 양 때때로 모호함 속으로 빠져드는 경우도 많다.
우리가 다루어야 하는 주제를 우리 자신도 분명히 이해하지 못해 불명확한 채로 회중에게 전달될 때도 있다. 명쾌하게 전달되지 못한 내용을 통해서는 누구도 변화받을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을 통해서는 감동받을 수 없다.
4. 흥미를 느끼게 하라.
설교자가 강단에서 범할 수 있는 최악의 잘못은 회중을 지루하게 만드는 것이다. 설교가 전달되는 방법에는 분명히 흥미를 느끼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어야 하지만 또한 설교가 씌어질 때도 아주 생생하고 매력적인 내용이 들어 있어야 한다.
5. 효과적인 방법으로 반복하는 기술을 배우라.
회중으로 하여금 메시지를 기억하게 하려면 계속해서 반복해야 한다. 반복하는 것 같지 않게 반복하는 것이 기술이다. 지루하지 않게 같은 내용을 계속 반복해서 전달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데에는 두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로 단순한 수사학적 반복이다. 설교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문장이나 구절을 반복하여 표현한다. 이런 방법을 사용할 때에 반복되는 구절의 용어를 바꾸지 않는다. 둘째는 눈에 띄지 않게 반복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분명한 용어나 구절이 좀처럼 반복되지는 않지만 그러한 의미를 담고 있는 생각들은 여러 표현으로 반복된다. 목표는 주제를 반복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게 하면서 설교의 중심 요지를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마지막 부분에 설교자는 실패를 감듯이 모든 논증과 예화의 참뜻을 한데 모아 지금까지 들은 모든 내용이 하나의 문장으로 표현된 메시지와 연관되었음을 알게 한다.

원고에서 강단으로
1. 읽기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훌륭한 설교를 만들고자 하는 자신의 노력이 완성되면 그후에 강단에 서서 그 원고를 읽는다. 이 방법은 한 가지 유리한 점이 있다. 설교자가 씌어진 내용을 또박또박 읽기 때문에 잊거나 빠뜨리는 부분이 없으며 또한 원고가 완성되어 읽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토요일에 편히 잠을 잘 수 있다. 그러나 본문의 내용을 세심하게 준비해야 한다. 그러나 많은 설교자들이 이 방법에 반대하는 일차적인 이유는 원고가 장애물이 되어 설교자가 회중과 눈을 마주치기보다는 원고에 집중하게 된다는 것이다.
2. 암기하기
암기력에 타고난 재능이 있는 설교자는 설교문을 완전히 암기한다. 설교를 하나의 웅변술로 여기던 19세기에는 이런 방법이 유행이었다. 내용을 암기해서 전하는 설교는 원고를 그대로 읽는 방법보다 유리한 점이 있다. 설교자가 회중들의 눈과 마주칠 수 있다. 설교자와 회중 간에 보이는 원고가 없다. 그러나 여기에 문제가 있다. 원고를 기억하는 데 집중하다 보면 회중의 반응이 약화될 수도 있다. 회중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돌면 다른 방법으로 설명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3. 설교의 대지만 보면서 설교하기
이 방법은 준비된 원고 설교의 장점과 자유롭게 전달하는 방법을 결합한 것으로 설교자들에게 가장 보편적인 방법일 것이다. 설교자가 준비에 최선을 다하여 집중할 수 있으므로 서론의 길이도 적절하고, 전환부분에는 적절한 용어를 사용할 수 있으며, 예화가 적절하게 사용될 수 있을 뿐 아니라 내용과 용어가 생생하고 흥미로울 수 있다.

심리적인 문제
설교 전달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설교자가 회중을 향해 갖고 있는 느낌이다. 만일 회중에 대한 신뢰감이 있고, 회중이 자신엑 애정을 갖고 있으며 힘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설교자는 좀더 자유로운 마음으로 전달할 수 있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설교자는 위축되어서 설교를 제대로 전달할 수 없다.
많은 설교자들은 말씀을 준비하거나 전달하는 과정에서 회중 가운데 있는 특정한 사람들을 염두에 두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설교자와 회중 간에 심리적으로 친숙한 느낌을 갖게 되고 좀더 구체적인 접근이 이루어지게 된다. 때로는 어떤 설교자들은 특정한 사람이 이 설교를 통해 영적으로 소생하기 위하여 기도하는데 이 방법도 도움이 된다.

전달을 위한 몇 가지 제안
1. 자연스럽게 설교하라.
설교는 자신의 개성을 통해서 나타나는 진리임을 기억하라. 그러므로 보고 들어서 습득한 다른 설교자의 틀에 박힌 말이나 제스처를 모방하지 않도록 하라. 그런 습관은 자신을 올바로 나타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설교를 통해서 자신의 스타일은 습득할 수 있는 기회를 막는다. 모든 설교자는 설교할 때 사용하는 말투와 제스처가 평상시와 일치하는지 일치하지 않는지 스스로 탐구해야 한다.
이상적인 상태의 설교는 보통의 대화체가 적격이다. 마치 저녁 뉴스 진행자처럼 자연스러운 톤이 좋다. 설교할 때 가까운 친구들에게 말하듯 하라. 목소리의 높낮이를 자연스럽게 하고 강조할 때는 제스처를 실감나게 사용하며 보통처럼 움직여야 한다.
2. 생기 있게 설교하라.
‘생기’라는 말은 라틴어의‘anima'에서 유래되었다. 살아있는 것같이 설교하라. 자신이 전하는 말씀에 자신이 응답하는 것같이 설교하라. 설교는 우리의 존재를 충만하게 만드는 것이어야만 한다. 찬송과 예배의 분위기와 마찬가지로 설교자의 분위기는 전염성이 있다. 만일 음울하고 가라앉은 분위기라면 교인들도 침체된다. 만일 생기가 있고 밝으면 교인들도 행복해보인다. 그러므로 설교할 때 설교자가 깊은 차원에서 우러나오는 믿음의 생동감을 갖고 있다면, 그 설교는 회중들에게 적합한 잠재적 메시지를 제공하게 된다.
3. 마지막으로 대화체로 설교하라.
회중을 보라. 그들의 반응을 보고 느끼라. 반응에 따라 설교하라. 회중의 필요와 느낌에 따라 대응하라. 설교의 감각을 알고 원고를 융통성 있게 사용하는 설교자는 회중의 분위기에 즉각적으로 대처할 수 있으므로 회중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은 반복해서 설명하고 현재의 상황에 맞지 않는다면 삭제하기도 하며 예상치 못한 유머를 추가할 수도 있다.


제 8 장 설교의 주제
설교자에게는 위대한 주제가 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원한 가족으로서 온전한 삶을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어떻게 역사하셨는가 하는 것이 바로 그 주제이다. 설교를 통해 주제를 구체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중요한 주제를 상실하면 안된다. 목사는 복음을 전파하도록 부름을 받았지 주변의 사소한 일에 대하여 말하라고 부름받은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목사에게 올 때에 대해서 바르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들은 삶에 대해 배우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삶을 넘어선 것, 곧 하나님에 관해 알고 싶어한다. 시골 혹은 도시의 현자처럼 우습게 보일 때 우리는 결국 사회적으로 겉도는 사람이 되고 만다. 목회를 인간의 노력, 현재와 미래 등의 모든 영역에 미치고 있는 실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한 지표와 징후를 제시하는 것으로서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목회의 사명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주제의 필요성
다양한 설교를 하기 위한 요령은 달리 없다. 다만 생동감 있게 살고,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복음의 관점에서 주변의 일에 관하여 생각하는 과정을 통하여 나타난다. 성장을 위한 노력이 없을 때, 새로운 자료와 환경과의 만남이 없을 때, 뇌는 퇴화하고 만다. 목회는 실제적인 것이 되지 못하고 습관적인 것으로 변해 버린다. 가장 위대한 설교가들은 하나님의 구원사업이라는 목회의 중요한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필요한 것은 우리가 처한 현실 속에서 복음을 경험하는 방법에 대해 민감해지는 것이며, 그같은 경험을 어떻게 새로운 용어로 설명하는가 하는 것이다. 현재의 관점에서 복음을 심사숙고하고 검증해봄으로써 믿음의 역사가 우리 자신의 시대에 창조적으로 지속되도록 한다. 다른 사람이 설교한 것을 복사하지 않을 때에 우리의 설교는 정말로 다양해진다.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려고 애쓰고 그런 경험 속에서 설교하면 다양하게 설교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설교의 중심적인 메시지를 표현할 새로운 용어와 비유가 떠오르게 되고 회중은 믿음이라는 것이 공허한 고백이 아니라 삶에서 실현되는 것임을 실감하게 된다.

교 회 력
계획을 세울 때 가장 좋은 기준은 교회력이다.
1. 강림절(Advent) : 강림절이라는 말은 라틴어의 “ad venio”에서 유래되었는데 성탄절 이전의 4주간이 이 절기에 해당한다. 강조점은 그리스도의 오심이다. 첫째주는 “창조 주일”이고, 둘째 주는 “성경 주일”, 셋째 주는 “예언자 주일” 넷째 주는 “세례 요한의 주일”이다. 많은 설교자는 이런 주제를 중심으로 계획을 세우기도 하며 때로는 성육신과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하여 설교하기도 한다.

2. 성탄절(Christmastide) : 알버트 몰겐은 이렇게 설명한다.
“강림절은 초림에 근거해서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것에 강조점이 있다면, 성탄절기는 오신 것에 근거해서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에 강조점이 있다.” 많은 설교자들은 성탄절 후의 주일에 설교하면서 앞으로 한 해 동안에도 크리스마스 정신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3. 현현절(Epiphany) : 1월 6일로 한때는 옛 성탄절이라 불리웠다.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께 경배하기 위하여 방문한 것과 연관이 있는데 복음의 보편성과 복임이 이방인을 위한 좋은 소식임을 일깨워준다. 현현절은 여섯 주일을 지킨다. 이 절기에는 예언서, 복음서,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그리스도에 관한 서신에 있는 내용을 설교할 수 있다.
4. 전(前) 사순절(Pre-Lent) : 전 사순절은 3주일을 지키는데, 이 절기를 몇 주일 지키는가는 부활주일이 언제인가에 따라 좌우된다. 이 기간에는 겸손과 자기 이해의 중요성에 대한 필요성 등을 설교할 수 있다.
5. 사순절(Lent) : 부활절 40일 전인 재의 수요일로부터 시작하는 사순절은 교회력에서 명상하고 헌신을 다짐하는 최대의 전통적인 절기이다. 부활 주일에 세례예식을 베풀기 위해 새신자를 가르치고 공부하는 기간이기도 하다. 설교의 내용도 그리스도를 위한 헌신과 충성에 관한 말씀이 좋다.
6. 고난주간(Holy Week) :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기 위한 종려주일부터 시작해서 성 금요일과 부활주일에 절정을 이룬다. 월요일은 성전 숙정, 화요일은 바리새파 사람들과의 논쟁, 수요일은 베다니에서의 사건, 목요일은 다락방에서의 만찬, 금요일은 십자가에 못박힘으로 그리스도의 마지막 삶과 사건을 강조한다.
7. 부활주일과 부활절(Easter Day and Eastertide) : 교회력의 절정인 부활주일은 죽음과 무덤의 권세를 이기신 하나님의 권능을 선포하며, 부활절기는 승천일까지 계속 부활을 강조하고 그것을 회중의 삶, 교회, 세계에 적용시킨다.
8. 승천주일(Ascension Sunday) : 승천일은 부활주일 후 다섯 번째 목요일이다. 승천 주일은 기다림의 주일로 알려져 있다.
9. 성령강림주일(Pentecost Sunday) : 오순절은 부활주일 이후 7주간 동안 계속된다. 기독교에서는 교회가 처음으로 모인 것을 기념하는데, 이는 성령이 강림하셔서 모든 낯선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마치 같은 언어로 이야기하듯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10. 삼위일체주일(Trinity Sunday) : 오순절 후 첫째 주일인 이 주일에는 하나님의 본성에 관해 설교하는 날이다. 교회력의 후반부가 시작되는 이때는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다양한 사회적, 도덕적, 윤리적 책임을 강조하기에 적절하다.

사려 깊은 설교자는 설교 계획을 짜면서 중요한 기념일을 열거해보고 중요한 주제에 맞춰 설교를 준비한다. 어버이날, 현충일, 노동절, 추수감사절과 같은 기념일은 교인들도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강단 계획을 짜는데 이런 중요한 날을 무시하면 복음을 우리의 삶속에 적용할 자연스런 기회를 놓치게 된다.

연속 설교
연속설교에는 몇 가지 장점이 있다.

첫째, 한 주제로 여러번의 설교를 하기 때문에 단편 설교보다 힘이 있다.
둘째, 교육적인 가치가 있다.
셋째, 설교를 위해 그동안 독서하고 마음으로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에 단편 설교보다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
넷째, 연속 설교가 단편 설교보다 작성하기 쉽다.
다섯째, 연속 설교의 준비과정을 통하여 설교자가 성장한다.
여섯째, 회중은 기대와 흥미를 지니고 있기에 설교하기가 쉽다.
일곱째, 연속 설교를 하고 나면 성취감을 느끼게 되는데 단편 설교를 통해서는 좀처럼 맛보기 어렵다. 연속 설교는 성경의 각 권에 나타난 두드러진 아이디어를 다루는 데 효과적인 방법이다.

균형 있는 강조
설교에서 리듬과 균형의 문제를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목회적, 예언적, 신학적, 복음적 관점 등 강조해야 할 것이 많다. 이 모든 내용은 한 해 동안 강단에서 선포해야 하는 필요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전체를 염두에 두고 설교 제목을 잘 계획해야 한다. 지난 1년이나 2년동안 우리가 설교한 것을 주기적으로 살펴보면 종종 문제점을 발견하게 되고 또 거기서 찾아낸 문제점을 계획적으로 수정할 수 있다.
설교 제목 정하기
잘 선택된 제목은 설교를 위해 몇 가지 공헌을 한다. 즉 제목을 통하여 설교자는 메시지의 내용을 요약하는데 도움을 얻는다. 또한 설교 제목을 통하여 설교 전에 설교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한다. 그래서 예배가 끝난 후에도 설교의 내용을 기억할 수 있게 한다. 좋은 제목이란 어떤 것인가? 좋은 제목은 흥미를 끈다. 자연스럽게 끌리는 느낌이 있고 생동감이 있다. 좋은 제목은 간단하다. 중요한 내용을 몇 마디에 압축한다. 또한 좋은 제목은 정직한 것이어야 한다. 설교 제목에서 언급되는 내용을 공정하고 정확하게 묘사해야 한다. 그것은 회중을 끌기 위한 기발한 문구가 아니라 설교자가 전하는 설교를 올바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어야 한다. 만일 제목을 잡는 일에 어려움을 느끼는 설교자라면 다음과 같은 범주에 속한 제목을 참고하면 도움을 받게 될 것이다.
1. 기발한 제목 잘 기억되고 언어의 유희적인 측면이 있는 제목이다.
2. 책, 연극, 영화에서 따온 제목 많은 사람이 책을 읽거나 연극이나 영화를 보고 서 관심을 갖게 되었다면 더욱 좋다.
3. 질문식 제목 대답이 필요없는 질문은 회중들에게 설교하기 전에 생각을 유 도하는 장점이 있다.
4. 이미지를 연상케 하는 제목 그림과 같은 느낌을 준다. 마음에 즉각적으로 이미 지를 떠오르게 한다.
5. 쉬우면서도 명료한 제목 이것은 단순하고 명료하다는 것 외에 특이한 점이 없 는 모든 제목이 해당되는 큰 범주이다.
6. 개인에게 초점을 맞춘 제목 이 제목은 목회의 경험에서부터 스며나온다. 회중 들에게 말하고 있는 듯한 제목들도 여기에 속한다.


제 9 장 설교배후의 설교자 인격

목회자만큼이나 성격과 내적 생활이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직업도 별로 없다. 매주 설교하는 설교자는 깊은 내적 자원이 있어야 한다. 그들의 정신은 온전하고 깨어 있어야 하고 내적인 감정과 다른 사람의 요구에 민감해야 한다. 충분한 휴식을 통하여 맑은 정신과 지식을 얻고 또한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설교를 만들어 내야 한다. 설교하는 일이야말로 통찰력과 지식을 묶어서 만들어내는 작업이다.

목사의 영적인 삶
목사는 기도하고 성경연구하고 묵상하고 경건서적을 읽는 훈련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목회를 시작할 때 느꼈던 놀라움과 신비로움을 단지 일상생활의 일 때문에 잊어버리고 영적인 설교준비나 대화가 약해진다. 새로운 목회지에 갈 때마다 목사는 하루 중 어떤 시간은 구별하여 기도하고, 독서하고, 명상하고, 설교 준비를 한다는 사실을 교인들에게 알려야 한다. 교인들도 그것이 중요한 일이며, 목회에 활력을 주고 나머지 시간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시간을 목회의 중심으로 삼음으로써 교인들에게 기도와 성경의 신학적 의미를 가르치며 우리 자신 또한 이것이 목회의 중심임을 기억하게 된다. 기도하지 않고 정기적으로 성경을 연구하지 않는 목회자는 목회의 장애물을 만나게 되고 쉽게 낙심한다. 영원한 존재를 생각하지 않으면 설교에 대한 사소한 반응, 줄어든 교인수, 목회의 실수 등으로 좌절을 경험한다. 영적 훈련을 지속하지 않는 목회자는 1년에 50회나 100회 설교하기가 어렵고 평생을 계속하기가 어려워진다. 그런 목회자의 설교는 다양하지 못하고 이 설교나 저 설교나 별로 다르지 않다. 그러나 성경을 매일같이 읽고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설교를 위한 신선한 아이디어가 끊임없이 흘러나온다.

목회자의 건강과 휴식
설교자가 될 수 있는 대로 건강하고 즐거운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의 공동체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메시지 전달에 방해요소는 없어야 한다. 그러기에 우리가 우리 자신을 돌보는 때조차도 그것은 설교를 위해 준비하는 것이다.
활기찬 목회를 할 수 있는 몇가지 방법을 제안한다.
1. 일과 휴식 사이에 적절한 리듬을 만들라. 2. 적당한 양의 운동을 하라.
3. 적당한 식단은 유지하라. 4. 적당한 수면을 취하라.
5. 휴가를 자주 가지라. 6. 매일 취미 생활을 하라.
목회자의 인간관계
마지막으로 목회자의 가정과 인간관계에 관한 문제에 이르렀다. 이것은 성경과 기도 외에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이다. 가정생활을 통해 얻은 이해는 설교를 풍요롭게 할 뿐만 아니라 모든 차원에서 설교를 성숙시키기도 한다. 그것은 자신이 공동체의 한 부분이며 그 공동체로부터 사랑과 관심을 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한다. 가정과 친구들과의 관계 속에서 성숙된 인격을 통하여 설교자는 전보다 더욱 지혜롭고 건전하며 이해심을 갖게 된다. 목회자의 인간됨은 중요하고 교인들은 그것으로부터 귀한 가치를 배운다. 우리 모두는 소망, 포부, 실망, 낙심, 작은 기쁨이나 승리를 나눌 가까운 친구가 필요하다. 이런 친구들은 무한히 우리를 강하게 만들며 설교를 더욱 생기 있고 호감이 있게 한다. 그들은 우리가 복음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지혜로운 목회자는 가정과 친구들에게 자신을 내어주어 개인적으로 그들의 삶에 힘을 북돋아줄 뿐만 아니라 설교자로서 정신적으로 그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기도 한다. 목회자와 그들은 서로에게 주는 자일 뿐 아니라 받는 자이기도 한다. 주는 것을 통하여 성장케 하고 증가의 법칙에 따라 주면 줄수록 더 많이 생겨 더욱 많이 나누어주게 된다.

마지막 정리
내가 아는 모든 유능한 설교자들은 모두 똑같다. 수많은 설교자들은 모두 자신이 가진 전부와 전 인격을 설교를 작성하고 전하는 일에 바쳤다. 설교가 그들의 삶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의 전체를 설교에 헌신한 것이다. 그들의 설교는 만일 그들이 한 가지라도 헌신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면 결코 나올 수 없는 그런 훌륭한 설교이다. 설교하기를 원하거나 훌륭한 설교를 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자신의 삶을 통제해야 하는데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똑같이 해당되는 진리이다. 이 사람에게는 이런 법칙이 적용되고 저 사람에게는 다른 법칙이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 똑같은 사명을 수행하고 있으며 같은 전통 아래 서 있다. 우리는 같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같은 성경을 받는다. 그리고 우리가 언제나 돌아가야 할 단 하나의 설교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 우리의 모습 그대로 설교하는 것이다.

출처 :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글쓴이 : 가장낮은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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