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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죽은 자를 살리신 예수님! (막5:35~43)

죽은 자를 살리신 예수님! (막5:35~43)

 

마가복음 4장과 5장에는 예수님이 행하신 네 가지의 놀라운 이적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가운데서 이미 세 가지 이적들을 차례대로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마지막 네 번째 이적을 살펴볼 차례입니다.

첫째 이적은 풍랑을 잔잔케 하신 것이었습니다. 갈리리 바다의 거센 풍랑 때문에 제자들이 죽게 되었다고 절망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심으로, 자연계를 다스리시는 권세를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둘째 이적은 군대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신 것이었습니다. 거라서 사람들은 아무도 그를 제어할 수 없다고 절망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군대만큼 많은 귀신이 들린 사람을 온전하게 고쳐주심으로, 영의 세계를 다스리시는 권세를 나타내셨습니다.

셋째 이적은 혈루증으로 앓던 여자를 고치신 것이었습니다. 그는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으며, 가진 것을 다 허비했습니다. 그렇지만 병이 낫지 않아 절망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그를 고쳐주심으로, 육의 세계를 다스리시는 권세를 보이셨습니다. 

넷째 이적은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이었습니다. 야이로가 예수님을 모시고 그의 집으로 가는 도중에, 그의 딸이 죽었다는 절망적인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죽은 딸을 살리심으로, 죽음을 다스리시는 권세를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행여 절망적인 상황으로 인해서 낙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본문 36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십시오. 승리의 왕이 되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세상을 이길 힘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세 개의 장면으로 나누어집니다. 첫째 장면은 야이로의 집으로 가는 길입니다. 둘째 장면은 야이로의 집입니다. 셋째 장면은 야이로의 딸이 있는 곳입니다.


첫째로, 야이로의 집으로 가는 길입니다(35~36절).


막5:35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예수님이 야이로와 함께 그의 집으로 가실 때였습니다. 큰 무리가 예수님을 에워싸 밀었습니다. 그 가운데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예수님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나음을 받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과연 그 여자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을 때, 그 여자의 병이 순식간에 깨끗하게 나았습니다. 그 순간 예수님은 자신에게서 능력이 나간 줄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리 가운데서 일부러 그 여자를 찾으셨습니다.

그 여자는 예수님 앞에 엎드려서, 모든 사실을 여쭈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 여자를 향하여 따뜻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 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아직 예수님이 그 여자에게 말씀하고 계실 때였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서 보낸 사람들이 그 곳으로 왔습니다. 그들은 야이로에게 절망적인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그들의 생각은 무엇이었습니까? 야이로의 딸이 병들어 있는 동안은, 예수님이 그를 고치실 수 있다고 그들은 여겼습니다. 그러나 야이로의 딸이 죽고 난 뒤에는, 예수님도 그를 어찌할 수 없을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너무 늦었다는 것입니다. 


막5: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예수님은 야이로의 집에서 온 사람들이 야이로에게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셨습니다. 분명 그 때 야이로는 “이 일을 어쩌나”하면서,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와 같은 상황에서도 전혀 동요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평소와 같이 평온하신 모습으로 야이로를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두려움은 믿음을 약화시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야이로에게 믿음으로 두려움을 물리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기 14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홍해 앞에 이르렀을 때, 애굽 군대가 그들을 추격해왔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담대하게 온 이스라엘을 이끌고 홍해를 건넜습니다. 

사무엘상 17장에 있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블레셋의 거인 골리앗 때문에, 온 이스라엘이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담대하게 물매로 돌을 던져서 골리앗을 쓰러뜨렸습니다.

하나님에게는 절망적인 상황이 결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끝이 오히려 하나님에게는 시작이 될 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에게 절망적인 상황이란 결코 있을 수가 없습니다.

마음에 낙심되는 일이 생겼습니까? 두려워하지 말고, 예수님을 믿기만 하십시오. 예수님은 자연 세계도, 영의 세계도, 육의 세계도, 그리고 죽음도 다스리십니다. 예수님이 나의 능력이 되사, 나에게 모든 문제를 이겨낼 힘을 주실 것입니다.


둘째로, 야이로의 집입니다(37~39절).


막5:37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야이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위로를 받고, 예수님과 함께 다시금 자기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분명 이 때 무리는 더 심하게 예수님을 에워싸 밀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혈루증으로 앓던 여자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댐으로 나은 것을 방금 목격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더 이상 무리가 따라오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열두 제자들 가운데 단 세 사람, 곧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라오게 하셨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나머지 아홉에게는 무리가 따라오는 것을 막도록 하셨을 것입니다.

이들 세 사람은 예수님의 측근이었습니다. 막9:2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변화산에 올라가셨을 때 이들 세 사람만 예수님과 함께 했습니다. 또한 막14:33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도 이들 세 사람만 예수님 곁에 있었습니다.

우리도 이들 세 사람처럼 예수님의 충성스러운 일꾼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이들처럼 예수님의 충성스러운 증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이들 세 제자처럼 예수님의 인정을 받으며, 모든 일에 귀하게 쓰임을 받기 바랍니다.


막5:38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서는 이미 장례식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나라 장례식의 분위기는 정숙한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장례식은 떠드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들의 장례식은 매우 소란스럽습니다. 그들의 장례에는 세 가지 요소가 필수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첫째, 슬픔을 적극적으로 표현해야 했습니다. 큰 소리로 울어야 했습니다. 또한 옷을 찢어야 했습니다. 그들의 전통은 옷을 찢는 방법을 39 가지로 자세하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장례식에 갈 때는 이미 여러 차례 찢은 적이 있는 옷을 입고 갔습니다. 

둘째, 곡하는 사람을 불러야 했습니다. 이는 돈을 받고서 직업적으로 울어주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가 하는 역할은 슬픔을 자극해서, 울음을 촉진시키는 일이었습니다. 렘9:17 말씀이 밝히는 대로, 이 일은 주로 여자들이 담당했습니다.

셋째, 피리 부는 자들을 불러야 했습니다. 오늘 본문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마9:23 말씀을 보면, 이러한 사실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피리 부는 자들이 하는 역할도 역시 장례식의 슬픈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전통에 의하면, 아무리 가난하더라도 적어도 두 명의 피리 부는 자와 한 명의 곡하는 여자를 불러야만 했습니다. 야이로는 그 마을의 유지였습니다. 그러니 그 때 피리를 부는 소리, 곡하는 소리, 옷을 찢으며 슬피 우는 소리로 얼마나 소란했겠습니까? 


막5:39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예수님이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 이르셨을 때, 예수님은 이미 안에서 장례가 치러지고 있음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집에 들어가셔서, 장례를 치르고 있는 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유대인들의 전통에 따라서, 지금 그들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을 하고 있다고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곧이어서 그 이유를 밝히셨습니다.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물론 야이로의 딸에게 아직은 실날 같은 목숨이 붙어있다는 뜻으로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야이로의 집에서 보냄을 받은 사람들이 야이로에게 그의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할 때, 예수님은 그들이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셨습니다. 

따라서 야이로의 딸에게 더 이상 목숨이 붙어 있지 않음을 예수님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마치 잠자는 아이를 깨우는 것처럼, 예수님은 곧 그 아이를 일으키실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요11:11을 보면, 나사로가 죽었을 때도 예수님은 그가 잠들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행7:60을 보면, 스데반이 순교할 때도 잔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또한 살전4:13에서도 성도의 죽음을 잔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그리고 예수님을 따라서 성경의 기자들은 죽음을 잠잔다는 말로 표현했겠습니까? 죽음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다가 깨는 것처럼, 다시금 일어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우리의 호흡도 끝날 것입니다. 고후5:8 말씀이 밝히는 것처럼, 그 때 우리의 영혼은 우리의 몸을 떠나서 예수님과 함께 있게 됩니다. 그래서 눅23:43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회개한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잠을 자는 것은 성도의 영혼이 아니라, 성도의 몸입니다. 성도가 육체의 장막을 떠나면, 성도의 영혼은 그 즉시 예수님이 계신 천국으로 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까지, 그의 몸은 잠을 자게 됩니다.

그러다가 고전15:51~53 말씀이 밝히고 있듯이,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 성도들의 잠자던 몸들이 다 일어납니다. 그 때 그들의 몸은 썩지 아니하며 죽지 아니함을 입게 됩니다. 말하자면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부활의 몸을 입으신 것처럼, 천국에 있는 성도들의 영혼도 부활의 몸을 입습니다. 말하자면 성도들의 영혼과 육체가 온전한 상태로 재결합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해서 롬8:17 말씀처럼, 성도들은 예수님과 함께 영원한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이와 같이 성도의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성도의 영혼은 예수님이 계신 천국으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성도의 몸은 잠시 잠이 듭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 깨어나서 영화스럽게 변화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전연 없습니다. 


셋째로, 야이로의 딸이 있는 곳입니다(40~43절).


막5:40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떠들며 울던 자들은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 눅8:53을 보면, “그들이 그 죽은 것을 아는 고로 비웃더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그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야이로의 딸이 죽은 지도 이미 몇 시간이 흘렀습니다. 따라서 그의 피부 빛도 변했을 것이며, 그의 몸도 굳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가 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몰라도 너무 모르신다고,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동요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비웃는 그들을 다 내보내셨습니다. 그리고서 예수님은 그 아이의 부모와 예수님의 세 제자들, 곧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데리시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막5: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예수님은 그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말씀만 하셔도 되셨습니다. 민19:11 말씀을 보면, 사람의 시체를 만지면 부정해집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앞에 나오는 23절에서 야이로는 예수님에게 아이의 몸에 손을 얹어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간구를 들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야이로가 원하는 것 이상으로 들어주셨습니다. 참으로 긍휼이 풍성하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면 이 때 예수님이 죽은 아이의 손을 잡으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부정해지셨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이 손을 대시는 순간, 그 아이는 살아났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죽은 아이의 손이 아니라, 살아있는 아이의 손을 잡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아이의 손을 잡으신 채, 그에게 “달리다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이 사용하던 아람어를 그대로 음역한 것입니다. “달리다”는 소녀를 뜻합니다. 그리고 “굼”은 일어나라는 뜻입니다.

본시 유대인들의 언어는 히브리어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후에는, 바사 사람들이 쓰던 아람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아람어로 말씀하시며, 아람어로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은 그 당시 모든 나라들이 공용어로 여기던 헬라어로 기록되었습니다. 더군다나 마가복음은 로마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쓰여졌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아람어인 “달리다굼”이라는 말을 들으면, 그 말을 그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 “달리다굼”이라는 말을 번역하고 있습니다.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그러니까 “달리다굼”을 그대로 직역해서 “소녀야 일어나라”고 말씀하지 않고, “내가 네게 말하노니”라는 말씀을 덧붙여서 의역을 한 셈입니다.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라.” 야이로나 그의 아내는 아침마다 그렇게 말하면서, 그들의 사랑하는 딸을 깨웠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마치 그 아이를 잠에서 깨우시듯이, “얘야 이제는 일어나야지”라는 뜻으로 “달리다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막5:42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분명 야이로의 딸은 오랫동안 앓아 누웠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의 몸은 쇠약할 대로 쇠약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곧 일어나서 걸었습니다. 누가 부축해줄 필요도 없었습니다. 기운이 없어서 겨우겨우 움직이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물론 소녀라고 해서, 아이라고 해서, 어린 딸이라고 해서, 나이가 아주 적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습니다. 결혼을 할 나이였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열두 살 여자에게 알맞고도 건강한 신체를 순간적으로 또한 온전하게 창조하셨던 것입니다.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걷는 것을 보면서, 방안에 있는 사람들, 곧 소녀의 부모와 예수님의 세 제자들은 어떠한 반응을 보였습니까? 그들은 곧 크게 놀라고 놀랐습니다. 말하자면 그 순간 그들은 너무나도 놀란 나머지, 정신이 하나도 없을 정도였던 것입니다.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을 설명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한 가지뿐입니다.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죽은 자를 순식간에 살리셨고, 또한 그에게 적합한 신체를 순식간에 창조하셨습니다.


막5:43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여기서 예수님은 두 가지를 명하셨습니다. 첫째,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방안에 있는 다섯 사람을 많이 경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와 같이 명하신 이유에 대해서는 따로 밝히지를 않고 있습니다.

사실 그들이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가 살아난 사실은 금새 소문이 퍼져나갈 것입니다. 우선 야이로의 집에서 떠들며 울던 자들이 다 알게 될 것입니다. 아울러 야이로의 딸이 걸어 다니면, 마을 사람들도 자연히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마9:26을 보면, “그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더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이 일은 결코 감추어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왜 예수님은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명하셨습니까? 우리는 뒤따르는 말씀에서 그 이유를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둘째,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명하셨습니다. 소녀의 부모에게 명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야이로와 그의 아내는 너무나 기뻐서 어찌할 바를 몰랐을 것입니다. 분명 그들은 그대로 뛰어나가서, “예수님이 내 딸을 살려주셨다!”라고 외치고 싶었을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그 곳으로 우르르 몰려들 것입니다. 그리고는 요6:15 말씀과 같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억지로 붙들어 자기들의 임금으로 삼고자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많이 경계하셨습니다.

그 대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명하시기를,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동안 소녀는 병 때문에 먹지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건강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얼마든지 먹을 수 있었고, 또한 원기가 왕성한 몸이기에 먹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의 명에 따라서, 야이로와 그의 아내는 조용하게 그의 딸에게 먹을 것을 갖다주었을 것입니다. 그런 동안에 오늘 본문 다음절인 막6:1 말씀처럼,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데리시고 조용히 그 곳을 떠나 예수님의 고향인 나사렛으로 가실 수 있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은 죽음도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죽음은 잠을 자는 것입니다. 깨어나면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우리의 몸도 영화롭게 부활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예수님의 풍성하신 긍휼도 다시금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멀리서도 능력을 행하실 수 있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야이로의 집까지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소녀의 손을 잡아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소녀의 먹을 것까지도 자상하게 챙겨주셨습니다.

이 시간 예수님은 우리 각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죽은 자를 살리신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위로를 받으며, 새롭게 용기를 내어서, 세상을 이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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