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 속에 담긴 주님의 마음
본문/ 빌 2:5-11
오늘 본문 말씀은 5절에서 이렇게 시작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는 권면입니다.
그러면서 6-11절에 그리스도인들이 품어야 할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하신 일을 말씀하고 있지, 정작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은 말씀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왜 그랬을까요? 저는 ‘숨은 그림 찾기’가 생각이 났습니다. 복잡하게 그려 놓은 그림에서 제시된 숨겨진 그림을 찾는 놀이를 말합니다. 이 ‘숨은 그림 찾기’는 주로 신문이나 잡지에 십자말풀이와 함께 실립니다. 사람들이 정신을 집중해서 복잡한 그림 속에서 하나씩 제시된 숨겨진 그림을 찾아갑니다. 그러면서 찾는 즐거움을 느낍니다.
저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우리에게 숨은 그림 찾기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설명해 주고는 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찾아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찾아보라 말씀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면 먼저 사도 바울이 소개하고 있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원래 하나님의 본체셨으나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는 고난을 자초하셨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사람이 되신 후에도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대신 죽으시는 고난을 겪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를 지극히 높이셨다는 것입니다. 그 이름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 되게 하셨고, 모든 무릎을 이 이름에 꿇게 하셨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요약해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은 한 마디로 ‘고난’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셔서 그 고난을 당하셨고,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난은 결국 영광으로 열매를 맺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안에 담겨진 주님의 마음은 무엇일까요? 이런 고난을 겪으시면서 예수님은 어떤 마음을 품고 계셨을까요?
1. 긍휼히 여기는 마음
오늘 본문을 보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하나님이신데 사람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왜 사람이 되셨을까요? 아니 사람이 되셔야 했을까요? 도대체 어떤 마음을 가지셨기에 사람이 되려고 하셨을까요?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힌트를 가르쳐주었습니다. 엡 2:3-5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람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우리가 원래 하나님께 죄를 지었기 때문에 진노의 자녀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향해 진노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면서 긍휼한 마음을 가지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는 마음 때문에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형편을 잘 아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사는 것을 보시고 우리를 향해 진노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바라보시며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을 가지게 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 고난을 자초하시고 사람이 되셔서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바로 그 긍휼히 여기는 마음 때문에
성경 원어인 히브리어로 ‘긍휼’이라는 말은 ‘라함’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라함이라는 말은 다른 뜻으로도 쓰입니다. 바로 ‘창자’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긍휼이라는 말과 창자라는 말은 같은 말의 두 가지 다른 뜻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긍휼이라는 말이 가지는 본래적인 뜻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긍휼이라는 말은 창자가 아플 정도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 말과 비슷한 고사가 있습니다. 바로 단장(斷腸)이라는 말입니다. 중국 진(晉)나라 시절 환온이 촉 땅을 정벌하기 위해 군사를 배에 태워 양자강의 삼협을 통과할 때의 일입니다.
부하 하나가 원숭이 새끼 한 마리를 붙잡아서 배에 실었습니다. 그런데 어미가 슬피 울면서 강가를 따라 배가 가는 곳을 따라오는 것입니다. 무려 100리가 넘는 곳까지 따라왔습니다. 배가 강기슭에 도착하자 어미 원숭이가 배에 뛰어올랐는데 바로 죽고 말았습니다. 그 원숭이의 배를 갈라 보니 너무 새끼를 향한 긍휼한 마음에 창자가 토막토막 끊어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장의 아픔이라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주님께서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보시며 긍휼한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불쌍한 마음에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느끼셨기에 인간이 되셔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내려다보시면서 긍휼히 여기는 마음에 아파하십니다. 우리가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서 쩔쩔매는 모습을 보시며 긍휼히 여기는 마음에 아파하십니다.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모습을 보시며 긍휼히 여기는 마음에 아파하십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시험에 들어 헤매는 모습을 보시며 긍휼히 여기는 마음에 아파하십니다. 우리가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힘겹지만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시며 긍휼히 여기는 마음에 아파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주님의 마음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2. 공감하는 마음
오늘 본문을 보면 7-8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원래 하나님이셨던 분이 사람이 되셔서 사람으로 사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으로서 저 하늘에서 우리 사람을 굽어 살피실 때 긍휼한 마음으로 바라 보셨고, 그 긍휼한 마음에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되신 후 사람으로 사시면서 사람들이 겪는 인생의 갖가지 힘겨운 문제들을 함께 겪으셨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과 공감하시게 되셨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성전 맞은편 감람산 기슭에 독특한 모양으로 지어진 작은 교회당이 하나 서있습니다. 그 교회의 이름이 ‘주님의 눈물’(Dominus Flevit)입니다. 달리 말해보면 그 이름이 ‘주님의 눈물교회’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의 외형이 눈물의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이 교회는 눅 19장 사건을 근거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이 고난주간에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시다가 먼발치에서 예루살렘 성을 보시면서 우셨습니다. 장차 예루살렘 성이 겪게 될 참혹한 시절을 내다보시면서 안타까운 마음에 우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참 많이 우셨습니다. 당신 때문에 우신 것이 아닙니다. 곁에 서 고통당하는 불쌍한 인생들을 지켜보시면서 우신 것입니다. 그 아픔을 알고 그 눈물을 아시기 때문에 우신 것입니다.
저의 집에 아이가 둘이 있습니다. 첫째는 삼십이 됐고, 둘째는 이십대 후반입니다.
벌써 오래 됐습니다. 이 아이들이 사춘기를 보낼 땝니다. 첫째 아이는 언제 사춘기를 보냈는지 모를 정도로 탈 없이 사춘기를 잘 넘겼습니다. 공부도 열심히 했고, 부모 말도 잘 들었습니다. 그래서 사춘기를 힘겹게 보내는 아이들과 그 부모를 머리로는 이해를 해도 마음으로 공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둘째는 달랐습니다. 몸살을 앓으며 사춘기를 보냈습니다. 공부에 손을 놓았습니다.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개구쟁이 짓을 했습니다. 부모 말을 잘 듣지 않습니다. 곁에서 지켜보는 저와 제 아내가 참 많이 힘이 들었습니다. 눈물로 기도도 했습니다. 다행히 하나님의 은혜로 사춘기 이후 제자리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사춘기를 힘겹게 보내는 아이들과 그 부모를 머리로 이해하는 것은 물론이고 마음으로도 공감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런 분들을 보면 눈물이 나고 절실하게 기도를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러셨습니다. 인간이 되셔서 인간이 겪는 그 무거운 짐을 져보시고 또 인간이 겪는 그 고통을 겪으시면서 인간의 연약함을 온 몸으로 아시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공감의 눈물을 흘리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 그 구체적인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 26장을 보면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장면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이 말씀을 자세히 읽다보면 조금 읽기 민망한 부분이 나옵니다.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37-38) 예수님께서 고민하셨고 그 고민이 너무 심하여 죽을 지경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죽을 만큼 심각한 고민을 친히 겪으셨다는 말씀입니다.
또 요 19:28을 보면 “내가 목마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형을 받으시는 동안 견딜 수 없는 육체적 고통에 그리고 감당할 수 없는 갈증에 더 이상 참으시지 못하고 목마르다고 절규하신 것입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 견디기 힘든 육체적인 고통을 친히 겪으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가 겪는 고 슬픔, 그 고통을 다 겪으셨기에 우리를 향해 공감하는 마음을 가지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의 아픔을 아시고, 우리가 고통을 아시고 우리 위해 공감하시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 점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3. 희생하는 마음
오늘 본문 8절을 보면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에 대해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는 사 53:4절 이하에서 이렇게 예언해 놓았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한 마디로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신 것은 바로 우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바로 우리의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이런 예언을 잘 아셨고, 그리고 온 몸으로 이 예언을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최근 복중 아이를 위해 항암치료를 중단하고 죽음을 택한 미국인 엄마의 사랑이 전 세계의 감동을 낳고 있습니다.
지난 3일 CNN의 보도에 따르면 36세의 엘리자베스 조이스는 불임을 무릎 쓰고 항암 치료를 받던 지난해 여름 아이를 가지게 됐습니다. 이것은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조이스는 정말 기뻐했고 남편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조이스는 임신 한 달 만에 허리에 암이 재발해 종양 제거 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후 조이스는 암 전이 여부를 판별하기 위해 전신 스캔을 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아이를 지워야 한다는 의료진의 설명을 듣게 됐습니다.
생사의 기로에서 고민하던 조이스는 결국 자신의 목숨이 아닌 아이의 생명을 택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암 치료를 중단했습니다. 그러자 임신 3개월째 되면서 암이 퍼지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폐에도 종양이 생겨 숨쉬기조차 힘겨운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아기를 지키려고 노력해 출산 예정일을 두 달 앞두고 인공분만으로 딸 릴리를 얻었습니다. 그 사이 조이스의 암은 심장과 뼈까지 전이돼 더는 손 쓸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결국 출산 6주 후 조이스는 딸을 안은 남편의 곁에서 조용히 숨을 거뒀습니다. 지켜보던 남편 맥스는 "삶에 대한 아내의 낙관적 태도와 용기는 모든 이에게 희망을 안겨줬다"고 눈물로 지켜본 소감을 피력했습니다.
정말 위대한 희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과연 우리는 저렇게 할 수 있을까요? 오늘 낙태로 셀 수 없는 수많은 생명들이 죽어가고, 자신의 안위를 위해 거침없이 낙태를 자행하는 이런 시대 상황 속에서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뱃속에 어린 생명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던진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요?
이 조이스라는 임산부는 아이를 살리기 위해 암 치료를 포기하면서 온 몸으로 퍼지는 암의 공격을 받아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나중에는 숨조차 쉬기 힘든 고통을 겪었습니다. 게다가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도 이겨내야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희생하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이보다 더합니다. 말씀을 전하시고 표적을 보여주셔도 믿지 않습니다. 지금 자기들의 죄를 위해 고난의 길을 걷고 계신데도 비난하고 조롱합니다. 예수님은 온 마음으로 저들을 용납하셨습니다.
게다가 어떤 이는 예수님을 배반하여 팔아넘깁니다. 또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간계를 꾸미고 엉터리 재판을 강행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를 질러댑니다. 또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십자가 처형을 자행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저들을 위해서도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고난은 이런 거룩한 희생의 마음으로 이루신 일입니다. 우리가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이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오늘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셨습니다. 고난의 그 길을 걷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한 주간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그 모든 이 땅에서의 사역을 마무리하시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 기울이셨습니다. 특히 고난의 쓴 잔을 남김없이 다 마시셨습니다. 그리고 끝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보혈의 피를 남김없이 다 흘려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는 한 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특히 우리를 위한 주님의 마음을 마음 깊이 느끼시는 한 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 우리를 공감해 주시는 마음, 그리고 우리를 위해 당신을 버리시는 그 희생의 마음을 깊이 느끼시고 더욱 주님께 감사하고 더욱 주님을 사랑하는 한 주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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