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 감사를 드립시다! (눅17:11~19)
출23:16을 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 년에 두 차례씩 감사절을 지키라고 명하셨습니다. 맥추절과 수장절입니다. 오늘 우리는 맥추감사주일로 맥추절을 지킵니다. 그리고 한 해의 끝 무렵에 가서, 우리는 추수감사주일로 수장절을 지킵니다.
맥추절(麥秋節)은 첫 열매를 거두며 지키는 절기입니다. 말하자면 이는 봄 추수가 끝나고 난 뒤에 지키는 절기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한 해의 전반부를 다 보내고,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면서 맥추감사주일을 지킵니다.
수장절은 연말에 농사해서 거둔 것을 저장하면서 지키는 절기입니다. 이는 가을 추수가 끝난 뒤에 지키는 절기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한 해를 다 보낸 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면서 추수감사주일을 지킵니다.
신16:16~17을 보면, 절기 때에는 빈손으로 하나님을 뵈올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을 따라서, 우리의 힘대로 하나님께 감사의 예물을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우리의 힘대로 준비한 맥추감사헌금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오늘 본문의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세 대지로 나누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닫고, 예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시다. 그리해서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며, 예수님이 주시는 풍성한 복을 누리도록 합시다.
첫째로, 예수님은 나에게 긍휼을 베푸십니다(11~14절).
예수님은 긍휼이 풍성하십니다. 따라서 내가 예수님께 나오면, 예수님은 나를 물리치지 아니하십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나를 만나주십니다. 또한 내가 예수님께 아뢰면, 예수님은 나를 외면하지 아니하십니다. 예수님은 나의 간구를 그대로 들어주십니다.
눅17: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은 네 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누어졌습니다. 요단 강 서편 맨 위쪽에 갈릴리가 있었고, 맨 아래쪽에 유대가 있었습니다. 갈릴리와 유대 사이에 사마리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요단 강 동편에 베레아가 있었습니다.
눅9:51 말씀처럼,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시기로 굳게 결심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도중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 때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을 맞이하여, 갈릴리에 사는 많은 유대인들도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요4:9 말씀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 당시 유대인은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이방인처럼 멸시했습니다.
주전 722년 경,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당했습니다. 그 때 앗수르의 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 땅을 점령하고 살았습니다. 그 이후 앗수르 사람들과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 태어난 후손들이 바로 사마리아인들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의 몸 속에는 이방인들의 피가 흘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종교도 이방인들의 영향을 받아서, 혼합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은 사마리아인을 대할 때, 마치 이방인을 대하는 것처럼 적대감을 띠면서 경멸했습니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갈릴리에 있는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갈 때는 사마리아를 통과해서 가지를 않았습니다. 요단 강 동편의 베레아로 가서, 그 곳을 지나서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돌아올 때도 역시 베레아 쪽으로 둘러서 갈릴리로 왔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사마리아인을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요4:39을 보면, 예수님은 사마리아의 수가라 하는 동네에 사는 여자와 그 곳의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셨습니다. 또한 눅10:30 이하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사마리아인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사마리아와 갈릴리의 접경지대를 따라서 베레아로 가신 것입니다. 이는 눅9:52~53 말씀과 같이,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눅17:12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눅17:13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예수님은 사마리아와 갈릴리의 접경에 있는 한 마을에 들어가셨습니다. 분명 이 마을은 갈릴리에 속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주변에는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다른 유대인들도 많았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그 때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님을 만나고자 했습니다. 오늘 본문 16절에서 볼 수 있듯이, 그 가운데 한 명은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그 마을이 사마리아와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나병환자들 가운데 사마리아 사람도 섞여 있었던 것입니다.
레13:45~46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나병환자는 격리를 시켰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감염되면 안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본시 유대인은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않았지만, 병 때문에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격리된 곳에서 함께 살았습니다.
아무튼 성한 사람이 가까이 오면, 나병환자는 그의 옷을 찢고 머리를 풀어야 했습니다. 또한 자기의 윗입술을 가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라고 외쳐야 했습니다. 성한 사람이 자기에게 다가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 그들은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말했습니다. 나병에 걸리면, 목소리도 변합니다. 따라서 목이 쉰 것처럼, 그들의 목소리는 제대로 나오지를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필사적으로 자신들의 소리를 높여서 다함께 외쳤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알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사람들과 격리되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가족들이 정기적으로 그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갖다주어야 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자기 가족들로부터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가까운 마을에 들어가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 기회를 놓칠 수가 없어서, 마을 밖에서 예수님을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예수님의 모습이 멀리서 보였습니다. 그 순간 그들은 다함께 소리를 높여서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칭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부를 때, 때때로 사용하던 칭호였습니다. 예컨대 눅5:5에서는 베드로가, 눅8:24에서는 몇몇 제자들이, 그리고 눅9:49에서는 요한이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칭했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그들도 예수님을 높였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제자들과 같이, 그들도 예수님의 놀라우신 능력과 예수님의 풍성하신 긍휼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과 같은 마음으로, 그들도 예수님을 가리켜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예수님에게 이와 같이 간구했습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물론 이 때 그들이 예수님에게서 바라는 것은 음식이나 의복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것들은 그들의 가족들도 얼마든지 그들에게 제공해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눅18:38을 보면, 한 맹인이 예수님에게 똑같은 간구를 했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이 그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물어보셨습니다. 그러자 그는 보기를 원한다고 대답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나병환자들이 원하는 것은 나병에서 나음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눅17:14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보시고 이르시되.” 예수님은 그들을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보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그들의 간구를 물리치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간구에 응답하시기 위하여, 그들을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참으로 긍휼이 풍성하신 예수님이십니다.
눅5:13을 보면, 예수님이 한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그의 몸에 대셨습니다. 그러면서 그에게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곧 나병이 그에게서 떠나가고, 그가 깨끗하여졌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나병환자들은 분명 예수님이 자기들에게 그와 같이 해주시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레위기 14장을 보면,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입었다는 사실을 확정짓는 일은 제사장이 책임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그들이 깨끗함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들에게 제사장들에게 가서 그들의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그들에게 순종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과 예수님의 긍휼을 믿고서, 예수님에게 나아와서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서있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약2:17 말씀과 같이, 그들의 믿음은 죽은 것이 되고 맙니다. 따라서 그들의 믿음은 꽃을 피우지도 못하고, 열매를 맺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나병에서 놓임을 받지도 못하고, 깨끗함을 받지도 못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되돌아옵니다. “그들이 가다가.”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깨끗함을 받은지라.” 제사장들에게 가던 도중에, 그들 모두가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니까, 그들의 간구가 그대로 응답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사용된 동사 “깨끗함을 받은지라”의 시제가 부정 과거입니다. 이는 헬라어에서 일회적인 동작을 나타냅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몸이 점진적으로 서서히 깨끗하여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일순간에 그들은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정수리로부터 발꿈치까지, 깨끗하지 않던 모든 세포, 모든 조직, 모든 기관이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그 대신 그 자리에 깨끗한 세포, 깨끗한 조직, 깨끗한 기관이 순간적으로 자리잡았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그들에게 창조의 역사를 행하신 것입니다.
물론 그 때 천둥소리가 요란하게 울리지는 않았습니다. 번쩍번쩍하면서 광채가 빛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조용하게 행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에게는 창조의 역사가 조금도 놀라운 일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해결하시지 못할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맙시다. 예수님은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나 같은 사람의 문제는 시시하게 보실 것이라고 여기지 맙시다.
예수님은 언제나 나에게 긍휼을 베푸십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나에게 긍휼을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마7:8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내가 구하면 나는 받을 것입니다. 내가 찾으면 나는 찾아낼 것입니다. 내가 두드리면 내게 열릴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나의 감사를 기뻐하십니다(15~18절).
내가 예수님에게 감사를 드리면, 예수님은 기뻐하십니다. 예수님이 나에게 긍휼을 베푸시기 때문에, 나는 예수님에게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이 나의 감사를 기뻐하시기 때문에, 나는 예수님에게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눅17:15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눅17:16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그 중의 한 사람이.” 나병환자 열 명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나머지 아홉은 유대인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마리아 사람은 나머지 아홉과는 가는 길이 달랐을 것입니다. 그는 사마리아의 제사장에게로 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그가 제사장에게 자기 몸을 보이기 위해서 가던 도중이었습니다. 어느 순간 그는 자기가 깨끗하게 나은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분명 시간적으로 또한 거리적으로 얼마 가지 않아서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즉시 예수님에게 되돌아왔기 때문입니다.
물론 같은 순간에 다른 아홉도 자기들의 몸이 나은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에게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오직 한 사람, 곧 사마리아 사람만이 예수님에게 되돌아왔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세 가지를 행했습니다.
첫째, 그는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예수님께 간구할 때도, 그는 소리를 높였습니다. 그 때는 병든 소리, 쉰 소리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성한 소리, 맑은 소리였습니다. 이제는 감사와 감격에서 우러나오는 큰 소리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 당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사탄을 힘입었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을 하나님이라 믿고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것은 다음에 있는 말씀을 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둘째, 그는 예수님의 발 아래에 엎드렸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경배했던 것입니다. 유대인도 사마리아인도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했습니다. 따라서 그가 예수님께 경배한 것은 그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그는 예수님을 바르게 알았습니다.
셋째, 그는 예수님에게 감사했습니다. 그는 나병환자였습니다. 더군다나 그는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셨습니다. 따라서 그는 예수님에게 감사하지 않고서는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눅17: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눅17: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예수님은 사마리아인의 행위에 응답하셨습니다. 그 곳에는 예수님의 제자들도 있었고, 또한 예루살렘을 향하는 유대인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예수님은 그의 행위에 응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응답은 세 개의 질문으로 되어있습니다.
첫째,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입니다. 오늘 본문 14절이 밝히고 있듯이, 열 사람이 제사장들에게 가다가 모두 다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열 사람 모두를 똑같이 불쌍히 여기시고, 열 사람 모두에게 똑같이 긍휼을 베풀어주셨습니다.
둘째,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모르셔서 물으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창3:9에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고”물으셨습니다. 똑같은 맥락의 질문입니다.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을 때, 물으시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면 그 아홉은 어디에 있었겠습니까? 그들은 제사장에게 가서 자기들의 몸을 보이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난 뒤에는 레위기 14장이 규정하고 있는 대로, 성전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며 정결케 하는 의식을 행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깨닫지 못한 사실이 있었습니다. 삼상4:21 말씀의 표현을 빌리면, 예루살렘 성전은 이가봇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습니다. 요2:21 말씀과 같이, 참 성전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이신 예수님께 나아와 경배해야 옳았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고서, 예수님에게 되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 아홉은 유대인이면서도,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요1:11 말씀과 같이, 예수님이 자기 땅에 오셨는데도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셋째,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하여 알 수 있듯이, 사마리아 사람이 예수님께 감사한 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예수님께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감사를 기뻐하셨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아홉 사람은 예수님께 감사하지 아니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지 못했습니다.
나는 사마리아 사람과 같습니까? 아니면 나머지 아홉 사람과 같습니까? 예수님은 나의 감사를 기뻐하십니다. 내가 예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셋째로, 예수님은 나에게 복 주시기를 바라십니다(19절).
예수님은 언제나 나에게 풍성하신 긍휼을 베푸십니다. 내가 잊지 않고 예수님께 감사하면, 예수님은 나의 감사를 기쁘게 받으십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나에게 더 크고 더 풍성한 복을 내리십니다.
눅17: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앞서 살펴본 대로,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의 행위에 응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응답은 세 개의 질문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뿐만 아니라, 그 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함께 듣도록 그 질문들을 던지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을 향하여 직접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라.” 말하자면 그 때까지도 사마리아 사람은 예수님의 발 아래에 그대로 엎드려 있었던 것입니다. 그만큼 그는 예수님께 깊이 감사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14절에서, 예수님은 그에게 제사장에게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창조주 예수님은 그가 깨끗함을 받았다고 밝히셨습니다. 따라서 그는 어디든지 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에게 “일어나 가라”고, 어디든지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의 믿음을 인정하시면서, 그에게 구원을 허락하셨습니다. 그 결과 그는 육체의 병도 고침을 받고, 더 나아가서 영혼의 병도 고침을 받았습니다.
나머지 아홉도 육체의 병은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영혼은 병든 상태로 남아있었습니다. 오직 사마리아 사람만 육체의 병과 아울러 그보다 더 절실한 영혼의 병을 고침 받았습니다. 그래서 오직 사마리아 사람만이 구원을 받아 영생을 얻었습니다.
나머지 아홉도 예수님의 능력과 긍휼은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예수님께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발 아래에 엎드리지도 않았고, 예수님께 감사하지도 않았습니다.
사실 그들 아홉은 그 당시 유대인들의 완전한 축소판이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에게 계속해서 구하기만 했습니다. “우리의 병을 고쳐주옵소서. 우리에게서 더러운 귀신들을 내쫓아주옵소서. 우리에게 떡을 주옵소서. 우리에게 표적을 보여주옵소서.”
예수님은 긍휼이 풍성하시기에, 그들의 간구를 다 들어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발 아래에 엎드리지도 않았고, 예수님께 감사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더 이상 긴 말씀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예수님이 아니시라면, 내가 어떻게 죄 사함을 받겠습니까? 예수님이 아니시라면, 내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아니시라면, 나는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나를 향하신 예수님의 긍휼은 너무나도 풍성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예수님께 감사합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감사를 기뻐하시며, 나에게 더 크고도 더 풍성한 복을 내리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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