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리고 어떻게
행 14:19-28
바울의 사역은 크게 네 차례 전도여행으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뒤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방 지역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세 차례는 자유의 몸으로 이방 지역 여러 곳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한 차례는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끌려가면서 그리고 로마에서 죄수로 수감된 채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이런 네 차례 전도여행을 통해 복음이 전 세계로 확장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의 1차 전도 여행 때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바울의 1차 전도여행은 약 2년에 걸쳐 진행됐습니다. 그리고 여행 경로를 살펴보면 파송지인 수리아 안디옥에서 출발하여 구브로 섬을 거쳐서 밤빌리아 지방을 지나 비시디아 지방과 남갈라디아 지역까지 나아갔습니다. 그 여행 거리가 무려 2,240킬로 정도나 되었습니다.
이 1차 전도여행으로 바울은 이방 전도의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방 전도의 구체적인 방법을 체계화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전도여행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역사를 깊이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이 1차 전도여행 중에 있었던 오늘 본문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이 루스드라라는 곳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유대인들이 바울을 쫓아왔습니다. 저들은 이미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복음을 전할 때 바울을 쫓아내는데 앞장섰던 사람들입니다. 저들이 루스드라까지 먼 길을 쫓아온 것입니다.
이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쫓아온 유대인들이 루스드라에 있는 사람들을 선동했습니다. 아마도 바울이 저들이 신봉하고 있던 제우스 종교를 부인하고 무너뜨리려 한다고 했을 것입니다. 화가 난 루스드라 사람들이 돌을 들어 바울을 쳤습니다. 바울은 죽도록 돌로 맞았습니다. 저들은 바울이 죽은 줄 알고 성 밖으로 내 던져버렸습니다.
바울은 이 때 돌에 맞아 거의 죽을 뻔 했습니다. 얼마나 이때의 고통이 컸든지 이 후에 고후 11:25에 이렇게 이 일을 회상하고 있습니다.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 한 번 돌로 맞고”
루스드라에 있던 바울의 제자들 그러니까 바울의 전도를 받아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이 바울을 찾아서 성 밖으로 달려갔습니다. 아마도 바울의 장례라도 치를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바울은 갑작스럽게 스스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일어난 뒤에 다시 돌에 맞았던 루스드라 성으로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돌로 쳐서 죽이려 했던 사람들이 있던 그 성 안으로 다시 들어간 것입니다. 계속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다음날 다시 먼 길을 떠났습니다. 더베라는 곳까지 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계속 복음을 전했습니다. 많은 제자들이 생겨났습니다. 복음의 귀한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 더베에서의 복음 전파 사역을 끝으로 바울은 파송지인 수리아 안디옥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냥 수리아 안디옥으로 가면 될 텐데 지금까지 자기가 복음을 전하며 왔던 곳을 다시 방문합니다. 그곳에 있는 제자들을 돌아보기 위해서입니다. 이제 막 예수를 믿게 된 저들을 다시 믿음 가운데 굳건하게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복음을 전했던 곳을 다시 둘러보고서는 수리아 안디옥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거기서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안디옥 교회의 사역을 수행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2년여의 긴 전도여행을 마쳤습니다. 2,240킬로 그토록 먼 길을 걸어서 때로는 배를 타고 전도여행을 마친 것입니다. 그동안 유대인들의 박해로 큰 고초를 겪었고, 심지어 돌에 맞아 죽을 뻔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도중에 포기하지 않고 전도여행을 마쳤던 것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읽고 묵상하면서 두 가지 질문을 품게 됐습니다. 하나는 도대체 바울은 왜 이토록 고생스러운 전도여행을 떠나야만 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바울은 어떻게 그 모진 박해와 고난을 이겨낼 수 있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왜?
바울은 왜 이토록 힘겨운 전도여행을 떠났을까요? 답은 아주 분명합니다. 바로 ‘주님 때문에’입니다.
사실 바울은 나름대로 큰 야망을 가지고 있던 사람입니다. 다소라는 이방 지역에 이민 가서 살던 사람입니다. 유대교의 종교 지도자가 되기 위해 멀리 예루살렘에 유학을 왔습니다. 유대교 종교지도자가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유대교에 온 몸을 바쳐 헌신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핍박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뒤에 달라졌습니다. 더 이상 그동안 마음속에 품고 있던 그 야망을 향해 달려갈 수가 없었습니다.
우선 주님께서 그 동안 품고 있던 야망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알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야망을 과감하게 던져버렸습니다.
바울은 빌 3:7 이하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렇습니다. 바울은 그동안 소중하게 여기던 것들을 배설물처럼 과감하게 버릴 수 있었기 때문에 전도여행에 나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느 장로님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이분은 오랜 세월 골프에 심취해 왔답니다. 몇 사람 멤버가 있는데 이분들 사이에 나름대로 규약을 정해놓았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는 일 이외에는 골프 약속을 어겨서는 안 된다’그래서 여러 가지 주의 일에 동참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예배까지 빼먹는 일도 있었답니다.
어 느날 말씀 묵상하는 도중에 천둥과 같은 주님의 책망의 음성을 듣게 됐답니다. 그래서 결단하고는 그 모임에서 탈퇴했고 지금은 아예 골프 자체를 끊었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나의 주님으로 모신 뒤에 주를 위해 버리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저마다 형편마다 주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다음으로 바울은 예수를 주님으로 모신 뒤에 더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게 됐습니다. 바로 주님의 사랑의 강권하심을 체험하며 사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후 5:14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도다.” 예수를 주님으로 모신 뒤에 주님을 향한 사랑이 깊어지자 그 사랑이 나를 이런 저런 일을 하도록 강권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난달에 다녀 온 중국 선교여행에서 오랫동안 중국선교 사역을 함께 해 온 나인수 장로님과 주숙명 권사님을 만났습니다. 그동안은 줄곧 미국에서 중국으로 오셔서 중국선교 여행에 합류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몽골의 울란바토르에서 오셨습니다.
이 부부는 오래 전 하나님의 은혜로 미국으로 이민을 가셔서 의사로서 안정된 삶을 살아 오셨습니다. 미국에서 교회봉사도 잘 하셨습니다. 아이들도 믿음으로 다 키우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아버님의 유업을 받들어 중국선교에 최선을 다해 참여해 오셨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기도 하는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셨답니다. 그 음성을 마음에 품고 부부가 기도하면서 깊은 생각을 하게 되셨답니다. 그리고 이렇게 결론을 내리셨답니다. ‘지난 30년 동안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자신을 위해 잘 살 수 있었다. 부모님 잘 부양했고, 아이들도 믿음 안에 잘 키울 수 있었다. 이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앞으로 남은 30년 인생은 주를 위해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의료선교의 뜻을 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셔서 몽골로 가게 되었습니다. 병원도 다 정리했고, 미국에 있는 집도 다 팔고 정리했습니다. 연금 받아서 생활하면서 몽골에서 무료봉사하며 의료선교에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70을 바라보는 나이에 정말 열악한 환경으로 과감하게 뛰어 든 것입니다.
저는 이 두 분을 보면서 큰 감동과 도전을 받았습니다. 누구도 쉽게 할 수 없는 결단을 했습니다. 누구도 쉽게 실천할 수 없는 일을 실천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주님의 사랑이 두 분을 강권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 분이 그 강권하심을 기쁨으로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나의 주님으로 모신다면 주님의 강권하심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시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때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강력하게 명령하시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강권하심에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바울은 어떻게 이토록 엄청난 고난을 견디며 전도여행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을까요?
사실 본문에 나오는 바울의 전도여행을 잘 살펴보면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이 때 바울은 50대 초반의 나이입니다. 집을 나와 2년이라는 긴 세월을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겪어보니까 집 나와 한 달을 여행한다는 것은 감당하기가 힘이 듭니다. 아무리 좋은 숙소에서 좋은 교통시설을 이용하고 좋은 음식을 먹으며 여행을 한다고 해도 한 달은 결코 쉽지 않은 여행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주로 걸었습니다. 열악한 환경에서 여행을 했습니다. 음식이 형편이 없습니다. 때로는 굶기도 했습니다. 잠자리는 제대로 준비되지 못했습니다. 더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박해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거절당하고 쫓겨나고 심지어 돌에 맞아 죽을 뻔하였습니다.
도대체 바울은 어떻게 이렇게 힘든 여행을 견뎌낼 수 있었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주님과 함께’했기 때문입니다.
우선 주님께서는 힘든 여정을 잘 참고 견디게 해 주셨습니다. 바울은 여러차례 전도여행을 하면서 이 점을 뼈저리게 체험했습니다. 그 체험을 고전 10:13에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을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을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주님께서는 우리 인생길에 함께 하시면서 시험을 당할 때에 그 시험을 잘 감당할 수 있게 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잘 견디고 잘 이겨낼 수 있게 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한국교회의 유명한 부흥사 가운데 김익두 목사님이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이분은 깡패 두목출신입니다.
한 번은 이분이 부흥회를 인도하려고 높은 산길을 오르다 잠시 쉬면서 시원한 바람에 땀을 식히고 있었습니다. 그 때 맞은편에서 술 취한 사람 하나가 올라오더니 김익두 목사님을 몰라보고는 시비를 걸더랍니다. 왜 자기보다 먼저 올라왔느냐고 마구잡이로 때리더랍니다. 옛날 같았으면 당장 요절을 냈겠지만 김목사님은 그저 말없이 다 맞았답니다.
때리기를 그치자 김목사님이 “다 때리셨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다 때렸다 왜 더 맞을래?”하더랍니다. 그 때 김익두 목사님이 정색을 하면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예수는 내가 믿고 복은 자네가 받았네 내가 김익두다!” 이 사람이 이제는 죽었구나 하고 싹싹 빌며 어찌할 바를 몰라했습니다.
그 때 김목사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이미 말하지 않았나 내가 예수 믿기 전 이었다면 자네는 여기서 죽었을 거야 내가 예수 믿은 덕에 자네가 살았네” 그러면 “저는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어떻게 하긴 어떻게 해 나를 따라와야지” 이 사람이 김익두목사님이 인도하는 부흥회에 참석하게 됐고, 예수를 잘 믿게 됐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가 시험 당할 때 그 시험을 잘 감내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과 함께 하면서 그 모든 고난도 다 견뎌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죽도록 돌에 맞았습니다. 사람들이 죽은 줄 알고 성 밖으로 끌고 가 던져버렸습니다. 이런 상황은 바울도 견디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을 보면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루스드라의 신자들이 바울의 장례라도 치르려고 성 밖으로 던져진 바울 곁으로 다가갔습니다. 아마도 돌에 맞아 피투성이가 됐을 것입니다. 의식도 없었을 것입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다가가자 바울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상황인가를 살펴보려고 성경 원문을 보았습니다. ‘아나스타스’(Anatstas)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이 말은 갑작스럽게 일어났다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돌에 맞아 중상을 입었습니다. 겉으로 볼 때 죽은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면 살아나도 제자들이 찾아갔을 때 그 자리에서 겨우 눈을 뜨는 정도, 아니면 손을 움직이는 정도, 그렇지 않으면 입을 열어 사람들을 알아보고 말을 하는 정도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벌떡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된 것일까요?
이 단어가 막 6장 사건에도 그대로 쓰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는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집으로 가셨습니다. 죽은 아이의 손을 잡으셨습니다. 그리고 “달리다굼”하고 소리치셨습니다. 그러자 소녀가 바로 일어나서 걸었다는 것입니다. 이 때 소녀가 일어났다고 할 때 바로 이 아나스타스라는 동사가 쓰였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한 가지 사실을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돌에 맞아 죽어있던 바울을 찾아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손을 잡고 외치신 것입니다. “달리다굼” 이 때 바울이 일어나서 걸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하면 때로는 사망의 골짜기에 던져져있을지라도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하면 때로는 눈물의 골짜기에 던져져있을지라도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금년 한해 세월호 문제 때문에 너무도 큰 아픔과 고통을 겪었습니다. 특히 세월호 사망자 유가족들 실종자 가족들 견디기 힘든 시간을 겪었습니다. 아직도 그 깊은 슬픔과 충격의 아픔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분들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일어나야 합니다.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우리 주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손을 내미실 것입니다. 그 손을 잡으십시오. 그리고 그 음성을 들으십시오. “달리다굼” 그 손을 잡을 때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상도중앙의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힘으로 일어날 수 없는 깊은 수렁에 빠져계십니까? 주님의 손을 잡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다시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길을 걸으며 늘 두 가지 질문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는 왜 내가 이 길을 걷고 있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어떻게 이 길을 완주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그 답을 주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나는 주님 때문에 이 길을 걷고 있다’ ‘주님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시기에 나는 이 길을 걷고 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나는 주님과 함께 이 길을 완주할 수 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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