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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최일환목사

[스크랩] 아무리 죽고 싶은 환경일지라도/2005년 8월 28일

아무리 죽고 싶은 환경일지라도

창세기39장1절~6절 

2005년 8월 28일 주일 낮예배 최일환 목사 설교

39:1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그를 사니라

39: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39:3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39:4 요셉이 그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으로 가정 총무를 삼고 자기 소유를 다 그 손에 위임하니

39:5 그가 요셉에게 자기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39:6 주인이 그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임하고 자기 식료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하였더라


설교:

믿음의 사람이라고 다 같은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도 그 믿음의 크기에 따라 삶이 天地 차이입니다. 믿음에는 큰 믿음이 있고 적은 믿음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왕 예수를 믿으신다면 큰 믿음의 소유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크기에 따라 하나님이 분명 다르게 대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인물 중 큰 믿음의 사람을 몇 사람 꼽으라 하면 여러분은 누구를 꼽겠습니까? 아브라함, 노아, 이삭 야곱, 모세, 다니엘, 바울... 여러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최 목사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은 요셉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2절에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요셉이 亨通한자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는 사람이 믿음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의 상황을 깊이 생각해 보세요. 요셉은 형들에게 버림을 받아 노예로 팔려가는 신세가 되었고 결국 평생 종으로 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요셉이 처한 환경은 미칠 것만 같은 환경이고 죽고 싶은 환경입니다. 그러나 그 환경과 그 고난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별 문제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이 있는 사람, 즉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은

1. 苦難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함께하는 사람은 어떤 환경이 닥쳐도, 어떤 고난이 닥쳐도 곧바로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깨닫는 사람입니다. 사업에 실패해도, 육체에 병이 들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요셉은 어릴 때 일찍 어머니를 여의었습니다. 어미 없이 17년을 살았습니다. 아버지가 3부인을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이복형들이 10명입니다. 그러기에 아비가 그를 다른 형제들 보다 끔찍하게 여기며 보살폈습니다. 그런데 그 형들이 그것을 시기 질투하여 죽여 버리려고 하다가 노예로 팔아버립니다. 그 상황이 여러분 상황이라면 어찌하시겠습니까? 

아마도 죽어버리자, 하고 자살을 시도하든지, 아니면 생을 포기하고 될 대로 되라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런 상항속에서도 아주 침착하고 담대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한다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면 왜 내가 이런 일을 당하나 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역경 속에서 더 굳게 하나님을 의지하며 믿음 생활을 했습니다.  

본문 3절을 보세요.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3절)고 하였습니다.

애굽 사람 보디발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애굽의 태양신을 믿는 사림입니다.

그런데도 요셉은 그 사람 앞에서 자기가 믿는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는 비록 몸은 애굽에 끌려 왔으나 그곳에서도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한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그 애굽 땅에서도 변함없이 祈禱생활, 禮拜생활을 당당하게 보여주었습니다.

만약 그에게 하나님이 함께 한다는 믿음이 없었다면 그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러기에 불신자 보디발이 그 요셉이 믿는 신을 참신(神)으로 인정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저 사람을 보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


성도 여러분!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을 느끼게 만드는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그러려면 여러분의 삶은 세상 사람의 삶과는 분명 달라야 합니다.

環境이 좀 힘들고 어려워도 그곳에 하나님의 計劃과 뜻이 있음을 알고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주어진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좀 힘들다고 풀이 푹 죽어 있고, 좀 힘들다고 울고불고 죽겠다고 아우성을 치면 어찌 하나님의 사람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苦難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고백했던 다윗처럼 우리에게 역경과 환난, 고난이 닥치더라도 믿음을 갖고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에게는 偶然이 없습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이 허락지 않으면 떨어지지 않습니다.


요셉의 그 고난 때문에 결국 그는 13년 후 애굽의 총리가 되고 그 때문에 부모와 형제를 기근에서 살려 내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 고난 때문에 다른 사람이 함께 복을 받게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정말 힘들고 어려워 죽을 것 같은 환경에 처하신 분이 계십니까? 그때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시고 하나님이 이런 상황 속에서도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갖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는 사람은

2. 꿈을 붙들고 나가는 사람입니다.

  요셉은 꿈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이 完成되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꿈으로 자신의 뜻을 계시 하실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비젼을 주실 때도 꿈을 통해서 주셨습니다. 요셉은 어렸을 때 하나님이 주시는 꿈, 두 가지를 꾸었습니다.


한 번은 요셉이 밭에서 곡식 단을 묶고 있는데 요셉의 곡식 단은 일어서고 다른 형제들의 곡식 단은 요셉의 곡식 단에 둘러서서 요셉의 곡식 단에 절을 하는 꿈을 꾸었습니다.(창 37: 7)

그 꿈은 요셉이 형제들에게 높임을 받게 될 것을 보여준 꿈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요셉이 11번째 아들, 그저 힘없고 어린 아이로 보았습니다. 그러기에 요셉의 꿈 자체를 容納할 수 없었습니다.


또, 한번은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요셉에게 절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 꿈은 요셉이 형제들보다 뛰어나고 그 인물됨이 탁월해서 장차 세계를 움직이게 될 것임을 보여준 꿈이었습니다.

이 꿈은 훗날 요셉이 당시 세계 최강대국 애굽의 국무총리가 됨으로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요셉의 꿈은 단순한 꿈이 아니었습니다. 그 꿈은 요셉 자신의 理想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요셉의 희망이 아니었습니다. 그 꿈은 하나님이 요셉에게 심어 준 未來였습니다.


하나님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밤에 잠자다 주는 꿈은 아니나 예수 안에서 거룩한 비젼을 갖게 하십니다.

빌립보서 2:13을 보세요.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所願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일을 하시는데 어떤 일을 하시느냐 하면 우리 맘속에 소원을 심어 준다는 것입니다. 그 소원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인데 그 소원을 이루며 살다보면 우리가 쓰임 받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도 예수 안에서 거룩한 소원, 하나님이 주시는 그 꿈을 잡아야 합니다.

  

요셉에게 꿈을 심어 주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꿈’과 ‘믿음’은 함께 갑니다. 히11:1절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했습니다. 바라는 것이 곧 꿈이고 비전입니다. Vision이 있다는 것은 곧 그 안에 믿음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꿈이 있는 사람은 기도하게 됩니다.

꿈이 있는 사람은 고난을 이깁니다.

요셉이 그랬습니다. 어린시기. 청소년 시기에 중요한 것은 환경이나 삶의 조건이 아니라 꿈입니다. 어떤 가정에서 성장했느냐가 미래를 결정해 주는 것 아닙니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꿈이 그 사람의 미래를 결정해 줍니다.

그러기에 꿈은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내 버려두지 않습니다. 그 꿈이 그 꿈을 가진 사람을 위대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생애를 쏟아 부을 수 있는 꿈을 가진 사람은 행복합니다.

꿈이 있는 사람은 기도하게 되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게 됩니다.


요셉은 한 순간도 하나님의 약속, 꿈을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죽고 싶을 만큼 어렵고 힘들 때에도 요셉의 마음은 항상 하나님약속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시험에 드는 이유 가운데 가장 많이 차지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무슨 일이든 내 뜻대로 되기를 바라는데 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고, 그렇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몸부림쳐 왔는데 그래 겨우 요거라는 말입니까? 라고 하는데 있습니다.

만약 이런 사람들이 요셉의 경우를 당했다면 아마 그 충격 때문에 쓰러진 사람 많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요셉은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가 든든히 붙잡고 있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꿈,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하나님이 주신 소원을 꿈으로 승화시켜 붙들고 나가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은

3. 자기를 지킬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인생은 어떻게 보면 단순한 경기가 아니라 장애물 경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셉이 처음으로 겪은 장애물은 형들의 미움이었습니다. 그 때 요셉의 나이는 열일곱이었습니다. 그 때 요셉을 미워하던 그의 이복형들이 요셉을 구덩이에 던져 죽이려다가 돈을 받고 애굽에 종으로 팔아 넘겼습니다.

  미움은 먼 곳에 있는 사람 사이에서 생기지 않습니다. 거의 가까운 사람 사이에서 생기게 마련입니다. 심각한 갈등은 언제나 부부나 형제, 또는 일가  친척 간에 많이 생기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교회 안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요셉이 두 번째 격은 장애물은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이었습니다. 여기 오늘 본문 6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요셉은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했습니다. 요셉은 비록 노예 신분이었으나 아주 건강하고 준수하고 지성과 인성이 균형이 잡힌 젊은이로 자라 있었습니다. 주인 보디발이 모든 것을 믿고 요셉에게 맡길 정도로 신실했습니다.


그런데 이 젊고 멋있는 요셉에게 보디발의 아내가 매력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7절을 보세요. “그 후에 그 주인의 처가 요셉에게 눈짓 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

남자들은 여자들이 눈짓할 때 왜 눈짓하는지 잘 봐야 됩니다. 그 여인이 먼저 눈짓하다가 요셉에게 접근했습니다. 이것이 시험입니다.

이 시험은 마귀를 통해 오는데 우리의 본능과 육체적 욕구를 이용해 우리를 집어삼키려고 우는 사자 같이 접근하는 것입니다.


요셉의 경우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이 때 요셉의 나이는 27-8세 정도 되었을 때였습니다. 혈기 왕성한 젊은이였습니다. 그리고 보디발의 아내는 젊고 매력 있는 여자였습니다. 그런데다 주인입니다. 그러니 이 여인의 말을 고분고분 잘 들으면 여러 가지 혜택이 주어질 수도 있었습니다. 반대로 이 여인의 요구를 거절하면 난관에 닥칠 위험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거절하는 쪽을 택했습니다.

이유는 하나님이 보시는 앞에서 죄를 지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9절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이것이 코람데오의 신앙입니다.

코람데오라고 하는 말은 하나님 앞에서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러나 유혹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10절에 그가 날마다 요셉에게 요청했다고 했습니다.

나중에는 11절에 보면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을 다 내보내 놓고 요청을 해 왔다고 했습니다. 그 날 보디발의 아내가 붙잡는 바람에 요셉이 자기의 겉옷을 그 여인의 손에 버려두고 도망을 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여인의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했습니다. 분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요셉을 좋아하던 마음이 증오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이 여인이 자기가 저지른 죄를 요셉에게 뒤집어 씌웠습니다.

 요셉으로서는 자기의 겉옷이 여인의 손에 있었고. 또 하인들이 요셉이 도망 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여인이 그 옷을 요셉이 자기를 겁탈하려한 증거물로 제시할 때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요셉이 꼼짝없이 감옥에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요셉이 그런 기막힌 일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우리 같았으면 혈압이 오르고 잠을 제대로 못 잣을 겁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데 “우째 이런 일이”하고 항변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않았고 사람들에게 복수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다 아시지요” 하고는 감옥에 들어가는 현실을 그냥 그대로 받아 들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요셉과 여전히 함께 하셨습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현실을 너무 힘들어하지 마시고 하나님이 아실 것을 믿고 하나님의 뜻을 찾으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은

4. 섬김의 삶을 살 줄 아는 사람입니다.

 요셉의 애굽에서의 삶은 한마디로 섬기는 삶이었습니다. 본문 4절에 요셉이 섬기는 것을 보고 그 주인이 요셉으로 가정총무를 삼았다고 하였습니다. <요셉이 섬겼더라.>는 말씀이 40장3절에도 나옵니다. 이때는 요셉이 감옥에 들어가 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감옥 안에 들어가서도 사람들을 섬겼습니다.

요셉의 삶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그가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섬겼다고 하는데 있습니다. 사실 내가 어려운데 남을 돕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내 코가 석자인데 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자기도 갇혀 있는데 감옥에 갇혀 있는 또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참된 섬김, 참된 도움은 자신이 남을 도울 수 있는 형편이 되기 때문에 돕고 섬기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성경에서 말씀하는 섬김은 돈이나 건강이 있어서 섬기는 섬김이 아닙니다. 내가 덜 먹으면서 내가 죽어가면서 다른 사람의 아픔을 덜어 주는 섬김입니다.


록펠러는 석유 사업으로 세계 제일의 거부가 된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53세에 불치의 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의사로부터 앞으로 일 년 밖에 더 살지 못한다는 진단이 내려졌습니다. 그 진단이 내려지고 나서부터 록펠러는 우울증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제 얼마 못 살고 죽는다는 생각을 잠시도 떨쳐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은 이런 생각을 떨쳐 버릴 능력이 없습니다.

어느 날 록펠러는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돈이 다 뭐란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사람들이 내가 죽으면 나를 어떻게 평가 할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마침내 새로운 결단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믿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자, 기왕 죽을 바엔 베풀고 죽자! 고 결단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록펠러는 그 엄청난 재산을 나누고 풀기 시작했습니다. 학교에 장학금을 내 놓았습니다. 고아원, 양로원에 후원금을 내 놓았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지금까지 자기가 살아온 삶의 방향이 완전히 바뀌어 버리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 놀라운 것은 전혀 새로운 기쁨을 맛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밝고 시원하고 행복하고 기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살아가는 과정에서 먼저 마음의 병을 고침 받게 되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마음의 병이 낫고 나니까 불치의 병이라던 육신의 병도 언제 나았는지 모르게 나아버렸습니다. 그 후 그는 44년을 더 살았습니다. 97세까지 살 다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성도가 어떤 형태로든 섬기는 삶을 살 때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한다는 생각에서 살다보니 삶이 다르게 되는 것입니다. 1)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고 2)꿈을 가지고 살게 되고 3)자기를 지킬 줄 알며 4)더 나아가 섬기는 자의 삶을 살게 됩니다.


아무리 죽을 것 같은 환경이라도 하나님이 함께하면 길이 열리고 합략하여 선을 이루는 것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출처 : 최일환 목사(장안중앙교회)설교 카페
글쓴이 : 최일환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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