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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히 쓰는 그릇이 되자 딤후 2:20-21

 
귀히 쓰는 그릇이 되자
딤후 2:20-21
 
   오래 전에 박경리의 소설 [토지]를 읽다가 우리 민족 고유의 그릇들이 정말 다양하게 소개되고 있는 것을 본 일이 있습니다. 특히 요즘은 잊혀져가는 여러 그릇들에 대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사발’이 나옵니다. 사기로 만든 국그릇이나 밥그릇을 말합니다. ‘주발’도 나옵니다. 놋쇠로 만든 밥그릇을 말합니다. ‘중발’도 나옵니다. 작은 주발을 말합니다. ‘종발’도 나옵니다. 중발보다는 작고 종지보다는 조금 넓고 평평한 그릇을 말합니다.
   ‘바리’가 나옵니다. 놋쇠로 만든 여자 밥그릇을 말합니다. ‘쟁첩’도 나옵니다. 반찬을 담는 작은 접시를 말합니다. ‘반병두리’도 나옵니다. 둥글고 바닥이 평평한 놋쇠 그릇으로 국수나 떡국을 담는 그릇을 말합니다. ‘양푼’도 나옵니다. 음식을 담거나 데우는데 쓰는 그릇을 말합니다. 이 외에도 수많은 그릇들이 등장합니다.
   저는 이런 내용을 보면서 우리 조상들이 음식에 맞는 그릇을 정말 다양하게 만들어 사용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음식은 어떤 그릇에 담느냐에 따라서 맛과 멋이 달라진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의 일꾼을 그릇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의 일꾼을 하나님의 밥상에 사용되는 그릇과 같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정말 다양한 재질로 다양한 모양과 다양한 용도의 그릇을 사용한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정말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을 다양한 용도로 사용하고 계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마치 하나님의 밥상에 오른 그릇들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밥상에 다양한 음식을 담아내기 위해 다양한 그릇들이 쓰임을 받고 있는 것처럼 다양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위해 쓰임을 받기 위해 부르심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 주변에 정말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을 두 종류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 스스로 예수님을 찾아 나온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자기 스스로 예수님을 찾아 나온 사람들은 자기를 위해서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자기들의 필요를 채우려고 예수님 곁에 모여 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위해서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명하신 것을 수행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번 중국선교여행 중에 운남성 곤명에 있는 운남신학원을 방문했습니다. 매년 신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특강을 하기 위해 이 신학원을 방문해왔습니다.
  이 신학원은 지금 한창 신축 중이었습니다. 공정이 마무리 단계라서 어수선했습니다. 전교생을 대상으로 강의를 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지 않아서 작은 교실에서 금년 9월에 갓 입학한 신입생을 대상으로 특강을 했습니다.
  금년 입학생이 48명이었습니다. 예년에 비해 학생들이 젊어졌습니다. 대체로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의 학생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운남성에 살고 있는 소수민족 출신들이었습니다. 이족, 리수족, 묘족, 하니족, 나시족, 징포족 등 여러 민족들이었습니다. 이 학생들은 대부분 운남성 가난한 산골마을 출신들이었습니다.
  저는 이 학생들에게 특강을 하면서 한 가지 사실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꾼들을 부르신다는 사실입니다. 민족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사는 모양이 다르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꾼을 택하시고 저들을 부르셔서 저들을 통해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소중해 보였습니다. 장차 하나님을 위해 귀하게 쓰임 받을 사람들이라는 생각에 정성을 다해 특강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하나님의 일꾼을 부르시고 저들을 통해 일하십니다. 저들은 마치 하나님의 밥상에 오른 그릇들처럼 하나님을 위해 쓰임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일꾼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나를 위해 예수를 믿는 자리에 머무르지 말고 주님을 위해 예수를 믿는 자리로 나아오시기 바랍니다. 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예수를 믿는 자리에 머무르지 말고 주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기 위해 예수를 믿는 자리로 나아오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밥상에 오른 그릇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쓰임을 받더라도 기왕이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방에 준비된 그릇들이 많아도 정작 밥상에 오르는 그릇은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밥상에 오른 그릇들이 많아도 정작 중요하게 사용되는 그릇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귀하게 쓰임을 받는 그릇은 따로 있는 것입니다.
   이것처럼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부르심에 응답해서 하나님을 위해 일하기 위해 나선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위해 귀하게 쓰임을 받는 사람들은 따로 있습니다.
   본문은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일꾼들에게 ‘귀히 쓰는 그릇이 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꾼들에게 기왕이면 귀하게 쓰임을 받는 사람이 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들을 귀하게 쓰실까요?
 
우선, 쓰임 받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20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 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릇은 두 가지 기준으로 구별해 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는 재질입니다. 그릇은 금 그릇, 은 그릇, 나무 그릇, 그리고 질  그릇과 같이 재질의 차이로 구별해 볼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용도입니다. 귀하게 쓰이는가 아니면 천하게 쓰이는가 즉 어떻게 쓰이는가로 구별해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분명하게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즉 재질의 차이와 용도의 차이는 다른 것이라는 점입니다. 즉 좋은 재질이라고 늘 귀하게 쓰이고 나쁜 재질이라고 천하게 쓰이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비록 재질은 나쁘지만 귀하게 쓰이는 그릇들이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저희 집 수리를 했습니다. 이사 수준의 집안 정리를 다시 하면서 과감하게 버린 것들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잊고 있었던 중요한 물건들을 새삼 발견한 것들도 많았습니다.
  그 중에 하나 결혼 선물로 받았던 찻잔이 보관되어있었습니다. 30년이 훌쩍 넘은 물건인데 새것처럼 멋진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그리고 저희 집에 있는 다른 그릇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재질로 된 값비싼 찻잔이었습니다. 그래서 버리지 못하고 또 다시 잘 닦아서 잘 모셔두었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가 하루에도 여러 잔의 차를 마시는데 정작 가까이 두고 늘 손때를 묻히며 차를 마시는 잔은 따로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싸고 작고 얇은 유리잔이고, 집에서는 싸고 투박한 머그잔입니다. 정말 값이 나가고 좋은 찻잔은 모셔두고, 싸고 흔한 찻잔은 가까이에 두고 정을 붙여 가며 귀하게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좋은 재질로 된 비싼 그릇이라고 귀하게 쓰임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나쁜 재질로 된 싼 그릇이라고 천하게 쓰임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그 그릇이 어떤 재질이냐 하는 것과 그 그릇이 어떻게 쓰이느냐는 다른 문제라는 점입니다.
 
   사실 오늘의 한국교회의 문제도 따지고 보면 재질 문제와 용도 문제의 혼동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꾼들이 하나님께 어떻게 귀히 쓰임을 받는 그릇이 될 것이냐 하는 문제보다도 어떤 재질의 그릇이 될 것이냐에 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보다 좋은 재질의 그릇이 되는 것이 하나님께 보다 귀히 쓰임을 받는 것인 줄 착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신학교 입학할 때만해도 아직 대형교회가 등장하기 전이었습니다. 이 때만해도 신학생들은 목사는 다 작고 어려운 교회에서 고생하며 헌신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큰 교회든 작은 교회든 어디에서든지 헌신적으로 사역을 하면 그것이 소중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8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소위 ‘교회성장학’이 신학교에 소개되게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교회도 기업처럼 성장시킬 수 있다는 일반경영 논리가 신학생들에게 강력한 메시지로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크게 성장시킨 목회자는 능력있는 목사고 하나님께 귀히 쓰임 받는 목회자라는 등식이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이런 풍조가 신학교에서 시작되어 한국교회에 만연되면서 목회자들은 온통 교회를 성장시키는 일에 매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목회 성패가 곧 교회의 크기로 가름하는 일이 자연스럽게 공감대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교회를 급성장시킨 목회자들이 졸지에 ‘스타 목사’로 부상하게 되고 매스컴의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오늘에 와서 대형교회가 반드시 좋은 교회가 아니라는 점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성장시킨 목회자들이 반드시 하나님께 귀히 쓰임 받는 목사가 아니라는 점도 확인되고 있는 것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회성장만을 추구해 왔던 교회들이 한국사회에 교회다운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성장주의에 물들어 있는 대형교회 목회자들이 목사다운 목사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좋은 재질의 일꾼들을 높이 평가해 왔습니다. 사람들이 볼 때 남다른 능력이 있어서 대형교회를 이룬 일꾼들, 남다른 은사와 학벌이 있는 일꾼들이 훌륭한 일꾼들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이것은 다만 금그릇, 은그릇과 같은 좋은 재질의 그릇일 뿐 입니다.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을 받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철저하게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좋은 재질의 그릇이 반드시 귀히 쓰임 받는 그릇이 아니라는 사실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좋은 재질의 그릇이 되려고 하기 보다는 귀히 쓰임 받는 그릇이 되려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사람들 앞에 어떤 그릇으로 평가 받느냐 보다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쓰임 받느냐를 깊이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다음, 깨끗한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 21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임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하나님의 일꾼이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을 받게 되려면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릇은 깨끗해야 쓰임을 받습니다. 그릇에 음식을 담아 먹는데 그 그릇이 더러우면 그 그릇은 쓸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그 그릇이 금으로 만든 그릇이라고 해도 더러우면 쓸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값비싼 브랜드의 명품 그릇이라고 해도 제대로 씻지 않았다면 그 그릇에 음식을 담아 먹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도 하나님의 일꾼이 깨끗해야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죄로 그 심령이 더러워져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사용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우상숭배로 그 영혼이 오염되어있다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영적인 사역 맡기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세상 풍조에 물들어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영적 사역의 도구로 사용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삼상을 보면 사울 왕 이야기가 자세하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삼상 9:15-16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울이 오기 전날에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알게 하여 이르시되 내일 이 맘 때에 내가 베냐민 땅에서 한 사람을 네게 보내리니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라” 하나님께서 사울을 귀하게 쓰시는 그릇으로 삼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삼상 13:13이하를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라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거늘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것을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사울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였기 때문에 그를 폐하시기로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사울을 대신하여 다른 사람 즉 다윗을 왕으로 삼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사울은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죄를 범했습니다. 세상 욕망에 사로잡혔습니다. 그의 심령이 심각하게 더러워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 사울을 사용하실 수가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버리시고 그를 대신하여 심령이 깨끗하게 준비된 다윗을 택하셔서 쓰시기로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깨끗한 그릇만을 사용하십니다. 비록 귀하게 쓰임을 받던 그릇이라도 더러워지면 더 이상 쓰임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꾼들은 늘 자신을 깨끗하게 관리해야 합니다.
 
  저는 불신가정에서 자라서 어려서부터 제사지내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아버님께서 제사 전날이면 다락에서 제기를 꺼내 오십니다. 대부분 제기는 안성유기로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깨끗하게 보관했지만 제사 전날 아버님께서 그 제기를 친히 닦으셨습니다.
  4,50년 전이어서 요즘처럼 세재나 그릇 닦는 도구들이 변변하지 못했습니다. 짚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양잿물에 짚을 담그시고는 정성을 다해서 닦고 또 닦으셨습니다. 놋그릇이 깨끗한 정도가 아니라 광채까지 났습니다. 아버님 말씀이 조상님께 제사 드리는 일이기 때문에 정성을 다해 제기를 깨끗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늘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일이다. 이보다는 더 해야 하지 않겠는가. 더욱 깨끗한 그릇이 되자’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꾼입니다.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들입니다. 정성을 다해서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관리해야 합니다. 우선 죄를 씻어야 합니다. 성령의 도움으로 철저하게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세상풍조에 오염된 것을 씻어내야 합니다. 우상숭배, 물질만능주의, 인본주의, 세상 향락주의에 물들어 있는 우리의 심령을 정결하게 씻어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하나님을 위해 일할 일꾼을 찾고 계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일꾼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밥상에 오른 그릇이 되시기 바랍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귀히 쓰시는 그릇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쓰임 받는 일에 마음을 집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관리하는 철저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