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군가?
고린도후서4:7~10
2004년 9월 12일 주일낮예배 최일환 목사 설교
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4: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4:9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4:10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설교:
왜 많은 사람이 자살을 할까요? 작년 한해만 전 세계에서 자살한자가 100만명이 가까운 사람이 자살을 한다고 합니다. 평균 40초당 한명이라고 합니다. 통계에 잡히지 않는 사람까지 하면 이보다 더 많은 숫자가 자살로 인생을 마감한다는 이야깁니다. 이는 전쟁이나 테러로 죽은 사람보다 훨씬 많은 숫자입니다. 국제 자살방지협회에 따르면 이대로 가면 앞으로 2020년에는 자살자 수가 연간 150만명으로 늘어날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합니다.
지난 2000년도에는 전 세계 자살자 수는 81만 여명으로 이는 살인(50만명)과 전쟁(23만명)의 희생자를 합한 것보다 많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되는 것일까요? 여러 가지 이유를 듭니다.
자살이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라고 생각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아닙니다. 자실은 돌이킬 수 없는 고통의 시작입니다.
또 경제적인 원인이 가장 크다고 합니다. 중국도 경제가 급성장하면 엄청난 자살자가 생기고 있답니다.
그러나 저는 이렇게 판단합니다. “자기 정체성”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냐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으면 절대로 자살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자기 정체성이 부정적이면, 그래서 “나는 쓸모없는 인간이다, 나는 있으나마나한 존재야,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아!,” 이렇게 되면 자살 할 가능성이 높게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 성도는 내가 누구냐 라는 문제를 올바로 정립해야 합니다. 내가 누군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지 못하면 삶의 목적과 방향이 올바로 세워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나는 누군가?” 라는 제목으로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누구십니까? 여러분은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이것이 바르게 정립되어 있는 사람은 삶에 활력이 있고 행복한 삶을 이루어 가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이 누군가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거나 잘못 인식되고 있다면 그 사람은 분명 불행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우리를 누구라고 할까요? 수없이 많은 비유를 들어 우리의 정체성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1. 우리는 질그릇과 같다고 합니다.
(7절) “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성경은 우리를 질그릇이라고 표현합니다. 왜 하고 많은 중에 질그릇이라고 표현했을까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볼품이 없습니다.
질그릇은 흙으로 만듭니다. 그것도 고급 흙이 아닌 단순한 질흙으로 만듭니다. 그러기에 수요도 많고 공급도 많습니다. 그리고 모양이 투박하고 볼품이 없습니다.
바로 우리가 그렇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보면 너무 볼품이 없는 그릇입니다. 버림받은 것 같은 느낌을 갖도록 가치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2)깨어지기 쉽습니다.
또 질그릇은 깨어지기 쉽습니다. 한번 놓치면 깨어집니다. 요즘은 기술이 좋아서 잘 깨어지지 않게 만들었으나 옛날 질그릇은 한번 부딪치거나 떨어지면 박살이 납니다. 그래서 사온지 얼마 안 된 그릇도 버릴 때가 많습니다.
우리 사람들도 깨어지기 쉬운 그릇입니다. 육체의 힘이 매우 강한 것 같으나 눈에 보이지 않는 세균에 넘어집니다. 대단한 것 같으나 허약합니다. 또 겉보기에는 매우 단단한 것 같으나 그러나 그 마음은 쉽게 깨어집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3)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창조하실 때 우리 육체는 흙으로 만들어졌고 결국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질그릇입니다. 그래서 무가치하게 보입니다. 흙은 세상에 가장 흔한 요소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가치를 몰라줍니다. 너무 많으면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공급이 희귀하여야 가치가 올라갑니다. 왜 금이 비쌉니까? 금이 세상에 돌 맹이처럼 많으면 아마도 금을 아무도 價値있게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이 그렇습니다. 사람도 적으면 대단히 귀하게 여깁니다. 천연기념물은 많아서 천연기념물인가요? 희귀해서 천연기념물인가요? 희귀해서입니다.
그러나 온 세상이 사람천지 같으나 똑같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 다릅니다. 성격도 생김새도, 능력도 다 다릅니다. 돌아가신 이종돈 목사님이 일란성 쌍둥이입니다. 그 때문에 장례식장에 문상 온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어떤 이는 기절초풍했답니다. 召天했다고 해서 왔는데 옆에 앉아 있으니 얼마나 놀랄 일입니까?
그러기에 우리 모두는 매우 귀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나 같은 존재를 이 세상에 오직 나 하나님 만드셨습니다. 그러기에 “나”라는 존재는 천연기념물입니다.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2. 우리 질그릇 속에는 보배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릇은 속에 담긴 것에 따라 달리 불려집니다. 술이 담겨있으면 술잔, 물이 담겨 있으면 물 컵, 밥이 담겨 있으면 밥그릇,
같은 그릇이라도 담긴 것에 따라 가치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놀라운 보배가 담겨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그 엄청난 보배가 담겨 있습니다. 그 담겨져 있는 것이 누구냐가 중요합니다. 이 보배는 두가지인데 예수 그리스도이며 진리의 복음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비록 질그릇 같은 존재이나 그러나 속에 담긴 보배 때문에 가치가 높아진 질그릇입니다.
그분이 우리 심령 속에 담겨져 있기에 눈에 보이지 않는 놀라운 가치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우리에 보배이신 예수님이 계시기에 주님의 능력도 소유한 자입니다. 그러기에 성도는 겉으로만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한 사람 한사람 심령을 보아야 합니다.
1947년 2월에 사해 서쪽 여리고 남방 14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쿰란 동굴에서 보물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때 한 소년이 잃어버린 산양을 찾기 위하여 절벽에 위치한 자연 동굴에 들어갔습니다. 그 소년은 두려움 때문에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동굴 속으로 돌을 던져 보았다. 그랬더니 무슨 그릇 깨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소년은 이 굴에서 십여 개의 옹기 단지, 곧 큼직한 뚝배기들을 발견하였습니다.
또한 그 속에는 양피지에 글이 쓰여진 두루 마리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유명한 사해 사본(Dead Sea Scrollsa)의 첫 발견입니다. 사해문서는 기원전 2세기경에 베껴진 성경 사본으로서 이사야서, 시편 등이 들어 있는 획기적인 성경연구 사료입니다. 그 후 고고학자들은 이 근방의 자연동굴 2백 개 이상을 파 헤쳐 찾았습니다.
이것을 처음 발견한 목동 소년은 고물상에게 두루 마리 한 개 당 4만원를 받고 팔아넘기고 횡재를 한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히브리대학교는 이 보물을 고물상으로부터 한 개에 25만 달러, 3억원씩 주고 사 들였습니다.
그 항아리는 가장 값싼 토기였지만 보물이 들어있었으므로, 이 뚝배기는 엄청난 빛과 값어치를 발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비록 우리가 질그릇이지만 우리의 가치는 겉으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고 속에 무엇이 담겨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 속에 보배이신 예수님이 담겨져 있으면 우리는 새로운 존재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보배인 예수님을 담고 있으면서도 그 자신의 가치를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요? 예수님이 어떤 가치를 가진 보배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보배를 담은 자는 대단한 자부심(프라이드)을 가져도 됩니다. 왜요, 예수는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배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후서 6장 9절 이하를 봅니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지 자로다.
왜 바울이 이렇게 당당하게 살 수가 있습니까? 기죽지 아니하고 그렇게 자신 만만하게 살아갈 수가 있습니까? 그 비결이 바로 하나님의 보호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보배 때문에 우리는 이긴다고 하는 것입니다. 8절과 9절을 보세요.
1)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한다 합니다.
우리 주변에 우리를 죄어오는 어려움을 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싸이지를 아니합니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찬송합니다. “내가 확신 아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위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 그 어떤 환경도 나를 이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2)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한답니다.
우리는 답답한 일을 당할 수 있고 곤고한 일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기도했는데 응답이 더디다고 느낄 때 답답합니다. 그래도 낙심하지 않은 것은 내 안에 보배를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속단은 금물입니다. 좋다고 생각했는데 나쁜 일로 결과를 맺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쁘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의 축복으로 끝나는 경우도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사업에 망해서 이제는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는데 오히려 더 좋은 사업장을 주시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내가 병을 얻어 절망했는데 그 병으로 말미암아 인생의 의미를 알게 됩니다. 오히려 신앙이 눈 뜨는 계기가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역전 시키시는데 명수입니다. 모세를 보세요. 하수에 죽었다 싶었는데 공주의 아들이 되죠,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됐다 싶은데 살인자로 쫓기죠, 광야에서 끝났다 싶은데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죠, 요셉도 보세요. 기가 막힙니다. 이 길로 가게 되어서 망했다고 생각했는데 그 길이 축복이 되었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의 길에서 속단은 금물입니다.
3)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한답니다.
우리 주변에 보면 버림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아내에게 버림받고 남편에게 버림 받았다고 합니다. 부모에게 버림을 받고 자녀로부터 버림을 받습니다. 회사로부터 버림을 받고 사회로부터 버림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아니합니다. 그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는 분이 있으니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4)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한답니다.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혹 넘어질지언정 망하지는 않는 다는 것입니다. 영어로 Knock down 과 Knock out 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Knock down 되었다는 것은 다시 일어남을 의미합니다. 다운 당했다 라는 말은 다시 일어나서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넠 아웃은 완전히 쓰러진 것입니다. 더 이상 일어 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망한 것입니다.
기독교인에게 Knock down은 있어도 넉 아웃은 없습니다. 우리는 결코 쓰러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기독교인은 “망했다”라는 말을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이런 능력이 있는 것은 우리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 속에 담겨진 예수님이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권위를 부여하고 우리에게 능력을 부여하기 때문입니다.
3. 이 보배를 전달해야 할 필요성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10절)
세상보배는 혼자 가지고 있어야만 가치가 인정되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우리 속에 있는 보배는 나누면 나눌수록 더욱 빛을 발하고 효력을 발휘합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보람은 그 보배를 열심히 나타내는데 있습니다.
정말 우리 속에 보배가 있다면 우리는 힘이 날 것입니다. 돈을 십 만원씩만 담아도 그것 나누어주라면 피곤한줄 모르고 나눌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보배를 소유하였는데 어찌 전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난리를 쳐도 그 보배의 가치를 온전히 확신치 못하면 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먼저 보배의 가치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때마다 예수 자랑하며 살아야 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목숨을 걸고 살아야 합니다.
10절을 보세요.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이 복음전파를 위해 예수님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간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복음전파가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복음전파는 세상말로 장난이 아닙니다.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이일을 위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막대한 복을 부어주셨고 지금도 우리를 들어 사용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주업이고 직장이 부업입니다. 할렐루야!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누구십니까?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은 누구십니까? 이것이 바로 세워질 때 우리 인생은 달라질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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