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지 말라
눅 7:11-17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기적 이야기입니다. 사실 이 이야기는 죽은 사람을 살리신 놀라운 기적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이런 이야기의 초점은 기적에 맞춰져있습니다. ‘누가 죽었고, 예수님께서 어떻게 살리셨고, 저가 살아난 후 어떻게 되었다’는 식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 이야기의 초점은 기적이 아닌 다른 곳에 모아져있습니다. 기적의 당사자인 죽은 사람이 ‘한 어머니의 독자’라고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어머니를 과부라고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더더욱 13절을 보면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라고 되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을 불쌍히 여기셔서 기적을 통해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이 아닙니다. 죽은 자의 어머니 바로 그 과부를 불쌍히 여기셔서 죽은 그 아들을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본문은 엄밀히 말하면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 이야기라기보다는 아들이 죽어 울고 있는 불쌍한 과부가 주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울고 있는 여인
본문에 나오는 이 여인은 한 마디로 말하면 울고 있는 여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 여인이 울게 된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선 이 여인이 우는 이유는 큰 슬픔 때문입니다. 이 여인은 과부입니다. 과부라는 뜻은 이미 남편을 잃은 큰 슬픔을 겪은 바가 있는 여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에게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또 죽었습니다. 그래서 장례를 치르고 있습니다. 지금 아들의 시신을 발인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슬플까요? 아마도 세상천지에 이런 슬픔을 겪어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고사성어 가운데 ‘곡자이상명’(哭子而喪明)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뜻은 ‘자식의 죽음에 몹시 상심하고 곡(哭)을 하다가 장님이 됐다’는 것입니다.
공자의 제자인 자하라는 사람이 서하에서 위문후의 스승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들이 죽었습니다.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공자의 다른 제자들이 문상하러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자하가 눈이 멀어있었습니다. 아들을 잃은 슬픔을 이기지 못해서 눈까지 멀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곡자이상명 즉 아들을 잃은 슬픔에 눈까지 멀었다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식이 죽으면 얼마나 슬픈지 눈이 멀 것처럼 아픕니다. 우리말에도 부모가 세상을 떠나면 산에 묻지만 자식이 세상을 떠나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식이 죽으면 얼마나 슬픈지 가슴에 묻는다고 했습니다. 오늘의 이 과부는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땅에 묻을 수 없어서 가슴에 묻었습니다. 너무 슬퍼서 눈이 멀 것처럼 마음이 아픕니다.
오늘도 우리 주변에 큰 슬픔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특히 세월호 유가족들의 슬픔은 오늘의 가장 큰 슬픔입니다. 우리도 슬픈데 유가족들과 실종자 가족들의 슬픔은 어떨까요?
단원고 학생들 325명이 수학여행에 나섰습니다. 그 중에 겨우 75명만 구조됐고, 244명은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6명의 학생은 시신도 찾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 부모들은 아이들을 가슴에 묻고 저 진도 앞바다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한 여학생은 넉넉지 못한 가정형편을 생각해서 수학여행을 가지 않으려 했습니다. 어머니가 그럴 수 없어서 간신히 돈을 마련해서 가지 않겠다는 딸을 등 떠밀어 세월호에 태웠습니다. 그 딸이 돌아오지 못해 어머니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저 진도 앞바다를 바라만 보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분들의 저 큰 슬픔이 벌써 우리의 뇌리에서 잊혀져가고 있습니다. 정치권이 이 사건에 개입하면서 이 분들의 슬픔에 대한 관심이 변질되고 있습니다. 진영싸움에 휘말리면서 이분들의 저 큰 슬픔에 대한 관심이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이 분들의 슬픔을 보듬어야 하겠습니다. 이분들을 위해 기도하고, 이분들을 위로하고, 이분들을 도와야 하겠습니다.
다음으로 이 여인이 우는 또 다른 이유는 절망 때문입니다. 이 여인은 과부입니다. 과부란 가장인 남편을 여읜 여인을 말합니다. 당시 가정의 생계는 전적으로 남편의 몫입니다. 아내는 철저하게 남편을 의지하여 생계를 꾸려갔습니다. 그래서 남편을 잃은 과부들은 생계를 이어가기가 막막했습니다.
구약성경을 읽어보면 가장 불쌍한 사람, 공동체가 반드시 돌봐야 할 사람들 중 1순위가 이 과부입니다. 율법으로도 과부를 돌아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추수 때 과부들이 걷어갈 곡식을 남겨놓는 관행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과부들은 공동체의 도움으로 겨우 생계를 이어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과부는 그나마 아들에 희망을 걸고 살아왔습니다. 비록 남편이 세상을 떠나 절망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아들에게 미래의 희망을 걸고 살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마저 세상을 떠나고 만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붙잡고 있었던 희망의 끈마저 끊어지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최근 방송인 송해씨가 한 TV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아들을 잃었던 슬픔을 털어놓은 일이 있습니다. 아들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너무 슬퍼서 견딜 수가 없더랍니다. 그러던 중 혼자서 남산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낭떠러지에서 최악의 선택을 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히 목숨은 끊어지지 않았고 개 짖는 소리에 사람들이 몰려와 구조를 받아 살아나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식을 잃은 슬픔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자기의 마음으로 도저히 알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분은 아들을 잃게 되자 더 이상 삶을 지탱해 갈 힘이 없었던 것입니다. 앞으로 살아갈 희망을 찾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들의 죽음으로 찾아온 그 깊은 절망이 최악의 선택을 하게 했던 것입니다.
오늘도 깊은 절망 때문에 울부짖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더 이상 삶을 지탱해 갈 힘이 없어 울부짖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어디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 없어 울부짖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울지 말라 말씀하시는 예수님
오늘 본문을 보면 이 장례식에 나인성의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습니다. 정말 큰 슬픔을 당한 이 여인을 위로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함께 장례 절차를 따라 청년의 시신을 발인하고 있습니다.
저는 목사이기 때문에 정말 많은 상가를 문상하고 장례를 집례하고 있습니다. 호상일 경우는 편하게 장례 절차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눕니다. 일반적인 장례일 경우는 ‘주 안에서 위로 받으십시오’라고 인사합니다. 그러나 이 과부처럼 너무도 큰 슬픔이 있는 장례일 경우에는 이렇게 인사합니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아마도 이 장례에 참여한 나인성 사람들도 같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이 큰 슬픔 앞에서 그 누구도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1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울지 말라” 그 누구도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말씀하셨습니다. “울지 말라”
어떻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을까요? 예수님만이 이 여인의 눈물을 닦아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이 이 여인을 위로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이 이 여인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실 수 있는 분은 주님뿐입니다. 우리를 위로하실 수 있는 분은 주님뿐입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실 수 있는 분은 주님뿐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이 여인의 슬픔을 위로하시기 위해 하신 일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여인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시기 위해 하신 일을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에서 백부장의 종을 고쳐주시고는 이 나인성으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과 일행이 나인성 성문에 가까이 왔을 때 막 죽은 이 과부의 아들 장례 행렬이 성문을 빠져나오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볼 때 우연한 만남이었을 것입니다.
과연 우연한 만남이었을까요? 성경을 보면 사람들 눈에 우연처럼 보이는 예수님과의 만남 사건들이 여럿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이 우물가에서 예수님과 만나는 사건을 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일부러 다른 때와 달리 사마리아 지역을 지나셨습니다. 마침 그 때 그 여인이 물을 길러 우물에 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그 여인과의 대화를 살펴보면 그 만남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 시간에 맞춰서 수가 성 우물을 찾으셨던 것입니다.
지금 이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하필이면 왜 나인성으로 가셨을까요? 가버나움에서 40킬로나 떨어진 곳입니다. 외진 곳이고 구지 그곳으로 가셔야 할 다른 이유가 없었습니다. 이 여인을 만나시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그것도 발인 도중에 극적으로 만나시기 위해 그 때 그곳으로 그 때 가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부러 이 여인을 만나기 위해 그 먼 길 100리 길을 달려오신 것입니다. 바로 그 때 이 여인을 만나기 위해 그 시간에 맞춰서 달려오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는 우리를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눈물의 골짜기를 지날 때 우리를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오셔서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십니다. 우리가 절망의 골짜기를 지날 때 우리를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오셔서 우리에게 새 희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께 손을 내미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울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이 죽었습니다. 어떻게 울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런데 주님께서 울지 말라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을 살리시는 이적을 베푸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이적은 예외적입니다. 예수님께서 놀라운 이적을 베푸실 때 꼭 확인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당사자나 주변 사람들의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보시고 이적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백부장의 종을 고치시는 사건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소원대로 종을 고쳐주시려고 그 집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이 때 백부장이 예수님께 구지 자기 집까지 자실 것 없고 이 자리에서 명하셔도 종의 병이 나을 것이라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말이 너무 놀라워서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 만한 믿음을 보지 못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네 믿은대로 될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8:13) 그러자 즉시 병이 나았습니다.
또 하나 죽은 자를 살리시는 사건을 들 수 있습니다. 요 11장에는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는 사건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집을 찾으셨습니다. 이미 죽은 나사로는 장사를 지내서 무덤 속에 있었습니다. 집에는 울고 있는 마리아와 마르다만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마르다가 이 말씀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다시 마르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믿느냐!” 예수님께서 이 믿음을 확인하신 후에 나사로의 무덤으로 가셔서 저를 살리시는 놀라운 이적을 베푸셨습니다.
그런데 유독 오늘 본문만은 예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게 네가 믿느냐고 묻지 않으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다른 그 누구의 믿음도 확인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울지 말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답은 한 가지입니다. 13절에 나오는 대로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불쌍히 여기셨다는 말은 원어를 보면 ‘스프랑크니조마이’(splanknizomai)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이 말은 원래 ‘창자까지 뒤틀려지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 말에 단장의 슬픔이라는 말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 과부의 이 큰 슬픔을 보시고는 마치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끼셨습니다. 그리고는 마음 속에 긍휼이 여기는 마음이 주체할 수 없이 솟구쳐 오르셨습니다. 그래서 울고 있는 이 여인에게 차마 네가 믿느냐고 묻지 못하셨습니다. 믿음을 확인하는 일은 뒤로 미루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울지 말라!”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때로는 불쌍히 여기시기에 먼저 은혜부터 베푸시는 때가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믿음이 부족해도 불쌍히 여기시고 먼저 은혜부터 베푸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울지 말라!”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울지 말라!” 주님은 긍휼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죽은 청년을 살리셨고, 그 어머니에게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과부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청년의 시신이 담긴 관으로 다가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관에 손을 대시고는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그러자 관에 누워있던 청년이 일어나 앉았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청년을 어머니 바로 그 과부에게 데려다 주셨습니다.
사실 죽음은 인간의 한계입니다. 이 세상 그 어떤 명의도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없습니다. 그 어떤 첨단과학과 첨단 의술도 일단 죽으면 더 이상 방법이 없어서 손을 뗍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시신에 손을 대셨습니다. 그리고 전능하신 그 능력으로 그 시신을 살려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때로는 우리 인생의 문제가 너무 힘겹고 복잡하고 어려워서 모두가 손을 댈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너도 나도 손을 뗄 수 밖에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다릅니다. 여전히 주님은 손을 대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전능하신 능력으로 그 문제를 풀어주실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인생의 문제를 주님께 맡기십시오. 그리고 주님께서 손을 대 주시기를 기도하십시오. 주님께서 손을 대시면 해결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청년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그 어머니 바로 이 과부에게 넘겨주셨습니다. 비로소 이 여인이 눈물을 그쳤습니다.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었습니다. 감사와 찬양이 가득하게 됐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절망이 변하여 희망이 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우리의 아픔, 우리의 눈물, 우리의 슬픔, 우리의 절망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그 분 앞으로 가십시오. 그리고 그분 앞에서 우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울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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