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을 믿습니다.
엡 1:7
막 2:1-12을 보면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쳐주시는 사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한 중풍병자가 친지들의 도움으로 주님 앞으로 나왔습니다. 사람들이 많아 주님 앞으로 나갈 수 없어서 지붕을 뜯어내고 천정으로부터 달아 내리는 극성을 부려가며 주님 앞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도움을 청했습니다. 저들의 간절한 바람은 중풍병을 고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병이 나았다고 말씀하셔야 할 텐데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일까요? 이 사람에게 병을 고쳐주시는 것보다 죄를 사해 주시는 것이 더 시급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에게 중풍병보다 죄가 더 큰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에는 갖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질병과 장애와 같은 육체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생겨난 갈등, 미움, 헤어짐과 같은 관계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상실의 문제가 있습니다. 최선을 다해 추구하던 것을 이루지 못한 실패의 문제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보다 더 근원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영적인 문제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죄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사람들 그 누구도 이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이런 근원적인 문제를 모른다는 점도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이 점을 지적해 주신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의 출발점이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인간의 죄 문제에 주목합니다. 그리고 그 문제 해결에 초점을 맞춥니다. 여기에 기독교와 여타 다른 모든 종교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오늘 기독교인들조차도 죄 문제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깊이를 더 해 가려면 바로 이 죄 문제를 제대로 알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정확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죄란 무엇인가?
우리 기독교는 죄를 두 종류로 구분해서 설명한다. 하나는 원죄요 다른 하나는 자범죄입니다. 다시 말해서 근원적인 죄(Sin)와 파생된 죄들(sins)로 구분해서 설명합니다.
우선 원죄 곧 근원적인 죄를 살펴보겠습니다. 원죄는 간단하게 말해서 하나님께 지은 죄를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지은 죄입니다.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을 보면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의 핵심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은 것입니다. 창 2:17에서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창 3:4에 나오는 대로 결코 죽지 않으리라는 사탄의 말에 속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불순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것입니다. 다시 창세기 3장을 보면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기어이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원죄입니다. 불신앙과 불순종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로 이 원죄가 우리 인생의 근원적인 문제입니다.
그러면 이 원죄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이것도 두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입니다. 창 3장을 보면 저들이 죄를 저지른 뒤에 죄책감에 하나님을 피해 숨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게 되자 그 영혼 깊은 곳에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점점 더 깊이깊이 하나님을 피해 숨었습니다.
그러자 점점 더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항변하면서 하나님의 존재마저 부정하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 반항하고 하나님께 대적하려는 몸부림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더 심각한 것은 하나님 대신 하나님 아닌 것들을 하나님처럼 섬기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영적인 죽음인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께 죄를 저지른 저들에 대해 진노하셨습니다. 그 죄에 대한 책임을 물으셨습니다.
먼저 저들의 삶 속에 고난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 생존을 책임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음세대를 출산하고 양육하는 책임도 지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인생의 모든 고난이 쏟아져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영적 죽음 이후 결국 육적 죽음도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에 인간은 결국 죽음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죽음의 고통도 겪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죽음 뒤에 심판대 앞에 서게 되고 심판을 통해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의 가장 근원적인 문제는 바로 이 원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저지른 인간의 죄 때문에 우리 인생에 모든 문제들이 우리를 괴롭게 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자범죄를 살펴보겠습니다. 이것은 원죄에서 파생된 죄들을 말합니다.
창 3장을 보면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한 뒤에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은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을 신학에서는 ‘타락’(Depravity)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이런 타락한 상태에 대해 성경은 여러 곳에서 자세하게 말씀해 줍니다. 대표적으로 롬 5:12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이 말씀 속에서 두 가지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나는 원죄는 더 이상 아담과 하와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담의 후손이 모두 원죄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원죄의 지배하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원죄 때문에 이 세상에는 수많은 죄들이 생겨나게 됐다는 것입니다. 원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인간들, 하나님의 형상이 훼손된 인간들 저들이 살아가면서 또 다른 수많은 죄들을 지으며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원죄로부터 수많은 죄들이 파생되어 나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죄들을 신학에서는 자범죄라고 부릅니다.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창 3장에서 원죄가 저질러진 뒤, 인간이 수많은 자범죄를 저지르는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예컨대 아담과 하와가 서로 미워하고 원망하며 살아갑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입니다. 그리고 이런 죄들이 점점 늘어나 세상을 가득 채우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인간은 바벨탑을 쌓으며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대신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이라고 섬기게 됩니다. 바로 우상 숭배입니다.
그렇습니다. 원죄가 저질러진 뒤 이 세상에는 갖가지 죄들이 파생되어 저질러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죄악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죄는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게 되었는가?
죄의 용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몫입니다. 인간은 예외 없이 모두가 다 죄 가운데 태어났고, 또 평생을 죄 가운데서 살아갑니다. 구체적으로 인간은 하나님 앞에 죄를 저질렀고, 그리고 세상에 살면서 온갖 죄를 다 저지르며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죄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용서는 죄 지은 인간의 몫일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몫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는가에 대해 여러 곳에서 여러 가지 형태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성삼위 하나님의 관점에서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성부 하나님의 은혜로
엡 1:3절 이하를 보면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를 용서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죄인이지만 그 중에 우리를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 택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아무런 자격도 없지만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를 택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값없이 용서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조건을 붙이시거나 우리에게 어떤 대가를 요구하지 않으신 채 오직 은혜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함으로
출 13:12 이하를 보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에게 구체적으로 용서받을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대속의 길입니다. 사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에 죄지은 사람을 대신해서 제물을 죽게 해서 용서를 받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제사 제도화해서 제물의 피를 흘리게 함으로 용서받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예수님의 피로 우리가 용서를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심으로 우리가 죄를 용서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롬 8:2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성령께서 구체적으로 우리를 죄 가운데서 해방시켜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가 죄 용서를 받게 되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선 성령은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해 주십니다. 행 2:37-38을 보면 성령께서 감동하셔서 우리가 죄 때문에 마음에 찔림을 받게 해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죄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게 해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뿐 아니라 그 죄를 고백하게 해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해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을 믿게 해 주심으로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의 능력 특히 용서의 능력이 우리에게 임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죄의 용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우리를 택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려 대속의 죽음을 죽게 하셨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셔서 예수 믿고 회개하게 하셨습니다. 정말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죄 용서를 받으려면
우선 죄를 깨닫고 회개해야 합니다.
요즘 한일 관계가 최악입니다. 그 이유는 일본의 잘못된 역사의식 때문입니다. 자기들이 일제 강점기 때 우리 민족에게 그토록 참담한 죄를 저질러 놓고도 그것이 죄라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니 진정한 반성과 참회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게다가 남들이 죄라고 하니 그것을 부정하려고 궤변을 늘어놓습니다. 망언을 퍼부어댑니다. 게다가 과거에 그나마 반성했던 것까지도 뒤집으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한일관계를 정상화하자고 성화입니다. 되겠습니까?
저는 우리 안에 저 일본인들의 모습이 있음을 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해놓고도 그것이 죄인 줄 깨닫지 못합니다. 이렇게 저렇게 합리화해서 슬쩍 덮으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고 합니다. 되겠습니까?
또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회개해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회개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죄를 한꺼번에 뭉뚱그려서 회개하려고 합니다. “하나님, 제가 죄인입니다. 제 모든 죄를 다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마치 빨랫감을 한꺼번에 뭉뚱그려서 세탁기에 넣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옷이 깨끗이 빨아지지 않는 것처럼 우리의 구체적인 죄는 용서받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가 저지른 죄에 대해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가 품은 생각에 대해 우리가 한 말에 대해, 그리고 우리가 한 행동에 대해 우리 양심을 불편하게 하실 때 바로 그것이 죄인 줄 깨달아야 합니다. 성령께서 보다 구체적으로 우리의 죄를 지적하시고 책망하실 때 그것이 내가 저지른 죄라는 것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가 저지른 죄에 대해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죄송함을 느끼고 마음 깊이 애통함을 느껴야 합니다. 나아가 하나님 앞에 구체적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죄 용서를 믿고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죄를 용서받는 것만큼 용서받은 이후의 삶이 중요합니다. 죄를 용서받고서 그 이후의 삶이 엉망이면 죄를 용서받은 것을 헛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천문학자였던 코페르니쿠스(Copernicus, Nicolaus)의 묘비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고 합니다.
“나는 바울이 가진 특권을 구하지 않는다.
나는 베드로에게 주신 능력도 구하지 않는다.
나는 다만 십자가에서 강도에게 주신 용서를 원한다.”
그렇습니다.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은 정말 귀한 일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회개를 통해 죄를 용서받았다면 마치 형을 다 마치고 출소한 사람처럼 이제 과거 내가 지었던 죄가 더 이상 나를 괴롭힐 수 없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죄로부터 정말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지었던 죄를 다시 반복해서 짓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용서 받은 죄를 다시 짓는다면 마치 자기가 토한 음식 찌꺼기를 다시 먹는 것과 같은 짓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죄를 반복해서 짓지 않도록 각별히 노력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은 채 살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 원죄로부터 파생된 수많은 죄를 범하여 살아왔습니다. 선을 알면서도 행하지 않고, 그것이 악인 줄 알면서도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죄를 용서받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애통해 하며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회개한 후에는 죄를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믿고 감사하며 죄로부터 자유를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그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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