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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왜 입을 열지 않았을까?/ 사53:7~9/2004년 8월 8일

왜 입을 열지 않았을까?

이사야53:7~9

2004년 8월 8일 주일낮예배 최일환 목사 설교

5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53:8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53:9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설교:

오늘시대는 참으로 말이 많은 세대입니다. 물론 P.R 시대요, 광고시대이기 때문이라고도 하겠지만 아무튼 다변이 능변으로 인정받고 있는 세대입니다. 어떻게 말을 잘하여 내 능력, 지식, 기술을 홍보하느냐에 성공과 실패가 달려있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말 잘하는 사람은 能力있는 사람이고 말 못하는 사람은 무능력자로 인정받고 살아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나 말이 없다는 것과 말 못한다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말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을 못하는 사람은 아니란 말입니다.


말이란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입에서 나오는 말 한마디가 나라를 어지럽게 하기도 하고 말 한마디에 사람이 죽고 살기도 합니다.

약3:16절 이하에 보면 혀는 몸의 작은 지체로되 인생의 바퀴를 불사른다고 했습니다.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것이 말입니다. 요즘 우리나라 매우 어렵습니다. 그 원인이 뭔가요? 지도자의 말에 권위가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노대통령의 말 한마디, 대통령 못해먹겠다는 말이 얼마나 나라를 어지럽게 했습니까? 또 언젠가는 기자회견을 하다 말 한마디 잘못하여 대기업 사장이 한강에 투신하여 죽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가 죽은 이유는 자기의 비리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회 지도층의 말 한마디는 막강한 힘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말을 하지 않으면 오히려 말을 하는 것보다 더 엄청난 표현이 되기도 합니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 침묵 속에 깊은 뜻이 담기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의 말씀이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어떻게 고난을 당하실 것인지를 주전 700년전 선지자 이사야가 성령의 감동으로 표현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 예언과 실제 예수님이 오셔서 고난당하신 모습이 어찌 그리 똑같은지요? 그래서 성경은 일점 일확이라도 틀림이 없는 正確無誤한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그중에 제 마음에 깊은 감동을 주는 부분은 7절입니다. 주님이 그 엄청난 곤욕과 괴로움을 당하면서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떨 깎는 자 앞의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다는 부분입니다.

왜 예수님은 그 엄청난 고통과 고난을 겪으면서 침묵을 지키셨을까요? 할말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당신이 메시야임을 얼마든지 입증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당신이 무죄함을 얼마든지 입증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왜요?


주님의 침묵은

1. 말을 해도 이해를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남편들이 퇴근하여 집에 들어오면 아내들은 그때부터 말을 계속합니다. 하루 종일 말할 상대를 찾지 못하다가 남편이 오니 신이 났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남편들이 세세하게 말을 해줍디까?

응, 아니, 알거 없어, 됐어,


왜 그런지 아십니까? 한마디로 말 상대가 안 되기 때문입니다. 해도 알아듣지도 못하고 또 한들 얻어지는 것이 없습니다. 계속 입만 아픕니다. 말의 가치를 못 느끼는데 어떻게 말을 합니까?


여성성도 여러분! 오해하지 마시고 잘 들으셔야 합니다.

남편이 집에 들어오면 말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줘야 합니다. 그러려면 남편이 하는 사업이나 직장 일에 관해 알아야 하고 내가 충고나 자문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마디로 내 수준을 높여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말의 가치를 못 느끼게 되고 결국 침묵이 제일 편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중에 사랑이 넘치는 남편은 눈높이를 합니다. 그래서 알아듣기 쉽게 말합니다. 그러나 그 말을 잘 알아들으면 계속 말하지만 사오정 말을 하면 그때부터는 입 다무는 것이 편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가도 직장 동료나 친구를 만나면 입에 거품을 품고 밤새 이야기 합니다. 왜요? 소위 말하는 코드가 맞는 것입니다.

 

말이란 상대가 알아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3살박이 어린아이에게 정치가 어떻고 경제가 어떻고 하면 그것은 어린아이가 문제가 아니고 그런 말을 하는 어른이 문제입니다.

예수님도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침묵 속에서 고난을 당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8장 36절에 보면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 생각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셨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세상 나라만 알고 세상 수준에서만 이야기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들이 알아듣지 못할 천국에 대해 침묵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이해시키려 해도 천국은 이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침묵이 더 나신 것입니다.

빌라도가 “진리가 무엇이냐” 물었는데 예수님은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십니다. 왜요? 대답을 하더라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세상 권세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이 택하신 영혼 구원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고 어려운 고난을 당하면서도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더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침묵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 그러나 어느 때는 전혀 아무 말씀도 없으십니다. 왜일까요? 그냥 침묵하시는 것이 응답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러기에 우리도 할말 다하고, 체면 다 세우고, 자존심 다 찾다보면 예수님 따라가기가 어렵습니다. 말하고 싶지만 침묵하고 참으며 견디는 능력을 갖기를 축원합니다.

정말 고통스럽고 힘들 때 침묵하면 문제가 해결되고 조용해집니다. 할말을 하고 싶고 도저히 말 안하고는 못 배길 때라도 그럴지라도 주님처럼 입을 열지 마시고 묵묵히 십자가를 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주님의 침묵은

2. 내 죄가 그토록 크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이 입을 열지 않으시면서 십자가를 지셨을까요? 그 고통이 얼마나 큰지, 육체적 고통뿐 아니라 정신적 고통은 더 컸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을 참아냈을까요? 주님의 고난은 주님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마땅히 형벌 받을 우리”를 위한 대속의 고난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 죄의 크기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그리고 얼마나 큰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분이 나를 대신해서 그 엄청난 십자가를 감당하신 것입니다. 그 말을 우리 죄가 그토록 크단 말입니다. 


5절을 보세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라고 표현되어 있으나 실상은 나 개인을 위한 것입니다. 나 한사람의 죄가 그토록 큰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로마서에서 말씀하고 있고 창세기 3장에서 정령 죽으리라고 하셨기에 죽음의 값을 대신 치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사죄의 종교입니다. 죄 문제를 해결 받는 유일한 종교입니다. 타종교는 죄의 문제를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려고 고행도 하고 도를 닦고 심지어 자해를 하면서 죄 값을 치르려고 합니다.

인도에 가면 자신의 죄를 씻으려고 사람들이 갠지스 강에 나와 물로 목욕을 합니다. 그 강은 시체를 불태우는 강이요, 온갖 더러운 것이 다 버려지는 강입니다. 그럼에도 그 물로 목욕을 하면 죄가 씻어진다고 믿습니다. 이슬람의 어느 교파는 자기 몸에 고통을 주고 피를 흘리게 합니다. 등에, 가슴에, 피가 줄줄 흘러내리게 합니다. 그러면 용서 받는다고 합니다. 불교는 도를 닦아 열반의 세계에 들어가야 부처가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방법도 죄인인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는 죄를 씻을 길이 없습니다. 죄인이 죄인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죄 없는 분이 오셔서 우리 죄를 해결해 주어야만 해결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성삼위 하나님이시면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엄청난 죄 값을 온전히 치르시기 위해 입을 열지 않고 묵묵히 고초를 겪으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침묵은 위대한 것입니다.  


그 침묵 앞에 빌라도는 두려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피고가 재판장을 두려워하는 일은 있어도 피고를 두려워하는 재판장은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로마 총독으로서 삼권을 손에 장악하고 있는 그가 그의 앞에 말없이 고개 숙이고 있는 예수님을 두려워하였던 것입니다.

아무리 물어 보아도 예수님은 말이 없었습니다. 일언반구의 말도 없었습니다. 빌라도는 그에게 "내가 너를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는 권세를 갖고 있는 데 왜 너는 한 마디도 변명하지 않느냐?"라고 말하면서 살려주려고 애를 씁니다. 어쩌면 빌라도의 이 말은 너는 아무리 죄가 없는데 왜 말이 없이 죽으려 하느냐, 왜 침묵하느냐고 물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주님은 말이 없으십니다. 왜요? 주님의 어깨에는 엄청난 우리의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죄 값을 치르는 죄인으로 섰기에 묵묵히 입을 열지 않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침묵은 죄가 그만큼 무서운 것임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침묵은

3. 그만큼 나를 사랑하신다는 표현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 온갖 고생을 다하면서도 힘들다고 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그냥 견디십니다. 정말 힘드시면“아이구 이러다 주갔다” 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십자가를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요한복음 18장 11절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하십니다. 오히려 당당히 자원하여 십자가를 지십니다. 원망하거나 불평하거나 짜증을 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앞서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고 당당히 제사장들과 부딪치십니다.

왜요? 그이유가 뭘까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고난속애서도, 견디기 힘든 모욕과 고초 속에서도 입을 열지 않고 견디게 한 것입니다. 사랑은 입을 열지 않고도 표현됩니다. 


성경곳곳에서 예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사랑은 용서와 인내로 표현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바닷가에 나타나셔서 제자들의 잡은 고기로 조반을 같이 합니다. 그런데 그 조반 중에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뭔가 말을 해야 할텐데 아무 말도 안 하십니다.

조반 후 그제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아마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침묵이 무척 두려웠을 것입니다. “너 왜 나를 부인했냐? 왜 그랬느냐? 네가 내 제자냐? 내가 경고 했지 않냐?” 차라리 야단치면 좋을텐데 아무런 야단을 치지 않습니다. 왜요? 이미 다 용서하신 사건입니다. 그러기에 말이 필요 없습니다.


성도여러분!

우리도 주의 일을 하면서 세상을 향해, 그리고 하나님을 향해 원망불평, 고통의 입을 열지 맙시다. 꼭 말을 해야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원수 마귀는 우리가 입을 열고 원망부평하기를 기다립니다. 또 우리의 약점이 들어나기를 기다립니다. 그래서 우는 사자같이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사단 마귀의 밥이 누굽니까? 말 많은 사람입니다.


주님의 침묵은 위대한 사랑입니다.


기도합시다.    

 

출처 : 최일환 목사(장안중앙교회)설교 카페
글쓴이 : 최일환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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