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사랑에 의심이 생깁니까?
요한복음11: 1- 16
2004년 8월 29일 주일낮설교 최일환 목사
11:1 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촌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11:2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러라
11:3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11:4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11:5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11:6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11:7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11:8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11: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11:10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11: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11:12 제자들이 가로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11:13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저희는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줄 생각하는지라
11:14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11:15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신대
11:16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설교:
성경을 읽다가보면 특별한 부분이 보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11장에는 나사로 집안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예수님이 그 식구들을 편애하시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사랑하신다는 표현이 여러번 등장을 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성경은 공공연히 대놓게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나사로의 가정에 짙은 구름이 덮이기 시작했습니다. 집안의 기둥이요, 두 여동생이 하늘처럼 믿고 있었던 오빠 나사로가 병석에 들어 눕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자 그 병은 점점 위독하게 되어 생사의 기로에 설만큼 숨 가쁜 상황이 되어 버렸습니다.
요즈음이야 응급실도 있고, 금방 입원할 수 있는 병원도 있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 그 식구들이 얼마나 난감했겠습니까?
그래서 그의 누이동생들은 급하게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에게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노라고 전갈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예수님은 얼굴조차 비치지 않습니다.
그러는 사이 나사로는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 때에도 예수님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하는 수 없이 두 자매는 장례도 손수 치루어야 했습니다. 아마도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절망으로 거의 매일 통곡하는 나날을 보냈을 것입니다.
저는 숨 가쁘게 돌아가는 이 집안의 불행을 보면서 삼 남매가 유달리 예수님의 남다른 사랑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 마음의 고통이 훨씬 더 심했고 더 많은 마음의 상처를 입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분명히 믿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만병을 통치하는 의사이시라는 것도 너무나 많이 보아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특별히 사람을 보내어 전갈까지 했던 그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며칠이 되도록 나타나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그들의 마음속에는 틀림없이 이런 의심이 생겨났을 것입니다.
“정말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일까?” “그분이 정말 우리를 사랑하시는 건가?”
연약한 인간인지라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믿었던 만큼 그들의 마음에는 더 커다란 시험이 찾아온 것입니다.
사실 오늘 우리에게도 이처럼 주님의 사랑을 의심할 수 있는 신앙의 위기는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습니다.
정말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인가? 정밀 주님은 내 기도를 듣고 계시는 것인가? 정말 하나님은 내 형편을 알고 계시는 것인가?
우리라고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도 어느 날 하루아침에 이런 의심 속에서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경우에 주님의 사랑을 의심할 수 있는 시험에 빠지게 되는지에 대해 몇 가지를 함께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1. 갑작스러운 불행이 닥칠 때입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불행이 닥쳤을 때 그때가 가장 위험합니다.
예를 들면 나사로처럼 병으로 쓰러지는 것 같은 갑작스런 불행을 당할 때
내가 불치병의 선고를 받았을 때, 사랑하는 가족이나 자녀가 예수를 잘 믿었는데도 목숨을 잃게 되는 재난을 당했을 때,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기가 쉽습니다.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할렐루야!
그 전능하신 하나님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사람이 젊은 나이에 병으로 쓰러진다는 것은 보통 모순이 아닌 것처럼 받아들여집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있어서도 안 되는 일처럼 우리는 해석을 합니다.
예수님이 사랑하는 자라면 모든 질병에서 그를 지켜주는 것이 정상이고, 아프지 않는 것이 정상이고, 역경의 바람이 불 때는 안전하게 비켜 가도록 해 주시는 것이 정상이라고 우리는 늘 생각합니다.
나사로와 그 누이들도 틀림없이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특별히 자기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마음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병 따위는 예수님이 우리 집을 드나드시는 이상 두려워 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큰 소리 치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빠가 병이 들어 급기야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되는 갑작스런 불행 앞에서 그들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을까요?
예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았을까요? 충분히 그럴 수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런 시험이 어디 나사로 집안에만 불어 닥치는 줄 아십니까?
우리 역시 그런 시험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사로 삼 남매가 우리에게 던져 주는 굉장히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이해할 수 없는 불행이 우리 앞에 나타나도, 그리고 그 불행을 통해서 고통을 당한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요, 잘못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사로가 병이 든 배후에는 사람이 깨닫기가 어려운 심오한 하나님의 뜻, 선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숨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두 누이동생들이 보내온 전갈을 듣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쉽게 말하면 “안 죽는다. 걱정하지 마라. 오히려 네가 병이 들었음으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예수님이 모든 사람에게 찬송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라”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예상치 못한 어려운 일, 또는 재앙 뒤에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심오하고 사랑이 넘치는 목적과 뜻이 숨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갑작스런 불행을 당했다고 해서 예수님이 날 정말 사랑하시나 하고 의심하는 것을 어리석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다보면 이런 저런 고통을 당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통해 우리 자신들이 깊은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하지 않는 일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병으로 고통 하는 분이 계십니까?
병으로 쓰러져있습니까? 사업에 실패했습니까?
사기를 당했습니까?
내 힘으로 지고 갈 수 없는 어떤 무거운 짐으로 어깨가 짓눌리고 있습니까? 인생을 사는 것이 두렵습니까?
이 모든 불행들 이 우리에게 찾아올 수 있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라고 하더라도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면 솔직히 우리 마음속에 이런 갈등이 생기기 쉽습니다.
“정말 주님이 날 사랑하시나? 사랑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나?” 내가 그동안 주님을 얼마나 열심히 섬기고 헌신했는데 왜 이런일이 닥치도록 하나님은 뭐하시고 계신 것일까? 섭섭한 감정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용히 마음의 귀를 기울여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나에게 있는 고통을 기억하면서 그 음성 들으시기 바랍니다.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그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너의 실패는 망할 실패가 아니니라.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고 내가 영광 받기 위함인 것인 줄을 너는 믿기를 바란다.”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조용히 들으십시오.
우리가 어떤 일을 당해도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면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2. 응답이 지체될 때입니다.
응답이 지체될 때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기 쉽습니다. 나사로의 병세는 시간이 흐를수록 악화되어 갔습니다.
“보시옵소서,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고 주님께 기별을 보냈건만 예수님은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이 말에서 우리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믿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 자기 오빠가 지금 위기를 당해서 죽어간다는 사실을 전하면서도 “주여, 와 주십시오.”라는 말은 한 마디도 안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렇게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오시지를 않았습니다. 이쪽에서는 한시가 급한데 왜 예수님은 태평하실까요? 그리고는 이틀을 더 머무신 이유가 뭘까요?
아마도 마리아는 10분이 멀다 하고 문 밖을 내다보며 마을로 올라오는 좁은 오솔길에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나타나기를 목이 빠지도록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오빠가 마침내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장례식도 치루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그 당시에 요단강 근처에 계셨습니다. 성지 순례 가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요단강에서 예루살렘까지 오는 데는 걸어서도 하룻길이면 충분합니다. 오신다면 벌써 왔을 텐데 지체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 상황의 마르다 마리였으면 어쩠을까요?
“주님이 정말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일까? 사랑한다면 이럴 수 있을까?”
분명히 마음의 상처가 컸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흘 후에야 비로소 나사로의 집안을 찾아오셨습니다.
왜요? 왜 예수님은 이틀을 더 유하시다 뒤늦게 나타나신 것일까요?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1)마르다 마리아의 연약한 믿음을 들어내기 위함입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다면 우리 오라비가 죽지 아니 하였겠나이다."(21절).
마리아도 예수님을 만나자 마자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우리 오라비가 죽지 아니 하였겠나이다.”(32절). 이 말을 바꾸면 “왜 이렇게 늦게 오셨어요? 빨리만 오셨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부러 늦게 오신 이유입니다.
이말을 잘 생각하세요. 두 여인의 고백은 대단한 믿음 같으나 실상은 정말 제한된 믿음입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다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이다.” 이 말을 뒤집어 보세요. 나사로가 죽은 이유는 “주님이 저기 계셨기 때문”이란 말입니다. 여기서는 살릴 수 있고 저기서는 못 살린다는 것입니다.
또 죽은지가 나흘이 됩니다. 이 말은 혹시 하루 이틀이라면 몰라도 나흘이라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능력을 공간으로, 시간으로 제한하는 연약한 믿음입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의 능력을 얼마나 신뢰하십니까? 혹시 주님이 전능하다고 믿으면서도 내 능력 수준에서 주님의 능력을 제한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믿음은 쉽게 실망하고 쉽게 낙심하여 시험에 들 때가 많음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의 능력을 입으로만 믿지 밀고 실생활에서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눈앞에 두고 제자들이 그것을 믿게 하기 위해 이런 사건을 만드신 것입니다.
2)예수님이 더 큰 선물을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이 사건의 핵심은 죽은 나사로의 부활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주님은 강력한 교훈을 제자들에게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나는 보통 선지자가 아니다. 나는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이다.” 이것을 주님은 교훈하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이 주신 큰 선물은 부활신앙입니다. 이 부활신앙이 없이는 하나님 앞에 바로 설수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부활신앙이 올바로 세워지기를 축원합니다. 이 부활 신앙은 신앙의 핵심이고 신앙의 능력입니다.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는 주님은 사랑했으나 그들에게는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을 능력은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얼마 후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면 그들은 곧바로 실망하고 낙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그들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하는 것을 가르쳐야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에게 놀라운 선물, 부활의 신앙을 주시기 위해 늦게 오신 것입니다,
본문의 시점이 언제 입니까? 이제 예수님은 십자가를 눈앞에 두고 계십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생명이 무엇인지, 죽은 자가 어떻게 살수 있는지를 시청각 교육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님이 생명의 주인인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3)사람의 생명은 사람에게 속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데려 가는 것이고 주님이 원하시면 살게 하시는 것이 생명입니다. 그러기에 일찍 죽었다고 억울해 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도 서른세에 죽으셨고 세례요한도 서른에 죽었습니다. 스데반도 젊어서 죽었습니다. 그렇다고 누가 그들이 저주받았다고 할 것입니까?
그러기에 혹 일찍 병들었다고, 또 주님의 응답이 지체 된다고 실망치 마시기를 축원합니다.
혹 여러분 가운데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있는 분이 계시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보고 배우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비록 더디지만 그들에게 찾아 오셨고,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인생의 고통을 당할 때마다 마리아 형제처럼 주님 앞에 빨리 가서 알려야 됩니다.
"보시옵소서.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보시옵소서. 사랑하는 자가 실직을 당했나이다."
"보시옵소서. 사랑하는 자의 집안에 고통이 들어왔습니다."
"보시옵소서. 사랑하는 자의 자녀가 지금 집을 뛰쳐나갔습니다." 무슨 내용이든지 좋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때로 이런 어려움을 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마다 주저하지 말고 예수님께 가서 알려야 됩니다.
부르짖으면서 실망치 마세요. 낙심치 마세요. 속히 응답이 없다고 낙심치 마세요. 오히려 예수님의 더디 오심이 사랑하신 것이다.
한 간증을 소개합니다. 어떤 대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는 믿음이 굉장히 좋았을 뿐 아니라 꿈도 많았고, 머리도 좋았습니다. 그런데 대학을 졸업할 즈음에 몸에 갑자기 이상이 생겼습니다. 온몸에서 기운이 빠지고 모든 일에 의욕을 잃어 가는 병이었습니다. 이 병원, 저 병원을 다니며 진찰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정확한 병명을 찾아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결국 나중에 병명이 밝혀지긴 했는데, <근육무력증>이라고 하는 무서운 병이었습니다. 이 병은 갈수록 근육에서 힘이 빠져서 나중에는 드러누워 말라죽게 되는 그런 병이었습니다.
아직 새파란 학생이, 그것도 예수님을 그렇게 잘 믿는 학생이 이런 병에 걸렸으니 얼마나 눈앞이 캄캄했겠습니까?
치료받을 길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그 병은 치료가 불가능한 그런 병이었습니다. 나중에는 연필마저 들 힘조차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습니다.
자연히 방안에 쳐 박혀서 누워 있는 시간이 매일 매일 연속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고쳐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입을 다무신 채 가만히 계셨습니다. 조금 기운이 나면 옆에 있는 책을 겨우 들고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조금 더 기운이 나면 일어나 앉아서 신문에 있는 중요한 내용들을 스크랩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5년이라는 세월을 보냈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그런 병이 들면 하나님 앞에 나아가 "주여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고 구하면 하나님이 "오냐 알았다. 가만히 기다려라."하고는 금방 고쳐 주실 것 같습니다.
그런데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3년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습니다. 5년이 차갈 무렵에 어느 날 하나님께서 그를 기적적으로 고쳐주셨어요.
하나님이 하루아침에 고쳐 주신 것입니다. 기적적으로 고쳐주신 것입니다.
그 후 그는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대기업의 사장이 되었습니다. 조그만 사무실에서 시작한 사업이 엄청난 기업으로 자랐습니다. 그가 이랜드의 박성수 사장입니다.
그가 병중에서 5년 동안 읽었던 책과 모든 자료들이 그 뒤 10년 동안 회사를 경영하는데 엄청난 기본 재산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아무것도 안된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은 귀한 것입니다. 그것이 질병이든 그것이 실패든 성공이든 하나님이 주신 것이면 그것은 귀한 것입니다. 장애물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훌륭한 기회가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병이 들었습니까? 경제적인 위기를 만났습니까? 사기를 당했습니까? 아니면 자녀가 말썽을 피웁니까? 인생을 살기가 두렵고 자신이 없습니까?
그런 일이 내 앞에 일어났다고 해서 우리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의심하면 안됩니다.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통 뒤에는 이런 말씀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니라.” 우리가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나가서 "주여,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사랑하는 자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합니다." 하고 우리의 모든 아픔을 주님께 다 아뢰었지만 여전히 응답이 없습니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응답이 지체되는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응답은 항상 최상입니다.
가장 알맞은 때에 우리에게 임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통성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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