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우리의 시각차이
이사야53:1~6
2004년 8월 1일 2004년 8월 1일 주일낮예배 최일환목사 설교
53:1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53: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欽慕)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53: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설교:
사람간의 문제를 보는 視覺이 엄청나게 차이가 있습니다. 이라크 派兵문제만 봐도 그렇고 行政수도 이전문제를 봐도 그렇습니다. 입장과 견해가 너무 차이가 나서 共感帶를 形成하기가 어렵습니다. 大統領이 되기 전의 말과 된 후의 말이 다릅니다. 野黨시절의 입장과 與黨시절의 입장이 달라집니다. 왜 똑같은 대통령을 두고 보는 평가가 정반대일까요? 보는 시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보는 시각이 다르기에 행동도 다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상문제를 바라보는 시각도 이처럼 다른데 하물며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시각도 다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똑같은 聖經을 보고도 생각이 다르고 똑같은 사건을 보고도 해석이 다릅니다.
또, 목사로서 제 친구가 보는 선교에 대한 시각과 제가 보는 선교 시각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느낍니다. 왜요? 보는 시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떤 시각에서 어떤 자세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로님이 보는 시각과 목사님이 보는 시각이 다릅니다.
그러나 視覺이 일치되고, 姿勢가 일치되면 하나가 될 수 있는데 그렇게 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오늘 봉독한 성경 말씀도 예수님 수난에 대해 우리가 바라보는 것과 하나님이 바라보는 것이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는가? 우리는 겉모습만 보고 現在만 보나 하나님은 속을 보시며 未來를 내다보시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예수님, 십자가, 죄 문제, 이것을 여러분은 어떻게 바라보십니까?
구체적으로 몇가지만 살펴봅니다.
1.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릅니다.
예수님을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 기독교의 核心이 예수님은 누구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잘못되면 이단이 됩니다. 또 이것이 제대로 서지 못하면 신앙만이 아니라 가정도, 교회도, 국가도 잘못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오늘 봉독한 본문을 보면 메시야가 이 땅에 와서 어떤 수난을 당할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수많은 종교 지도자들, 바리새인, 서기관, 제사장등이 보고 또 보고 했을 것인데 왜 예수님을 몰라보았을까요? 예수님 탄생 6~700년전 선지자 이사야가 선포한 이 하나님의 말씀을 왜 생각 못했을까요?
이것도 메시야에 대한 視覺차이 때문입니다. 메시야에 대한 시각, 이것이 유대인들이 바라는 것과 하나님의 것과는 너무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위대한 메시야, 자기나라를 로마로부터 해방시킬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실상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은 매우 초라했습니다. 너무나도 초라하여 아무도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2절의 말씀처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었”습니다. 결국 세상 사람들이 欽慕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蔑視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습니다. 고생도 무지 많이 했고 인간의 艱苦와 疾苦를 아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얼굴을 外面하였습니다. 아무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결국 외모로만 보았기에 사람으로 보았고 또는 先知者로만 보았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이 길 지나가시다가 제자들에게 질문하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이 대답합니다. 어떤 사람은 세례요한, 어떤 사람은 엘리야, 어떤 사람은 예레미야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훌륭한 先知者 중 하나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당대 사람들만의 見解가 아니었습니다. 제자들 중에도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기 직전인 그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보았던 자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나요? 3년이나 따라 다녔는데, 그동안 수없이 많은 奇蹟과 表迹을 보았는데 어찌 이럴 수 있나요? 그 기적과 표적이 보통 사람들이 하는 일이었다면 그러려니 하지만 죽은 자도 살립니다. 떡5개 물고기2마리로 5000명을 먹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물위로 걷기도하고 수많은 병자들을 치유하십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지 못합니다.
왜요? 인간의 잘못된 신앙 때문입니다. 성경을 정확하게 보지 못하였습니다. 왜요? 지도자들이 잘못 가르쳤고 처해 있는 환경을 앞세우며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 앞에 와 있는데도 잘못된 시각으로 예수님을 보게 되니 그 예수님을 푸대접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각은 다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곧 하나님이고 인류의 唯一한 메시야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우리를 위한 위대한 구원 사역을 묵묵히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만이 우리 인간을 구원할 구주로 보셨습니다. 왜요? 예수님만이 죄 없는 분이시고 그분만이 우리의 구원을 이루실수 있는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누구로 보십니까? 그 시각이 聖經과 일치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보시는 예수님의 시각이 여러분의 시각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유일한 메시야 입니다.
2. 십자가를 바라보는 시각이 다릅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 그 십자가를 어떤 시각으로 보십니까? 단순히 교회 象徵으로만 보지 마시기를 축원합니다. 한국교회는 복을 받은 것이 많은데 그중에 동네마다 도시마다 십자가 온 나라를 덥고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세웠다고 잡아가거나 교회를 폐쇄시키지 않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교회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中國에 가보면 교회도 십자가를 맘대로 내걸지 못합니다. 중동지방에서는 십자가를 내걸면 당장 잡아갑니다. 십자가는 고대 中東지방과 로마 시대의 사형 틀입니다. 최고의 흉악범들을 처형하는 도구였습니다.
반면에 카톨릭 교회와 개신교 일부 교파는 십자가를 예배당 가운데 모셔 성스럽게 만들어 偶像으로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십자가는 성스러운 도구로 받들어 모셔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그것도 우상입니다.
왜 모세의 法櫃가 없어진 줄 아시나요? 왜 히스기아 왕이 모세가 놋 뱀을 부수어 버렸나요? 백성들이 우상으로 섬기기 때문이었습니다.
십자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를 섬김의 대상으로 만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를 쳐다보고 기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를 통해 핏 값을 치르신 구원의 은총을 상징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 우리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구원하는 방법으로 정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셨고 그에게 처참하게 십자가에 죄 값을 대신 치르게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 사건을 성경의 한 사건으로만 보지 마시고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기 위해 이루신 위대한 사건으로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시각의 변화가 없이는 신앙의 감격이 없습니다. 그 십자가 고난 사건이 나를 구하시기 위해 벌이신 하나님의 위대한 사건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를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 단순한 사건으로 보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나를 위한 위대한 구원 사건으로 보느냐에 따라 우리의 인생길은 달라질 것입니다.
4절을 보세요.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어떤 목사님이 동네 꼬마들에게 전도하다가 길바닥에 십자가를 그리고 “이것이 뭐~게”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꼬마가 “그것도 몰라요, 우리를 뭘로 알아요?” “그래 미안하다 그게 뭐냐?” 물었더니 “더하기지 뭐예요?”하더랍니다.
목사님이 집에 돌아와서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십자가를 “더하기”라고 큰소리친 그 소년의 소리를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중요한 설교 힌트를 얻었습니다.
죄는 4가지 산술법칙을 갖고 있습니다.
1)더하기 - 죄는 그대의 문제를 더합니다. 죄 된 방법을 쓰면 점점 더 얽히고 골치 아파집니다.
2)빼 기 - 죄는 그대의 정력을 빼앗아 갑니다. 죄가 깊어 갈수록 의욕은 빠지고 무력해집니다.
3)곱하기 - 죄는 그대의 아픔을 곱합니다. 죄 된 생활이 마취제가 될 때가 있으나 깬 뒤의 아픔은 이전보다 더 합니다.
4)나누기 - 죄는 이웃을 나눕니다. 죄는 가족까지 쪼개며 죄는 친구를 잃게 합니다. 결국 죄는 그대의 영혼을 갈기갈기 찢을 것입니다, 라며 설교 했다고 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은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표시하는 표적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이 시각이 온전히 세워지기를 축원합니다.
3. 罪를 바라보는 시각이 다릅니다.
미국에서 목사가 죄에 대해 회개하라고 설교하면 무식한 목사라고 합니다. 그래서 동성애나 이혼, 혼외정사를 죄라고 지적하고 책망하는 교회 목사찾아보기가 힘들다고 합니다.
서양에서는 요즘 해수욕장에서는 보통이고 길거리에서 잔디밭 위에서도 여성들이 위통을 다 벗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브래지어까지 다 벗고 다녀도 부끄럽지 않다고 합니다. 그만큼 죄책감을 느끼는 것에 대해 사람들의 감각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1950년대 만해도 미니스커트 입는 것 때문에 난리가 났는데 이젠 완전히 벗고 다니는 시대 되었습니다. 옛날에는 처녀가 애를 낳으면 동내에서 쫓겨났는데 요즘은 그럴 수 있지 하는 시댑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죄에 대한 視覺이 변한 것입니다. 옛날에는 죄였는데 요즘은 죄가 아닌 것이 된 것입니다. 사람의 죄에 대한 시각은 세월 따라 문화 따라 이처럼 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는 시각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일점 일확도 변함이 없듯이 죄를 바라보는 시각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왜요? 성경이 시대 따라 달라지고 형편 따라 변하면 성경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이 변함이 없다면 죄도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동성애도 죄고 간통도 죄고 우상숭배도 죄며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 않는 것도 죄입니다. 십일조를 떼먹는 것도 죄고 주일을 성수치 못하는 것도 죄입니다. 왜요?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고 하나님이 그것을 죄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가장 큰 죄는 예수를 믿지 않는 죄입니다. 이 불신앙의 죄, 이 죄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5절을 보세요.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메시아이신 예수님, 그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 이것은 이 죄 때문입니다. 이 죄 문제를 해결하려고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고 이 죄 때문에 무서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만큼 죄는 심각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감당 할 수도 없고 감당치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죄 값을 그에게 담당시키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작은 죄라고 가볍게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죽을병은 큰 사고로 죽는 것보다 작은 바이러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세균 때문에 죽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보기에 작은 죄가 우리를 망하게 합니다.
죄를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고 영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시각이 중요합니다. 시각은 가치를 결정하고 가치는 인생을 바꾸어 놓습니다. 하나님의 시각과 여러분의 시각이 일치되는 그날, 그날은 우리가 복을 받는 날입니다.
기도합시다. (합심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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