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에 대한 심판! (창3:17-19)
창3: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창3: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창3:19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오늘 본문을 담고 있는 창세기는 “기원의 책”이며 “시작의 책”입니다. 창세기를 기록한 사람은 모세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모세의 손을 통해서, 이 세상 만물이 어떻게 시작이 되었는가를 우리에게 계시해주신 것입니다.
창세기 1장과 2장은 자연 세계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엿새 동안에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세기 3장은 영적 세계에 대한 말씀입니다. 여기에는 사람의 타락과 이에 따른 하나님의 심판, 그리고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그 결과 죄가 이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타락에 관여한 당사자들을 차례대로 심판하셨습니다. 맨 먼저 뱀을 심판하시고, 그 뒤를 이어서 뱀을 조종한 사탄과 뱀의 꾐에 빠진 여자를 심판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남자 곧 아담을 심판하셨습니다. 물론 아담은 뱀의 꾐에 빠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여자가 건네주는 선악과를 먹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습니다. 그 결과 오늘 본문에 기록된 대로, 아담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안타깝게도 불신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를 않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창세기의 첫머리에 나오는 천지 창조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의 신화나 전설처럼 간주해버립니다.
그런데 더더욱 안타까운 일은 기독교인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컨대 인류의 시조 아담을 실제적이고 역사적인 인물로 보지 않고, 하나의 상징적인 인물로 해석하려는 기독교인들도 없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담을 실제적이고 역사적인 인물로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아담이라는 이름이 신구약을 통틀어서 모두 스물 일곱 절에 서른 두 번 등장합니다. 이들은 하나같이 아담이 실제적인 인물임을 보여줍니다.
창5:3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5:4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대상1:1 아담, 셋, 에노스,
눅3:38 그 위는 에노스요 그 위는 셋이요 그 위는 아담이요 그 위는 하나님이시니라
유14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이 이 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언제나 아담을 역사적이며 실제적인 인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일 아담이 하나의 상징적인 인물에 불과하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성경의 족보에 등장하는 다른 이름들도 역시 상징적인 인물에 불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결과는 심각해집니다. 누가복음 3장의 족보에서 아담이라는 이름과 함께 등장하는 예수님도 실제적이고 역사적인 인물이 아니라, 그저 필요에 따라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하나의 상징적인 인물로도 해석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본문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오늘 본문에 기록된 아담이 역사적인 인물이며, 그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심판도 실제적인 사건이었음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왜 아담을 심판하셨습니까? 심판의 이유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어떻게 아담을 심판하셨습니까? 심판의 내용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심판으로 아담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심판의 결과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읍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함을 받읍시다. 그리해서 우리 모두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째로, 심판의 이유입니다(The Cause).
창3: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1) “아담에게 이르시되.”
아담은 자기의 죄를 감추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습니다. 그리고는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찾아오시자 그는 자기의 죄를 여자의 탓으로, 더 나아가 그에게 여자를 주신 하나님의 탓으로 돌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의 변명을 인정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 아담을 심판하셨습니다. 뱀과 사탄 그리고 여자에 대한 심판은 각기 한 절뿐입니다. 그러나 아담에 대한 심판은 세 절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아담의 책임을 크게 물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때 아담은 자기의 죄를 변명하거나 핑계를 대지 말아야 했습니다. 아담은 자기의 죄를 회개하면서, 하나님의 용서를 구했어야 마땅했습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아담의 죄를 용서하시면서, 그에게 내리실 심판을 감하실 수도 있으셨을 것입니다.
(2)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딤전2:14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
에덴 동산에서 뱀의 속임을 받은 것은 아담이 아니라 여자였습니다. 아담은 자기가 선악과를 먹은 것을 뱀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여자의 탓으로 돌렸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통해 우리는 뱀이 하와를 속일 때 아담은 그 자리에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창3:6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뱀의 꾐에 빠진 여자는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여자는 자기 남편 아담을 만나서 그에게 선악과를 주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이때 하와가 여러 가지 말로 자기 남편 아담을 설득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하와가 아담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를 성경은 밝히지 않습니다. 아마도 하와는 뱀이 자기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아담에게 옮겼을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서 뱀이 말한 대로, 자기가 선악과를 먹었는데도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점도 말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그가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경고까지 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뜻을 아담은 분명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가 직접 받았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은 그의 아내 하와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이는 무슨 뜻입니까?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 아내의 말을 더 소중히 생각한 것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보다는 자기 아내를 기쁘게 했던 것입니다.
물론 남편은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내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아내의 뜻을 존중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내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이 상충될 때는 사정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면서까지 아내의 말을 들을 수는 없습니다.
창12:6 말씀을 보면, 아브라함이 그의 아내 사라의 말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갈을 첩으로 얻어, 그에게서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많은 문제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내에게 기쁨을 주는 남편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남편에게 기쁨을 주는 아내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배필을 기쁘게 하는 일보다 더 우선되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일을 자기 배필에게 요구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그 어떠한 경우라도 사람의 말을 듣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함으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3)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하나님은 아담이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아담이 선악과를 먹으면 죽습니까? 선악과 속에 사람이 먹으면 죽게 되는 강한 독이라도 들어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에덴 동산에는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들만 자라고 있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에덴 동산에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선악과에 무슨 독이 들어있을 리가 없었습니다. 선악과도 다른 과실들과 마찬가지로 분명 먹기에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왜 아담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했습니까?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아담은 자기 아내 하와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이는 결국 무슨 의미입니까? 아담은 화와의 말을 들음으로서, 하와를 속인 뱀의 말을 들은 셈입니다. 거기서 더 거슬러 올라가면, 아담은 뱀을 조종한 사탄의 말을 듣고 만 것입니다. 그러니 아담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했습니다.
고전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그런데 아담은 어떠했습니까? 아담은 먹는 것으로 인해서, 또한 자기 아내의 말을 듣는 것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를 못했습니다. 아담은 자기 아내의 말을 듣고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먹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범사에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합시다. 그리해서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밝히 드러냅시다. 그 결과 범사에 하나님의 축복을 풍성히 받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심판의 내용입니다(The Contents).
창3:17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창3: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왜 아담으로 인해서 땅이 저주를 받았습니까? 아담 곧 남자의 활동 무대가 바로 땅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여자에 대한 심판을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가 됩니다. 여자는 자녀와의 관계와 남편과의 관계에서 심판을 받았습니다. 여자의 활동 무대가 가정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오늘 본문처럼 땅이 하나님께 저주를 받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땅이 하나님께 복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께 복을 받은 땅의 모습을 잠시 살펴봅니다. 그러면 땅이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는 말씀의 뜻을 우리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33:13 ....그 땅이 여호와께 복을 받아 하늘의 보물인 이슬과 땅 아래에 저장한 물과(넉넉한 물)
신33:14 태양이 결실하게 하는 선물(選物)과 태음이 자라게 하는 선물과(좋은 날씨)
신33:15 옛 산의 좋은 산물과 영원한 작은 언덕의 선물과(비옥함)
신33:16 땅의 선물과 거기 충만한 것과....(풍성한 결실)
이와 같이 복을 받은 땅은 물이 넉넉합니다. 기후도 좋습니다. 비옥합니다. 그 결과 소출이 풍성합니다. 에덴 동산이 그러했습니다. 네 개의 강이 흘렀습니다. 옷을 벗고 살았습니다.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들이 자랐습니다. 그 열매를 임의로 먹었습니다.
이와는 달리 저주를 받은 땅은 어떠하겠습니까? 물이 부족합니다. 기후도 나쁩니다. 토질도 척박합니다. 가시덤불과 엉겅퀴와 같은 각종 잡초들이 생겨납니다. 각종 병충해가 발생합니다. 그 결과 소출이 빈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의 타락으로 인해서 이 땅은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 내려진 저주가 다 풀리는 날이 있습니다. 마지막 아담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시는 날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 점에 대해서 많은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사35:1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사35:2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
사35:6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사43:19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사43:20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첫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땅이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인 우리 주 예수 그리스께서 다시 오시는 날, 저주를 받은 땅은 복을 받은 땅으로 바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생각하면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롬8:19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롬8: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롬8: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롬8: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모든 피조물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날에는 이 땅에 임한 모든 저주가 사라지며, 모든 피조물이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날까지 이 땅은 저주를 받은 상태에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2)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하나님의 심판으로 여자는 수고하여야 자식을 낳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남자는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심판이 여자에게는 그 활동 영역인 가정에 임했고, 남자에게는 그 활동 영역인 일터에 임한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는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들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모든 것이 풍성했습니다. 아담은 그곳에 있는 각종 나무의 열매를 임의로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아담은 그 소산을 먹기 위하여 땀을 흘리며 수고할 필요가 전연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범죄하고 난 후에는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아담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는 저주를 받은 땅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때로부터 아담은 그의 평생에 수고하여야만 비로소 그 소산을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창5:5의 말씀처럼, 아담은 구백삼십 세를 살았습니다. 그 긴긴 세월 동안 아담은 땅의 소산을 먹기 위해서 얼굴에 땀을 흘리며 수고하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불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땅이 입을 열어 자기를 삼키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또한 아담은 뱀처럼 흙을 먹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가 수고하는 대로 얼마든지 땅의 소산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아담은 그것도 감사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은 수고할 때마다, 다시는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지 않으리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을 것입니다.
(3)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아담은 땅의 소산을 먹기 위해서 그의 평생에 수고하여야만 했습니다. 여기에 그가 해야 할 수고의 구체적인 내용이 두 가지로 밝혀지고 있습니다. 첫째,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제거하는 수고입니다. 둘째, 밭의 채소를 경작하는 수고입니다.
본시 하나님은 이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러기에 그때의 환경은 사람이 살기에 완벽했습니다. 사람이 창조될 때, 곧 사람의 타락으로 인해서 땅이 저주를 받기 이전의 환경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창2:5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사람이 창조될 때,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땅에는 가시덤불과 엉겅퀴와 같은 잡초들이 아직은 나지를 않았습니다. 따라서 모든 식물들은 잡초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마음껏 성장하며 풍성한 결실을 맺을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사람은 땅을 갈아야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먹을 것이 풍성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타락하고 난 이후에는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사람은 각종 나무의 실과를 임의로 먹을 수 있었던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땅은 저주를 받았습니다. 사람이 사는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와 같은 각종 잡초를 내었습니다. 사람은 얼굴에 땀을 흘리며 그와 같은 잡초들을 제거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수고로이 밭을 갈아 채소를 경작해야만 했습니다.
오늘 본문 19절에서 아담이 땀을 흘려야 먹게 되는 “먹을 것”이 히브리말로는 “떡”입니다. 따라서 여기서의 “채소”는 사람이 재배해서 추수하는 각종 곡물들, 곧 쌀과 보리 또는 밀 등등을 다 포함해서 일컫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자는 수고하여야 자식을 낳습니다. 남자도 수고하여야, 그것도 평생에 수고하여야 땅의 소산을 먹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인생은 한 마디로 수고입니다. 세상살이가 힘들고 고달픈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 때문입니다.
그러나 은혜로우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말씀해주셨습니다. 우리는 여자가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나는 길에 대해서는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여기서는 남자가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나는 길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딛2:9 종들은 자기 상전들에게 범사에 순종하여 기쁘게 하고 거슬러 말하지 말며
딛2:10 훔치지 말고 오히려 모든 참된 신실성을 나타내게 하라 이는 범사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려 함이라
여기의 “종”을 옛날의 노예나 머슴에 국한된 말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섬기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처럼, 예수님 안에서 새 사람이 된 우리도 섬김의 자세로 살아갑니다. 따라서 여기의 종은 섬김의 자세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떠한 자세로 섬겨야 합니까? 우리가 무슨 일에 종사하든지 우리는 범사에 우리 구주, 우리의 창조주가 아니라, 우리의 심판주가 아니라,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는 자세로 섬겨야 합니다. 이는 무슨 뜻입니까?
구원받은 우리는 우리의 일터를 증거의 자리로 삼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각자의 일터에서 기쁜 마음으로 섬기며 정직하고 신실하게 일할 때,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골3:22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골3:23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골3:24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여기에 참으로 놀라운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가 교회에서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우리의 일터에서도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자연히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는 우리의 일터에서 눈가림만 하지 않고 성실한 마음으로 일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을 통해서 사람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께 예배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을 때, 일터에 대한 우리의 관점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더 이상 우리의 일터는 심판의 자리가 아닙니다. 우리의 일터는 증거의 자리요, 예배의 자리요, 주께서 주실 영원한 상을 받게 될 자리입니다.
엡6:5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엡6:6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엡6:7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엡6:8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
여기에 우리는 우리의 일터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각자의 일터에서 행해야 할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주를 섬기듯이 우리의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일하는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직장에서 우리가 일한 만큼 충분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일터는 증거의 자리, 예배의 자리, 주께로부터 영원한 상을 받을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최선을 다해서 일하면, 주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보상을 해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받는 만큼만 일하겠다는 생각을 가지면, 우리는 주께로부터 받을 영원한 상을 잃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기쁜 마음으로 성실하게 일합시다. 그리해서 우리의 일터에서 주님을 힘써 증거하며, 주님을 잘 섬겨서 주께로부터 영원한 상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심판의 결과입니다(The Concequence).
창3:19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1) 에덴 동산에서 쫓겨남
지금까지 아담은 에덴 동산에서 살았습니다. 에덴 동산에는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들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모든 것이 풍성했습니다. 아담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를 임의로 먹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죄를 범함으로 이제부터는 저주를 받은 땅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는 가시덤불과 엉겅퀴와 싸와야 했습니다. 수고로이 밭을 갈아서 곡물을 경작해야 되었습니다. 그는 종신토록 얼굴에 땀을 흘려야 비로소 식물을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아담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말씀은 오늘 본문 뒤에 있는 창3:23에 기록되었습니다. 아담은 죄 때문에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을 상실해버리고 만 것입니다.
(2) 죽어야 함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아담이 그것을 먹으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히6:18 말씀과 같이,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가 없으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그대로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담은 흙에서 취함을 입었습니다. 창2:7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은 흙으로 아담을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아담은 생령이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담은 살아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아담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다시금 흙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와를 속였던 뱀의 말은 순전한 거짓말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아담은 반드시 죽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창5:5의 말씀대로, 아담은 구백삼십 세를 살았습니다. 성경에는 기록이 없지만, 그의 아내 하와도 역시 비슷한 연수를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는 그 즉시 그들을 죽게 하지 않으셨을까요?
하나님은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긍휼이 풍성하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먹었을 때, 그들은 그 즉시 죽어 마땅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살 자격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즉시 그들의 생명을 취하지 아니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생명을 연장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 바로 뒤에 있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그들에게 구원을 베푸셨습니다.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천사들이 죄를 범했을 때는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그 즉시 타락한 천사들을 하늘에서 내어쫓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구원의 은총을 베풀지 아니하셨습니다. 그 결과 타락한 천사들은 영원한 불 못에 던짐을 당하는 운명에 처해졌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이러한 질문을 던질 때가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어떤 사람이 죽도록 내버려두셨는가? 그러나 이는 올바른 질문이 아닙니다. 올바른 질문은 이와 같습니다. 왜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살려두시는가? 모든 사람은 죄로 인해서 죽어야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는 이와 같은 질문을 할 때도 있습니다. 왜 나쁜 일이 좋은 사람에게 생기는가? 아닙니다. 나쁜 일이 좋은 사람에게는 생기지 않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나쁜 일이 생기는 것은 죄로 인해서 모든 사람이 다 나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왜 사람들이 병들거나 사고가 나서 죽는가? 이와 같은 질문보다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왜 나 같은 죄인이 아직도 살아있는가? 왜 나 같은 죄인에게 나쁜 일이 생기지 않고 이렇게 좋은 일도 생기는가? 그 답은 오직 하나,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눅13:1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아뢰니
눅13:2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눅13:3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예루살렘 성전에서 살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은 살해를 당한 사람들이 죄인들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벌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를 부인하시면서, 회개하지 않으면 누구에게라도 똑같은 일이 생길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왜 그들이 죽었습니까?”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시면서, 그들에게 온당한 질문이 무엇인가를 깨우쳐주셨습니다. “왜 다른 사람들이 살아있는가?” 그 대답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눅13:4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눅13: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사람들이 죽는 것은 당연합니다. 롬6:23의 말씀과 같이,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왜 사람들이 죽는가? 왜 사람들에게 나쁜 일이 생기는가? 이와 같은 문제로 인해서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와 같은 죄인이 아직도 살아있습니까? 왜 하나님은 우리와 같은 죄인에게 나쁜 일이 생기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주십니까? 대답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또다시 새로운 한 주간을 맞이했습니다. 우리의 일터를 증거의 자리로 삼고,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세로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일합시다. 그리함으로서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는 복된 한 주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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