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을 극복하는 비결
마 24:36-44
최근 정부와 몇몇 연구 기관이 우리나라에 대한 장밋빛 전망을 내놓았습니다.
우선 내년에는 소위 ‘30-50’클럽에 가입하게 될 전망이라는 것입니다. 국민소득 3만 불과 인구 5천만 시대를 맞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30-50클럽은 여섯 개 나라만이 가입하고 있어서 우리나라는 일곱 번째로 여기에 가입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2020년에는 국민소득 4만 불을 달성해서 잘하면 일본을 제칠 수도 있다는 전망을 내놓았습니다.
이 전망만 놓고 보면 우리나라는 단군이래로 가장 잘 살게 되고 소위 선진국에 진입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국민은 선진국 국민으로서 남부럽지 않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정말 희망찬 전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 국민들은 이런 희망찬 전망을 피부로 느끼고 있을까요? 아니 이런 희망에 대해 동의할 수 있을까요?
사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은 그 어느 때보다도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절망의 힘겨운 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청년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절망적인 현실 앞에서 탄식하고 있습니다. 저들이 겪고 있는 절망적 상황은 인터넷에 떠도는 유행어에서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삼포세대’라는 말이 있습니다.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세대라는 말입니다. 어쩔 수 없이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란 말입니다.
‘이구백’이란 말도 있습니다. 과거에는 ‘이태백’ 즉 이십대 태반이 백수라는 말이 있었지만 지금은 이십대 90%가 백수라는 말입니다.
‘낙바생’이란 말도 있습니다.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듯 어렵게 취업한 학생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런 말들에서 오늘의 청년들의 삶의 현실이 얼마나 절망적인가를 실감할 수 있게 됩니다.
청년뿐일까요? 우리나라 청소년의 자살률이 세계 1위입니다. 학교폭력도 세계 1위입니다. 청소년 흡연율도 세계 1위입니다. 청소년들이 삶의 현실 역시 절망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노년세대는 어떻습니까? 100세 시대를 맞았는데 노후를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자식들이 부양할 형편이 못됩니다. 국가역시 아직 노인복지를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노인들은 생계를 이어가기 버겁고, 황혼이혼에 고독사 등 절망적인 상황에 내몰리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뉴시니어 세대’라는 말이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베이비붐시대 즉 1955에서 1964년에 출생한 50대들을 말합니다. 서울대 송호근 교수가 쓴 [그들은 소리 내어 울지 않는다]라는 책을 보면 저들의 상황 역시 절망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써 놓았습니다.
애써 이루었으나 대접받지 못하고, 다 주었으나 감사받지 못하는 세대이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느라 자기를 잃어버린 세대가 되었다. 쉬어야 할 때가 되었어도 마음 편히 쉴 수도 없다.
이렇게 볼 때 오늘을 살아가는 이 시대의 사람치고 절망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들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참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절망의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절망이란 무엇일까요? 절망(絶望)이란 그 말 자체의 의미에서 보듯이 ‘희망이 끊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무엇인가에 희망을 걸고 달리고 또 달려왔는데 이루지 못했을 때 느끼는 감정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희망을 가지고 추진해 왔던 일이 실패로 돌아갈 때 절망을 느낍니다. 마지막 한 가지 믿고 의지해 온 것이 사라질 때 절망을 느낍니다. 이것은 특별한 사람들만이 겪는 것이 아니고 인생을 살며 누구나 다 느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덴마크의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키에르케고르는 이 절망을 하나의 ‘병’이라고 진단했습니다. 우리 내면에 생기는 병이라고 진단했습니다. 그런데 이 절망이라는 병을 치료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두면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다고 하여 이 절망을 ‘죽음의 이르는 병’이라고 까지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절망은 우리에게서 희망이 끊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그 어디를 둘러봐도 희망을 가질 수 없을 때 느끼는 마음의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절망이 찾아오면 더 이상 살 의미를 찾지 못하게 됩니다.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그래서 절망은 반드시 치료해야 하는 마음의 병입니다.
문제는 이 절망이라는 병을 우리 스스로 치료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마땅히 이 절망이라는 병을 치료할 방법도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인들도 인생을 살아가면서 순간순간 절망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 안에서 이 절망을 극복해 갑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이 절망을 극복해 왔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종말의 때에 관해 말씀해 주신 예언의 말씀입니다. 마 24:15 이하를 보면 종말의 때에 우리의 상상 이상의 엄청난 환난이 있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환난을 겪게 될 때 우리들은 깊은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는 비결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일까요?
약속에 대한 믿음
예수님께서는 종말에 도저히 상상을 초월하는 환난 중에 쓰나미처럼 절망이 밀려올 때 다시 오마 약속하신 예수님의 약속을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약속을 믿을 때 그 믿음이 새로운 희망을 갖게 해 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절망을 죽음이 이르는 병이라고 진단했던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을 두 가지로 분석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해 온 여인에게 프러포즈를 했는데 싸늘하게 거절당했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 열 번 아니라 스무 번도 더 문을 두드렸는데 거절당했습니다.
이 때 우선 그 남자는 여인에게 거절당했다는 사실 때문에 절망합니다. 이것은 ‘대상에 대한 절망’입니다. 이런 절망은 경증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어렵지 않게 치유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시간이 지나서 이 여인을 잊고 다른 여인을 찾아 나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럴 경우 어떤 사람은 그 여인에게 거절당한 자신 때문에 절망합니다. 내가 이것밖에 안 되나 하는 생각에 깊은 절망을 느낍니다. 이것은 ‘자신에 대한 절망’입니다. 이런 절망은 중증입니다. 이렇게 자신에 대해 절망한 사람은 또 거절당할 것 같은 두려움에 다시는 사랑할 수 없게 됩니다. 이 절망은 정말 치료하기 힘이 듭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참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 절망합니다. 무능하고 연약한 자신에 대해 절망합니다. 아무리 해 봐도 나는 안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그 절망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절망에 사로잡혀 버리고 맙니다.
행 1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뒤의 이야기를 기록해 놓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뒤에 제자들은 모두가 더 감당키 힘든 절망을 맛보았습니다. 그래서 그 절망에 사로잡혀 도망쳐 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에 저들을 다시 만나 주셨습니다. 그리고 승천하시기 전에 저들에게 약속의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행 1:4-5이 이렇게 그 말씀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제자들이 그 약속의 말씀을 들은 뒤에 어떻게 했는지를 역시 행 1:12-13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 쓰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은 3년 동안 함께 하시던 예수님께서 자기들 곁을 떠나 승천하시는 것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만 의지하고 뒤를 따랐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예수님께서 자기들 곁을 떠나신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 의지해 왔는데 그 예수님께서 자기들 곁을 떠나신 것입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한 상태입니다. 점점 박해는 거세집니다. 절망이 거세게 밀려오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저들이 그 절망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는 그 믿음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절망하는 이유는 우리가 맞서고 있는 상황과 사건이 너무도 힘겹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너무도 연약하고 부족함을 뼈저리게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절망을 극복하려면 예수님의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영적 각성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주목할 만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두 사람이 밭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는데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비유의 말씀은 두 사람이 같은 일을 하고 있는데 한 사람은 졸면서 일을 하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깨어서 각성된 상태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깨어서 각성된 상태에서 일을 하고 있는 사람만을 천국으로 인도해 가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매너리즘’(mannerism)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전에는 “틀에 박힌 태도나 방식”이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타성(惰性)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통 ‘오래돼서 굳어진 좋지 않은 버릇이나 오랜 시간 동안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지 않아서 나태하게 굳어진 습성’을 말합니다.
신앙생활도 매너리즘에 빠질 수 있습니다. 반복되는 교회생활, 반복되는 예배, 반복되는 봉사를 이어오는 동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태하게 굳어진 습성들이 하나 둘씩 쌓이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예배에 감격도 사라지고, 교회생활의 기쁨도 사라지고, 신앙생활의 의미조차 사라지게 됩니다.
이렇게 영적 매너리즘에 빠진 사람에게 어느 날 절망이 찾아오면 신앙생활이 송두리째 흔들립니다. 그 절망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깨어있는 사람들은 다릅니다. 절망이 찾아와도 신앙생활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마치 면역력이 강한 사람이 감기에 걸리지 않듯이 절망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새로운 희망을 찾아서 거뜬히 일어날 수 있습니다.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돈을 받는 계산원이 ‘달인’으로 소개된 일이 있습니다. 하루 8시간 똑같은 작업을 반복하는 사람입니다. 가장 따분하고 가장 하기 싫은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너리즘에 빠져 지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달랐습니다. 늘 연구하는 자세를 가졌습니다. 어떻게 하면 빠르게 일을 처리해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줄까를 생각했습니다. 일을 빠르게 처리할 수 있는 비결을 터득해 갔습니다. 예를 들어 10개 또는 20개 동전을 한 번에 잡는다든지, 지나간 차의 뒤처리를 빠르게 한다든지 하는 훈련을 거듭했습니다. 그리고 작게 음악을 들으며 춤을 추듯이 일을 했습니다.
그러자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다른 라인과 비교해 보면 속도가 2배 빨랐습니다. 그리고 늘 표정이 즐겁고 행복해 보여서 차를 탄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주었습니다. 이 사람은 매너리즘에 빠질 상황에서 달인이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매너리즘과 달인은 종이 한 장차이입니다. 누구는 매너리즘에 빠지지만 누구는 달인이 됩니다. 그 차이는 바로 각성 즉 깨어 있느냐 여부에 달려있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있어야 하겠습니다. 늘 새롭게 시도하고, 늘 그 안에서 기쁨을 찾고, 늘 그 안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영적 준비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기 오리라” 한 마디로 영적인 준비를 하고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김장철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김장을 했고, 많은 집에서 김장이 한창입니다. 그런데 오늘에는 김장은 필수가 아니고 선택입니다. 언제든지 김치를 담가 먹을 수가 있고, 또 언제든지 김치를 사먹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옛날에는 겨울철에 먹을 것이 부족했고 채소가 없기 때문에 반드시 김장을 해야만 했습니다. 집집마다 이맘때면 김장하느라 야단입니다. 그 시절에는 김장은 가장 중요한 연례행사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김장을 하고 나면 주부들은 겨울동안 걱정이 없습니다. 든든합니다. 반찬걱정 먹거리 걱정은 안 해도 되기 때문입니다. 어릴 적 생각해보면 저희처럼 가난한 집에는 밥상에는 온통 김치 일색입니다. 총각김치, 김장김치에 김치지게 김치부침개 등등
예수님께서 준비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생각지 않은 때에 고난이 찾아오고, 생각지 않은 때의 절망의 시기가 찾아오고, 생각지 않은 때에 주님께서 재림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김장하듯 영적으로 준비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영적 준비란 무엇을 말할까요? 간단합니다. 우선 말씀준비입니다. 말씀은 영의 양식이기 때문에 우리의 영을 튼튼하게 해 줍니다. 매일 말씀을 묵상하고 매일 말씀을 읽는다면 우리는 어떤 절망이 다가온다고 해도 거뜬히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 기도준비입니다. 기도는 영의 호흡이기 때문에 우리의 영을 힘차게 해 줍니다. 매일 기도의 골방을 찾고, 순간순간 기도에 힘쓴다면 우리는 어떤 절망이 다가와도 더 큰 희망을 찾아 그 절망을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 준비를 보다 철저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충만하고 우리의 영이 더욱 강건해 져야 하겠습니다.
오늘부터 교회력으로 대림절 기간이 시작됩니다. 오늘이 대림절 첫날로 대림절 첫째 주일이고 성탄절 전날까지 대림절이 이어집니다. 기독교는 이 기간 이미 오신 예수님의 은혜를 깊이 감사하고 다시 오실 예수님을 소망 가운데 바라고 기다리며 묵상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희망을 마음에 품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대림절 기간에 주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희망을 품게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동안 여러분을 괴롭히고 힘들게 했던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약속의 말씀을 굳게 믿으십시오. 더욱 영적으로 깨어있으십시오. 그리고 더욱 철저하게 영적으로 준비하십시오. 주님께서 주시는 새 희망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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