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성함을 얻게 하신 예수님! (막6:53~56)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셨을 때,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웠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억지로 붙들어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서, 예수님을 그들의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자기들을 로마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해주시기를 바랐습니다. 또한 그들은 로마에 의해 분봉 왕으로 세움을 받은 헤롯 일가도 예수님이 제거해주시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앞으로도 예수님이 그들을 위하여 더러운 귀신을 내쫓아주시며, 병을 고쳐주시며, 죽은 자를 살려주시며, 그들을 먹여주시기를 바랐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삼아서, 계속해서 예수님의 권능을 누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이 그 곳에 모인 무리에게서 좋지 않은 영향을 받지 않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재촉하사,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셨습니다.
그런 후에 예수님은 그 곳에 모인 무리를 해산시키셨습니다. 무리를 보내신 후에, 예수님은 따로 산에 올라가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이 무리에게 물들지 않고, 믿음 위에 굳게 서도록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동안, 예수님의 제자들은 배를 타고 건너편 벳새다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바람이 크게 거스르며 파도가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힘겹게 노를 저었지만, 그들이 탄 배는 육지에서 수 리나 떨어진 바다 가운데로 밀려났습니다.
그들이 곤경에 처한 것을 보시고, 예수님은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셨습니다. 때는 밤 사경, 그러니까 새벽 세 시에서 새벽 여섯 시 사이였습니다. 그들은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유령인 줄 알고 무서워하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예수님은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예수님이 배에 오르시자, 바람은 그쳤습니다. 배 안에 있던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절하면서,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라고 말하며 자신들의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탄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목적지, 곧 벳새다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이 더 이상 힘겹게 노를 젓지 않아도 되도록, 예수님이 이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다 가운데 있던 그들의 배는 순식간에 그들의 목적지 벳새다에 이르렀습니다.
요한복음 6장이 밝히듯이, 예수님은 그 곳에서 그의 본 동네 가버나움으로 가셨습니다. 그러자 그 전날 예수님이 주신 떡으로 배불리 먹었던 사람들이 다시금 예수님에게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사모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후에 되어진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게네사렛 땅으로 가셨습니다. 게네사렛은 가버나움 남쪽으로 수 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비옥한 평원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 나아온 그 곳의 병자들은 모두 다 성함을 얻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오늘 이 시간 우리에게도 찾아오셔서, 예수님에게 나아온 우리 모두의 영과 육을 다 성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오늘의 말씀을 받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오늘 본문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게네사렛 땅에 이르신 예수님(53절).
막6:53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러 대고
게네사렛은 어떤 동네를 가리키는 이름이 아닙니다. 게네사렛은 가버나움 남쪽에 있는 평원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타신 배가 이른 곳을 가리켜서 그냥 게네사렛이라고 부르지 않고, “게네사렛 땅”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게네사렛에는 곳곳에서 샘물이 솟아올라, 그 땅을 비옥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곳에서 경작되는 곡물은 연중 삼모작이 가능했습니다. 그 결과 오늘 본문 56절 말씀과 같이, 게네사렛 주변에는 도시, 지방, 마을 등 크고 작은 동네들이 산재해 있었습니다.
눅5:1을 보면, 갈릴리 바다를 가리켜서 게네사렛 호수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실상 그 곳은 바다가 아니라 호수입니다. 물이 짜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갈릴리 바다를 가리켜 게네사렛 호수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 곳 게네사렛 땅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내용을 다시 한번 회상해봅니다. 예수님은 벳새다 율리아스에서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런 후에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바다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셨습니다. 같은 이름이면서도 서로 다른 마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를 타고 벳새다로 가고 있는 동안, 예수님은 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은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곳으로 오셨습니다. 그 때가 밤 사경, 곧 새벽 세 시에서 여섯 시 사이로 어두울 때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유령인 줄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서, 그들은 예수님이신 줄 알았습니다. 그들이 기뻐하며 예수님을 배로 영접하자, 그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목적지 벳새다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탄 배가 목적지 벳새다에 이른 것은 새벽 시간으로 어두울 때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54절에 의하면, 예수님이 게네사렛 땅에 가셨을 때는 어떠했습니까? 사람들은 뭍에 나와있었으며, 또한 그들은 곧 예수님이신 줄을 알아보았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게네사렛 땅에 이르신 때는 낮 시간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벳새다에 이르신 때와 예수님이 게네사렛 땅에 이르신 때 사이에 시간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을 보면, 그 사이에 생략된 내용이 자세하게 나옵니다.
예수님은 그 날 아침 그의 본 동네 가버나움으로 가셨습니다. 벳새다는 가버나움의 외곽에 있는 어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비유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은 송도에 배를 대시고 그 곳과 인접해 있는 인천 시내로 들어가신 셈입니다.
그러자 그 전날 예수님이 주신 떡과 물고기를 배불리 먹었던 사람들이 다시금 예수님을 찾아서 가버나움으로 몰려왔습니다. 요6:2 말씀과 같이, 그들이 벳새다 율리아스로 몰려갔던 것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 곧 이적을 보고자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요6:26 말씀이 밝히듯이, 그들이 가버나움으로 몰려온 것은 그들이 예수님에게서 얻어먹었던 떡과 물고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전날 그들은 평생에 잊지 못할 저녁을 배불리 먹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날 아침도 배불리 먹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더 이상 그들에게 떡과 물고기를 주지 아니하셨습니다. 그 대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사모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자신이 바로 생명의 떡이심을 누차 밝히셨습니다.
예컨대 요6:35을 보면, 예수님은 자신이 생명의 떡이심을 밝히시면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이 때 그들은 어떤 반응을 보여주어야 마땅했겠습니까?
“오 주여! 이제 우리는 아침 식사를 원치 않습니다. 우리에게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주시옵소서. 우리가 주를 믿나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예수님께 엎드려 경배해야 옳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영생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썩을 양식에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예수님에게 자신들이 먹을 떡과 물고기를 주시도록 요구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그들에게 떡과 물고기를 주지 아니하시자, 결국 그들은 예수님의 곁을 떠나가 버렸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예수님이 주시는 영생을 거부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심판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1장과 누가복음 10장을 보면, 실제로 예수님은 벳새다와 가버나움, 그리고 그 인근에 있는 고라신을 준엄하게 심판하셨습니다.
행여 썩을 양식을 얻기 위하여, 이 자리에 나오지는 않았습니까? 그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예수님을 떠나시렵니까?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가버나움아,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예수님이 경고하신 대로, 그러다가는 심판을 받고 맙니다.
썩을 양식을 구하지 맙시다. 그것을 먹더라도, 우리의 육신은 또다시 주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양식, 곧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늘 사모합시다. 그리하면 우리의 삶은 결코 주리지 아니하며, 또한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떠나가는 모습을 보시면서, 예수님은 그의 열두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그 때 시몬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요6:68 말씀입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썩을 양식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들은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이 그들에게 주실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사모했습니다. 계속해서 시몬 베드로는 자신들의 신앙을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이는 바다 위로 걸어오신 예수님을 배로 영접한 후에, 그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고 경배하면서 드렸던 그 때의 신앙 고백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에, 예수님은 가버나움을 떠나셨습니다. 그 곳에 모인 무리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예수님의 곁을 떠나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열두 제자들을 데리시고, 오늘 본문에 기록된 대로 게네사렛 땅으로 건너가셨습니다.
둘째로, 병자들을 데리고 온 게네사렛 사람들(54~55절).
막6:54 배에서 내리니 사람들이 곧 예수신 줄을 알고
예수님을 태운 배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이 배에서 내리셨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신 그 다음날 오전 시간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을 것입니다. 그 날 아침 예수님은 가버나움에서 상당한 시간을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게네사렛은 도시나 마을을 가리키는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그 곳은 갈릴리 바다 서안에 위치해있었으며, 길이 5km, 너비 2km가 되는 비옥한 평원이었습니다. 때는 유월절이 가까웠습니다. 그러니까 계절적으로는 4월경, 곧 따뜻한 봄철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신 곳에도 푸른 잔디가 많았습니다. 아무튼 그 때 게네사렛 사람들은 자기들의 농작물을 둘러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배에서 내리실 때, 그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곧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두 번에 걸쳐서,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사역하셨습니다. 막1:39을 보면, 예수님은 그의 공생애 첫 해에 갈릴리를 두루 다니셨습니다. 또한 막6:6을 보면, 예수님은 그의 고향 나사렛에서 배척을 받으신 후에 또다시 갈릴리 모든 촌에 두루 다니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두 사람씩 짝을 지어서, 갈릴리 온 지역을 두루 다니면서 전도 여행을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놀라운 권능들을 행했습니다. 그 결과 막6:14 말씀과 같이, 이미 예수님의 이름은 갈릴리 온 지역에 널리 알려졌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게네사렛 땅에 오셨을 때, 그 곳 사람들이 예수님을 곧 알아본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지 못하고, 단지 병을 고치는 자로만 알았을 뿐이라는 점입니다.
만일 그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았다면, 그들은 예수님에 나아와 엎드려 경배해야 옳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 경배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예수님에게서 얻고자 했을 뿐이었습니다.
막6:55 그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 다니며 예수께서 어디 계시다는 말을 듣는 대로 병든 자를 침상째로 메고 나아오니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았으면, 예수님에게 달려와서 엎드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에게로 달려오지 않고, 게네사렛 주변에 있는 여러 동네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는 병들어 있는 사람들을 모두 다 예수님에게 데리고 왔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한 곳에만 머물러 계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곳저곳을 다니시면서 복음을 전하시고, 또한 예수님을 믿게 하시려고 여러 권능들을 행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이 계신다는 말을 듣는 곳으로 모든 병자들을 다 데리고 왔습니다.
자기 발로 걸어서 오는 병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부축을 받으면서 나아오는 병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울러 마가복음 2장에 나오는 중풍병자처럼, 누워서 일어나지 못하는 병자들을 사람들이 침상째로 메고 오는 경우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어떤 병자라도 다 고치신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1장에서 예수님은 열병을 앓던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셨습니다. 또한 같은 장에서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2장에서는 중풍병자를 고치셨습니다.
마가복음 3장에서는 한쪽 손 마른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마가복음 5장에서는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여자를 고치셨습니다. 마가복음 1장과 5장에서 예수님은 더러운 귀신을 내쫓으시고, 마가복음 5장에서는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셨습니다.
이외에도 막1:34 말씀이 밝히듯이, 예수님은 베드로의 집 문 앞에 모인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들을 다 고치셨습니다. 또한 마14:14 말씀과 같이,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실 때도 그 곳에 있는 병자들을 다 고치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그 어떠한 병자라도 다 고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몸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게네사렛 사람들이 열광적으로 그 곳에 있는 모든 병자들을 다 데리고 예수님에게 나아온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입니다.
물론 그들이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다니며, 모든 병자들을 예수님에게 데려온 그들의 사랑과 정성은 높이 살만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예수님께 경배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에게 왔을 뿐이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육신의 질병을 고치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영혼의 질병을 고치는 일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예수님이 주실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사모하지 않았습니다. 그들도 역시 썩을 양식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육신은 병 고침을 받더라도, 또다시 다른 병에 걸립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은 영원한 하늘 나라로 올리우든지, 아니면 영원한 지옥 불에 던지우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맙시다. 늘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사모하며 삽시다. 그리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예수님 안에서 결코 주리지 아니하며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삶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다 성함을 얻게 된 병자들(56절).
막6:56 아무 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지방이나 도시나 마을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께 그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
게네사렛은 비옥한 평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인근에는 많은 동네들이 있었습니다. 작은 지방들과 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큰 도시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저 몇몇 집들로만 이루어진 아주 작은 마을들도 군데군데 산재해 있었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도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이 후에 예수님은 두로와 시돈 등 이방 지방으로 가셨다가, 십자가를 지시러 예루살렘으로 향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때 예수님은 게네사렛의 여러 동네들을 부지런히 다니시면서 사역하셨을 것입니다.
각 동네 어귀에는 넓은 터가 있었습니다. 때로는 시장으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때로는 동네에서 생긴 문제를 함께 모여 상의하는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사람들은 모든 병자들을 각 동네의 시장, 곧 동네 어귀에 있는 광장으로 다 데려다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이 각 동네로 들어오실 때, 사람들은 병자들이 예수님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댈 수 있게 해달라고 간구했습니다. 마가복음 5장을 보면,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자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고 깨끗하게 나음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게네사렛 사람들도 그들이 시장에 데려다 놓은 병자들이 예수님의 옷 가에 손을 댐으로써 깨끗하게 나음을 받기 바랐을 것입니다. 따라서 병을 고치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그들이 믿었음은 분명합니다. 우리가 이 점은 인정을 합니다.
또한 그들은 예수님에게 예의도 갖추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성가시게 해드리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병자들에게 일일이 손을 대어주시기를 간구하지 않고, 그저 병자들이 예수님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만을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그들의 믿음은 이기적이었습니다. 자기중심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얻기만 바랐습니다. 그러다가 그것을 얻으면, 그 길로 그들은 예수님을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이러한 사실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들을 결코 물리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이와 같이 끝맺음을 합니다.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 바로 여기에 오늘 본문의 강조점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 본문의 강조점은 게네사렛 사람들이 보여준 이웃에 대한 사랑이나 정성이 아닙니다. 또한 그들이 보여준 믿음이나 예의도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강조점은 오로지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보여주신 능력과 긍휼에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능력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예수님의 옷 가에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었습니다. 성함을 얻지 못한 자도 더러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병의 일부만 나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또한 병이 서서히 나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옷 가에 손을 대는 순간, 병자들은 순식간에 성함을 얻었습니다. 그들의 병은 온전하게 성함을 얻었습니다. 또한 단 한 사람의 예외가 없이 모든 병자들이 다 성함을 얻었습니다. 이와 같이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능력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긍휼도 강조합니다. 예수님은 병자들에게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해보지 아니하셨습니다. 또한 그들이 예수님에게 나아온 동기도 물어보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런 차별 없이 모든 병자들을 다 낫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풍성하신 긍휼을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은 긍휼이 풍성하시기에,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차별 없이 비추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긍휼이 풍성하시기에,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똑같이 내려주십니다. 하나님의 일반은총입니다.
예수님도 긍휼이 풍성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벳새다 빈들에 모인 사람들을 모두 다 배불리 먹여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게네사렛 병자들을 구별하지 아니하시고, 다 성함을 얻게 하셨습니다. 바로 일반은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능력은 무한하시며, 예수님의 긍휼은 풍성하십니다. 따라서 이 시간 우리가 어떤 동기로 예수님에게 나아왔든지, 예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또한 예수님의 무한하신 능력으로, 우리를 다 성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명심합시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기를 바라시는 것은 썩을 양식이 아닙니다. 썩을 양식은 말 그대로 썩어서 없어집니다. 그것이 건강이든지, 물질이든지, 또는 어떤 문제의 해결이든지, 그 모든 것들은 썩어서 없어질 것들이요 일시적인 것들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기를 바라시는 것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입니다.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늘 사모합시다. 그리하면 우리의 영과 육이 동시에 다 성함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무한하시며, 예수님의 긍휼은 풍성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이적을 통해서,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내게 주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게네사렛 병자들의 몸을 다 성하게 하심으로, 나의 영혼을 성하게 하셔서 내게 영생을 주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시간 예수님의 무한하신 능력과 예수님의 풍성하신 긍휼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의 영과 육이 다 성함을 얻기 바랍니다. 그리해서 우리 모두의 삶이 예수님 안에서 결코 주리지 아니하며,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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