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아래서
전 2:18-23
오늘 본문은 ‘전도서’의 말씀입니다. 전도서라는 책 이름은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그 이름이 마치 복음전도에 관한 책이라고 오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전도의 지침을 주는 책이라고 오해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히브리 성경에서 이 책의 이름은 “코헬레트”(Qoheleth)로 되어있습니다. 이 말은 ‘집회에서 연설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많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한문 성경에서 ‘전도자’(傳道者)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성경은 그 이름을 전도자라고 하지 않고 전도서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 책의 내용이 전도자에 대한 내용이 아니라 전도자가 전한 말씀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1:1을 보면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고 되어있는데, 이 말씀을 참고로 전도자의 말씀이라는 뜻에서 전도서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 전도자가 전하는 말씀은 무엇일까요? 다시 말해서 전도서의 내용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허무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입니다. 살면서 겪는 인생의 허무를 하나님의 백성은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전도서의 주제를 그대로 잘 나타내 보여줍니다. 특히 오늘 본문은 인간의 수고에서 발견되는 허무함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관해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인간 수고의 허무함
오늘 본문은 사람들이 느끼는 허무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특히 땀 흘려 애쓰고 수고한 뒤에 느끼는 허무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청년들 사이에 유행하던 유머 중에 이런 퀴즈가 있습니다. 어떤 버스가 큰 교통사고를 당해서 승객들이 모두 다 죽고 말았습니다. 그 승객들 중에 가장 억울하게 죽은 사람은 누구일까요? 여러 보기를 주고서는 답을 찾는 퀴즈입니다.
답을 말씀드려보면 가장 억울하게 죽은 사람은 66번 버스를 타려다가 99번 버스를 66번으로 착각하고 탔다가 죽은 사람이랍니다. 그 다음은 결혼식을 하루 앞두고 이 버스를 탔다가 죽은 신랑이랍니다. 세 번째는 버스가 출발할 때 놓칠까봐 급하게 달려와서 겨우 버스에 탔다가 죽은 사람이랍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졸다가 내려야 할 곳에서 못 내리고 한 정거장 더 가다가 죽은 사람이랍니다.
실제로 이런 사람들은 얼마나 억울할까요? 나름대로 열심히 산다고 살았는데 결과가 너무도 허무합니다. 단순히 유머로만 넘길 문제가 아닌 것만 같습니다. 우리 인생의 참모습 그자체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의 인생은 우리가 애쓰고 노력한 대로 되어지지 않습니다. 수고는 수고대로 하지만 그것이 헛수고가 될 때가 다반사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수고하고 땀 흘린 뒤 허무함을 느낄 때가 참 많습니다.
오늘 본문의 전도자는 사람들이 땀 흘려 수고하지만 허무함을 느낄 때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경우를 두 가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수고한 결과를 자기가 아닌 남들이 가지게 될 때 허무함을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18절을 보면 “내가 해 아래에서 내가 한 모든 수고를 미워하였노니 이는 내 뒤를 이을 이에게 남겨 주게 됨이라”고 했습니다. 19절에는 “내가 해 아래에서 내 지혜를 다하여 수고한 모든 결과를 그가 다 관리하리니 이것도 헛되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21절에는 이렇게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지혜와 지식과 재주를 다하여 수고하였어도 그가 얻은 것을 수고하지 아니한 자에게 그의 몫으로 넘겨주리니 이것도 헛된 것이며 큰 악이로다”
그렇습니다. 사실 많은 경우 수고는 우리가 하지만 그 결과가 엉뚱한 사람에게 돌아갑니다.
최근 대한항공 때문에 시끄럽습니다. 조현아 부사장이라는 분 때문입니다. 이분이 소위 ‘갑질’이라는 것으로 물의를 일으켰습니다. 아버지, 할아버지 잘 둔 덕에 부사장 자리에 올라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은 물론 사람들의 눈살 찌푸릴 일들을 저질러서 구설수에 오른 것입니다.
사실 이분의 할아버지 고 조중훈씨는 기름밥 먹어가며 트럭운전으로 고생하던 분입니다. 특별한 계기로 미군의 도움으로 운수업을 시작하게 됐고, 고생고생해서 오늘의 대한항공을 이루게 됐던 것입니다. 아마 조중훈씨가 살아있었더라면 오늘 이 사태를 어떻게 보았을까요? 자기가 수고하여 놀라운 열매를 이루어놓았는데 자기는 그 열매를 누리지 못하고 자식의 자식이 누리고 또 그 열매를 잘못 누려서 자기 이름에 먹칠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속도 상했겠지만 허무함을 느끼지 않았을까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수고하지만 그 수고가 제대로 열매가 되어 내게 돌아오는 일은 극히 드뭅니다. 만일 열매가 내게 돌아온다고 해도 그 열매를 누리려고 하면 이미 세월이 너무 많이 흘러버렸습니다. 결국 그 열매를 제대로 누려보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다른 하나는 수고는 하지만 애만 태우지 열매를 거두지 못할 때 허무함을 느끼게 됩니다.
23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사람들이 인생을 살면서 수고를 하는데 그 수고가 너무도 힘이 든다는 것입니다. 단지 고생만 하는 것이 아니고 때로는 근심하기도 하고, 때로는 슬퍼하기도 하고, 때로는 밤잠 자지 못하고 고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열매를 보지 못하는 일이 다반사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법고시 공부한다고 여러 해 정말 고생 고생했는데 결국 합격하지 못하고 접고 돌아서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창업한다고 퇴직금에 대출까지 받아서 작은 사업을 시작했는데 3년을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때 사람들이 느끼는 허무함은 절망까지 더해져서 견디기 힘이 듭니다.
오늘 전도자의 말씀은 인생에 이런 일이 보편적이라고 말씀해 줍니다. 나만의 문제가 아니고 누구나 이런 일들을 흔히 겪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해 아래에서
그러면 사람들은 인생을 살면서 왜 이런 허무를 느끼게 되는 것일까요? 전도자는 오늘 본문에서 그 답을 자기만의 용어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로 “해 아래에서”입니다.
이 해 아래에서라는 표현은 본문에서만 18, 19, 20, 그리고 22에 나옵니다. 6절밖에 안 되는 길지 않은 본문 속에 무려 네 번이나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그리고 전도서 전체로 보면 이 해 아래에서 라는 표현이 무려 29번이나 등장합니다.
이 해 아래에서라는 표현은 글자 그대로 하늘에 떠 있는 태양아래라는 물리적인 공간을 뜻합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다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은 하늘에 거하시고 사람은 땅에 거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늘은 하나님의 영역이고, 땅은 사람의 영역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전도서에서는 이 해 아래에서라는 표현이 특별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영역 밖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에서 그분의 은혜가 미치는 영역 밖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시는 곳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전도서 기자가 말하는 해 아래에서는 하나님과 무관한 삶의 자리를 말합니다. 이 하나님과 무관한 삶의 자리에서 사람들이 수고의 땀을 흘리는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헛된 것을 깨닫게 될 때 견디기 힘든 허무함이 마음속에 밀려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해 아래에서 허무감을 느끼게 되는 것일까요? 왜 하나님과 무관한 인생이 결국은 허무감을 느끼게 되는 것일까요?
우선 해 아래에서 인간은 앞을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름대로 방향을 잡고 수고의 땀을 흘려보지만 올바른 방향으로 나가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얼만 전 한 경제연구소에서 ‘기업의 생존연구보고서’를 발간했습니다. 그 자료를 보면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바가 참 많습니다. 결론적으로 기업의 수명이 30년을 넘기가 힘이 든다는 것입니다. 1970년대 우리나라 기업의 상위권에 속해 있던 그 많은 기업들 중에 2010년대에도 여전히 상위권을 지키고 있는 기업은 삼성과 LG 둘 뿐이었습니다. 40년 만에 대부분의 기업들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지금 삼성과 현대가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 굴지의 기업이지만 30년 뒤에는 어떻게 될까요? 국가적으로 볼 때 100년을 지탱해 나갈 수 있는 기업은 0.5% 밖에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해 아래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다 그렇습니다. 땀 흘려 수고했지만 시간을 지나놓고 보면 다 헛되고 헛됩니다. 바벨탑처럼 높이 세워졌지만 어느 순간에는 황폐화되고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허무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해 아래에는 죽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수고하여 놀라운 성과를 냈다고 하더라도 어느 날 죽음이 찾아오면 모든 것이 다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일장춘몽이 되고 맙니다.
알렉산더는 기원전 334년부터 동방원정을 시작한지 10년 만에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호메로스의 저서 〈일리아드〉에 나오는 아킬레우스의 후손이며 태양의 아들이며 살아있는 신을 자처하였습니다.
그런데 33살 젊은 나이에 생각지 못했던 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병세가 날이 갈수록 심해지자 왕실은 깊은 시름에 빠졌습니다. 그의 병을 고치기 위해 이름난 명의들이 수없이 왔다 갔지만 아무런 차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허둥대는 주변 사람들과는 달리 알렉산더 대왕은 오히려 침착했습니다. 그는 얼굴에서 병색이 짙었지만 타고난 강인한 정신력으로 조금씩 자신의 주변을 정리하면서 죽음을 준비하는 듯 했습니다.
드디어 죽음이 다가오자 알렉산더는 입을 열어 마지막 유언을 남겼습니다. " 내가 죽거든 묻을 때 손을 밖에 내놓아 남들이 볼 수 있도록 하시오. 나는 단지 세상 사람들에게 천하를 쥐었던 알렉산더도 떠날 때는 빈손으로 간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하오."
그렇습니다. 해 아래에서 일어나는 일이 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명성을 얻고, 아무리 놀라운 업적을 쌓아도 죽음이 찾아오면 그 모든 것은 그 자신에게는 헛된 일일 뿐입니다. 그 순간 감당할 수 없는 허무함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전도자는 해 아래에서 겪는 이런 허무함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해 아래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자신 홀로 걷는 인생길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무관한 인생길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해 아래에서 벗어나게 되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게 됩니다.
출 13:20 이하를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그들이 숙곳을 떠나서 광야 끝 에담에 장막을 치니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에담이라는 곳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은 애굽을 벗어나서 광야가 시작되는 곳입니다. 여기서부터는 길도 없고 방향을 잡을 이정표도 없습니다. 한 마디로 어디로 가야할 지를 알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부터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앞에 서셔서 저들의 광야 길을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해 아래에서 벗어나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서십니다. 그리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보내셔서 우리의 길을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못된 길로 가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합한 길로 나아가게 해 주십니다. 그러면 그 길을 다 마칠 때 돌아보면 보람되고 의미 있는 열매를 보게 될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해 아래에서 벗어나게 되면 죽음이 찾아오더라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죽음 이전에 행하던 일들이 물거품처럼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아름다운 열매로 남게 됩니다.
요 12:24를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1999년 4월20일 콜로라도 덴버의 한 고등학교에서 두 학생의 총기 난사로 13명의 학생과 교사가 사망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사건을 저지른 이들은 히틀러의 생일을 맞아, 이런 광기 어린 학살을 감행했다고 합니다.
저들은 학생들을 캠퍼스의 한군데에 모아놓고, 한 사람씩 총구를 갖다 대며 이렇게 물었습니다. “너는 하나님을 믿느냐?” 이 질문에 대부분의 학생들이 살기 위해서 “믿지 않는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공포 분위기 가운데서도 확실한 신앙의 결단을 한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 학생의 이름은 캐시 버낼입니다. 그는 죽음의 총구 앞에서도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그래,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신다. 그리고 너희도 역시 하나님의 길을 따라야만 한다.” 이 말을 들은 범인들은 “네가 믿는 하나님의 곁으로 가라” 하며 총을 쏘았고, 결국 캐시 버낼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이 있은 후 놀라운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학생들은 캐시 버낼의 순교 앞에서 자신들의 비겁함을 한없이 부끄러워했습니다. 얼마 후, 남아 있던 학생들 사이에서 자신들도 캐시 버낼과 같은 담대한 증인으로 서야 되겠다는 신앙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급기야 미국 전역의 각 학교에서는 ‘우리도 캐시 버낼의 길을 따르자’라는 신앙운동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해 아래에서 벗어나면 죽음도 우리 인생을 허무하게 만들지 못합니다. 죽음조차도 우리 삶을 의미 있게 만들고 오히려 더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해 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땅에 수많은 사람들이 해 아래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결국은 모든 것이 헛되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제 서야 돌이킬 수 없는 허무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해 아래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풍성한 삶을 살게 됩니다. 주 안에서 복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살면 사는 대로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보람과 의미 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리고 죽어도 많은 열매를 맺으며 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나아가게 됩니다. 해 아래에서 벗어나셔서 복되고 의미있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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