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을 드러내신 예수님! (막 9:1~8)
예수님의 제자들은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자신들의 신앙을 분명하게 예수님에게 고백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가 이 땅에서 그리스도로서 하셔야 할 본질적인 사역이 무엇인가를 그들에게 밝히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많은 고난을 받으시고, 버린 바 되시고, 죽임을 당하시고, 사흘 만에 살아나실 것을 드러내 놓고 말씀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은 사실 너무도 끔찍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로잡히실 때,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이처럼 자신 있게 말했던 베드로조차도,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렇지만 장차 예수님의 제자들은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순교자가 되어,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그들의 목숨을 잃어야 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그들을 위로하시며, 그들에게 소망을 안겨주실 필요를 느끼셨습니다.
이를 위해 오늘 본문 바로 앞 절인 막8:38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현재의 고난 너머에 장래의 영광이 기다리고 있음을 밝히신 것입니다.
그런 후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실제로 자신의 영광을 잠시 드러내셨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자신이 그리스도이신 것을 시각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아울러 예수님은 고난 너머에 있을 영광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장래의 영광은 현재의 고난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오늘 본문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 좀더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변형입니다(1~3절).
막9:1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말씀은 이와 같이 시작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예수님은 확실하지 않은 일을 추측해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확실하게 되어질 일을 하나님의 권위로 엄숙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이 때 예수님 곁에는 무리와 제자들이 함께 서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 모두에게 해당되지는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만 해당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앞으로 몇 달 또는 몇 년 내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해서, 예수님이 온전하게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는 뜻입니까?
이는 실로 예수님의 제자들 모두가 간절히 기대하며 바라는 바였습니다. 그래야 그들도 예수님의 좌 우편에 앉아서, 덩달아 영광을 누릴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그러한 뜻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 중 몇 사람에게만 대표적으로 잠깐 동안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미리 보여주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그들에게 자신이 그리스도이며, 또한 그가 고난을 통하여 영광에 이르게 될 것임을 깨닫게 해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이 때 예수님이 그 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하나님 나라의 권능을 보여주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람들은 또 다시 예수님을 억지로 붙들어 자기들의 임금으로 삼고자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셔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많은 고난을 받으시고, 버린 바 되시고, 죽임을 당하셔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대표적으로 세 사람에게만 자신의 영광을 일시적으로 드러내신 것입니다.
막9:2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마17:1에서도 “엿새 후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눅9:28 말씀을 보면, “이 말씀을 하신 후 팔일 쯤 되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두 가지 기록이 상충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날도 하루로 간주하고, 또한 그 말씀이 이루어진 날도 하루도 간주했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은 “팔일 쯤” 되었다고 기록했습니다. 반면에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그 둘 사이의 날들만 계산해서, “엿새 후에”라고 기록했습니다.
아무튼 이 때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이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실 때도, 또한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도, 예수님은 이들 세 사람만 데리고 가셨습니다.
이렇듯 이들 세 사람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 가운데서도 핵심적인 인물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번에도 예수님이 이들 세 사람만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지만, 모두들 별로 당혹해 하거나 이상스럽게 여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눅9:28 말씀을 보면, 이 때 예수님은 세 사람을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분명히 그들도 예수님과 더불어 기도하기를 바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눅9:32 말씀을 보면, 이 때 그들은 깊이 졸았습니다.
뒤에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도, 그들 세 사람은 역시 잠들었습니다. 눅22:45 말씀을 보면, 그들이 잠든 이유는 슬픔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잠을 자버림으로, 그들의 슬픔을 잊어버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그들도 같은 길을 걸어가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슬픔은 극도에 달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들은 슬픔으로 인하여 깊이 졸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계속해서 깊이 졸고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들이 해야 할 역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본체로서의 영광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것을 자신들의 눈으로 밝히 볼 것입니다.
신19:15 말씀대로, 어떤 사건을 확정하기 위해서는 두세 증인이 필요했습니다. 변화 산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영광을 목격했습니다. 그들은 세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기들이 본 것과 들은 것에 대하여 증인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충분했습니다.
다시금 오늘 본문으로 되돌아옵니다. 오늘 본문 2절 마지막을 보면, 예수님은 그들 앞에서 변형되셨습니다. 이는 눅9:29 말씀처럼, 예수님의 용모가 변화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본체는 하나님이시므로, 예수님의 본질은 결코 변화되실 수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이 때는 단지 예수님의 용모 곧 외모만이 변화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외모는 일반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후광이 예수님의 얼굴을 감싸고 있던 것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세 제자들 앞에서 예수님의 외모가 변화되셨습니다.
말하자면 이 때 예수님은 일시적으로 그들 앞에서 자신이 입고 계시던 육체를 벗으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의 육체 안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본체로서의 영광을 잠시 밖으로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 때 예수님의 변형되신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막9:3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
마17:2 말씀을 보면, 이 때 예수님의 얼굴은 해 같이 빛났습니다. 물론 이 때 어떤 강렬한 빛이 외부로부터 예수님의 얼굴에 비친 것은 아니었습니다. 눅9:32 말씀처럼, 이는 예수님 자신의 영광에서 나오는 빛이었습니다.
물론 이 때 예수님의 얼굴만 해 같이 빛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몸 전체가 해 같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몸에서 나오는 눈부신 빛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옷이 광채가 나며 매우 희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에서 나오는 빛이 너무도 밝아, 사람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의 얼굴이 해 같이 빛나고, 예수님의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다고 묘사할 뿐이었습니다.
요8:12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빛이심을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 시각적으로도 자신이 빛이심을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빛이시라는 사실은 무엇을 뜻합니까?
요일1:5 말씀과 같이,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하나님은 빛 자체이시기 때문에,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빛이심을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그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심을 밝히 드러내셨습니다.
아직도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에 의아심을 품고 있습니까? 성경을 읽지 않고, 성경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고, 성경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요20:28에 나오는 도마의 고백처럼,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시며 나의 하나님이심을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둘째로, 모세와 엘리야의 등장입니다(4~6절).
막9:4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하거늘
이미 말씀드린 대로, 어떤 사건을 확정하려면 두 사람 이상의 증인이 필요했습니다. 이 때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난 것도 예수님을 증언할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눅9:31 말씀처럼, 그들이 증언할 일은 장차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율법을 기록한 사람이었습니다. 엘리야는 바알을 섬기는 자들을 담대하게 무찌른 선지자였습니다. 모든 선지자들은 엘리야처럼 힘써 율법을 지켜야만 했습니다. 그러니까 모세가 율법을 대표하는 자라면, 엘리야는 선지자들을 대표하는 자였습니다.
사실 모세가 율법에서 설명한 모든 제사 제도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눅24:25~26에서 예수님이 밝히신 바와 같이, 모든 선지자들도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은 후에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을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모세의 율법과 모든 선지자의 글을 합친 것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눅24:27 말씀과 같이, 그 둘을 합친 것이 바로 성경 곧 구약성경입니다. 구약성경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5:17 말씀과 같이, 예수님은 율법이나 선지자 곧 성경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성경을 완전하게 하려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리스도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을 그대로 이루셔야만 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모세와 엘리야는 율법과 선지자, 곧 구약성경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이 때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 무엇을 증언했습니까? 예수님의 죽으심은 결코 우연이나 실수가 아니라, 이미 성경에 자세하게 계시되어 있는 하나님의 일이라는 증언이었습니다.
막9:5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베드로는 예수님을 “랍비여”라고 불렀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주여”라고 불렀습니다. 누가복음에서도 “주여”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에서 사용된 “주여”와는 다른 단어입니다. 누가복음의 “주여”를 좀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주인이여”라는 뜻입니다.
이 때 베드로는 정신이 없었을 것입니다. 깊이 졸다가 놀라서 깨어났는데, 무슨 정신이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주여”라고도 불렀다가, “랍비여”라고도 불렀다가, “주인이여”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베드로는 나름대로 예수님을 높이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그러면서 베드로는 자기 마음에 있는 생각을 털어놓았습니다.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도 죽임을 당하실 필요가 없고, 자기들도 덩달아 죽임을 당할 이유가 없으니까 모두 좋다는 뜻입니다.
곧 이어 베드로는 자기들이 초막 셋을 짓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하여 각기 하나씩 짓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들은 밖에 있어도 되지만,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는 초막 안에 계시도록 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때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육 개월 전이었습니다. 유월절 육 개월 전이니까, 초막절이 있을 무렵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적인 견지에서 보면, 베드로의 제안은 그 시기가 매우 적절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다음절은 전연 다르게 평가합니다.
막9:6 이는 그들이 몹시 무서워하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이더라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앞에서 예수님은 갑작스럽게 변형되셨습니다. 예수님의 빛난 영광에, 그들은 압도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무서워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자연히 그들은 몹시 무서워했습니다.
너무나도 무서운 나머지,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럴 때의 원칙은 입을 다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성격상 입을 다물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괜스레 입을 열었다가, 그만 어리석은 말을 하고 말았습니다.
우선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세와 엘리야와 같은 수준으로 대했습니다. 예수님은 세세토록 경배를 받으셔야 할 하나님이십니다. 반면에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을 증언을 하기 위하여 잠시 나타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어찌 같은 수준이 될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베드로는 상황 파악을 제대로 못했습니다. 왜 예수님이 그들에게 자신의 영광을 밝히 드러내셨습니까? 예수님은 그들에게 자신이 그리스도이시며, 또한 그가 그리스도로서 고난을 받으신 뒤에 영광에 들어가실 것을 밝히 보이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아울러 왜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를 불러서 그들 앞에 세우셨습니까? 성경에 계시된 대로, 예수님이 장차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은 이미 하나님이 정하신 일임을 그들에게 증언토록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베드로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했습니다. 그 때문에 그는 예수님의 책망을 엄하게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베드로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일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여전히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곳에 초막 셋을 짓고, 계속해서 그 곳에 머무르기를 바랐습니다.
예수님은 성경에 충실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시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충실하기 바랍니다. 그리해서 우리도 사람의 일보다는 하나님의 일을 늘 생각하기 바랍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증언입니다(7~8절).
막9:7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말씀하실 때, 베드로가 불쑥 끼어 들어서 대화를 중단시켰습니다. 그러니 베드로가 계속해서 어리석은 말을 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17:5 말씀을 보면, 베드로가 그의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이었습니다.
“마침 구름이 와서.” 그 때 홀연히 빛난 구름이 일어났습니다. 그 구름은 어두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 안에 누가 계시기 때문이었습니까?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었습니다. 빛이신 하나님이 그 안에 계시니, 그 구름은 빛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었습니다. 이 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구름 속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때 그들은 구름 바깥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때 빛난 구름은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덮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빛난 구름 바깥에 있으면서, 빛난 구름 속에서 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막1:11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도 하나님은 같은 증언을 하셨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심으로 스스로를 증언하셨습니다. 또한 구약성경을 의미하는 모세와 엘리야도 나타나서 예수님을 증언했습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이 친히 그 곳에 임재하셔서 예수님을 증언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예수님이 누구이신가 확신이 서지를 않습니까? 도대체 누구의 증언이 더 필요합니까? 요20:31 말씀처럼, 이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베드로는 사람의 일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입을 다물어야만 했습니다. 그 대신 그들이 마땅히 들어야 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막9:8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더라
마17:6~7을 보면, 이 때의 상황을 좀더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빛난 구름 속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서, 그들은 엎드려 심히 두려워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그들에게 다가가 손을 대시며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
분명 그들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고서 주변을 둘러보았을 것입니다. 그러자 그 곳에는 오직 예수님과 자기들뿐이었습니다. 빛난 구름도 사라졌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도 사라졌습니다. 예수님도 변형되시기 이전의 모습으로 되돌아오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은 일시적으로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셔야만 했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는 오직 예수님과 그들만 다시금 남았던 것입니다.
뒤에 베드로는 벧후1:17~18에서, 이 때 자신이 본 것과 들은 것을 생생하게 증언했습니다. 야고보는 일찍 순교했기 때문에, 아무런 기록을 남기지 못했습니다. 나머지 한 사람 요한도 요1:14에서, 이 때 그가 본 예수님의 영광을 밝히 증언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긴 말씀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현재의 고난 그 너머에 장래의 영광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이십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하여 몸소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십니다. 그러므로 앞서 가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릅시다. 그리하면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항상 우리를 돌보시고 친히 우리를 거느리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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