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아침에 있었던 일
본문/ 요 20:1-18
진실을 진실로 믿는다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우선 진실을 왜곡하려는 세력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들에게는 그 진실이 불편한 진실이어서 그렇습니다. 다음으로 진실을 믿지 않으려는 세력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들에게는 그 진실이 믿을 수 없는 진실이어서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는 일은 정말 쉽지 않습니다. 사탄에게는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이 진실이 정말 불편한 진실이어서 사력을 다해 왜곡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탄의 지배하에 있는 자들에게는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이 진실은 정말 믿을 수 없는 진실이어서 믿지 못하도록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진실을 있는 그대로 전하고 또 있는 그대로 믿게 하려고 지난 2000년 동안 역사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진실을 있는 그대로 전하게 하시고 또한 있는 그대로 믿게 하려고 역사하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부활의 진실을 진실로 알리고 진실로 믿게 하시는 하나님의 첫 번째 역사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 부활의 그 아침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역사를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증인의 선택: 막달라 마리아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증인으로 막달라 마리아를 택하셨습니다. 저에게 예수 부활의 진실을 믿게 하시고 또 저를 통해 이 진실을 전하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이야기는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이야기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나아가 막달라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가서 이 사실을 전하는 일로 끝이 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이 진실을 확인하고 전하도록 막달라 마리아를 택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첫 번째 사람이고, 또한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한 첫 번째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필 막달라 마리아였을까요? 그 답을 찾기 위해 먼저 막달라 마리아가 누구인가를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막 16:9을 보면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에 들려 고생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귀신을 쫓아내 주셔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초대교회의 전승에 따르면 이 마리아는 창녀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 믿고 새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 남다른 은혜를 받은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눅 7장을 보면 막달라 마리아는 향유를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자신이 가진 가장 값진 것으로 그 은혜에 감사를 표했던 것입니다. 눅 8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공생애 사역을 하러 다니실 때, 이 막달라 마리아도 따랐고 재정적으로 뒷바라지 했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 받은바 은혜를 갚고자 최선을 다했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막달라 마리아는 끝까지 예수님을 따랐다는 것입니다. 종려주일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예수님을 따랐습니다.(막 15:41) 빌라도 앞에서 군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칠 때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눅 23:21)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그 자리에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고통을 겪으시는 내내 그 자리를 지켰고, 마지막 예수님께서 임종하실 때 지켜보았습니다.(막 15:40)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 장례할 때 거기에 있었습니다.(마 27:61) 그리고 오늘 본문을 보면 안식 후 첫날 새벽 미명에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르기 위해 가장 먼저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사람도 바로 이 막달라 마리아였던 것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을 만난 뒤에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이 예수님의 뒤만을 따랐던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 뿐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받은바 은혜에 감사했기 때문입니다. 남은 생애를 은혜 갚는 삶을 살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직 순전한 마음으로 예수님만을 따르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이 순전한 마음을 택하신 것입니다. 진실을 진실대로 확인하고 또 진실을 진실 그대로 전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이 순전한 마음을 가진 사람뿐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셨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따르며 마음이 복잡했습니다. 그는 이미 많은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은혜를 구했습니다. 그래서 메시야로 등극하실 예수님 때문에 덕을 볼 것을 기대하며 주님을 따랐습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할 예수님 때문에 자신도 피해를 볼 때 두려워서 예수님 곁을 떠났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는 달랐습니다. 늘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이미 받은바 은혜가 크기에 감사하는 마음뿐입니다. 더 이상 다른 은혜를 구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늘 은혜를 갚으려는 마음으로 주님을 따랐습니다.
오늘도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오직 받은바 은혜에 감사하며 예수를 믿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묵묵히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끝까지 주님 곁을 지킬 수가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받을 은혜를 기대하며 예수를 믿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조금만 어려움이 와도 믿음이 흔들립니다. 더 이상 은혜 받을 가능성이 없어 보이면 예수를 떠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받은바 은혜에 감사하고 그 은혜에 감사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귀히 여기십니다. 증인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그래서 더 큰 은혜를 누리게 하십니다.
증거의 제시 1: 빈 무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제일 먼저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있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빈 무덤이 예수 부활의 첫 번째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막달라 마리아가 빈 무덤을 보고 예수님의 부활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 특히 베드로와 요한에게 달려가서 누군가가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서 가져갔다고 말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이야기를 듣고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무덤에 들어가서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진 것을 보았습니다. 한 마디로 빈 무덤을 확인한 것입니다.
본문 9절을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 하더라” 저들이 빈 무덤을 보고도 예수님의 부활을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무덤이 비어있는 것을 보고도 부활하실 것을 여러 차례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해 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무덤이 비어있는 결정적인 증거를 보고도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진실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저들이 왜 빈 무덤을 보고도 예수님의 부활을 알아차리지 못했을까요? 아직 말씀의 사람이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그 말씀이 저들의 인격에 스며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들이 세상을 보는 눈이 변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적절한 비유일지 모르겠습니다만 말씀을 듣는 일은 술을 마시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술을 마시는 사람들 중에 분위기에 취하고 술의 향에 취하려고 마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만 술을 조금 마시면서 즐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또 어떤 사람들은 술에 취하려고 마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술을 자신의 주량 넘게 마십니다. 술기운에 취합니다. 술이 지성과 감성과 의지에 영향을 미칩니다. 사람이 달라집니다. 더 심하면 인사불성이 됩니다. 아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우리가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 그 말씀이 우리의 인격 속에 깊이 스며듭니다. 그래서 말씀의 기운이 우리의 지성과 감성과 의지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가치관이 달라지고, 인생관이 달라지고, 세계관이 달라집니다. 한 마디로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우리가 말씀의 사람이 되어서 세상을 보면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세상이 달라 보입니다. 이렇게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 채로 빈 무덤을 볼 때 예수님의 부활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여러 해 전에 우리교회가 중국 산동신학교를 돕고 있을 때에 근처에 있는 취푸(曲阜)라는 곳을 가보았습니다. 이곳은 공자의 고향입니다. 여기에는 공자의 사당인 공묘(孔廟)의 대성전(大成殿)이 있습니다. 그리고 공자의 후손이 대를 이어 살아온 저택과 관공서 그리고 정원이 모여 있는 공부(孔府)가 있습니다. 그 규모가 거의 황제의 황궁에 맞먹을 정도로 거대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곳에 공자의 묘를 보존해 놓은 공림(孔林)이 있습니다. 이 공림은 공자가 죽은 뒤에 공자의 묘 근처에 나무를 심었고, 역대 황실이 앞을 다투어 공자를 기리면서 그 규모가 커졌습니다. 지금은 나무가 10만 그루가 넘습니다. 그리고 그 넓이가 200만 제곱미터 그러니까 약 60만평이나 됩니다. 예를 들어 숭실대학교 면적이 약 3만평이니까 공림의 면적은 숭실대학교의 20배 정도의 넓이입니다.
공자가 죽은 지 2500년이 지났지만 이 공림에는 지금도 매장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공자의 자손들은 죽으면 이곳에 묻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중심에는 역시 공자의 무덤이 있습니다. 그리고 좌우에는 공자의 제자들의 무덤이 있습니다. 이 공림이 이미 1994년에 유네스코에 의해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있습니다.
저는 이 어마어마한 무덤 군을 보면서 역시 중국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더 중요한 결론을 얻었습니다. “공자의 무덤이 있구나! 공자도 죽었구나! 공자도 위대하지만 그도 인간일 뿐이구나!”
그렇습니다. 공자도 무덤이 있습니다. 공자도 결국 죽었다는 말입니다. 석가도 세계 곳곳에 그 시신의 일부라 할 수 있는 사리를 보관해 놓은 곳이 있습니다. 부처인 석가도 죽었다는 말입니다. 소크라테스도, 진시황도, 역사의 한 페이지를 화려하게 장식했던 영웅호걸도 다 무덤이 있습니다. 그들 모두 다 죽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무덤만은 비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님만 사망권세를 물리치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만이 우리를 사망권세에서 구원해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의 사람이 되어 예수님의 빈 무덤을 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예수님의 구원을 믿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증거의 제시 2: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
오늘 본문을 보면 빈 무덤을 보고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더욱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해 주셨습니다. 바로 막달라 마리아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게 해 주신 것입니다.
본문 11절 이하를 보면 막달라 마리아는 빈 무덤을 보고 베드로와 요한이 집으로 돌아간 뒤에도 예수님의 빈 무덤을 떠나지 않고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입니다.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님의 시신이 뉘었던 곳에 앉아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사들이 막달라 마리아에게 왜 우느냐고 물었습니다. 누군가가 주님을 옮겨다 어디에 두었는지 몰라서 울고 있다고 답했습니다.
그리고 뒤편에서 인기척이 나서 뒤를 돌아보니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계시는데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왜 우느냐 그리고 누구를 찾느냐’ 마리아는 동산지기인줄 알고 당신이 우리 주님을 옮겼으면 어디에 두었는지 말해 두면 자기가 모셔오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마리아야” 마리아가 그 때야 예수님인 줄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랍오니”(선생님)하고 불렀습니다. 저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최초로 만난 것입니다.
이 때 마리아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고 슬피 울던 사람이었습니다. 빈 무덤을 보고 예수님의 시신을 도난당했다고 크게 슬퍼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하셨고, 지금 자기가 그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 기쁨을 무슨 말로 형언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 사건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남은 평생 결코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그 남은 생애를 송두리째 바꿔놓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만큼이나 결정적인 증거가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실제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 40일을 지상에 계시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주셨습니다. 성경에 나온 인물들만 대략 살펴봐도 약 500여명이 넘습니다. 저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것을 직접 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죽으셨던 예수님께서 자기들 앞에 부활하신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저들에게 이보다 더 확실한 부활의 증거가 또 어디 있을까요?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은 사람들의 남은 생애를 송두리째 바꿔놓았습니다. 대표적으로 의심 많던 도마는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난 뒤에 믿음을 회복했습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며 의심을 떨쳐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남은 생애를 예수 부활을 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인도에서 복음을 전하다 순교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우리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셨기 때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뵈올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내신 성령께서 우리에게 영적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볼 수 있게 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확실히 믿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남은 생애가 달라지게 됩니다.
저는 지난 주간에 은퇴집사님이신 이장손 집사님 병원 심방을 다녀왔습니다. 간경화로 오랫동안 고생하셨습니다. 최근에 악화되셔서 병원에 입원하셨는데 담당의사 선생님 말씀이 이제 두 주 남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몇 가지 연명치료에 관한 제안을 하더랍니다.
그런데 이 집사님께서 단호하게 거절하셨다는 것입니다. 지푸라기라고 잡는 심정으로 마지막 진료를 받고자 하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거절하셨다는 것입니다.
제가 왜 그러셨냐고 물었습니다. 집사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를 기다리시는데 뭘 주저하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준비를 다 마쳤는데 무슨 미련을 갖겠습니까?” 놀라운 것은 그 표정입니다. 그렇게 평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얼굴이 그렇게 밝고 또 빛이 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한 가지 기도부탁을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답게 품위있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해 달라고 기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병문안 갔다가 큰 감동과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너무도 자랑스러웠습니다. “역시 우리 상도중앙교회 교인이구나”
그렇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 우리 삶이 달라집니다. 그 어떤 어려움도 당당히 맞설 수 있습니다. 그 어떤 시련에도 물러서거나 포기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기를 바라십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신앙을 갖도록 역사하신 것처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부활신앙을 갖도록 역사하십니다. 그리고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으로 담대하게 살기를 바라십니다. 나아가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신앙을 가진 뒤 부활의 증인의 삶을 살았던 것처럼 우리도 부활의 증인의 삶을 살기를 바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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