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추천 설교/마경훈목사

[스크랩] [20160320]찬송 받으실 그리스도

찬송 받으실 그리스도 21:1-11

설교자: 마경훈 목사(비전교회 담임)

 

오늘은 교회절기상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날을 기념하여 지키는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나귀를 타고 들어가셨습니다. 본문은 그 일을 기록한 것입니다.

오늘 설교는 나귀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주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 모든 것의 진짜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1-3)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전 예수님께서 제자 둘을 맞은 편 마을로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가면 매여 있는 나귀가 있을 텐데 풀어 주님에게로 가져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 무슨 말을 하면 주가 쓰시겠다 하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복음서의 내용을 보면 주님의 제자 둘이 맞은 편 마을로 가서 주님의 말씀대로 매여 있는 나귀를 푸니 나귀 주인이 제자들에게 왜 푸느냐고 물었습니다. 제자들이 주가 쓰시겠다고 하자 나귀 주인은 주님의 말씀대로 나귀를 보내주었습니다.

나귀 주인은 자신이 키우는 나귀를 주님이 쓰시겠다고 하시니 주저하지 않고 내어주었습니다. 나귀 주인은 나귀의 참주인은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신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기초는 자신을 알고 주님을 아는 것입니다. 나는 죄인이고 주님은 죄를 사해주시는 분입니다. 나는 약한 자이고 주님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나는 미련하고 주님은 지식과 지혜의 근본이십니다. 나는 피조물이고 주님은 창조주이십니다. 나는 종이고 주님은 주인이십니다. 나는 병사고 주님은 대장이십니다. 나는 구원 받은 자이고 주님은 구원자이십니다. 이런 관계정립이 확실한 사람이 건강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고, 이런 관계정립이 분명한 사람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이 주님에게서 온 것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욥은 주님이 만물의 주인이시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모든 재산을 잃고, 모든 자식들을 잃게 되는 고난을 당했지만 원망하고 불평하지 않고 주님을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1:21을 보겠습니다.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내 것 같지만 사실은 내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의 것을 맡아서 관리하는 청지기 일뿐입니다. 가족도, 재물도, 건강도, 재능도, 시간도 다 주님이 내게 맡기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것을 맡아서 관리하는 청지기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든지 모든 것의 진짜 주인이신 주님이 내놓으라고 하면 내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만물의 주인이 예수님이시라면 우리가 바라는 모든 복의 근원이 예수님이라는 말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노력과 수고로 원하는 복을 누리려고 합니다. 하지만 시127편을 보면 하나님께서 집을 세우지 않으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사람이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는 것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헛되다고 말씀합니다. 127:1-2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주님이 만물의 주인이시고 모든 것을 주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받은 것에 감사하며 받은 것을 최선을 다해 관리해서 주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4-5)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백마를 타지 않고 나귀를 타셨습니다. 왜 나귀를 타셨을까요? 4절에 보니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5절에서는 주님이 이루신 말씀인 슥 9:9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출생부터 죽음까지 구약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삶을 사셨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주님처럼 자신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살아야 합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 보면, 그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만들었습니다. 6:22입니다.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출애굽기를 보면 모세가 얼마나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에 모세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했다는 말씀이 26번이나 나옵니다. 39:32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이와 같이 성막 곧 회막의 모든 역사를 마치되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다 행하고성막을 세울 때도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행했습니다.

신앙생활의 중요한 원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원리입니다. 원수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원수에 대해서 상식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감정적으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까?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원수를 축복하고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상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원수를 사랑하고 원수를 축복하고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기보다는 우리의 상식과 감정대로 반응할 때가 대부분입니다. 그 이유는 믿음으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상식이나 감정으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고후 5:7을 보겠습니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믿음으로 산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통해서 사시는 것을 말합니다. 2:20을 보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나를 통하여 사시는 것이란 어떤 삶입니까? 자기를 부인하는 생활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려고 할 때 내가 주님과 동일한 뜻을 가진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나는 상식적으로 또 감정적으로 행동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기를 원하십니다. 이때 내 상식과 감정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 주님이 나를 통해서 사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 때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3. 겸손하신 예수 그리스도(5)

예수님은 힘을 상징하는 코끼리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수 있었습니다. 또는 승리를 상징하는 말을 타고 입성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하필이면 힘없는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스가랴는 겸손이라고 답합니다. 9:9을 보겠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스가랴의 예언은 왕이신 주님이 오시는데 주님은 겸손하셔서 나귀를 타신다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겸손과 온유하신 생애를 보내셨습니다. 그분의 겸손은 하나님께는 복종으로 사람들에게는 섬김으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 복종하셨습니다. 심지어 십자가 앞에서도 복종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렸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남 보다 조금만 더 가져도, 조금만 높아져도 교만해 버리는 인간성을 내려놓고, 모든 일에 하나님만을 높이는 겸손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실화입니다. 1천 년 전에 영국에 카뉴트(King Canute, 1016-1035)라는 한 괴짜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절대로 왕관을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신하들이 자기를 지나치게 존경하고 높이는 것이 싫어서였다고 합니다. 어느 날 한번은 이 왕이 신하들에게 왕좌를 해변으로 옮기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리고는 바닷가에 놓인 왕좌에 앉아 수평선을 뚫어지게 응시했습니다. 그러다가 밀려오는 파도를 향하여 파도여, 멈추어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여러 번 명령했지만 밀물은 사정없이 밀려들었고 왕이 앉은자리의 절반까지 물이 차오르더니 급기야 왕은 파도에 밀려 왕좌에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서 왕이 신하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들 모두 똑똑히 보았느냐?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은 하찮은 것이다. 우주를 다스리는 권능은 오직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지할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이날 이후 왕은 왕관을 벗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상에 걸어놓았습니다. 참된 왕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자기는 예수님의 종이라는 고백입니다. 이런 의식이 분명하면 교만할 수 없지요. 이런 의식을 가진 사람은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대통령 재직하던 시절 한 배우가 링컨의 초청으로 백악관에서 잠을 자다가 링컨의 기도소리를 들었습니다. 그의 기도의 내용은 단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하는 기도였고 나머지 한 가지는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기도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겸손의 진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절대 하나님께 사랑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손에 쓰임 받는 도구는 될 수 있어도 하나님과 사랑을 나누는 영적인 연애는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겸손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복을 받습니다. 벧전 5:5입니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이 대적하는 사람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에게 은혜를 받는 사람입니다.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마십시오. 부족하고 모자란 사람에게라도 교만하게 행동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속으로라도 상대를 깔보는 마음을 품지 마십시오. 사람을 우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내게 능력이 있어도 하나님이 도우셔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래야 하나님의 복이 넘칩니다. 22:4을 보겠습니다.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하나님 앞에 겸손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사는 사람이 재물과 영광과 생명의 복을 받는 것입니다.

 

4.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7)

말은 전쟁의 상징입니다. 특히 요한계시록에 보면 거의 말이 전쟁의 상징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평화의 왕으로 오셨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 나귀타셨던 것입니다.

평화는 헬라어로 에이레네입니다. 이 말은 개역개정성경에서 평화, 평강, 화평등으로 해석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하늘에도 평화 땅에도 평화를 이루시는 분입니다. 본문과 동일한 사건을 기록한 눅 19:38을 보겠습니다.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사람들이 찬송하는 내용입니다. 주님이 오시므로 하늘에 평화가 있다는 내용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태어나셨을 때에 들판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 중에 천군천사들의 찬송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2:14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천군천사들은 주님이 오시므로 땅에서 평화가 이루어진다고 찬송했습니다. 주님은 하늘에도 평화, 땅에도 평화를 이루시는 분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평화가 있는 것입니다. 20:19-21입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을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이 너희에게 평강(에이레네)가 있을지어다였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손과 옆구리의 못자국과 창자국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제자들을 만나셔서 첫 번째 하신 말씀이 제자들에게 평화를 비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하신 말씀 역시 평화를 비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정도로 주님은 우리의 평화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우리 주님은 개인에게 내적인 평화를 주시는 분입니다. 14:27을 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주님께서 근심과 두려움을 가진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 주님은 사람 대 사람의 평화도 주시는 분이시고 사람 대 하나님의 평화도 주시는 분이십니다.

2:11-19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무슨 내용이냐면요. 그리스도 밖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은 원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평화로워지며 한 새 사람을 이룬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한 새 사람이 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몸이 되어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진정한 평화는 주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돈이 많은 사람을 부러워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부러워고, 유명한 사람을 부러워합니다. 그런데 진정한 평화는 돈이나 능력 혹은 유명세로 얻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평화는 주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이 한국을 대표하는 유명한 부자를 한 15분 정도 만나본 적이 있답니다. 지금은 돌아가셨습니다만 그 분이 일본에 암 수술하러 가기 직전에 만났답니다. 목사님이 평소에 늘 묻고 싶었던 질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질문 했어요. “회장님! 평안하세요?” 회장님이 목사님을 빤히 쳐다보면서 말했습니다. “평안이라뇨? 요즘은 아침에 눈을 뜨면 초조하고 불안하오. 요즘 아침에 눈을 뜨면 아주 초조하고 불안하오목사님은 그때 그 분이 하나도 부럽지 않더랍니다. 너무 너무 불쌍하게 보이더랍니다. 목사님이 속으로 그랬답니다. 겉으로는 안 그랬지만 속으로. ‘내가 낫다. 훨씬 낫다.’ 돈으로 내적 평안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평안하십시오. 주님으로 충만하십시오. 평안은 환경이나 사람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임재로 오는 것입니다. 평화의 왕이신 주님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5. 찬송의 대상이신 예수 그리스도(9)

사람들은 주님을 환영하면서 주님께 소리 높여서 찬송을 드렸습니다. 찬송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우리 주님은 찬송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1:3에 보면 우리 주님이 찬송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주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시기에 찬송 받으실 분입니다. 2:6에도 보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하나님의 본체시라는 말은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제가 거울 앞에 서 있습니다. 거울에 비치는 제 모습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 그림자가 있습니다. 여러분! 저와 거울에 비치는 제 모습과 그림자 중에 저의 본체는 뭐죠? 거울 앞에 서 있는 저 자신이죠. 주님이 하나님이 본체이시라는 말은 주님이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찬송을 받으셔야 합니다.

주님은 능력의 말씀을 가지신 분이시기에 찬송 받으실 분입니다. 주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지금도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고 계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찬송을 받으셔야 합니다.

주님은 죄를 정결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주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로 우리의 죄를 씻어주십니다. 1 1:7입니다.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주님은 하늘에서 하나님 아버지 보좌 우편에 앉아계십니다. 그리고 장차 심판의 주님으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찬송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심판 하시는 일을 아들에게 맡기셨습니다.

모순처럼 보이는 2개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5:22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3:17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5:22에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심판을 맡기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3:17에서는 하나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아들로 말미암아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두 말씀은 언뜻 보면 모순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라는 열쇠로 보면 풀리는 말씀입니다. 심판은 아들 예수님에게 달렸습니다. 아들을 믿지 않는 사람은 심판을 받고 아들을 믿는 사람은 아들이 대신 심판을 받으셨기 때문에 구원을 받아서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3:18입니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주님은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사람들은 나귀타고 오시는 주님에게 호산나를 부르며 찬송을 했습니다. 호산나라는 말은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주님은 영원히 찬송 받으실 구원자이십니다.

영국에서 윌리암 케리가 인도 선교사로 파송된 후, 조금 있다가 짧은 기독교 역사를 지닌 미 대륙에서 처음으로 아도니람 저드슨을 선교사로 파송했습니다. 그는 미국을 떠나 인도에 잠시 들렸다가 버마로 갔습니다. 버마에 가서 평생 선교사로 자신의 생애를 주님께 바쳤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많은 어려움과 고난을 당하며 열심히 주님의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그가 미국을 떠난 지 30년 후에 미국에 올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가 보스톤에서 선교보고회를 하던 날, 교회당은 입추의 여지없이 수많은 사람들로 채워졌습니다. 미국을 대표하여 파송된 최초의 선교사가 인도와 버마 복음화를 위해 생애를 바치고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어 돌아왔을 때, 그의 메시지를 잔뜩 기대한 많은 사람들은 모여 들었습니다. 그는 모인 청중들에게 이렇게 설교를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시고, 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허물과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피 흘리셨습니다. 그의 피 흘리심은 우리의 죄 사함과 구원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동일한 복음이 선교지에 소망이 되었습니다.” 바로 십자가에 대한 설교였습니다. 그는 짧게 설교를 마쳤습니다. 그러자 청중들은 실망하는 모습이 역력했습니다. 여러분, 선교사의 이야기를 들을 때, 우리는 무엇을 기대합니까? 선교지에서 일어난 기적이나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와 같은, 드라마틱한 사건들에 대해 듣고 싶어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아도니람 저드슨의 설교가 너무나 평범하지 않느냐?”고 수군거렸습니다. 그 때 그 얘기를 들은 아도니람 저드슨이 청중들에게 돌아서서 정색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십자가 사건보다 더 비범한 사건이 어디 있습니까? 십자가보다 더 위대한 메시지가 어디 있습니까? 십자가보다도 더 놀라운 복음이 어디 있습니까? 나에게는 이보다 더 중요한 메시지가 없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해주셨고 십자가로 우리를 구원해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영원한 구원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영원히 찬송 받으셔야 합니다. 할렐루야

출처 : 마경훈목사의 설교 카페
글쓴이 : 마경훈목사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