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들을 파송하신 예수님! (막6:7~13)
오늘 본문 바로 앞 절인 막6:6 하반부에 있는 말씀입니다.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예수님은 그의 고향 나사렛에서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나사렛을 떠나신 예수님은 갈릴리의 모든 촌을 두루 다니시면서 가르치셨습니다.
지금까지는 언제나 예수님이 혼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항상 예수님이 홀로 권능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다 보니 누구든지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듣고 예수님의 권능을 보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와야만 했습니다.
자연히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예수님의 몸에 손을 대려고, 예수님을 에워싸 밀곤 했습니다. 몰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예수님이 모든 촌을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기란 용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느 듯 예수님의 공생애도 절반 가량이 지났습니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다니셔야 할 마을들은 아직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때부터 그를 대신하여 그의 제자들을 각 마을에 파송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대로, 그들도 가르칠 것입니다. 예수님이 권능을 행하신 대로, 그들도 권능을 행할 것입니다. 그만큼 복음 전파의 효과는 커질 것입니다. 아울러 사람들이 일부러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몰려들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파송을 받는 제자들에게 몇 가지의 중요한 당부를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깊이 새겨들어야 할 귀중한 말씀들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증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오늘 본문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차례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권능을 주셨습니다(7절).
막6:7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예수님은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는 둘씩 둘씩 짝을 지으셔서, 갈릴리의 모든 촌으로 파송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여섯 팀으로 나누어서 각 마을로 파송하신 것입니다.
물론 지난 일년 동안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많은 가르치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더 훈련을 받아야 했습니다. 따라서 전4:9 말씀과 같이, 둘이 함께 한다면 서로 도와가면서 자기들이 해야 할 일을 좀더 잘 감당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눅10:1을 보면, 예수님이 칠십 인을 세우셨을 때도 둘씩 보내셨습니다. 막11:1을 보면,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준비하게 하실 때도 두 제자를 보내셨습니다. 또한 막14:13을 보면, 유월절 음식을 먹을 객실을 준비하게 하실 때도 두 제자를 보내셨습니다.
다시금 본문으로 되돌아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그들에게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셨습니다. 눅9:1을 보면, 예수님은 그들에게 병을 고치는 권능도 주셨습니다. 또한 마10:8을 보면, 예수님은 그들에게 죽은 자를 살리는 권능도 주셨습니다.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은 예수님이 행하신 권능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그가 행하신 권능들을 그의 제자들도 행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에, 그 자신의 권능들을 그대로 그들에게 주실 수가 있으셨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이와 같은 권능들을 주셨습니까? 먼저 예수님은 그들의 가르침에 권세를 더하여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행하는 놀라운 권능들을 보면서, 그들의 가르침을 사실로, 또한 진리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이 행하는 권능을 통하여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예수님의 긍휼을 나타내기를 바라셨습니다.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어떠한 권능이라도 다 행하실 수 있으십니다.
예컨대 눅4:9에서 마귀가 시험한 대로, 예수님은 얼마든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실 수도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그런 식으로는 자신의 권능을 행하시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푸실 때만, 그의 권능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내쫓으신 것도 귀신 들린 사람을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치신 것도 병든 자를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리신 것도 죽은 자의 가족들을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제자들도 권능을 통하여, 예수님의 긍휼을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권능을 주신 목적은 두 가지였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에 권위를 더하시며, 그들을 통하여 예수님의 긍휼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날은 사도 시대가 아닙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주어진 놀라운 권능들이 우리에게는 주어지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예수님의 가르치심이 있습니다. 아울러 우리도 얼마든지 다른 사람들을 긍휼히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엡4:15 말씀과 같이, 복음을 전하며 진리를 가르치되 사랑 안에서 합시다. 그리하면 예수님이 우리를 사용하셔서 죽은 영혼들을 살리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통하여 병든 심령들을 고치시며, 그들의 삶을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부하셨습니다(8~11절).
막6:8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막6:9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명하시기를, 여행을 위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이 그들을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삶을 책임지시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 예수님은 제자들과 늘 함께 하시면서, 친히 그들을 보살펴주셨습니다. 이제 그들은 예수님을 떠나서 전도 여행을 가야 했습니다. 그럴지라도 그들은 걱정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변함없이 그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을 돌보실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몇 가지 품목을 예로 드셨습니다. 첫째, 지팡이입니다. 옛날 이스라엘에는 높은 산 위에 있는 동네가 많았습니다. 따라서 지팡이를 짚고 다녀야 여행하기가 용이했습니다. 게다가 짐승들이 성가시게 굴 때도, 지팡이는 요긴하게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이 여행을 갈 때, 지팡이를 들고 가는 것을 허용하셨습니다. 그러나 마10:10과 눅9:3 말씀과 같이, 예수님은 여분의 지팡이는 허락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들의 지팡이가 부러지지 않도록, 예수님이 돌보실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둘째, 양식입니다. 그들은 여행 도중에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공중의 새를 기르시는 하나님이 때마다 일용할 양식을 그들에게 공급해주실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셋째, 배낭입니다. 그 안에 양식을 넣을 수도 있습니다. 또는 여분의 지팡이나 신발 또는 옷을 넣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모든 것을 책임지실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예비해야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배낭을 가지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넷째, 전대의 돈입니다. 전대란 돈을 넣어서 어깨나 허리에 두르는 띠를 가리킵니다. 먹을 때가 되면, 주께서 먹을 것을 공급하실 것입니다. 잠잘 때가 되면, 주께서 잠잘 곳을 마련해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전대의 돈을 가질 이유도 없었습니다.
다섯째, 신입니다. 마10:10을 보면, 신을 가지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분의 신은 가지지 말라는 뜻입니다. 지금 신고 있는 신만으로도 족합니다. 신이 떨어져서 그들의 발이 부르트는 일이 없도록, 주께서 돌보실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여섯째, 옷입니다. 두 벌의 옷도 필요치 아니했습니다. 그 때 입고 있던 한 벌의 옷만으로도 족했습니다. 들의 백합화를 입히시는 하나님이 그들을 입히시며, 그들의 옷이 헤어지지 아니하도록 돌보실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그들이 전도 여행을 하면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주께서 모든 것을 책임지실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전적으로 예수님을 의뢰해야 했습니다.
눅22:35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전대와 배낭과 신발도 없이 보내었을 때 부족한 것이 있더냐?” 제자들의 대답은 “없었나이다”였습니다. 그들이 전도 여행을 할 때,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면서 그들을 돌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일생토록 그렇게만 살아야 합니까? 다시 말해서 옷도 한 벌만 입고, 신발도 하나만 신고 살아야 합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그 때 제자들은 훈련 중에 있었습니다. 그들의 훈련은 며칠, 길어야 몇 주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훈련을 통해서 전적으로 예수님을 의뢰하는 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여행을 위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사정이 다릅니다. 이것은 그 다음절인 눅22:36 말씀을 보면 분명해집니다.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준비하며, 예비하며, 스스로를 보호하며 사는 것이 우리의 일상적이며 지혜로운 삶입니다.
그러나 살아가다 보면, 형편이 어려워질 때가 있습니다.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예수님은 변함없이 나와 함께 하시며, 나를 돌보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면, 예수님이 나의 부족을 채워주십니다.
또 한 가지 예수님의 말씀에서 마음에 새겨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탐심을 없애라는 교훈입니다. 귀신을 내쫓으며, 병을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권능입니다. 따라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부를 축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배낭도 가지지 말고, 전대의 돈도 가지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것들이 있으면, 탐하는 마음이 생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마10:8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놀라운 권능들을 주시되, 아무런 값도 없이 거저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도 자기들이 받은 권능들을 행하되, 사람들에게 거저 행해야만 마땅했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면 목회자도 사례비를 받지 말아야 합니까? 그런 뜻은 아닙니다. 마10:10에서 예수님은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9:14에서,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 예수님의 명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바라시는 바는 탐심을 없애라는 것입니다. 저도 탐심을 없애야 하고, 여러분도 탐심을 없애야 합니다. 우리 모두 탐심을 없애고, 예수님을 전적으로 의뢰합시다. 그리하면 예수님은 늘 우리에게 족한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막6:10 또 이르시되 어디서든지 누구의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
이제 예수님은 그들의 숙소에 관한 지침을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사람들 앞에서 놀라운 권능들을 행할 것입니다. 귀신을 내쫓으며, 병을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릴 것입니다. 그러면 분명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자기들의 집으로 모시고자 할 것입니다.
그러할 때 어떤 사람의 집에 머물러야 합니까? 마10:11에 의하면,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유한 자가 아니라 합당한 자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을 경외하며, 경건하게 살아가는 가정을 찾아야 합니다.
일단 합당한 자의 집을 찾아 거기에 들어가면, 그 곳을 떠나기까지는 그 집에서 유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환경이 좀더 좋은 집을 찾아서 옮겨갈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느 집으로 인도하시든지, 처음 인도하신 그 집에서 계속 머물러야 합니다.
물론 잠자리가 불편할 수 있습니다. 먹는 음식도 보잘것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빌4:11 말씀과 같이,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면 딤전6:8 말씀과 같이,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열둘 가운데 한 사람은 그러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는 족한 줄을 몰랐습니다. 탐욕에 사로잡혀서, 결국은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바로 가룟 유다였습니다. 나의 안일보다 하나님의 일에 힘써야 합니다. 그리하면 예수님이 내게 족한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막6:11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에 발 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바로 얼마 전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의 고향 나사렛에서 배척받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듣고 예수님의 권능을 보면서도, 예수님을 영접하지 아니하고 배척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분명 자기들도 똑같은 경우를 당할 수 있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과연 사람들이 그들을 영접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말을 듣지도 아니할 때는 그들은 자기들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궁금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거기서 나갈 때에.” 거기서 나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집이나 어느 성이 그들을 영접하지 아니하면, 더 이상 그 곳에서 시간을 허비할 이유가 없습니다. 다른 곳으로 옮겨가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며 다른 사람들에게 권능을 행해야 할 것입니다.
거기서 나갈 때에는 발 아래 먼지를 떨어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일종의 유대인들의 풍속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부정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땅을 벗어났다가 되돌아올 때는 반드시 몸에 묻은 먼지를 떨어버렸습니다.
당시에는 먼지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여행을 하면, 신발이나 옷 또는 몸에 먼지가 묻기 마련이었습니다. 이방 땅의 먼지로 이스라엘을 더럽힐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로 들어오기 직전, 머리와 옷을 털었습니다. 또한 신발에 묻은 먼지도 떨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을 거부하는 것은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을 영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처럼 여기라는 뜻입니다.
자기가 의롭다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은 단호하게 예수님의 제자들을 배척할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그들이 받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심판뿐입니다. 예수님을 거부하고서는 아무도 구원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증거가 있으면, 긴말이 필요가 없습니다. 증거에 따라서 판결이 내려질 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들을 배척하는 곳을 떠나며, 그들의 발 아래 먼지를 떨어버립니다. 그러면 그것이 증거가 되어서, 그들을 배척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내려질 것입니다.
이에 따라 행13:51을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비시디아 안디옥을 떠나면서, 발의 티끌을 떨어버리며 그들을 대적하는 유대인들에게 증거를 삼았습니다. 또한 행18:6을 보면, 바울이 고린도에서 그의 옷을 털면서 그를 대적하는 유대인들에게 증거를 삼았습니다.
예컨대 내가 어떤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내 말을 들으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그 즉시 내 발 아래 먼지를 떨어버리면서, “너는 지옥행”이라며 그에게 증거를 삼아야 합니까? 그렇다면 우리 가운데도 구원받지 못했을 사람이 많았을 것입니다.
요점은 이러합니다. 고후5:20 말씀처럼, 먼저 충분히 권면하고 진심으로 간청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그가 끝끝내 예수님을 거부한다면, 그 때는 그를 이방인처럼 여기며 그를 떠나야 합니다. 더 이상 내 노력으로는 되지 않으니까, 하나님께 그를 맡겨버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증인은 어떠해야 합니까? 긍휼을 품어야 합니다. 전적으로 예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탐심을 없애고,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해야 합니다. 또한 분별력을 가지고 대처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당부를 늘 우리의 마음에 깊이 새기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순종했습니다(12~13절).
막6:12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막6:13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은 순종했습니다. 예수님이 보내셔서, 그들은 나갔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대로, 그들도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이 권능을 행하신 대로, 그들도 권능을 행했습니다. 언뜻 생각하면, 아주 신나는 일처럼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러하지 않았습니다. 마10:16을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들을 박해하는 현장 속으로 들어가야만 했습니다.
계속해서 마10:17 말씀입니다. “사람들을 삼가라 그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예수님의 제자들이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그들이 강도질을 행했습니까? 아니면 살인을 행했습니까? 이유는 다음절인 18절 말씀에 나옵니다.
“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박해를 받게 되며, 나중에는 순교하는 자리에까지 이르게 될 것입니다.
마10:28 말씀입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이와 같이 예수님의 제자들은 죽음까지도 각오하고서, 예수님의 보내심에 순종했던 것입니다.
막1:15에서 예수님은 전파하시기를,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따라 예수님의 제자들도 나가서 “회개하라”고 전파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대로, 그들도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기를 의롭게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결단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아 회개하며,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회개하라”고 전파했던 것입니다.
“회개하라.” 이는 사람들의 가려운 귀를 긁어주는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듣기 좋게 말하는 소리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그대로, 제자들은 전파했습니다. 사람들의 박해를 받으면서도 그렇게 전파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의 순종은 돋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그들에게 뜻하신 대로, 그들은 나가서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밝히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풍성하신 긍휼을 잘 나타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주신 권능으로, 그들은 많은 귀신을 쫓아내었습니다.
아울러 그들은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쳤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병자들을 고치실 때, 기름을 바르신 적은 한번도 없으셨습니다. 그러실 필요가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병자들에게 기름을 발라서 고쳤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스라엘에서는 왕이나 제사장이나 선지자를 세울 때, 기름을 부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라는 뜻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뜻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병자들에게 기름을 발랐습니다.
병을 고치는 권능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권능이 행하여지는 통로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은 이 사실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름을 바르는 상징적인 행위를 통하여 모든 영광을 예수님에게 돌렸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도 예수님의 지상명령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세상 속으로 보내십니다. 우리도 세상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라고 전파합시다. 그러면서 우리의 삶을 통해, 예수님의 사랑과 긍휼을 나타냅시다.
또한 예수님을 신뢰하며, 예수님 안에서 만족하며 감사하는 모습을 보여줍시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박해를 받더라도, 낙심하지 말고 그럴수록 더 당당해집시다. 언제나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예수님의 역사하심이 우리를 통하여 밝히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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