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내심을 받은 사람들 (눅 9:1-6)
어떤 목사님의 이야기가 생각이 납니다.
한 번은 미국에 가려고 비행기를 탔답니다. 가면서 성경을 펴서 읽고 있었답니다. 한 미국 노인이 다가와 말을 걸더랍니다. “Are you a christian?” 그리스도인이냐고 물었다는 겁니다. 이 목사님은 반가운 마음에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I am a pastor.” 목사라고 대답을 했다는 겁니다.
조금 후 이 노인이 다시 와서는 또 이렇게 묻더랍니다. “Are you a real christian?” 진짜 그리스도인이냐고 물었다는 겁니다. 이 목사님은 당황스러웠고, 할 수 없이 “Yes!” 그렇다고 대답했답니다.
비행기 타고 가면서 내내 여러 생각이 마음속에 떠오르더랍니다. 조금 불쾌하기도 했고, 그 노인이 이상하다는 생각도 들었고, 그러면서 부끄러운 마음도 들더랍니다.
그리스도인이냐고 물었는데 자기는 목사라고 답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냐고 물었는데 자기는 그리스도인들을 목양하는 사람들이라고 답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에 관한 생각을 오랫동안 하지 않고 살아왔다는 점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에 관한 생각을 잊어버리고 살아갑니다. 그러면서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한 생각에만 치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역은 감당하면서도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으로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목사요 장로요 사역자이면서도 그리스도인으로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12제자들을 파송하시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본문 1-2를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보내시며” 한 마디로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12 제자를 보내셨다는 말씀입니다.
본문이 포함된 누가복음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이 세 부분으로 구분되어있습니다.
우선 1차 갈릴리 사역은 눅 4장-6장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이 사역을 제자들과의 관계에서 볼 때 제자를 부르시는 일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다음으로 2차 갈릴리 사역은 7장-8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역시 제자들과의 관계에서 볼 때 제자를 훈련해서 세우는 일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리고 3차 갈릴리 사역은 9장에 기록되어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제자들과의 관계에서 볼 때 제자를 보내시는 일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사역을 하시면서 제자들을 택하셔서 부르시고, 훈련하여 세우시고, 그리고 저들을 세상으로 보내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이유도 보내시기 위해서였고, 또한 제자들을 훈련시켜 세우신 이유도 보내시기 위해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제자들은 한 마디로 말하면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예수님의 12 제자들에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닙니다.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 예수 앞에서 훈련 받고 세움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부르신 이유가 보내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세우신 이유도 보내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 모두는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 점을 보다 분명하게 확인시켜주고 있습니다. 우선 요 17:18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보냄을 받은 사람들로 여기고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다음으로 요 20:21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예수님께서 직접 제자들에게 보내신다는 말씀을 분명하게 전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예수님께로부터 세상으로 가라는 명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여기고 계십니다. 또한 우리는 주님께로부터 세상으로 가라고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여러 해 전입니다. 한 청년이 군에 입대하게 됐다고 기도를 받으러 왔습니다. 제가 군대 생활했던 때가 생각이 났습니다. 때가 겨울철로 접어들 때라서 걱정이 됐습니다. 그리고 전방지역으로 입대를 하게 돼서 더욱 걱정이 됐습니다. 그러면서 앞으로 무엇을 위해 기도해 주면 좋겠느냐고 기도제목을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이 뜻밖의 기도부탁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는 군에 선교사로 파송 받아 간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파송기도를 해 달라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군선교사로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제가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야말로 파송기도를 했습니다. 그 후 군입대자들을 위해 기도할 때 파송기도를 하게 됐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우리 가정으로 보내셨다’, ‘주님께서 나를 내 직장과 사업장으로 보내셨다’, ‘주님께서 나를 우리 동네로 보내셨다’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보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파송자의식’입니다. 보내심을 받았다는 생각이 모든 생각의 중심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과 당시 종교지도자들 사이에 차이점들을 여럿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 한 가지를 꼽으라면 바로 이 ‘파송자의식’입니다.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제사장들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자기들이 선택된 사람들이라는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자기들은 남달리 선택받은 사람들이요, 남달리 복을 받은 사람들이요, 남달리 특권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서는 특권의식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대신 파송자의식으로 가득했습니다. 눅 4:43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 15:24를 보면 “예수께서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지칭할 때 여러 곳에서 “나를 보내신 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요4:34; 5:24, 30; 6:39; 7:16,28; 8:16,26,29; 9:4; 12:44,45; 13:20; 15:21; 16:5) 또한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의 관계를 보내신 분과 보내심을 받은 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곳도 여러 곳입니다.(요5:36; 6:57; 7:29; 8:42; 11:42; 17:8,21,23,25).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게 보내심을 받았다는 ‘파송자의식’ 속에 사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주님께서 세상으로 보내신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처럼 파송자의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의 삶
오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간략하게 두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삶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은 우선 세상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합니다.
요 17:14를 보면,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세상이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상은 보내심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을 자기에게 속하게 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내심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에 속하기를 거부하니까 미워한다는 것입니다. 배척하고 핍박하고 박해한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 현대 복음주의 거장 존 스토트는 그의 마지막 책 [제자도]에서 잘 정리해 주고 있습니다.
그는 세상 속에 살아야 하는 제자들이 반드시 피해야 할 점이 두 가지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 하나는 ‘도피주의’입니다. 제자들이 신앙을 지킨다고 세상으로부터 도피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우리를 세상 속에 살게 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순응주의’입니다. 제자들이 세상과 타협하여 순응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세상에 순응하면서 신앙이 오염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속으로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세상과 맞서게 됩니다. 이 때 도피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이 때 타협하고 순응하면 안 됩니다. 당당하게 맞서서 싸워 이겨야 합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세상과 맞서서 싸워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본문 1절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실 때 빈손으로 보내시지 않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저들에게 능력과 권위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은 뒤에 끊임없이 세상과의 영적 싸움이 이어지게 됩니다. 세상은 우리를 자기에게 속하게 하려고 하고, 우리는 세상 속에 있으면서 세상에 속하지 않으려고 하는 영적 싸움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 영적 싸움을 싸울 수 있도록 능력과 권위를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능력과 권위로 세상과 싸워 이겨야 합니다.
출 3장 이후를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애굽으로 보내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중요한 것은 모세가 애굽으로 가기를 두려워했다는 점입니다. 그 이유는 애굽에는 바로가 버티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자기 힘으로는 결코 바로와 맞설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이런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려주셨습니다. 모세가 이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애굽의 바로 앞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지팡이로 애굽의 바로와 맞서서 당당히 이겨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를 세상 속으로 보내실 때 빈손으로 보내시지 않으십니다. 능력과 권위를 주십니다. 모세에게 주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려 보내십니다. 우리가 주님 주시는 능력과 권위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맞서서 싸워야 합니다. 그러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삶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은 무엇보다 보내신 이유를 잘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보내신 이유를 잘 이루어드려야 합니다.
본문 2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보내시며”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신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 속에서 앓는 자를 고치는 일입니다. 하나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 속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일입니다.
마 13:33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가루 서 말 속에 작은 누룩을 넣습니다. 그 누룩이 소리 없이 보이지 않게 서서히 가루 전체를 변화시켜서 부풀게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확산되어 가는지를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작은 누룩과 같은 제자들을 세상 속에 보내십니다. 그리고 저들로 하여금 누룩이 가루 서 말을 변화시키듯 보이지 않게 소리 없이 변화시켜가기를 바라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속에서 누룩처럼 세상을 소리 없이 보이지 않게 조용히 그러나 꾸준히 변화시켜가야 합니다. 도저히 변할 것 같지 않은 어떤 사람을 서서히 그러나 꾸준히 변화시켜가야 합니다. 도저히 변할 것 같지 않은 우리 가정을 서서히 그러나 꾸준히 변화시켜가야 합니다. 도저히 변할 것 같지 않은 우리 일터를 서서히 그러나 꾸준히 변화시켜가야 합니다. 도저히 변할 것 같지 않은 우리나라를 서서히 그러나 꾸준히 변화시켜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사명의식’입니다. 나는 주님께로부터 사명을 받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영국의 철학자 찰스 핸디는 세 종류의 삶의 태도를 비유로 설명한 일이 있습니다.
3명의 벽돌공이 열심히 벽돌을 쌓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표정이 저마다 달랐습니다. 한 사람이 유난히 인상을 찌푸리고 있어서 지나가던 행인이 물었습니다. “당신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보면 모릅니까? 벽돌을 쌓고 있습니다.” 행인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일하고 있는 사람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몰라서 묻습니까? 지금 돈벌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한 사람은 표정이 사뭇 달랐습니다.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습니다. 행인이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지금 아름다운 교회당을 짓고 있는 중입니다.”
그렇습니다. 같은 일을 하더라도 사명의식을 가지고 하는 사람들은 다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머리가 좋은 사람은 열심히 하는 사람을 당해 내지 못하고, 열심히 하는 사람은 사명의식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을 당해내지 못한다.’ 사명의식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그 자신이 행복합니다. 그리고 일의 결과도 다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사명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그 안에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으로서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사명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명의식으로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단지 부르심을 받은 사람, 세우심을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정체성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내심을 받은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선 세상과 맞서 싸워 이겨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추천 설교 > 박봉수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여호와 삼마 (겔 48:30-35) (0) | 2015.11.24 |
---|---|
[스크랩] 거룩한 공교회를 믿습니다. (마 16:15-18) (0) | 2015.11.24 |
[스크랩] 소돔과 고모라를 떠나라 (창 19:12-22) (0) | 2015.11.24 |
[스크랩] 성령을 믿습니다. (행 2:1-4) (0) | 2015.11.24 |
[스크랩] 예수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자 (벧후 3:18) (0) | 2015.11.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