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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작은 것을 양보하면/창13:1~18/2005년 6월12일

적은 것을 양보하면

창세기13:1~18

2005년 6월 12일 주일낮예배 최일환 목사 설교

13:1 아브람이 애굽에서 나올새 그와 그 아내와 모든 소유며 롯도 함께 하여 남방으로 올라가니

13:2 아브람에게 육축과 은금이 풍부하였더라

13:3 그가 남방에서부터 발행하여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13:4 그가 처음으로 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13:5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13:6 그 땅이 그들의 동거함을 용납지 못하였으니 곧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라

13:7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하였는지라

13:8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13:9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13:10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13:11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13:12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하였고 롯은 평지 성읍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13:13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

13:14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13:15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13:16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13:17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13:18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더라.


설교:

많은 사람이 성경 말씀대로 신앙생활을 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대단한 결단을 하지 않고는 제대로 예수 믿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다르게 생각해 봐야 합니다. 정말 신앙생활이 어려운 것일까요? 정말 하나님이 우리가 실천하기 어려운 것을 요구하시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런데 왜 信仰生活을 제대로 하기가 어려운 것일까요? 여기에는 여러 가지 原因이 있습니다. 그 원인을 다 살펴보기는 어려우나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하나 거론한다면 “욕심” 때문입니다. 


이 慾心, 다른 말로 말하면 貪心, 貪慾이 우리의 신앙생활을 어렵게 하는 것입니다. 이 탐심이 우리를 어떻게 힘들게 하는 것일까요? 탐심은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죄를 범했을 때 우리 속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 탐심은 사단이 준 것으로 인간이 죄를 범하게 만든 원인이기도 합니다. 그 탐심은 우리 속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거룩한 형상을 나타내는 일에 방해꾼 노릇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탐심의 종노릇하지 않고 참된 행복을 누리면서 살 수 있을까요? 성경은 탐심을 물리치라고 요구하셨는데 어떻게 해야 탐심을 물리치고 은혜롭게 살 수 있을까요?


오늘 봉독한 본문의 말씀을 살펴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탐심에서 자유를 누리는 비법”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세상 것에 대한 포기”입니다.

이것을 포기하면 내가 평안해집니다. 이것을 포기하면 내가 자유를 얻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무엇일까요? 


1. 인간관계의 旣得權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롯은 삼촌과 조카의 관계입니다. 롯은 아브라함의 동생 하란의 아들로서 그 아버지 하란은 자기 아버지 데라보다 먼저 죽었습니다. 그러니 큰아버지인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자식처럼 애지중지하며 보살폈고 하나님아 아브라함을 부르시어 가나안땅으로 갈 때 조카 롯을 데리고 갈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은 롯에게 아버지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조카 롯과 아브라함의 관계가 서로 불편한 관계가 되어 버렸습니다. 재산이 너무 많다보니 아브라함의 목자들과 룻의 목자들이 영역다툼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한 지역에서 살림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너무 땅이 비좁아 서로 부딪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양보해야 합니까? 아무래도 롯이 양보해야 정상 아닙니까? “큰아버지, 죄송합니다. 제가 떠나겠습니다. 미안합니다.” 해야 하는데 아브라함이 먼저 그를 불러 제안을 합니다.

“우리는 한 친척이다. 어찌 우리가 싸우겠냐? 그러니 네가 나를 떠나라 네가 왼편을 택하면 내가 오른편을 택하고 네가 오른편을 택하면 내가 왼편을 택하겠다.”    


여기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성숙함을 보게 됩니다. 그는 롯과의 갈등이 생겼을 때 “네가 내게 그럴 수 있냐?” 하면서 어른대접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네가 이제까지 베푼 사랑을 이렇게 갚는 것이냐?” 하면서 원망하거나 불평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참으로 성숙하게 분쟁보다는 양보를 선택하였습니다. 그래서 어찌 보면 아브라함이 바보 같고 어리석은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가 기득권을 포기하고 조카에게 모든 것을 양보하고 떠나보낸 후 그에게 엄청난 복, 눈에 보이지 않으나 어마어마한 복을 그에게 줍니다. 

14절부터 17절까지를 읽어봅시다.

<13:14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13:15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13:16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13:17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할렐루야 


성도 여러분! 현재 눈에 보이는 것만이 복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진짜 복입니다. 환경이 주는 복은 가짜가 많습니다. 속는 것도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진짜입니다. 왜일까요? 하나님만이 복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롯은 눈에 보이는 복, 虛像의 복을 좇아갔으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주시는 약속의 복을 받습니다. 이것이 작은 것을 포기하는 자의 복인 것입니다. 자가가 갖고 있는 기득권을 포기한 아브라함, 그는 엄청난 복을 선물로 받습니다.


그러기에 작은 것 때문에 손해 봤다고 속상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 것은 과감하게 포기하세요. 선배라고 기득권을 주장하셨습니까? 포기하세요. 고참을 무시한다고 속이 상했습니까? 그것도 포기하세요. 내가 어른인데 젊은 것들이 무례하다고 속이 상했습니까? 그것도 포기하세요. 그리고 하나님이 알아주시는 복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게 진짜 복입니다.  


2. 물질에 대한 욕심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財物,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만물이 하나님의 것이고 결국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것을 믿었습니다. 그러기에 재물에 대한 욕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가 애굽에 내려갔다가 나올 때 하나님이 그에게 빈손으로 나오지 않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바로 마음을 움직여 六畜과 銀金을 잔뜩 붙여 주게 했습니다.


문제는 그 재물 때문에 조카와 싸우게 되었습니다. 재물이 끼면 반드시 싸움이 벌어집니다. 그래서 성도 사이에도 돈거래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돈거래 하면 반드시 어려움이 찾아옵니다. 누가 돈을 빌려 달라하면 아예 도와 줄 생각하고 주세요. 契도 하지 마세요. 만약 내게 들키면 그냥 두지 않습니다. 부자간에도 재물 때문에 싸웁니다. 형제간에도 싸웁니다. 심지어는 부부사이도 재물 때문에 싸우고 이혼합니다. 


사람이 재물을 포기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재물이 생명보다 귀하게 여겨집니다. 그래서 목숨 걸고 싸웁니다. 왜 돈 문제 때문에 사람들이 그토록 싸우는 것일까요? 재물에 사람의 행복을 좌우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피터지게 싸웁니다. 재물 때문에 살인이 벌어지고 강도, 도적질이 일어납니다. 이 재물 때문에 정치인들이 정치 인생에 먹칠을 합니다.


아브라함은 그 재물에 대한 탐심을 버렸습니다. 그는 만물은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이 맘만 먹으면 언제든지 소유할 수 있다는 믿었습니다.

이스라엘 땅을 가보면 가나안땅의 동쪽과 서쪽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동쪽은 요단강이 흐르기에 물이 넉넉하고 여호와의 동산 같다고 할 정도로 윤택합니다. 그러나 서쪽은 안 그렇습니다. 그곳은 맨 산이고 물 한 방울 안 납니다. 그러기에 비교가 안 될 정도입니다.


그래도 아브라함은 룻에게 먼저 선택을 하도록 기회를 줍니다.

“네가 좌편을 택하면 나는 우편을 택하고 네가 우편을 택하면 나는 좌편을 택하겠다. 네가 먼저 선택하라.”

룻은 그 제안을 받자마자 싸가지가 없게 요단 들, 동편을 택하여 갑니다. 얼마나 싸가지가 없는 짓입니까? 그래도 아브라함은 한마디도 안합니다. 왜일까요? 그는 재물에 대한 욕심을 포기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롯은 참 이기적인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속만 챙기는 얌체며 배은망덕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늘 현실적이며 욕심이 가득한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아마 여러분 주변에도 이런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얄밉고, 주는 것 없이 밉고, 속된 말로 싸가지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늘 이득을 챙기는 사람이며 절대로 손해를 안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잘되는 것은 아닙니다. 당장은 잘될 것 같고 늘 이익중심으로 살기에 부자가 되어 잘 살 것 같으나 오래가지 못해 롯처럼 다 날리게 됩니다.

잇속을 다 챙겨 요단 들판 소돔 성으로 갔던 롯은 어찌되었습니까? 그는 그곳에서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지고 결국 포로로 잡혀가기도 하고 그 성이 죄악이 관영하여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할 때 아내와 두 딸과 함께 맨손으로 탈출합니다.

그러다 롯의 아내는 소돔 성을 되돌아보다 소금기둥 되어버립니다. 왜 되돌아봤을까요? 그 아까운 재산, 피 땀 흘려 모아놓은 재산이 한꺼번에 날아갑니다. 그러나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그래서 뒤돌아보았습니다. 역시 남자보다는 여자가 탐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또, 소알 성에서 두 딸들이 아버지 롯에게 술을 먹이고 동침하여 딸들에게서 아들을 낳는 비극의 주인공이 됩니다. 그들에게서 난 자식이 하나는 모압 족속의 조상이고 하나는 암몬 족속의 조상이 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과 원수가 되어 늘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족속이 되고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받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눈에 보이는 것이 全部가 아닙니다. 그러기에 물질에 대한 지나친 욕심은 접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포기 되지 않으면 그 돈이 하나님이 됩니다. 돈이 하나님이 되면 그것은 반드시 우리를 고통스럽게 합니다.  그러기에 재물에 대한 탐심을 물리치시고 뛰어 넘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한 단계 높은 복을 주십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땅이 큽니까? 롯이 받은 땅이 큽니까?

“너는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할렐루야!


3. 사람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릇이 큰 사람입니다. 조카가 얌체같이 동쪽을 택하고 갔으면 얼마나 밉겠습니까?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그를 미워하지도 않고 그에게 배은망덕에 대한 원망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무조건 용서합니다. 어디 용서한 것을 볼 수 있는 것일까요?

14장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14장에 보면 그 당시 가나안땅을 차지하고 있던 여러 족속의 왕들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엘람 왕 그돌라오멜이 주변 세왕들과 연합하여 소돔과 고모라 왕 등 5족속 연합군 세력에 공격을 해 왔습니다. 그때 롯이 꼼짝없이 붙들려 갑니다. 가족도 재물도 다 빼앗깁니다. 그런데 그 소식을 들은 아브라함이 자기가 거느리고 있던 318명의 군사를 이끌고 달려갑니다. 그리고는 그 그돌라오멜 연합군대를 쳐 부시고 그 재물과 사람을 되찾아옵니다. 

도대체 어찌된 것입니까? 그렇게 밉게 행동하던 욕심쟁이 롯을 왜 목숨을 걸고 싸워 구해내는 것일까요? 그게 사랑입니다. 어떤 사랑입니까? 容恕를 통한 사랑입니다.

쫄짱 망한 롯, 포로 된 롯, 쌤통 아닙니까? 얼마나 통쾌합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냥 두지 않고 목숨을 걸고 달려가 싸워 그를 되찾아 옵니다. 그게 사랑이고 그게 용서입니다.


그게 주님의 위대한 사랑입니다. 진정한 용서, 이것은 때로는 진 것 같고, 패한 것 같으나, 이것이야 말로 영원한 승리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모습을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작은 용서가 진정한 승리를 가져오고 작은 양보가 하나님을 감동시켜 미처 헤아릴 수 없는 복을 선물로 가져 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작은 양보를 손해로 여기고 있지 않습니까? 그 작은 손해, 그 작은 이익 때문에 속상해 하지 않습니까?

이젠 바뀌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원치 않는 것은 과감하게 양보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약속을 붙드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출처 : 최일환 목사(장안중앙교회)설교 카페
글쓴이 : 최일환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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