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를 어떻게 양육할 것인가
본문/ 5:23-24
우리가 예수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인생관도 세계관도 가치관도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특히 자녀관도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서 그 대표적인 예를 볼 수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되 남다르게 아들을 주셨습니다. 나이 75살이 될 때까지 자녀가 없었습니다. 자녀에 대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셔서 그를 통해 큰 민족을 이루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25년이라는 긴 세월을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100세가 되던 때 비로소 아들 이삭을 보내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일로 이삭을 남다르게 생각하게 됐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자기 아들에 대해 생각하는 것과 다른 생각을 하게 됐을 것입니다. 바로 이 아들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보내주신 아주 특별한 선물이라고 생각하게 됐을 것입니다. 어떻게 생겼든지, 어떤 재능이 있든지, 어떤 성품이든지 상관없이 그저 감사할 뿐이었을 것입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신 자녀를 어떻게 남다르게 생각해야 하는가를 보여줍니다. 우리의 자녀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아주 특별한 선물’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녀들을 보내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잘 생겼기 때문에, 공부를 잘하기 때문에, 착하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주셨다는 것을 믿기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자녀들에게 어떤 문제가 있더라도, 자녀들이 공부를 잘 못하더라도, 자녀들이 다른 아이만 못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보내주셨기 때문에 감사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로 남다른 시험을 하셨습니다. 바로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아주 특별한 선물이라는 생각에 자기 생명처럼 귀하게 여기던 아들입니다. 그런데 이 아들을 번제 제물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철저하게 순종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와 이레로 이삭의 번제를 대신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이 사건으로 아들 이삭을 남다르게 보게 됐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자기 자녀들에 대해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생각하게 됐을 것입니다. 바로 이 아이는 나의 아이가 아니고 하나님의 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뜻과 섭리 가운데 이 아이를 통해 놀라운 일을 계획하고 계신 바로 그런 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청지기로서 이 아이를 양육해야 할 사명을 받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을 것입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자녀들과 부모로서 자신이 누구인가를 남다르게 생각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줍니다. 자녀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점입니다. 부모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죽는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부모는 자녀들을 돌봐야 할 청지기라는 점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백성으로 양육해야 할 사명을 받은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자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아주 특별한 선물입니다. 그래서 이 자녀는 더 할 수 없는 축복입니다. 정말 자녀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저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양육해야 할 사명입니다. 우리는 이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존 웨슬리는 우리가 주목할 만한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 세 가지 질문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첫째, 너에게 준 시간을 어떻게 관리했느냐?
둘째, 너에게 준 재산을 어떻게 관리했느냐?
셋째, 너에게 맡긴 자녀를 어떻게 양육했느냐?
사랑하는 여러분! 장차 우리에게 물으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맡기신 우리 자녀를 어떻게 양육했느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대답을 하실 수 있으십니까?
그러면 우리는 자녀들을 어떻게 양육해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아이들을 어떤 모습으로 양육해 가야 할까요?
본문 23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이 말씀에서 우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흠 없게 보전되기를 바란다는 기원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땅을 사는 동안 그 영과 혼과 몸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잘 보전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우리가 우리 자녀들을 양육할 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 우리 자녀들의 영과 혼과 몸을 하나님의 백성답게 잘 양육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 영의 양육
우리가 자녀들을 양육할 때 우선적으로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 바로 영의 양육입니다.
그러면 ‘영’이란 무엇일까요? 구약성경에서는 원어인 히브리어로 ‘루아흐’라고 되어있고, 신약성경에서는 원어인 헬라어로는 ‘프뉴마’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영어에서는 ‘spirit’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영은 한 마디로 우리가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통로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느끼고 하나님과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영적인 창문과 같습니다.
요 4:24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 지니라” 하나님께 예배할 때 우리의 영으로 예배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롬 8:16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의 영과 대화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을 불어넣어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영을 통해 우리와 소통하시고 또 교제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우리 자녀들에게 그들의 영이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도록 양육해야 합니다.
저는 이번 태국선교여행 도중 정말 답답함을 많이 느꼈습니다. 태국어를 전혀 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현지에서 두 마디 ‘사와디 캅’(안녕하십니까?)와 ‘코큰 캅’(감사합니다)를 배웠을 뿐입니다. 태국 목사님들과 함께 차를 타고 시골교회로 가는 도중 대화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가만히 생각을 해 보니 제가 외국어 소통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영어인데 중학교 때부터 수십 년을 배웠지만 그것도 별로 신통치가 않아서 깊은 대화를 하려면 통역이 필요합니다. 다른 하나는 중국어인데 이것은 제대로 배운 일이 없고 독학으로 눈치로 배운 것이 고작입니다. 그래서 가벼운 인사와 대화 정도 밖에는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늘 선교지를 갈 때마다 후회가 막급합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열심히 외국어 공부를 해 놓을 것을...’
그렇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녀들을 양육하되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도록 그 영을 양육해야합니다. 하나님과 대화를 잘 할수 있도록 그 영을 잘 양육해야 합니다.
삼상 3장을 보면 어린 사무엘이 성소에서 자라면서 겪었던 에피소드가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셨는데 사무엘이 ‘내가 여기 있나이다’하면서 대답을 하고는 엘리 제사장에게로 달려갔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줄 몰랐던 것입니다. 이런 일이 세 번이나 반복되었습니다.
이 때 엘리 제사장이 사무엘을 지도해 줍니다.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삼상 3:9) 사무엘이 이 가르침을 받고서야 하나님의 부르심에 제대로 응답할 수 있었습니다. 그 후에는 잘 양육을 받아 위대한 영적 거물로 성장하게 됐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자녀들을 양육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 영의 양육입니다. 그들의 영으로 하나님과 잘 소통할 수 있도록 그 영을 잘 양육해야 합니다. 기도할 줄 아는 자녀들로, 영적인 예배를 드릴 줄 아는 자녀들로 그 영을 잘 양육해야 합니다.
2. 혼의 양육
우리가 자녀들을 양육할 때 다음으로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 바로 혼의 양육입니다.
그러면 ‘혼’이란 무엇일까요? 혼이란 구약성경에서는 원어 히브리어로 ‘네페쉬’라고 하고, 신약성경에서는 원어 헬라어로 ‘프쉬케’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soul’이라는 말로 번역했습니다.
이 혼이란 대체로 성경에서는 사람 자신을 지칭한다. 예컨대 창 2:7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때 생령이 바로 네페쉬 곧 혼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혼이란 한 사람 개인의 그 자신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혼이란 생각하고, 느끼고, 결단하는 한 인간의 인격 자체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영, 혼, 몸이 함께 쓰일 때는 자신을 인식하고 자신과 소통하는 통로라는 뜻으로도 쓰입니다.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을 알고 느끼며, 자신과 마음을 나누고 대화할 마음의 창문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혼을 불어넣으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기만의 인생을 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혼을 잘 양육해야 합니다. 자신과 깊은 대화를 통해 자신을 잘 알고,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을 성숙하게 살아가도록 이끌어주어야 합니다.
넬슨 만델라가 직접 쓴 최후의 자서전이 출판되었습니다. 제가 이 책을 주목하게 된 것은 그 책 제목 때문입니다. 바로 책 제목이 [나 자신과의 대화]입니다.
이 책 제목이 말해 주는 것과 같이 만델라가 위대한 생애를 살 수 있었던 비결은 한마디로 자신과의 깊은 대화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책은 인간의 평등과 민주주의를 위해 온 몸을 불살랐던 영웅 만델라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주 평범한 인간 만델라의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27년이라는 기나긴 수감생활 동안 그가 썼던 일기, 편지, 그리고 녹취록이 있는 그대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기록들을 통해서 수감되기 전의 폭력적인 흑인 해방운동가 만델라가 어떻게 용서와 포용을 통한 화해와 평등의 주창자로 변해가게 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비결은 한 마디로 자기 지신과의 진솔한 대화였다는 것입니다.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서 자신의 생각, 자신의 감정, 그리고 자신의 뜻이 무엇인지를 올바로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이해했고, 또 자신을 격려했습니다. 때로는 자신을 질책했고 자신을 고발했습니다. 그러면서 정말 성숙한 인격으로 위대한 인간으로 자라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너무 모릅니다. 자기가 왜 그런 생각을 갖게 됐는지? 자기의 감정은 왜 그런지? 자기는 왜 그렇게 하려고 하는지? 잘 모릅니다. 그래서 자꾸 실수를 저지릅니다. 늘 그 수준에 머물러있습니다. 자기와의 대화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와의 대화 방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양육할 때 혼의 양육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 자신과 대화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차분히 자신을 돌아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잘 알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자신을 용서하게 하고 또 격려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회개하게 해야 합니다.
3. 몸의 양육
우리가 자녀들을 양육할 때 또 하나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 바로 몸의 양육입니다.
그러면 ‘몸’이란 무엇일까요? 몸이란 구약성경에서는 원어 히브리어로 ‘바싸르’라고 하고, 신약성경에서는 원어 헬라어로 ‘소마’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body’라는 말로 번역했습니다.
이 몸이란 한 마디로 세상과 소통하는 통로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내다보고 세상을 향한 자신의 태도를 세워나가는 세상을 향한 창문과 같습니다.
바울은 두 종류의 몸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는 육신을 따르는 몸입니다. 여기서 육신이란 인간의 타락한 본성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육신을 따르는 몸이란 인간의 타락한 본성을 따라서 세상과 소통하는 몸을 말합니다.
이 육신을 따르는 몸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그리고 이생의 자랑에 이끌려 세상과 소통하고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우선 자신의 속사람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솟구쳐 오르는 욕망에 눈이 먼 채로 세상과 소통하고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다음으로 눈앞의 이익에만 사로잡혀서 세상과 소통하고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자기중심적으로 자신만을 높이고자 하는 마음으로 세상과 소통하고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롬 7:24을 보면 이런 육신을 따르는 몸을 ‘사망의 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몸으로는 결코 생명의 역사를 일으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몸으로는 결국 사망의 구렁텅이에 빠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몸으로는 결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영을 따르는 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영이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영을 따르는 몸이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을 따르는 몸을 말합니다.
고전 6:19을 보면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 몸 안에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몸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롬 12:1을 보면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영을 따르는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12:2를 보면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을 따르는 몸이 가져야 할 태도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세상 풍조가 어떤 지에 대한 관심보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살라는 것입니다. 세대를 본받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두 종류의 몸이 있습니다. 하나는 육신을 따르는 몸이고 다른 하나는 영을 따르는 몸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녀들을 양육할 때 우선 육신을 따르는 몸에서 벗어나서 영을 따르는 몸이 되도록 양육해야 합니다. 그리고 영을 따르되 더욱 철저하게 따르는 몸이 되도록 양육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녀는 우리에게 축복입니다. 그래서 그 복을 잘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또한 자녀는 우리에게 사명입니다. 잘 양육해야 하는 사명입니다. 우리가 자녀의 영과 혼과 몸을 잘 양육해 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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