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에서 배척받으신 예수님! (막6:1~6)
마17:20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만일 우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능력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믿음의 힘입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여자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병이 깨끗하게 나음을 받았습니다.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죽은 딸이 살아났습니다. 이와 같이 믿음의 힘은 참으로 대단합니다.
반면에 불신앙의 결과도 놀랍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그들의 불신앙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권능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이와 같이 불신앙은 예수님이 주시는 복을 막아버리는 벽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불신앙의 사람이 되지 말고,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삽시다. 그리해서 늘 예수님 안에서 복되고도 풍성한 삶을 살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오늘 본문의 말씀을 차례대로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세 대지로 나누어질 수 있습니다. 첫째, 고향으로 가신 예수님입니다. 둘째, 고향에서 배척을 받으신 예수님입니다. 셋째, 고향 사람들의 불신앙에 놀라신 예수님입니다.
첫째로, 고향으로 가신 예수님입니다(1절).
막6:1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따르니라
예수님은 가버나움에 있는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서 나오셔서 그의 고향으로 가셨습니다. 마2:1 말씀처럼, 예수님은 유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습니다. 그러나 눅4:16 말씀처럼, 예수님은 갈릴리 나사렛에서 계속해서 자라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단 한번도 “베들레헴 예수”라고는 불리지 아니하셨습니다. 막10:47, 14:67, 16:6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예수님은 언제나 “나사렛 예수”라고 불리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예수님의 고향이란 바로 갈릴리 나사렛을 가리킵니다.
막1:9 말씀이 밝히는 것처럼,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나사렛을 떠나셨습니다. 그 후 한 동안 예수님은 유대와 갈릴리의 여러 곳을 두루 다니시면서 사역하셨습니다. 그러다가 누가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처음으로 그의 고향 나사렛을 방문하셨습니다.
안식일에 예수님은 그 곳의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사61:1 이하의 말씀을 읽으셨습니다. 메시야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예언이 그들에게 응하였음을,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바로 메시야이심을 그들에게 밝히셨습니다.
그러나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근 삼십 년 동안 예수님과 같은 마을에서 살았던 그들의 고정관념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막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불신앙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러자 눅4:28 이하의 말씀과 같이, 회당에 있던 나사렛 사람들은 다 크게 화를 냈습니다. 그러더니 그들은 예수님을 산 낭떠러지로 끌고 가서, 예수님을 밀어 뜨려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이적을 행하셔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가셨습니다.
아무튼 예수님은 누가복음 4장에서 처음으로 그의 고향 나사렛을 방문하셨습니다. 그로부터 한 일년이 지났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두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더 그의 고향 나사렛을 방문하셨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그의 고향 나사렛을 방문하셨습니까? 고향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더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였습니까? 아니면 십자가를 지시기 전, 그의 가족들과 마지막으로 작별인사를 나누시고 싶으셨기 때문입니까? 모두 다 일리가 있는 말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이 나사렛으로 가신 또 다른 목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1절은 “제자들도 따르니라”고 끝맺음을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훈련시키시기 위하여, 그들을 데리시고 나사렛으로 가셨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다음에는 예수님이 열두 제자들을 불러서, 둘씩 둘씩 짝을 지워 각 마을로 보내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귀신을 내쫓으며, 병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전하다 보면, 긍정적인 반응과 부정적인 반응을 동시에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막6:10 말씀처럼, 그들은 사람들의 영접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막6:11 말씀처럼, 그들은 사람들에게서 배척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배척받으시는 모습을 미리 제자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그들도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번에 예수님이 나사렛을 방문하신 목적은 제자들의 훈련을 위한 것이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살아가다 보면, 형통할 때도 있고 곤고할 때도 있습니다. 형통하다고 자만하지 말고, 곤고하다고 낙심하지 맙시다. 예수님은 이 두 가지를 병행해서 우리를 훈련시키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잘 훈련받아서, 더 귀하게 쓰임 받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고향에서 배척을 받으신 예수님입니다(2~3절).
막6:2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안식일이 되어, 예수님은 나사렛에 있는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날도 회당에 모인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그 날 사람들에게 가르치신 내용은 기록하고 있지를 않습니다. 단지 그 결과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듣고서, 그 날 회당에 모인 많은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마7:29 말씀과 같이,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권위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언제나 확신에 차있었습니다. 또한 눅4:22 말씀처럼,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은혜로웠습니다.
또한 요7:15 말씀처럼, 예수님은 배우지 아니하셨지만 모든 것을 다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에는 결코 막힘이 없었습니다. 또한 요7:46 말씀처럼, 예수님의 말씀은 독특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누구도 감히 흉내내지 못할 만큼 깊은 진리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그 날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예수님의 권위 있는 말씀, 은혜로운 말씀, 또한 깊은 진리를 가르치면서도 누구라도 쉽게 납득할 수 있는 말씀을 듣고서 모두가 놀랐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예수님을 영접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처음 방문 때처럼,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들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때도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배척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길 가요, 돌밭이요, 가시떨기가 있는 땅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이 결실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시금 본문을 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그저 놀라기만 할 뿐, 곧이어 예수님을 무시하는 듯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한 마디로 이 사람과 이런 것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이 사람”이라고 얕잡아 불렀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이렇게 물었습니다.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그러니까 그들이 말한 “이런 것”이란 예수님의 지혜와 예수님의 권능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지혜는 무한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알고 싶어하는 모든 것을 남김없이 다 가르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7장에 나오는 산상수훈을 한번 예로 들어봅시다. 예수님은 폭넓은 주제들을 아주 깊이 있게 가르치셨습니다.
복, 박해, 상, 사명, 율법, 살인, 예배, 간음, 이혼, 맹세, 복수, 원수, 구제, 기도, 금식, 재물, 염려, 비판, 거룩, 외식, 멸망, 생명, 거짓 선지자, 열매, 순종, 지혜 등등 예수님은 삶의 모든 분야를 총망라해서 가르치셨습니다. 진실로 예수님의 지혜는 무한하십니다.
예수님의 권능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자연을 다스리시며, 풍랑을 잔잔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영을 다스리시며, 귀신들을 내쫓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육을 다스리시며, 모든 질병을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다스리시며, 죽은 자들을 살리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습니다. 바다 위로 걸으셨습니다.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요21:25 말씀처럼, 이외에도 예수님이 행하신 권능은 너무나도 많아서 낱낱이 기록할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지혜와 권능은 무한하십니다. 물론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의 지혜와 권능 자체를 부인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도 인정했습니다. 단지 그들은 예수님이 과연 어디서 예수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그런 지혜와 권능을 얻었느냐고 물었습니다.
물론 막3:22에 등장하는 예루살렘의 서기관들처럼, 그들도 예수님은 바알세불이 지핀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놀라운 권능들을 행하시는 것은 귀신의 왕을 힘입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지혜에 대해서는 그렇게 말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거짓말쟁이인 사탄이 진리를 말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잠9:10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이 틀림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지혜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면, 예수님의 권능도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요3:2에서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 곧 예수님이 행하시는 권능을 보면서,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렇지만 나사렛 사람들은 이토록 분명한 사실을 외면한 채,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고 물었습니다. 증거가 불충분하기 때문에, 그렇게 묻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믿지 않으려고 작정했기 때문에, 그와 같이 물은 것뿐이었습니다.
신앙은 결단입니다. 막9:24 말씀처럼,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입니다. “내가 믿나이다.” 먼저 믿기로 작정하고 결단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아뢰십시오. 그러면 절로 마음이 열릴 것입니다.
막6: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마음을 닫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에게 있는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권능을 인정하려 들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예수님의 직업과 예수님의 가족 관계를 들먹였습니다. 예수님을 비하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원어성경을 보면, 그들은 먼저 예수님의 직업을 언급했습니다. “이 사람이 목수가 아니냐?” 그런 뒤에 그들은 예수님의 가족 관계를 거론했습니다.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아무튼 그들은 예수님의 직업을 언급했습니다. 마13:55에 의하면, 마리아의 남편 요셉의 직업은 목수였습니다. 예수님은 요셉의 직업을 그대로 이어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삼십 세에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까지, 나사렛에서 목수의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사장도, 서기관도, 바리새인도, 회당장도 아니셨습니다. 예수님은 목수에 불과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들추어내는 나사렛 사람들의 의도는 뻔합니다. 예수님은 그 자신의 주장처럼, 메시야나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곧이어 그들은 예수님의 가족 관계를 거론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미 요셉은 죽고 난 뒤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이라고 부르지 않고,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불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설사 요셉이 죽은 뒤라도,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이 정상적입니다. 그런데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은연중에 예수님의 아버지는 누구인지 모른다는 식으로 비아냥거렸던 것입니다.
그들은 연이어 예수님의 형제들을 밝히고 있습니다.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나중에 야고보는 야고보서를, 유다는 유다서를 기록했습니다. 나머지 두 사람, 요셉과 시몬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은 또한 예수님의 누이들을 언급했습니다.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예수님의 누이들은 그들과 함께 그 곳에 있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누이들은 결혼을 해서, 그대로 나사렛에 머물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왜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직업과 예수님의 가족 관계를 언급했습니까? 오늘 본문 3절 끝 부분입니다. “예수를 배척한지라.”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하기 위해서, 일부러 예수님의 직업과 예수님의 가족 관계를 들추어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직업이나 예수님의 가족들이 예수님의 무한하신 지혜나 권능과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이미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으려고 작정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사실들을 괜스레 들추어내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와 같은 경우를 겪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교회로 인도했습니다. 나중에 느낌을 물어보면, 이렇게 대답합니다. “사람들이 냉냉하고 너무 사랑이 없는 것 같아. 내 앞에 앉은 사람은 왜 그렇게 졸아? 설교는 따딱해서 재미도 없고, 길기만 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문제가 아닙니다. 설교의 방법이나 길이도 문제가 아닙니다. 죄를 회개하며,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는 것이 핵심입니다. 믿지 않으려고 작정을 하니까, 쓸데없이 이것저것 핑계를 댈 뿐입니다.
그러나 구원받기로 작정된 사람은 다릅니다. 예수님을 더 알고 싶어합니다. 바르게 신앙 생활을 하기 바랍니다. 자연히 그에게는 말씀이 송이꿀보다 더 달게 여겨집니다. 그 결과 그런 사람은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 육십 배, 또는 백 배의 결실을 하게 됩니다.
행16:14을 보면, 예수님이 루디아의 마음을 여셨습니다. 그래서 루디아는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듣고, 그가 받은 말씀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마음도 활짝 열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우리도 듣고 받은 말씀을 그대로 따르면서 살기 바랍니다.
셋째로, 고향 사람들의 불신앙에 놀라신 예수님입니다(4~6절).
막6:4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하시며
나사렛은 예수님의 고향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배척하는 고향 사람들을 향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눅4:24을 보면, 예수님이 나사렛에 처음 가셨을 때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한 요4:44을 보면, 예수님이 사마리아를 떠나서 갈릴리로 가실 때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그 당시에 보편화된 하나의 속담이었을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존경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지자가 자기 고향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합니다. 시기와 질투 또는 편견 등으로 인해서 선지자를 존경을 하지 않고, 오히려 비하시켜 버리기 일쑤입니다.
우리 나라 속담에도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했습니다. 나와 관계가 없는 사람이 땅을 사면, 전연 배가 아프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나와 가까운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픕니다. 시기하는 마음, 질투하는 마음, 무시하려는 마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그의 고향이라는 말씀에 그의 친척 그리고 그의 집, 곧 그의 가족까지도 덧붙이셨습니다. 막3:21을 보면, 예수님의 친족들은 예수님을 미쳤다고 여겼습니다. 또한 요7:5을 보면, 처음에는 예수님의 형제들까지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로서는 나사렛 사람들 전체가 총체적으로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마도 그 때는 단 한 사람, 곧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만 예수님을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 때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까요?
빌2:6~7 말씀처럼,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자기를 비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나사렛에 사시면서, 그 곳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권능을 전연 행하지 아니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나사렛 사람들은 계속해서 예수님을 목수로만, 또한 보잘것없는 집안의 가족으로 알기만을 고집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예수님의 지혜와 예수님의 권능에 놀라면서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기는 거부했습니다.
선지자의 고향처럼 되지 맙시다. 그러면 말씀이 들어오지를 않습니다. 말씀을 들어도 결실을 하지 못합니다. 갓난아이처럼 신령한 젖을 사모합시다. 어린아이처럼 늘 나를 낮춥시다. 그리하면 예수님이 나의 영적 갈급함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막6:5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예수님은 그의 고향 나사렛에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의 권능에도 한계가 있다는 뜻입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의 권능은 무한하신 것이 아니라, 유한하신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결코 그럴 수가 없습니다.
5절 하반부를 보면, 이 사실은 분명해집니다.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예수님의 권능은 영원하시며 무한하시다는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그 곳에서도 의도적으로 소수의 병자들은 고쳐주셨습니다.
마13:58 말씀처럼, 그들의 불신앙 때문에 예수님은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신 것입니다. 말하자면 마7:6 말씀과 같이, 예수님은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아니하셨습니다. 또한 그의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권능을 행하시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신 것을 밝히 드러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더 이상 그들에게 권능을 행하실 필요가 없으셨던 것입니다.
막6:6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예수님은 고향 사람들의 불신앙을 이상히 여기셨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동사 “이상히 여기다”의 본래 뜻은 “놀라다”입니다. 신약성경에는 “놀라다”라는 동사가 대략 30번 정도 사용되었습니다. 언제나 사람들이 예수님의 지혜와 권능에 놀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놀라신 경우도 두 번 있었습니다. 한번은 오늘 본문에 있는 바와 같이, 예수님은 나사렛 사람들의 불신앙을 보시고 놀라셨습니다. 또 다른 한번은 마8:10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예수님은 가버나움의 백부장에게 있는 큰 믿음을 보시고 놀라셨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불신앙으로 인해서 예수님을 부정적으로 놀라게 해드렸습니다. 반면에 가버나움의 백부장은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믿음으로 예수님을 긍정적으로 놀라게 해드렸습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을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간구대로 권능을 행하셔서, 그의 하인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사렛에서는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렛을 떠나셔서, 그 후에는 두 번 다시 그 곳을 찾지 아니하셨습니다.
나는 나사렛 사람들처럼 되어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가버나움의 백부장처럼 되어야 하겠습니까? 선택은 내가 하는 것입니다. 믿지 않으면, 예수님은 떠나십니다. 그 결과 예수님의 권능을 볼 수 없습니다. 응답을 받지도 못합니다. 복을 누리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믿으면 예수님의 권능을 봅니다. 응답을 받고, 복도 누립니다. “내가 믿나이다.” 먼저 결단하십시오. 그리고 나서 간구하십시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믿음의 사람이 되어서, 예수님을 기쁘시게 합시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늘 복되게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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