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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박봉수목사

차원이다른소원 잠30 7-9

14. 9. 7.   
                                   
차원이 다른 소원
잠 30:7-9
 
   제가 좋아하는 CCM곡 가운데 한웅제 목사님의 [소원]이라는 곡이 있습니다. 그 가사 내용이 이렇습니다.
 
삶의 작은 일에도 그 맘을 알기를 원하네 
그길 그 좁은 길로 가길 원해 
나의 작음을 알고 그분의 크심을 알면 
소망 그 깊은 길로 가길 원하네 
저 높이 솟은 산이 되기보다 여기 오름직한 동산이 되길 
 가는 길만 비추기보다는 누군가의 길을 비춰준다면 
내가 노래하듯이 또 내가 얘기하듯이 
살길 난 그렇게 죽기 원하네 
삶의 한자리라도 그 분을 닮기 원하네 
사랑 그 높은 길로 가기 원하네 
 
   이 곡은 노래 자체가 아름답고 차분합니다. 그리고 노랫말에 큰 울림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곡을 좋아합니다.
   특히 “저 높이 솟은 산이 되기보다 여기 오름직한 동산이 되길 가는 길만 비추기보다는 누군가의 길을 비춰준다면”이라는 대목이 파도처럼 마음을 뒤흔듭니다. 높이 솟은 산이 되기보다 오름직한 동산이 되고 싶어 하는 소원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자기 가는 앞길만 비추기보다 그 빛을 필요로 하는 누군가의 길을 비춰주고 싶어 하는 소원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노래는 두 가지 소원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는 높아지려는 욕망보다 사람들을 위해 쓰임 받고 싶어하는 소원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자기만을 위하는 이기적인 욕망보다는 남들을 위하는 이타적인 소원입니다. 이런 두 가지 소원은 하나님을 감동시켜드릴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마음에 큰 울림을 남깁니다.
 
   저는 이곡을 들으며 솔로몬이 생각이 났습니다. 왕상 3장을 보면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드리는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뜻밖의 솔로몬의 일천번제를 받으시고는 크게 감동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왕상 3:5을 보면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무슨 소원이든 말하면 그 소원을 들어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솔로몬이 소원으로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지혜를 구했습니다. 왕상 3:11 이하를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든지라 이에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장수하기를 구하지도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 원수의 생명을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으니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네 앞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네 뒤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한 마디로 솔로몬이 구한 소원이 하나님의 마음을 크게 감동시켜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구하지 않은 더 많은 것들을 솔로몬에게 보너스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 속에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께 구하는 소원은 이런 것들이 가장 많다는 것입니다. 첫째가 건강과 장수에 관한 것이고, 둘째가 돈과 부에 관한 것이고 그리고 셋째가 승리하는 것, 높아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소원들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그 소원이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자기가 건강해지고 오래 사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이 피해볼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배려가 없습니다. 자기가 돈을 많이 버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이 큰 손해를 볼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배려가 없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경쟁에서 이기는 도중 진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없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의 소원은 이런 소원들과는 달랐습니다. 특히 백성들의 송사를 다룰 때 잘 판단하고 정확하게 판결을 해서 정의를 세우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행여라도 자기의 잘못된 판단으로 피해자가 생기지 않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판단을 잘하고 판결을 잘 할 수 있게 지혜를 달라는 것입니다.
   이 소원이 다른 소원들과 분명히 다릅니다. 바로 그 소원이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백성들을 위한 것이고 나라를 위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 다른 점이 하나님을 감동시켜드렸습니다. 이 다른 점이 하나님의 놀라게 해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에서 가르쳐주신 말씀이 생각이 납니다. 마 6:33을 보면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우리가 예수 믿고 나면, 우리가 믿음이 깊어지게 되면 우리의 소원이 달라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에 관한 소원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우리의 소원이 차원이 달라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마음에 어떤 소원을 품고 계십니까? 하나님께 어떤 소원을 기도하고 계십니까? 앞에서 말씀드린 나 자신을 위한 소원에 머물러계시지 않습니까? 나의 건강, 나의 부, 나의 승승장구를 위한 소원이라는 차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믿음의 성숙은 그가 어떤 기도를 드리느냐로 가름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는냐 여부는 그가 어떤 소원을 마음속에 품고 있느냐로 가름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구약시대의 지혜자의 기도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아굴이라는 사람이 하나님께 드린 기도입니다.
   7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아굴이 두 가지 하나님께 소원을 아뢰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그 소원이 자기에게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한 번 그 소원이 꼭 이루어지기를 간청드리는 것입니다.
   아굴이 하나님께 아뢰었던 소원 두 가지는 무엇일까요?
 
첫째, 정직입니다.
   8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한 마디로 말하면 정직한 삶을 살게 해 달라는 소원입니다.
   이 소원은 그야말로 차원이 다른 소원입니다. 하나님께 아뢰는 첫 번째 소원이 정직하게 살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네가 가장 바라는 소원 한 가지만 말해 보라고 할 때 아굴이라는 지혜자는 정직을 구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소원이 차원이 다른 소원입니다.
    사회심리학자인 에릭 프롬이란 사람이 1976년에 출판한 책 [소유냐 존재냐](To Have or To Be)는 고전처럼 많이 읽히는 책입니다. 
   이 책은 인간의 존재양식을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소유지향적인 삶(Having mode)입니다. 이런 삶은 우선 자신의 정체성을 소유에서 찾습니다. 자신을 ‘나는 무엇 무엇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라는 식으로 이해하고 설명합니다.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고, 어떤 학위를 가지고 있고, 얼마나 재산을 가지고 있고, 어떤 가족들이 있고... 남보다 많이 가지고 있으면 자신을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남보다 적게 가지고 있으면 자신을 보잘것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많이 가지기 위해서 오늘도 동분서주합니다.
   다른 하나는 존재지향적인 삶(Being mode)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을 여기 존재하는 나에서 찾습니다. 살아있음을 느끼고 감사합니다. 자신을 어떤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식으로 이해하고 설명합니다. 그러면서 다른 존재들도 소중히 여기며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일을 존재 목적으로 삼습니다. 그래서 정직하고 겸손하고 배려하며 살려고 합니다.
   에릭 프롬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유지향적 삶을 살고 있으며, 이 소유지향적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진단했습니다. 그 이유는 소유를 내려놓으면 헤엄을 칠 줄 모르는 사람이 큰 바다에 던져진 느낌을 받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하다못해 구명조끼라고 가지고 있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불안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유지향적이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소원은 무엇인가 없던 것을 가지려는 것이고, 가진 것을 더 가지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아굴은 첫 번째 소원이 정직입니다. 바로 존재 자체에 대한 소원입니다. 그러니까 아굴은 존재지향적 삶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굴은 잘 사는 것을 많은 것을 소유한 것에서 찾지 않았습니다. 대신 잘 사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사는 것에서 찾았습니다. 그래서 아굴의 첫 번째 소원이 바로 정직한 삶을 살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아굴은 왜 정직한 삶을 사는 것을 첫 번째 소원으로 꼽았을까요? 열왕기를 읽어보면 이스라엘의 왕들에 대한 기록이 소상하게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역대 왕들에 대한 평가가 한가지입니다. 여호와 앞에 정직하게 행했느냐 그렇지 못하고 악하게 행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왕이 통치를 잘했느냐 못했느냐는 한 마디로 정직 여부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굴을 비롯하여 구약의 지혜자들은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선적으로 여호와 앞에 정직하게 살게 해 달라고 소원을 빌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그야말로 헛된 것을 쫓고 거짓을 말하는 것이 하나의 거대한 물줄기를 이루고 있습니다. 누구라도 쉽게 거스르기가 힘이 듭니다. 정직하게 살면 손해 보고 정직하게 살면 바보취급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상황에 따라 거짓을 말하는 것이 용납되고, 적당하게 거짓말하는 것이 습관화되어가고 있습니다.
 
   곰탕가게를 운영하시는 어느 교회 집사님 간증을 들었습니다. 곰탕 한 그릇을 끓여도 주님을 대접한다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했다고 합니다. 특히 곰탕은 푹 끓이는 것이기 때문에 원재료가 수입산인지 국내산인지 전문가도 알 수 없답니다. 그리고 거기에 들어가는 고기도 한우인지, 육우인지, 젖소인지 알 수 없답니다. 그래서 원산지를 속이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답니다. 그런데 이 분은 한우 소뼈와 한우 고기만을 고집한답니다. 그리고 모든 식재료들도 최상의 것을 고집한답니다. 세월이 흐르자 정직한 맛을 소비자들이 알게 됐고 지금은 대박집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분 말씀의 핵심은 주님 대접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했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래서 주 앞에 정직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런 소원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장사가 잘 돼서 큰 돈 버는 것이 소원이 아니고, 손님들이 몰려들어서 여기저기 분점 내는 것이 소원이 아니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 앞에 정직하게 살고자 하는 것이 소원이어야 하겠습니다.
 
둘째는 필요 충족입니다.
   8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한 마디로 말하면 소박한 소원입니다. 필요한 것을 채워달라는 소원인 것입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삶이 있습니다. 하나는 필요를 따라 사는 삶입니다. 필요를 따라 사는 삶이란 자기에게 필요한 것만을 채우려는 삶입니다. 이런 삶을 사는 사람들은 우선 자신의 필요를 잘 압니다. 그리고 필요가 채워지면 그것으로 만족할 줄 압니다.
   다른 하나는 욕망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욕망을 따라 사는 삶이란 자기에게 필요한 것 이상의 것을 채우려고 하는 삶입니다. 이런 삶을 사는 사람들은 만족을 할 줄 모릅니다. 끊임없이 일어나는 마음속의 욕망을 따라 살아갑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대부분은 욕망을 따라 사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만족할 줄 모르고 계속 솟구치는 욕망에 채워지지 않는 갈증에 시달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애굽에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주 특별한 양식을 먹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출 16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후 한 달 보름 만에 신광야에 도착했습니다. 저들이 그동안 가지고 온 양식이 다 떨어졌고, 애굽에서 먹던 음식이 그리워졌습니다. 그래서 지도자인 모세와 아론에게 원망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때 저들에게 아주 특별한 양식을 주셨습니다. 바로 ‘만나’입니다. 출 16:4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 만나를 주시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한 마디로 필요한 것만 채우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필요를 따라 사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아굴은 이런 삶을 살려고 애쓰는 가운데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라고 소원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톨스토이의 단편 소설 가운데 [사람에게는 얼마만큼 땅이 필요한가?]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가난한 농부 바흠이라는 사람이 바시키르 촌장으로부터 뜻밖의 제안을 받게 되었습니다. "너는 평생 곁에 있으면서 내가 이 넓은 땅을 가질 수 있게 도와주었다. 이제 너에게 땅을 나누어주겠다. 네가 해가 지기 전까지 달려가서 이 말뚝을 박고 오는 곳까지 너에게 주겠다." 
   이 바흠이라는 사람이 아침 일찍 말뚝을 박기 위해서 초원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오직 땅을 차지하겠다는 욕망에 사로잡혀서 오후가 지나고도 한 나절이 더 지날 때까지 앞으로만 전진했습니다. 어느 순간 돌아갈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해 지기 전에 돌아갈 수 없을 곳까지 온 것입니다. 이 사람이 지나치게 욕심을 부른 것을 후회하면서 달리고 달렸습니다. 짐이 될 것 같아서 조끼고 물통이고 장화고 모두 내버리고 달렸습니다. 바흠은 마지막 죽을 힘을 다해 뛰고 또 뛰어서 가까스로 촌장 앞까지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촌장 앞에서 그는 입에서 피를 토하며 말했습니다. “촌장이시여 이제 이 땅의 절반은 제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촌장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하인을 불러 말했습니다. “좋은 관에 넣어 묻어주어라” 하인은 바흠의 신체 치수대로 210센티의 땅을 팠습니다. 그것이 그가 차지할 수 있었던 땅의 전부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어리석은 인생들이 욕망 따라 사는 삶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차원의 삶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필요를 따라 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이런 소원을 가지고 사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잘 믿으면 우리의 소원이 바뀝니다. 세상 사람들이 마음에 품고 사는 소원을 버릴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가르쳐주시는 소원을 품고 살게 됩니다. 이것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오늘 본문 지혜자 아굴의 소원은 차원이 다른 소원입니다. 정직하게 살게 해 달라는 소원과 필요에 만족하고 필요를 채워달라는 소원입니다. 우리도 이런 소원을 품고 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