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 예언과 성취
본문/ 미 5:2-5상
성경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약속과 그 약속이 이루어진 것을 기록해 놓은 책입니다. 그래서 구약 신학자 오스카 쿨만은 성경 내용을 두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가 약속이고, 다른 하나가 성취입니다.
성경 내용의 초점은 뭐니뭐니해도 메시아의 강림 사건입니다. 그래서 구약은 오실 메시아에 대한 약속이 중심 내용을 이루고 있고, 신약은 오신 메시아에 대한 증언 즉 구약 예언의 성취가 중심 내용을 이루고 있습니다.
실제로 구약 성경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부분에서 메시아가 오실 것을 약속해 놓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 성경에는 마찬가지로 셀 수 없이 많은 부분에서 구약의 약속이 이루어진 것에 관해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구약의 그 많은 메시아에 관한 예언 중의 하나입니다. 이 예언은 메시아의 성탄에 관해 가장 직접적으로 예언하고 있는 구절들 중의 하나입니다.
이제 본문을 살피면서 메시아에 관한 예언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1. 메시아 출생지에 관한 예언
2절에 보면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 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메시아가 태어날 장소가 베들레헴 에브라다라는 예언입니다.
여기서 에브라다는 베들레헴의 옛 이름입니다. 창 35:19를 보면 베들레헴을 에브랏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렇게 베들레헴 에브라다라고 부른 이유는 스블론 지역에도 베들레헴이라는 마을이 있기 때문에 혼동될 것 같아서 현 지명과 옛 지명을 결합해서 불렀습니다.
이 예언대로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습니다. 나사렛에서 살던 요셉과 마리아는 호적 정리를 위해 고향 베들레헴으로 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베들레헴에서 예수를 낳게 된 것입니다.
참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하나님에 의해서 성취가 된 것입니다.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다는 것은 다음 몇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메시아가 낮고 천한 곳에 오신다는 뜻입니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 남동쪽 약 9키로 지역에 있던 마을입니다. 일종의 예루살렘 위성 마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자들, 권력자들이 사는 예루살렘과는 달리 이곳에는 가난하고 힘 없는 사람들이 모여 살았습니다. 주석학자 스미스에 의하면 유다 지역에서 최소한의 행정구역 단위를 이루기 위해서는 천명의 인구가 있어야 하는데 이 베들레헴은 당시 인구가 천명이 되지 않을 정도로 작은 마을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가 예루살렘을 주목했습니다. 예루살렘에만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베들레헴을 주목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는 곳, 사람들의 관심이 떠난 곳, 하나님은 이곳을 주목하셨습니다. 이곳에 관심을 기울이셨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놀라운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온 인류를 구원하시는 구속사의 대장정을 바로 이곳에서 시작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무엇에 주목하고 있습니까? 어디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까? 사람들이 주목하고 있는 곳,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곳 그곳을 주목하고, 그곳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무엇에 주목하고 계시는 지를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에 관심을 기울이고 계시는 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주목해야 하고, 그것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기 예수를 바로 이곳 베들레헴으로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낮은 곳, 천한 곳에 메시아를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 약속대로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습니다. 그것도 베들레헴의 한 마구간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찬송 109장은 아기 예수가 탄생하신 그 밤에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있었던 일을 마치 영화처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찬송은 천사들, 목동들, 동방박사들이 함께 합창하는 노래 같습니다. 특히 4절은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주 예수 나신 밤 그의 얼굴 광채가 세상 빛이 되셨네 왕이 나셨도다. 왕이 나셨도다.” 상식적으로 볼 때 왕의 탄생을 축하하는 노래는 예루살렘에서 불려 져야 옳습니다. 예루살렘 왕궁에서 주악에 맞춰 불려 져야 옳습니다. 그런데 이 노래는 보잘 것 없는 마을 베들레헴에서 불려 졌습니다. 그것도 마구간에서 불려 졌습니다.
빌 2:6-8을 보면 “이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주님은 이 땅에 오실 때부터 낮추셨습니다. 한 평생을 낮추시며 사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최후까지 낮추셨습니다.
베들레헴 예수 탄생교회에 가보면 출입문이 아주 작고 문이 낮습니다. 누구라도 그 교회에 들어가려면 고개를 숙여야 하고, 몸을 낮춰야 합니다. 왕이 방문해도 그렇습니다. 오늘날 대통령이 방문해도 그렇습니다. 그 분을 경배하려 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자기를 낮춰야 합니다.
주님은 이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낮추라!
낮아지라!
둘째, 우리를 먹이시기 위해 오셨다는 뜻입니다.
베들레헴이란 말은 떡의 집이란 뜻입니다. 이 말을 영적으로 해석해 보면 하나님께서는 메시아를 보내셔서 우리를 영적으로 먹이시려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약속대로 예수님께서는 메시아로 오셔서 우리를 먹이셨습니다. 요 6:48-51을 보면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로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기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 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예수님께서 주신 이 떡은 한 번 먹으면 영생을 누리게 되는 신비한 떡입니다. 이 세상에서 돈 주고 살 수 없고, 이 세상에서는 구경도 할 수 없는 떡입니다. 주님은 이 떡을 주시기 위해서 떡의 집 베들레헴에 오셨습니다.
우리가 이 예수를 믿으면 영생의 떡을 먹게 됩니다. 세상의 모든 떡은 먹어도 결국은 죽습니다. 그러나 이 떡을 먹으면 결국은 삽니다. 죽어도 삽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양식을 구합니다. 좋은 음식을 먹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 떡을 먹어야 합니다. 이 떡을 먹어야만 영생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에브라다라는 말은 풍성한 열매라는 뜻입니다. 이 말을 영적으로 해석해 보면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보내셔서 우리로 풍성한 삶을 살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약속대로 예수님은 메시아로서 우리의 생명을 풍성케 하셨습니다. 요 10:11에 보면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 세상 살면서 지치고 고단한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마치 긴 가뭄에 시달리는 과실나무와도 같습니다. 잎도 메마르고, 열매도 제대로 맺지 못하고 허덕이며 겨우 생명만 부지하고 있습니다. 그 생명이 메말라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한 세상 감사하며, 기뻐하며, 힘차게 살아갑니다. 마치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도 같습니다. 그 잎이 마르지 않고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풍성케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런 복을 주시기 위해서 에브라다에 오셨습니다.
2. 메시아 사역에 관한 예언
본문에 보면 메시아가 이 땅에 오셔서 하시는 일 두 가지가 예언되고 있습니다.
첫째, 돌봐주신다는 것이다.
본문 4절에 보면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그 떼에게 먹여서 그들로 안연히 거하게 할 것이라”
본문은 메시아와 그 백성들 사이의 관계를 목자와 양의 관계로 비유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메시아는 목자이고 그 백성들은 양이라는 것입니다.
우선 ‘메시아는 여호와의 능력과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한다’는 말씀을 주목해 보겠습니다. 이 말씀은 메시아가 권위와 능력을 가지고 그 백성들을 돌볼 것에 대한 예언입니다. 즉 메시아가 능력 있는 목자로 오셔서 그 양들을 돌보실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양들에게 복이 있다면 능력 있는 목자를 만나는 것입니다. 어려운 상황을 맞았을 때 능력 있는 목자는 그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서 양들로 하여금 큰 어려움을 겪지 않게 해 줍니다. 그러나 무능한 목자를 만나면 양들은 겪지 않아도 될 어려움을 겪게 되고 모진 시련을 당하게 됩니다.
사실 우리가 경제적으로 어렵고, 사회적으로 혼란한 시대를 만나게 된 것도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으나 무능한 지도자, 무능한 책임자들 때문입니다. 저들이 제대로 시대를 본별하지 못하고 제대로 국민들을 이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약속대로 메시아이신 예수님은 놀라운 능력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벳새다 들녘에서 오병이어의 이적을 베푸시며 그 백성들을 돌보셨습니다. 각종 병든 사람들을 고치시는 이적으로 돌보셨습니다. 주님은 놀라운 능력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 어떤 문제로 고민하고 괴로워해도 주님은 그 크신 능력으로 그 모든 문제를 풀고 해결해 주십니다.
다음으로 ‘서서’라는 말씀을 주목해 보겠습니다. 이 말은 히브리어로 아마드라는 말입니다. 그 뜻은 ‘서 있다, 견딘다, 지탱한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메시아가 오셔서 그 백성 곁에 늘 계시며 돌봐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요 10:11-12에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이다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여기에 두 종류의 목자가 나옵니다. 하나는 삯꾼 목자입니다. 이 삯꾼 목자는 이리가 오면 양들을 버려 두고 도망칩니다. 이 삯꾼 목자의 특징은 자기를 먼저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유익하면 양들을 돌보고, 자기에게 손해가 올 것 같으면 언제라도 양들을 버립니다. 그래서 이 삯꾼 목자는 양 곁에 서있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이 삯꾼 목자에게는 ‘서서’, ‘아미드’라는 말을 쓸 수가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선한 목자입니다. 이 선한 목자는 이리가 오면 끝까지 싸웁니다. 나중에 이리 떼가 많아 싸우다가 지더라도 양들을 버리지 않습니다. 결국은 죽더라도 말입니다. 바로 이런 목자가 양들 곁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그 백성들을 바라보시며 하시는 말씀이 “목자 없는 양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목자에게 버림 받은 양떼와 같다는 것입니다. 목자들이 모두가 제 살길 찾아 도망쳐 버린 뒤에 홀로 남은 양들, 언제 이리와 강도의 공격을 받아 죽게 될지 모르는 처참한 형편 가운데 놓인 양들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선한 목자가 되셔서 이 버림받은 양떼 곁에 끝까지 계셨고, 결국은 목숨까지 버리셨습니다.
이 약속대로 예수님은 메시아로 오셔서 늘 그 백성들을 곁에 계셨습니다. 지금도 우리 곁에서 계십니다.
둘째, 평강을 주신다는 것이다.
본문 5절에 보면 “이 사람은 우리의 평강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메시아가 우리에게 참된 평강을 주실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눅 2:14를 보면 천사들이 밤중에 들판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 나타나서 메시아 탄생 소식을 전하며 불렀던 노래가 기록되어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메시아가 탄생함으로 이제 앞으로 나타날 일들을 노래한 것입니다. 두 가지인데, 하나는 하늘에서 일어날 일이고, 다른 하나는 이 세상에서 일어날 일입니다.
하늘에서는 하나님께서 과거에 없던 큰 영광을 받으시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과거에 없던 큰 평강을 그 백성들이 누리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약속대로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오신 뒤에 하나님은 십자가 위에서 더 할 수 없는 큰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이 땅에 진정한 평화의 길이 열렸습니다.
지금도 그리스도밖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지구촌은 지금도 전쟁의 포화가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남북이 여전히 60년째 총칼을 겨누고 있습니다. 저 중동지방에는 이슬람 국가 건설이라 하여 전쟁의 참화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를 들여다보면 정치는 여와 야가 정쟁으로 세월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진보다 보수다 하여 이념논쟁으로 으르렁거리고 있습니다.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들이 소위 갑질 논쟁으로 서로 감정 대립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가정마다 부모 자식간에, 부부 사이에 갈등이 있고 다툼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그 어디를 둘러 봐도 샬롬이 없습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참된 샬롬을 맛볼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단 한 곳 예수 안에는 샬롬이 있습니다. 회개와 용서가 있습니다. 용납과 화해가 있습니다. 진정한 하나됨이 있습니다. 메시아는 이 갈등 많고, 다툼 많고, 분쟁 투성이인 우리에게 진정한 샬롬을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심령에 메시아가 오셔야 합니다. 우리 가정에 오셔야 하고, 우리 사회, 우리 조국, 우리 민족 위에 메시아가 오셔야 합니다. 더 나아가 이 세계 위에 메시아가 오셔야 합니다. 그 길만이 이 땅에 평화가 임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금번 성탄절에 메시아가 주시는 평강이 여러분의 심령, 여러분의 가정, 여러분의 하시는 일 위에 넘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본문/ 미 5:2-5상
성경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약속과 그 약속이 이루어진 것을 기록해 놓은 책입니다. 그래서 구약 신학자 오스카 쿨만은 성경 내용을 두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가 약속이고, 다른 하나가 성취입니다.
성경 내용의 초점은 뭐니뭐니해도 메시아의 강림 사건입니다. 그래서 구약은 오실 메시아에 대한 약속이 중심 내용을 이루고 있고, 신약은 오신 메시아에 대한 증언 즉 구약 예언의 성취가 중심 내용을 이루고 있습니다.
실제로 구약 성경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부분에서 메시아가 오실 것을 약속해 놓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 성경에는 마찬가지로 셀 수 없이 많은 부분에서 구약의 약속이 이루어진 것에 관해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구약의 그 많은 메시아에 관한 예언 중의 하나입니다. 이 예언은 메시아의 성탄에 관해 가장 직접적으로 예언하고 있는 구절들 중의 하나입니다.
이제 본문을 살피면서 메시아에 관한 예언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1. 메시아 출생지에 관한 예언
2절에 보면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 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메시아가 태어날 장소가 베들레헴 에브라다라는 예언입니다.
여기서 에브라다는 베들레헴의 옛 이름입니다. 창 35:19를 보면 베들레헴을 에브랏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렇게 베들레헴 에브라다라고 부른 이유는 스블론 지역에도 베들레헴이라는 마을이 있기 때문에 혼동될 것 같아서 현 지명과 옛 지명을 결합해서 불렀습니다.
이 예언대로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습니다. 나사렛에서 살던 요셉과 마리아는 호적 정리를 위해 고향 베들레헴으로 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베들레헴에서 예수를 낳게 된 것입니다.
참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하나님에 의해서 성취가 된 것입니다.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다는 것은 다음 몇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메시아가 낮고 천한 곳에 오신다는 뜻입니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 남동쪽 약 9키로 지역에 있던 마을입니다. 일종의 예루살렘 위성 마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자들, 권력자들이 사는 예루살렘과는 달리 이곳에는 가난하고 힘 없는 사람들이 모여 살았습니다. 주석학자 스미스에 의하면 유다 지역에서 최소한의 행정구역 단위를 이루기 위해서는 천명의 인구가 있어야 하는데 이 베들레헴은 당시 인구가 천명이 되지 않을 정도로 작은 마을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가 예루살렘을 주목했습니다. 예루살렘에만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베들레헴을 주목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는 곳, 사람들의 관심이 떠난 곳, 하나님은 이곳을 주목하셨습니다. 이곳에 관심을 기울이셨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놀라운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온 인류를 구원하시는 구속사의 대장정을 바로 이곳에서 시작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무엇에 주목하고 있습니까? 어디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까? 사람들이 주목하고 있는 곳,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곳 그곳을 주목하고, 그곳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무엇에 주목하고 계시는 지를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에 관심을 기울이고 계시는 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주목해야 하고, 그것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기 예수를 바로 이곳 베들레헴으로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낮은 곳, 천한 곳에 메시아를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 약속대로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습니다. 그것도 베들레헴의 한 마구간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찬송 109장은 아기 예수가 탄생하신 그 밤에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있었던 일을 마치 영화처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찬송은 천사들, 목동들, 동방박사들이 함께 합창하는 노래 같습니다. 특히 4절은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주 예수 나신 밤 그의 얼굴 광채가 세상 빛이 되셨네 왕이 나셨도다. 왕이 나셨도다.” 상식적으로 볼 때 왕의 탄생을 축하하는 노래는 예루살렘에서 불려 져야 옳습니다. 예루살렘 왕궁에서 주악에 맞춰 불려 져야 옳습니다. 그런데 이 노래는 보잘 것 없는 마을 베들레헴에서 불려 졌습니다. 그것도 마구간에서 불려 졌습니다.
빌 2:6-8을 보면 “이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주님은 이 땅에 오실 때부터 낮추셨습니다. 한 평생을 낮추시며 사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최후까지 낮추셨습니다.
베들레헴 예수 탄생교회에 가보면 출입문이 아주 작고 문이 낮습니다. 누구라도 그 교회에 들어가려면 고개를 숙여야 하고, 몸을 낮춰야 합니다. 왕이 방문해도 그렇습니다. 오늘날 대통령이 방문해도 그렇습니다. 그 분을 경배하려 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자기를 낮춰야 합니다.
주님은 이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낮추라!
낮아지라!
둘째, 우리를 먹이시기 위해 오셨다는 뜻입니다.
베들레헴이란 말은 떡의 집이란 뜻입니다. 이 말을 영적으로 해석해 보면 하나님께서는 메시아를 보내셔서 우리를 영적으로 먹이시려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약속대로 예수님께서는 메시아로 오셔서 우리를 먹이셨습니다. 요 6:48-51을 보면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로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기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 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예수님께서 주신 이 떡은 한 번 먹으면 영생을 누리게 되는 신비한 떡입니다. 이 세상에서 돈 주고 살 수 없고, 이 세상에서는 구경도 할 수 없는 떡입니다. 주님은 이 떡을 주시기 위해서 떡의 집 베들레헴에 오셨습니다.
우리가 이 예수를 믿으면 영생의 떡을 먹게 됩니다. 세상의 모든 떡은 먹어도 결국은 죽습니다. 그러나 이 떡을 먹으면 결국은 삽니다. 죽어도 삽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양식을 구합니다. 좋은 음식을 먹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 떡을 먹어야 합니다. 이 떡을 먹어야만 영생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에브라다라는 말은 풍성한 열매라는 뜻입니다. 이 말을 영적으로 해석해 보면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보내셔서 우리로 풍성한 삶을 살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약속대로 예수님은 메시아로서 우리의 생명을 풍성케 하셨습니다. 요 10:11에 보면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 세상 살면서 지치고 고단한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마치 긴 가뭄에 시달리는 과실나무와도 같습니다. 잎도 메마르고, 열매도 제대로 맺지 못하고 허덕이며 겨우 생명만 부지하고 있습니다. 그 생명이 메말라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한 세상 감사하며, 기뻐하며, 힘차게 살아갑니다. 마치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도 같습니다. 그 잎이 마르지 않고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풍성케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런 복을 주시기 위해서 에브라다에 오셨습니다.
2. 메시아 사역에 관한 예언
본문에 보면 메시아가 이 땅에 오셔서 하시는 일 두 가지가 예언되고 있습니다.
첫째, 돌봐주신다는 것이다.
본문 4절에 보면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그 떼에게 먹여서 그들로 안연히 거하게 할 것이라”
본문은 메시아와 그 백성들 사이의 관계를 목자와 양의 관계로 비유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메시아는 목자이고 그 백성들은 양이라는 것입니다.
우선 ‘메시아는 여호와의 능력과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한다’는 말씀을 주목해 보겠습니다. 이 말씀은 메시아가 권위와 능력을 가지고 그 백성들을 돌볼 것에 대한 예언입니다. 즉 메시아가 능력 있는 목자로 오셔서 그 양들을 돌보실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양들에게 복이 있다면 능력 있는 목자를 만나는 것입니다. 어려운 상황을 맞았을 때 능력 있는 목자는 그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서 양들로 하여금 큰 어려움을 겪지 않게 해 줍니다. 그러나 무능한 목자를 만나면 양들은 겪지 않아도 될 어려움을 겪게 되고 모진 시련을 당하게 됩니다.
사실 우리가 경제적으로 어렵고, 사회적으로 혼란한 시대를 만나게 된 것도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으나 무능한 지도자, 무능한 책임자들 때문입니다. 저들이 제대로 시대를 본별하지 못하고 제대로 국민들을 이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약속대로 메시아이신 예수님은 놀라운 능력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벳새다 들녘에서 오병이어의 이적을 베푸시며 그 백성들을 돌보셨습니다. 각종 병든 사람들을 고치시는 이적으로 돌보셨습니다. 주님은 놀라운 능력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 어떤 문제로 고민하고 괴로워해도 주님은 그 크신 능력으로 그 모든 문제를 풀고 해결해 주십니다.
다음으로 ‘서서’라는 말씀을 주목해 보겠습니다. 이 말은 히브리어로 아마드라는 말입니다. 그 뜻은 ‘서 있다, 견딘다, 지탱한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메시아가 오셔서 그 백성 곁에 늘 계시며 돌봐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요 10:11-12에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이다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여기에 두 종류의 목자가 나옵니다. 하나는 삯꾼 목자입니다. 이 삯꾼 목자는 이리가 오면 양들을 버려 두고 도망칩니다. 이 삯꾼 목자의 특징은 자기를 먼저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유익하면 양들을 돌보고, 자기에게 손해가 올 것 같으면 언제라도 양들을 버립니다. 그래서 이 삯꾼 목자는 양 곁에 서있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이 삯꾼 목자에게는 ‘서서’, ‘아미드’라는 말을 쓸 수가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선한 목자입니다. 이 선한 목자는 이리가 오면 끝까지 싸웁니다. 나중에 이리 떼가 많아 싸우다가 지더라도 양들을 버리지 않습니다. 결국은 죽더라도 말입니다. 바로 이런 목자가 양들 곁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그 백성들을 바라보시며 하시는 말씀이 “목자 없는 양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목자에게 버림 받은 양떼와 같다는 것입니다. 목자들이 모두가 제 살길 찾아 도망쳐 버린 뒤에 홀로 남은 양들, 언제 이리와 강도의 공격을 받아 죽게 될지 모르는 처참한 형편 가운데 놓인 양들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선한 목자가 되셔서 이 버림받은 양떼 곁에 끝까지 계셨고, 결국은 목숨까지 버리셨습니다.
이 약속대로 예수님은 메시아로 오셔서 늘 그 백성들을 곁에 계셨습니다. 지금도 우리 곁에서 계십니다.
둘째, 평강을 주신다는 것이다.
본문 5절에 보면 “이 사람은 우리의 평강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메시아가 우리에게 참된 평강을 주실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눅 2:14를 보면 천사들이 밤중에 들판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 나타나서 메시아 탄생 소식을 전하며 불렀던 노래가 기록되어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메시아가 탄생함으로 이제 앞으로 나타날 일들을 노래한 것입니다. 두 가지인데, 하나는 하늘에서 일어날 일이고, 다른 하나는 이 세상에서 일어날 일입니다.
하늘에서는 하나님께서 과거에 없던 큰 영광을 받으시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과거에 없던 큰 평강을 그 백성들이 누리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약속대로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오신 뒤에 하나님은 십자가 위에서 더 할 수 없는 큰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이 땅에 진정한 평화의 길이 열렸습니다.
지금도 그리스도밖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지구촌은 지금도 전쟁의 포화가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남북이 여전히 60년째 총칼을 겨누고 있습니다. 저 중동지방에는 이슬람 국가 건설이라 하여 전쟁의 참화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를 들여다보면 정치는 여와 야가 정쟁으로 세월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진보다 보수다 하여 이념논쟁으로 으르렁거리고 있습니다.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들이 소위 갑질 논쟁으로 서로 감정 대립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가정마다 부모 자식간에, 부부 사이에 갈등이 있고 다툼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그 어디를 둘러 봐도 샬롬이 없습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참된 샬롬을 맛볼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단 한 곳 예수 안에는 샬롬이 있습니다. 회개와 용서가 있습니다. 용납과 화해가 있습니다. 진정한 하나됨이 있습니다. 메시아는 이 갈등 많고, 다툼 많고, 분쟁 투성이인 우리에게 진정한 샬롬을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심령에 메시아가 오셔야 합니다. 우리 가정에 오셔야 하고, 우리 사회, 우리 조국, 우리 민족 위에 메시아가 오셔야 합니다. 더 나아가 이 세계 위에 메시아가 오셔야 합니다. 그 길만이 이 땅에 평화가 임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금번 성탄절에 메시아가 주시는 평강이 여러분의 심령, 여러분의 가정, 여러분의 하시는 일 위에 넘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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