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성장(6) 마5:7 2011.2.27(일)
불쌍히 여기는 마음, 하나님의 마음
우리가 살아가면서 발견하는 것은 시각의 중요성입니다. 어떤 눈과 시각으로 세상을 보느냐 하는 것이 어떻게 세상을 사느냐 보다 중요합니다. 어떤 고등학교에서 고3 애들이 공부하다 스트레스를 받아 싸웁니다. 몇 친구가 말렸지만 계속 싸웁니다. 그래서 구경만 합니다. 선생님들이 지나가면서 한 마디씩 합니다. 먼저 국어 선생님입니다. “고3들이, 주제도 모르고 싸우다니”. 수학선생님이 말합니다. “고3 너희들, 분수를 알아라, 분수를”. 음악선생님이 말합니다. “너희들은 말리지는 못할망정 장단만 맞추냐”. 진로담당 선생님입니다. "야, 너희들 앞으로 어떻게 하려고 그러니?“ . 양호선생님입니다. ”그러다 다칠라. 다치면 또 나한테 오려고“. 국사선생님입니다. ”야, 임마, 너희들 조상들 부끄럽지도 않냐“. 세계사 선생님입니다. ”이 놈들아, 싸운다고 세계 역사가 달라지냐?“. 물리선생님입니다. ”그렇게 힘으로만 싸우는 게 아니야. 머리로 싸워야지“. 생물선생님입니다. ”아이구, 벌레만도 못한 놈들“. 영어 선생님입니다. ”O, no, stop, 싸움, stop". 어떻습니까?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각자의 전공과 입장에서 말한 것입니다. 이것이 시각입니다.
요즘 세상이 너무 힘들게 돌아갑니다. 천국의 정원이라고 부르는 뉴질란드에서는 대지진이 나 건물이 무너지고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아직도 못 찾은 사람이 많습니다. 이집트에 이어 리비아에서는 반정부운동이 일어나 역시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나라가 파국으로 치닷고 있습니다. 북한에서는 굶주린 사람들이 먹을 것을 달라고 아우성치고 아직도 쓰레기를 뒤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사람들을 볼 때 어떤 마음이 듭니까? 만일 하나님이라면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지난 13일, SBS 뉴스를 통해 우리 가슴을 아프게 한 한 사연이 있었습니다. 서울 난곡동의 한 목사님이 운영하는 “베이비박스” 이야기입니다. “베이비박스”는 버리는 아기들을 위해 만들어 놓은 임시 보관소입니다. 아직 1년도 안됐는 데 이곳에 버려진 아기가 8명입니다. 주사랑공동체를 운영하고 있는 이종락목사님은 뇌성마비로 태어난 자신의 아들 은만이를 25년동안 키우고 있습니다. 말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자신의 아들을 보면서 그는 자신처럼 힘든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때부터 남의 버린 아이를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최근 주사랑공동체가 언론에 보도되면서 베이비박스에 2명의 아기가 더 들어왔습니다. 남기고 간 쪽지에는 이렇게 써 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저를 찾지 말아 주세요”. 그렇게 쓴 사람들은 고1, 고2 미혼모였습니다. 누가 버려진 아이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주셨습니까? 하나님입니다. 함께 보시죠(SBS 뉴스). 어떻습니까? 훌륭합니까?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긍휼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사람이 갖기 힘듭니다. 그래서 먼저 긍휼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긍휼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긍휼의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설명할 때 가장 좋은 것이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입니다. 시편 116:5,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도다”. 느9:31, “주의 크신 긍휼로 그들을 아주 멸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도 아니하셨사오니 주는 은혜로우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여러분은 창세기에서 가인이 돌을 들어 동생 아벨을 죽인 사건을 아실 것입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 사건입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일입니다. 더구나 가인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도중에 이런 일을 저질렀습니다. 예배는 그만 두고 동생까지 죽였으니 가인은 용서받을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진노해서 가인을 멀리 내쫓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닙은 가인의 이마에 표를 주었습니다. 누구든지 이마에 있는 표를 보고 그를 죽이지 말라는 뜻입니다. 내쫓으면서도 죽지는 않게 하신 하나님, 그것이 그가 보여준 긍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몸종 하갈이 있었습니다. 사라가 아들 낳지 못하자 그 빈 자리를 들어와 아브라함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주인을 무시했습니다. 두 여인 때문에 가정이 시끄럽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질서의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사라의 말대로 하갈을 광야로 내쫓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목말라 하는 하갈에게 광야에서 샘을 내 주었습니다. 물이 없던 광야에 퐁퐁퐁 물이 솟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그 아들 이스마엘을 축복했습니다. “네 씨가 많아 수를 셀 수 없게 될 것이다”. 그 결과 오늘날 아랍족속이 번성하게 되었습니다. 하갈이 이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엘로이, 곧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택하지 않은 백성 하갈과 이스마엘에게 까지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이것이 긍휼입니다.
호세아의 아내 고멜이 집을 나갔습니다. 이번이 첫 번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수없이 집을 나가 남의 아이를 셋이나 낳았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그를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호세아에게 말합니다. 호3:1, “너는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가정을 버리고 집을 나가 남의 자식을 낳은 여자를 찾아가 돈을 주고 데리고 오라. 있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탄식하며 하신 말씀입니다. 호세아 11:8,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여기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불붙듯 하도다” 했습니다. 긍휼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긍휼은 히브리어로 “라쿰”, 어머니의 자궁을 일컫는 말입니다. 긍휼은 속에서 나옵니다. 뱃속 깊은 곳에서 본능처럼 나옵니다. 그래서 막을 수 없습니다. 어머니의 태에서 나오는 사랑입니다. 사49:15 말씀 입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최근에 저는 한 성경귀절을 읽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습니다. 요한2서 3절입니다.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 많이 읽었던 이 말씀에서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라는 말이 눈에 띄였습니다. 이 말씀은 여기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딤후1:2에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사도 요한이나 바울은 하나님의 마음을 똑같이 깨달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은혜와 긍휼과 평강”, 이 세 단어로 표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묵상했습니다. 은혜와 긍휼과 평강은 서로 어떤 관계에 있을까?
은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입니다. 긍휼은 우리가 서로 나누어야 할 사랑입니다. 은혜는 죄를 사하시려고 하나님이 주시는 용서의 사랑입니다. 긍휼은 우리가 고통당하는 사람을 위로하는 사랑의 마음입니다. 은혜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라면 긍휼은 나와 우리와의 관계입니다. 먼저 은혜가 임하고 긍휼이 뒤따라 옵니다. 그러나 같이 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면 우리는 긍휼의 마음을 갖습니다. 은혜는 긍휼을 낳고 긍휼은 은혜에게서 옵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평강입니다. 평강은 곧 은혜 더하기 긍휼입니다. 따라서 둘 중의 하나가 없으면 평강은 없습니다. 은혜만 있고 긍휼이 없으면 평강은 없습니다. 긍휼만 있고 은혜가 없어도 평강은 없습니다.
눅10장에 나타난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에 이 원리가 나타납니다. 어느날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던 사람 하나가 강도만났습니다. 가진 것 다 털리고 얻어 맞아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이때 제사장 하나가 지나가다 그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냥 지나갔습니다. 레위인도 보고 그냥 지나갔습니다. 사마리아인 하나가 지나가다 그를 보고 가까이 가서 응급치료를 했습니다. 그리고 나귀에 싣고 여리고로 가서 의사에게 치료를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치료의 시간은 걸리고 자기가 갈 길은 바빳습니다. 그래서 돈을 주고 먼저 갔습니다. 그리고 다시 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문제가 무엇입니까? 제사장과 레위인은 매일 은혜를 받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이 하는 일은 매일 성전에서 예배를 집례하는 일입니다. 제사장은 소나 양을 잡아 제사드리고 레위인은 성전 안내나 찬양으로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이들은 곧 예배전문가였습니다. 그러면 예배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은혜입니다. 은혜받으려고 예배하고 은혜가 임하니까 예배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예배를 통해 은혜는 받는 데 고통당한 사람에 대해서는 긍휼이 없다는 것입니다. 위로부터 내려오는 은혜는 받는 데 옆에서 고생하는 이웃에 대해서는 긍휼은 없는 사람들, 그것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가 말하려는 핵심입니다. 눅10:31을 보시겠습니까?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제사장은 분명히 보았습니다.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사람을. 그러나 그는 그냥 지나갔습니다. 레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렇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지금 제사장과 레위인은 예루살렘에서 막 예배를 집례하고 집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예배를 집례하느라 그들을 무척 피곤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예배는 소나 양을 잡아 드리는 예배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빨리 집에 가서 쉬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이 잊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은혜받았으면 그 은혜는 반드시 긍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긍휼로 나타나지 않는 은혜는 평강이 이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돌아가신 미국의 유명한 영성가 한 분이 있습니다. 이름은 헨리 나우엔입니다. 이 사람은 본래 하바드 대학교수였는 데 어느날 교수직을 버리고 홀홀 단신 들어간 곳이 있었습니다. 카나다에 있는 Daybreak라는 공동체입니다. 이 공동체는 정신장애자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였는데 그는 거기서 죽을 때 까지 25살 먹은 아담이라는 정신지체아 한 명을 돌보며 살았습니다. 그가 쓴 <여기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면서 발견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우면 사람에게도 가깝다는 사실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우면 사람에게도 가깝습니다. 하나님에게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의 긍휼도 받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위하여 은혜가 필요한 것처럼 우리와 세상과의 관계를 위해 긍휼이 필요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평강이 임합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예배하면서 은혜받습니까? 그 은혜는 은혜 자체를 위한 은혜가 아니라 세상을 사랑하기 위한 하나님의 긍휼의 선물임을 믿습니까? 여러분이 하나님께 가깝듯이 사람에게도 가깝습니까? 여러분에게 은혜가 필요하듯이 세상도 여러분에게 긍휼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래서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을 아십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긍휼을 통하여 세상의 평강이 됩니다. 그 축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일생 사람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렇게 긍휼히 여기며 사신 분이 계셨는 데 그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긍휼히 여기는 일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일생 눈물과 사랑으로 사람을 불쌍히 여기며 사셨습니다. 예수님이 불쌍히 여기신 이야기가 성경에 많지만 종류로 나누면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목자없는 양같은 사람들을 보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마태9:36,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예수님이 사람을 불쌍히 여기신 첫 번째는 사람들이 목자없는 양처럼 살기 때문입니다. 목자없는 양은 주인없이 사는 것입니다. 먹고 살기는 그런대로 먹고 사는 데 하나님은 없습니다. 겉으로 볼 때는 그럴싸 한데 하나님이 없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 부모없이 사는 사람입니다. 며칠전에도 한 노인이 나이 많아 돌아가셨는 데 그 자녀들이 슬피 울며 말합니다. “목사님, 이제 우리는 부모 없는 고아예요”. 그들의 나이가 50대입니다. 50대가 부모없다고 우는 데 어린 아이가 부모가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서 가장 무서운 죄가 낙태요 영아 유기입니다. 우리 나라는 연간 35만명이 낙태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보고되지 않는 것까지 합치면 약 180만이 낙태로 죽어간다고 합니다. 큰 범죄요 억누를 수 없는 슬픔입니다. 이렇게 육적인 부모없어도 슬픈 데 하나님없이 산다면 얼마나 슬프겠습니까? 문제는 사람들이 하나님없이 사는 것이 얼마나 슬픈지도 모르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가난해서 불쌍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못 배운 사람이 불쌍하다고 한 적도 없습니다. 로마의 식민지배때문에 불쌍하다고 말씀한 적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없어서 불쌍합니다.
우리 친구 목사님이 이 마음을 가졌습니다. 한 번은 금식을 하고 교회로 돌아오는 데 거리에 다니는 사람들을 보자 이상하게 눈물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럴싸 하게 옷을 입고 다니고 웃으며 걷고 있었지만 친구 목사님이 보기에는 다 무덤으로 향하는 죽음의 행렬처럼 보였답니다. 그래서 울고 있는 데 한 할머니가 지나가면서 “왜 우시오? 청년? 어디 아파요?” 하더랍니다. 대답을 안하고 계속 울고만 있었더니 가까이 오더랍니다. “아니, 정말 어디 아파요?” 그러더니 손을 이마에 대더랍니다. 그때 우리 친구가 할머니 손을 잡고 “할머니, 할머니가 지옥갈까 봐 울고 있어요” 했답니다. 할머니가 깜짝 놀라며 “내가 왜 지옥 가? 별 사람 다 보네” 하고 핑 가더랍니다. 그러더니 한참 있다가 다시 와서 “청년,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 하고 묻더랍니다. 그래서 친구가 말했습니다. “하나님 믿어야죠. 교회 나와야죠”. 결국 할머니는 교회 나왔고 그 교회 집사가 되었습니다. 울고만 있어도 전도가 됩니다. 최고의 전도는 눈물의 전도입니다. 하나님없이 살아가는 사람들 때문에 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불쌍히 여기신 두 번째는 사람들이 병으로 고통당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환자를 볼 때마다 항상 따라 다니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마14: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 한센씨 병을 가진 환자가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 그가 말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이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할 수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막1:41,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이 말씀을 하자마자 고침을 받았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다양한 병을 치료하셨습니다. 육체적인 병, 정신적인 병, 영적인 병, 감정적인 병, 관계적인 병, 그러나 어떤 병이든지 반드시 따라가는 치유의 능력이 있습니다. 사랑입니다. 눈물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치료는 마술적 치료가 아니라 사랑의 치료요 긍휼의 치료입니다. 미국 목회자로서 많은 치유의 능력을 보인 죤 윔버목사님이 있습니다. 이 분이 캘리포니아 빈야드교회에서 많은 치유의 사역을 행했는 데 그가 그렇게 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한번은 그가 길을 지나가는 데 환상을 보았습니다. 하늘에서 구름이 일어나더니 큰 둑이 되었습니다. 차를 세우고 보았더니 그것은 둑이 아니라 벌집이었습니다. 그 벌집에서 꿀이 사람들 위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꿀을 손으로 만져보고 먹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먹지 않고 버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윔버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주님, 이것이 무엇입니까?” 그때 주님이 말씀했습니다. “이것은 내가 사람들에게 주고자 하는 자비의 꿀이다. 내가 너희들을 치료할 수 있는 것은 내 안에 자비의 꿀이 있기 때문이다. 내 자비는 꿀처럼 넘친다. 다만 내 자비를 믿음으로 받는 사람에게만 그 자비는 긍휼이 된다. 치유는 너희가 내게 간청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내 긍휼 때문에 일어난다. 받아라. 내 긍휼을. 내 치료는 너희에게 부어지는 내 긍휼이다”. 윔버 목사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긍휼을 믿음으로 받았습니다. 그때부터 치유의 은혜가 나타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최고의 치료는 사랑의 치료요 긍휼의 치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간청때문이 아니라 그 자신이 가지신 긍휼 때문에 우리를 치료합니다. 다만 문제는 우리가 그의 긍휼을 믿음으로 받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자, 내 긍휼을 받아라. 치료는 내 긍휼에서 시작된다. 치료는 너희에게 부어지는 내 긍휼이다”. 주일마다 이 긍휼을 받으십시오. 주일마다 제가 영육간의 치료를 위해 선포합니다. 제 능력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 때문에 선포합니다. 선포할 때 믿으십시오. 믿으면 하나님의 긍휼이 능력이 됩니다.
예수님이 불쌍히 여기신 세 번째는 우리 상처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나인성에 아들을 잃고 슬피우는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성에 이르러 가까이 갔습니다. 눅7:13입니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왜 과부는 예수님에게 불쌍한 존재였습니까? 아들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아들 하나 믿고 살아온 어머니, 그에게 아들은 인생 전부였습니다. 어떻습니까? 저는 이 장면을 이렇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만일 이 자리에 석가모니가 지나갔다고 합시다. 분명히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인생은 고해니 너무 희노애락에 매이지 말라. 살고 죽는 것이 한 순간의 꿈이거늘”, 같은 자리에 마호멧이 지나갔습니다.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알 다 알라의 뜻이다. 사는 것도 운명 죽는 것도 알라의 뜻이니 슬퍼하지 말라”. 공자가 지나갔습니다. “왜 소인배처럼 우느냐? 군자처럼 참아야지”. 스토아 철학자가 지나갔습니다. “고통은 인생을 훈련하는 학교니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했습니까?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이 세상에 상처받은 자를 불쌍히 여길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불쌍히 여겨“, 막달라 마리아를 불쌍히 여기신 분, 사마리아 여인을 불쌍히 여기신 분,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불쌍히 여기신 분, 그리고 마지막 강도 하나를 불쌍히 여기신 분, 영혼의 주인인 하나님없이 살 때 불쌍히 여기시는 분, 마음이 슬픔속에 있을 때 불쌍히 여기시는 분, 육체가 질병속에 있을 때 불쌍히 여기시는 분, ”무거운 짐을 나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불쌍히 여겨 구원해 줄 이, 은혜의 주님, 오직 예수“. 예수님의 긍휼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성령님은 우리로 불쌍히 여기게 하십니다
긍휼이 하나님의 마음이고 예수님이 행하셨지만 막상 우리가 하려고 하면 잘 안됩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안에 있는 경쟁심과 이기심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긍휼의 마음을 갖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잘 안됩니다. 왜 안될까 하고 보면 우리안에 있는 이기적 경쟁심 때문입니다. 우리안에서 우리도 모르게 우리만 아는 자아가 있습니다. 경쟁적 자아요 이기적 자아입니다. 그것이 다른 사람이 내 안에 들어오는 것을 막습니다. 긍휼의 사람이 되려면 자기를 버리고 자기 욕심도 버리고 자기 야망도 버려야 하는 데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바라는 것은 성공하는 것, 남보다 앞서는 것, 첫째가 되는 것, 남과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마음속에는 긍휼의 마음이 들어오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어느 수도원에서 그랬다고 합니다. 수도사들이 싸움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삽니다. 그래서 한번은 싸워보기로 하고 벽돌 하나를 사이에 놓고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자, 우리도 세상 사람들처럼 한번 싸워보세” 그러자 다른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싸우는가?” 첫 번째 사람이 말했습니다. “자네와 나 사이에 벽돌을 하나 놓고 내가 ”이건 내거야“하면 자 ”아니야, 그건 내거야“라고 우기게. 그러면 싸우게 될거야”. 그래서 벽돌을 놓고,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이건 내거야”. 그러자 두 번째 사람이 “아니야, 내거야”했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말했습니다. “맞아, 자네거야. 어서 가져가게”. 그래서 결국 두 사람은 싸울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모든 싸움, 모든 갈등, 모든 다툼이 이기적 욕망, 경쟁심에서 옵니다. 만일 우리안에 그것만 없어지면 다툴 일도 없어지고 사람에 대한 긍휼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도 일어날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님이 그 일을 하십니다. 성령님은 우리안에서 늘 우리의 자아를 죽이는 일을 합니다. 롬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성령님은 우리안에 있는 거짓 자아, 경쟁적 자아, 이기적 자아를 죽입니다. 그래서 긍휼의 마음을 갖게 합니다. 긍휼을 영어로 compassion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컴” “같이”, “패션”, 고통받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안에서 우리와 함께 고통받습니다. 그는 어머니같은 분입니다. 그는 우리의 고통을 두고 멀리 가지 않습니다. 세상끝날까지 함께 계십니다. 함께 고통당하시는 성령님이 우리안에 계시면 우리안에 계시는 예수님의 긍휼이 밖으로 흘러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생활에서 고립주의를 경계할 뿐 아니라 경쟁주의도 경계해야 합니다. 어떤 분이《이기는 습관》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제목을 《지는 습관》으로 바꿔야 합니다. 교회들이 서로 이기려고 하니까 과다경쟁으로 시끄럽습니다. 지역 사회안에서 교회끼리 경쟁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는 큰 교회도 없고 작은 교회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교회만 있습니다. 교단끼리 경쟁하지 말아야 합니다. 장자교단도 없고 막내 교단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있습니다. 한 교회가 아프면 다른 교회도 아파야 합니다. 한 목사님이 실수하면 한국교회 모든 목회자는 침묵하고 금식해야 합니다. 교회 하나가 잘못되면 모든 교회가 아픈 것이지 다른 교회가 이익보는 것 아닙니다. 한 교회가 잘못되어 다른 교회가 이익보았다면 그 교회는 그 교회 신자를 즉각 돌려주고 회개해야 합니다. 성령님은 우리와 영원히 함께 고통을 당하십니다. 그래서 긍휼은 성령님의 속성이요 성품입니다. 그래서 한 가지를 기억합시다. 우리가 고통가운데 있을 때 언제나 우리를 불쌍히 여기는 예수님께 돌아갑시다. 우리 마음에 긍휼의 마음이 사라질 때 성령님을 통해 우리안에 있는 긍휼을 회복시키시는 예수님께 돌아갑시다. 억지로 안됩니다. 예수님께 돌아가면 다시 긍휼을 회복합니다. "인생 길 험하고 마음 지쳐 살아갈 용기 없어질 때 나 혼자 앉아 울지만 말고 예수님 품으로 나오세요“. 예수님안에 긍휼이 있습니다. 평생 예수님의 긍휼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영적 성장(6) 마5:7 2011.2.27(일)
불쌍히 여기는 마음, 하나님의 마음
영상(SBS)
긍휼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시편 116:5,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도다”.
느9:31, “주의 크신 긍휼로 그들을 아주 멸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도 아니하셨사오니 주는 은혜로우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호3:1, “너는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
호11:8,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사49:1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요한2서 3절,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
딤후1:2,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눅10: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헨리 나우엔, “우리가 기도하면서 발견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우면 사람에게도 가깝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일생 사람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마9:36,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마14: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
막1:41,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이 말씀을 하자마자 고침을 받았습니다.
눅7: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성령님은 우리로 불쌍히 여기게 하십니다
롬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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