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표적의 의미
요 4:43-54
신약성경에는 복음서가 넷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그리고 요한복음입니다. 그런데 네 복음서를 자세히 살펴보면 ‘마’, ‘막’, ‘눅’은 공통점이 참 많습니다. 대부분의 이야기가 서로 비슷합니다. 그래서 이 세 복음서를 같은 관점에서 기록했다고 하여 공관복음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네 번째 복음서인 ‘요’는 이 세 복음서와는 많이 다릅니다. 다른 관점에서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요’를 4복음서라고 부릅니다.
공관복음서와 4복음서가 여러 가지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대표적인 것 가운데 하나가 기적에 관한 이해입니다. 공관복음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있는 그대로 소개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참 많은 기적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해서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그 기적이 담고 있는 의미를 중심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7가지 기적에 초점을 맞추어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적을 표현하는 용어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공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기사’ 또는 ‘이적’이라는 말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기사’라는 말은 ‘테라스’ (Teras)라는 말을 번역한 말입니다. 이 말의 뜻은 깜짝 놀랄만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본 사람들이 기절초풍을 할 정도로 놀라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이적’이라는 말은 ‘뒤나미스’(Dunamis)라는 말을 번역한 말입니다. 이 말의 뜻은 인간의 고통과 어려움을 해결해 주는 능력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본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인간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놀라운 능력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표적’이라는 말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표적’이란 ‘세메이온’(Semeion)이라는 말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 말의 뜻은 ‘싸인’(Sign) 즉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주는 행위라는 말입니다.
요한은 요 20:30-31에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을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 가운데 일부만을 표적으로 소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표적을 소개한 이유는 사람들이 그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게 하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표적을 보고 예수 믿고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요한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기적들은 다 표적들입니다. 그래서 이 표적을 읽을 때는 단지 놀라운 기사로, 능력 있는 이적으로 보면 안 됩니다. 그 표적이 드러내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그 표적이 보이고자 하는 예수는 어떤 분인지를 알고자 하는 마음으로 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표적은 요한 기록한 표적 7개 중에 두 번째 표적입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하신 후 원래 목적지였던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첫 번째 표적을 보이셨던 가나로 가시는 도중 왕의 신하가 급히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달려오는 것을 보셨습니다. 이 사람은 멀리 갈릴리 바닷가 가버나움에서 예수님을 만나려고 달려왔습니다. 아들의 병을 고쳐달라고 청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서 이렇게 청했습니다.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자기와 함께 빨리 가버나움에 가시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가 죽기 전에 고쳐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믿기 힘든 말씀을 하셨습니다. “가라 네 아들이 살아있다.” 그 아들이 나았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그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집 가버나움으로 돌아갔습니다. 집으로 가는 도중에 소식을 전하기 위해 달려오고 있는 하인들을 만났습니다. 소식을 자초지종 들어보니 그 아이가 나은 시각이 예수님께서 네 아들이 살아있다고 말씀하셨던 바로 그 시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왕의 신하는 물론이고 그 온 집안이 다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요한은 이 사건을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오셔서 행한 두 번째 표적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이 표적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려고 한 것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기대
예수님께서는 이 표적을 통해 믿는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기대를 나타내 보이고 계십니다. 저들의 믿음이 자라가기를 바라는 기대를 나타내 보이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를 거쳐서 지금 갈릴리 지역으로 넘어오셨습니다. 사마리아 지역에서 수가성 우물가에서 한 여인을 만나셨습니다. 그 여인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동네로 들어가 사람들에게 자기가 그리스도를 만났다는 사실을 전했습니다. 이 여인의 말을 들은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을 자기네 동네로 모셨습니다. 그리고 이틀 동안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4:42을 보면 그 후에 동네 사람들이 그 여인에게 이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여기서 주목할 것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에 가셔서는 그 어떤 기적도 베풀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병자를 고치신다든지, 귀신을 내쫓으신다든지, 오병이어의 기적과 같은 놀라운 일들을 행하신 일이 없으셨다는 것입니다. 다만 말씀을 전하실 뿐이셨습니다. 그래도 저들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고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갈릴리에 와서 보니 사람들의 태도가 다른 것입니다. 사마리아사람도 아닌 유대인, 명색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고 사는 사람들의 태도가 다른 것입니다.
44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어떤 말씀을 하셔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고향인 나사렛을 떠나실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45절을 보면 또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도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 중에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러라” 한 마디로 갈릴리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베푸신 기적을 보고 영접했다는 것입니다.
48절에 안타까운 마음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갈릴리 사람들은 무엇인가 놀라운 일들을 보아야만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늘 이 표적을 보이신 것입니다. 이 표적을 통해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처럼 믿음이 성숙해 지기를 바라시는 기대를 나타내고 계신 것입니다.
바둑을 두는 프로 기사들은 바둑을 둔 후에 꼭 복기(復碁)라는 것을 합니다. 방금 끝난 바둑을 다시 두어 보면서 어느 수는 잘 두었는지 어느 수는 잘못 두었는지를 살펴봅니다. 그러면서 기력이 계속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프로 1단은 형편없는 수준이라 하여 수졸(守卒)이라고 하고, 9단은 신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하여 입신(入神)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마추어는 복기를 하지 않습니다. 우선 복기를 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복기할 능력도 없습니다. 그래서 바둑을 두어도 늘 그 수준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보다 성숙한 믿음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주님께서 우리를 향한 기대입니다. 우리가 이런 주님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더욱 힘 써야 하겠습니다.
성숙한 믿음
예수님께서는 본문의 표적을 통해서 유대인들에게 성숙한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당시 유대인들이 이루어가기를 바라시는 믿음의 모습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왕의 신하가 보여준 믿음입니다.
여기서 왕의 신하는 누구일까요? 당시 갈릴리 지역을 다스리고 있던 분봉왕 헤롯 안디바의 신하를 말합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 사람이 헤롯 안디바의 친척이거나 왕궁의 고위 관리이거나 아니면 왕궁 수비대의 고급 장교일 것이라고 합니다. 어쨌든 이 사람은 당시 고귀한 신분의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당시 낮고 천한 신분의 한 청년이었던 예수님 앞으로 달려 나왔습니다. 그것도 가버나움에서 가나 지역까지 약 34킬로나 되는 먼 길을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자기 아들을 살려달라고 간청을 하고 있습니다. 이미 예수님 앞에서 모든 자존심, 체면 다 내려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뜻밖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사람의 이 간절한 청을 들으셔서 따라 나서시든지, 아니면 아들을 고치시기 위한 어떤 치유의 행동을 보이시든지 하셔야 할 텐데, 생뚱맞게 한 마디를 던지십니다. “네 아들이 살아있다.”
이 왕의 신하는 지금 아무 것도 본 것이 없습니다. 아들이 낳았다는 아무런 증거도 보지 못했습니다. 다만 낳았다는 말씀만 들었을 뿐입니다. 본문에 이 말씀을 들은 왕의 신하의 반응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이 사람은 아무 것도 본 것이 없습니다. 증거를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말씀만 믿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지금 아들을 고치기 위해 그 먼 길을 달려왔습니다. 아들을 고치기 위해 무엇인가 하려고 그 먼 길을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단지 아들이 낳았다는 말씀을 들었을 뿐입니다. 어떻게 그 말씀을 믿으라는 말입니까? 어떻게 그 말씀만 듣고 돌아가란 말입니까? 놀랍게도 이 사람은 그 말씀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믿고 돌아갔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성숙한 믿음입니다. 주님의 말씀만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당시 유대인들에게 바라시는 믿음이 이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바라시는 믿음도 이것입니다.
오랫동안 콩고에서 선교하던 월츠 버튼이란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이분은 오랫동안 콩고에 선교를 하던 중에 사역 도중에 간암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치료가 불가능한 상태여서 고향으로 돌아와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목사님이 할 수 있는 일은 기도하고 말씀을 읽는 것뿐이었습니다. 어느 날 벧전 2:24을 읽게 되었습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을 묵상하는 동안 너무나 감사하여 한 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잠시 멈추었다가 계속 말씀을 읽어 나갔습니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이 말씀을 보는 순간 성령님의 음성을 마음 깊이 듣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내가 질병의 고통을 대신 짊어지고 그 무서운 형벌을 대신 감당하기 위해 무자비한 로마 병정들에게 등이 찢어지도록 채찍을 맞았다. 내가 너를 대신해서 질병의 형벌을 다 청산하였다. 너는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하는 말을 믿느냐?"
그 순간 이 목사님은 즉시로 이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감사를 드리며 입으로 시인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월츠 버튼은 나았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나는 나았다!"하고 수천 번 반복하여 시인하였습니다. 이 목사님은 그의 영혼 깊숙한 곳에서부터 자신의 병이 고침을 받았다는 확신으로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그 말씀은 살아서 역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목사님은 즉시 아내를 불러 "이 말씀을 보시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나음을 입었다고 기록되어 있지 않소. 이 말씀을 통하여 성령께서는 내게 말씀하였소. 나는 이제 간암 환자가 아니오. 하나님께서 고쳐주신 정상인이오. 정상인이 누워서 있을 수만 없지 않소. 이제 나는 새로운 힘을 입어 일어나 활동을 해야겠소" 하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주님의 일을 다시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목사님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의심 없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전보다 더 열심히 활동하며 건강을 찾았습니다.
이것이 성숙한 믿음입니다. 보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만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대로 역사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성숙한 믿음을 가지게 되기 바랍니다.
성숙한 믿음의 열매
본문의 왕의 신하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집으로 가던 중에 아들이 나은 소식을 전하기 위해 달려오던 종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나은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고 말씀하신 그 시간인 줄 알고 예수님께서 고쳐주셨다는 것을 확인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이 사람이 집으로 가서 아들이 나은 것을 확인했다는 말이 기록되어있지 않습니다. 물론 집으로 가서 아들이 나은 사실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본문을 보면 이 아들이 어떤 병에 걸렸었는지 그 병세가 얼마나 중한 지 기록되어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이 병이 나은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 역시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 역시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본문이 이 표적의 열매로 기록해 놓은 것이 이것입니다.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이 왕의 신하가 이 표적을 체험한 후 본격적으로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왕의 신하 뿐 아니라 그의 온 집안이 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믿음의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영적인 열매만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들의 간증을 들어보면 대부분 어떤 병에 걸렸었는데 기도했더니 그 병이 깨끗이 나았고 그 후에 어떻게 건강한 삶을 살았다는 식입니다. 어떤 문제가 있었는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그 문제가 다 해결되었고 나아가 더 큰 복을 받아서 더욱 잘 살게 되었다는 식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표적에는 이런 식의 간증은 없습니다. 다만 예수를 믿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온 가족이 다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보다 깊은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놀라운 은혜를 베푸신 목적은 우리가 생명을 얻고 그 생명을 풍성하게 누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게 하시는 것은 우리가 예수 믿고 더 잘 믿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믿음의 열매를 겉사람에게서 찾으려 합니다. 병이 어떻게 나았느냐, 자식이 얼마나 잘 됐느냐, 하는 일이 얼마나 잘 됐느냐 등등. 그러나 예수님은 믿음의 열매를 속사람에게서 찾고 계십니다. 얼마나 그 믿음이 자랐느냐 얼마나 주님을 더 사랑하게 됐느냐 얼마나 주님께서 맡기신 일에 충성하게 됐느냐 등등. 우리의 생각과 관점이 바뀌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주님은 우리에게 표적을 보이고 계십니다. 크고 작은 기도의 응답을 체험하게 하십니다. 때로는 놀라운 일을 체험하게 하시기도 합니다. 이 때 우리는 그 표적 앞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 표적의 결과 우리의 믿음이 깊어져야 합니다. 더 주님을 사랑하게 되어야 합니다. 더 주님께 충성하고 헌신하게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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