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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성장(7) 마5:7 2011.2.27(일) 깨끗한 마음, 하나님을 보는 마음

영적 성장(7) 5:7 2011.2.27() 깨끗한 마음, 하나님을 보는 마음

3월 첫주, 봄이 시작되는 계절입니다. 여러분은 봄을 좋아합니까? 제가 인터넷에서 봄시라고 쳤더니 주옥같은 시들이 쏟아졌습니다. 아마도 계절을 노래하는 시중에 봄이 가장 많은 것 같습니다. 천상병 시인이 그렇게 썻습니다. “겨울만 되면 나는 언제나 봄을 기다리며 산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추운 겨울에 봄을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왜 봄은 우리를 설레게 하는 것일까요? 아름다운 자연? 진달래, 개나리? 밝은 태양, 맑은 공기? 그렇습니다. 다 좋습니다.

 

그 중에서도 도종환 시인의 다시 오는 봄이 좋았습니다. “다시 오는 봄”(도종환). “햇빛이 너무 맑아 눈물납니다. 살아 있구나 느끼니 눈물납니다. 기러기떼 열지어 북으로 가고 길섶에 풀들도 돌아오는데. 당신은 가고 그리움만 남아서가 아닙니다. 이렇게 살아 있구나 생각하니 눈물납니다”. 봄이 우리에게 주는 감동은 아마도 우리가 살아 있구나 하는 느낌늘 갖는 것이 아닐까? 겨우내 추위속에서 하루 하루 웅크리고 살면서 내가 살아 있다는 느낌을 갖지 못하다가 봄이 되어 만물이 소생하면서 내가 살아 있음을 확실히 느끼는 것입니다. 결국 생명의 문제입니다. 마음의 문제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봄이 와도 내 마음에 생명에 대한 애착이 없다면 봄은 아직 아닙니다. 아무리 눈부신 봄이 와도 내 마음이 밝지 않다면 아직 봄은 아닙니다.

 

저는 이번 주 내내 이 마음의 문제로 고통하며 지냈습니다. 순서에 따라 예수님의 산상 수훈 여섯 번째,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요를 설교해야 하는 데 과연 내 마음이 청결하냐의 문제로 심한 고통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설교할 때마다 두렵고 떨리지만 이번에는 더욱 그랬습니다. “정말 나는 청결한 사람일까? 내 마음이 청결하지 않다면 나는 과연 설교할 수 있을까?”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에게 청결한 마음을 주옵소서”. 기도할수록 저는 하나님앞에 깨끗하지 못한 저 자신을 느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다시 더러워 지고 또 기도하고 닦아도 떠 더러워지는 자신의 모습을 하나님앞에 감출 수 없었습니다.

기도하다가 이번 성지순례때 보았던 예수님의 얼굴이 올랐습니다. 이스탐불에 있는 성 소피아 사원을 방문했을 때입니다(사진). 이 사원은 주후 360,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가 목조로 지은 이후 수없는 보수를 거쳐 현재 웅장한 건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7세기 이슬람이 이 지역을 지배하면서 이슬람 사원이 되었는 데 거기에 최후의 심판이라는 모자이크가 있습니다. 이 그림은 가운데 예수님이 있고 좌측에 마리아, 우측에 세례요한이 있습니다(그림). 제가 눈여겨 본 것은 예수님의 얼굴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보다가 점점 예수님의 얼굴에 빨려 갔습니다. 사람이 만든 모자이크이지만 그 그림은 저에게는 정말 예수님이 내 앞에 계신 것 같은 느낌을 주었습니다. 함께 보실까요? (동영상).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여러분을 바라보고 계신 것 같지 않습니까? 어떤 느낌을 받았습니까? 예수님의 사랑과 긍휼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러면서도 예수님의 눈이 어딘가 슬프지 않습니까? 왜 슬플까요? 제가 그때 받은 감동은 이것입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주님은 슬프다.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우리의 거룩하지 않는 모습 때문에 주님은 여전히 슬프다”.

 

어떻습니까? 주님이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를 바라본다면 그 앞에 자신있게 설 사람이 있습니까? 누가 주님, 나는 깨끗합니다. 나는 청결합니다. 깨끗한 저를 봐주십시오“. 말할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여러분, ”주님, 제가 아무리 노력해도 제가 주님앞에 완전할 수 없으니 그냥 살래요. 제발 저를 잊어 주세요“. 그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우리가 주님앞에 여전히 부족하지만 그렇다고 우리를 포기하고 살 수는 없지 않아요? 만일 그렇게 한다면 주님이 더 슬퍼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마음을 청결하게 해야 합니다. 구약 시대의 성전은 우리 마음을 상징합니다. 그 성전의 한 복판에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지성소가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의 한 복판에는 하나님이 계시는 거룩한 방이 있습니다. 그 거룩한 방을 성경은 여호아의 등불이라고 불렀습니다. 20:27, “사람의 영혼은 여호아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 우리 마음의 깊은 곳, 거기에 하나님의 빛을 비치는 지성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늘 마음의 깊은 곳을 살핀다는 것입니다. 이 마음의 깊은 곳을 교회사의 영성가들은 마음의 성소라고 불렀습니다. 문제는 이 마음의 성소가 깨끗하게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다른 것이 들어오면 안됩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에는 이 성전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들입니다. 이들은 성전 입구에 서서 이방인을 통제하고 비록 이스라엘 사람일지라도 부정한 자들은 철저히 성전 출입을 막았습니다. 지금도 예루살렘 성전에 가면 과거에 이방인의 출입을 엄격히 금지했던 고고학 발굴품이 놓여 있습니다. 이렇게 쓰여져 있습니다. "이곳에 이방인을 데려오는 자는 반드시 죽음을 당할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에 이방인이 들어오면 반드시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막을 뿐 아니라 지켰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내부에는 모두 12문이 있었는 데 그 문 하나마다 레위인, 제사장이 열 명씩 모두 20명이 지켰습니다. 문이 12문이었기 때문에 결국 예루살렘 성전 전체를 매일 지킨 사람은 레위인, 제사장 240명이었습니다. 이들은 밤 6시부터 다음날 새벽 6시까지 조를 나눠 교대로 성전을 지켰습니다. 왜 이렇게 했겠습니까?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이 거하시는 지성소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에도 이 지성소가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하나님의 빛이 비춰야 하는 여호아의 등불, 그 거룩한 내면의 성소가 여러분에게도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옛날 예루살렘 성전에서 그랬던 것처럼 여러분도 여러분의 마음의 성소를 지키고 있습니까? 매일 매일, 그 마음의 성소를 지키기 위해 파숫군을 세웁니까? “이방인이 들어오면 반드시 죽으리라“. 다짐하고 삽니까? 오늘 예수님이 원하는 마음이 이 마음입니다.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요”. 청결한 마음, 깨끗한 마음, 예수님을 닮은 마음, 우리는 어떻게 그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청결한 마을 가지면 어떻게 될까요?

 

마음이 청결해야 깨끗해집니다.

먼저 하나님은 우리 마음이 청결해야 깨끗해진다고 말합니다. 다른 것이 깨끗해야 깨끗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깨끗해야 깨끗해집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마음을 깨끗하게 하지 않고 다른 것을 깨끗하게 하려고 합니다. 환경론자들은 환경이 깨끗하면 사람들이 깨끗해지는 줄 압니다. 정치가들은 법이나 제도, 시스템을 갖추면 세상이 깨끗해지는 줄 압니다. 김강자 경찰서장같은 사람은 택사스촌만 없애면 세상이 깨끗해지는 줄 알았습니다. 재개발론자들은 달동네만 없애고 고층 아파트를 지으면 사람들도 재개발되는 줄로 압니다. 민주화운동 하는 사람들은 부패한 정권만 무너뜨리면 금방 깨끗한 세상이 오는 줄 압니다. 다 필요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마음이 청결해야 합니다. 세상을 바꾸는 가장 중요한 원리를 심리학자 윌리암 제임즈가 말했습니다. “인류가 지금까지 발견한 최고의 발견은 인간이 마음을 바꾸면 세상도 바뀐다는 사실이다”. 그렇습니다. 마음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예수님 시대 유대인들의 깨끗하게 되는 방식에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부정한 것을 멀리함으로써 깨끗해지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더러운 음식을 먹지 않습니다. 아예 구약성경 레위기에 먹지 말아야 할 음식이 규정되어 있습니다. 레위기 11장과 20장입니다. 물고기중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물고기는 먹어서는 안됩니다. 오징어, 낙지, 꼴뚜기, 새우, 굴이 그 예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우리가 그렇게 좋아하는 낙지볶음, 오징어 튀김, 추어탕 같은 음식이 없습니다. 새 중에서 야생조류는 먹지 않습니다. 독수리, , 부엉이, 펠리컨, 갈매기, 박쥐등입니다. 그것은 우리도 거의 먹지 않지만 먹지 않는 이유가 다릅니다. 육류중에서는 되새김질하지 않고 발굽이 갈라진 것은 먹지 않습니다. 그래서 말이나 당나귀나 낙타는 새김질은 하나 굽이 갈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먹지 않습니다. 돼지는 굽은 갈라졌으나 되새김질을 하지 않기 때문에 먹지 않습니다. 기타 음식에 관한 많은 규제도 많습니다. 예를 들면 피를 먹지 않습니다. 우유와 소고기를 섞어서 먹지 않습니다. 염소 새끼를 어미의 젖과 함께 먹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반드시 코셔라고 부르는 음직만 먹습니다. 그래서 가게에 가보면 음식에 표시가 붙어 있습니다. K라고 쓰여진 음식은 먹고 그렇지 않은 것은 먹지 않습니다.

 

왜 이렇게 유대인들은 음식에 대하여 까다롭습니까? 음식이 사람을 깨끗하게도 하고 더럽게도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의 음식에 대한 관점은 위생적인 것도 아니고 영양적인 것도 아닙니다. 건강때문도 아닙니다. 거룩때문입니다. 우선 성경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앞에 더 거룩해진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입장은 달랐습니다. 사람의 입으로 들어간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합합니다. 7:18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으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예수님은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는 생각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말씀합니다. 7:21-23,“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예수님은 더럽게 하는 것더러운 것을 구분했습니다. “더럽게 하는 것은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입니다. 더러운 것은 마음입니다. 음식 자체가 더러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가끔 우리를 위생적으로, 건강에 대하여 해를 줍니다. 그러나 더러운 것 자체는 아닙니다. 정말 더러운 것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입니다. 이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합니다. 마음을 깨끗하게 해야 사람이 깨끗해 집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깨끗케 하십니다

그러면 누가 사람의 마음을 깨끗하게 합니까?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도 아시고 깨끗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17:9-10,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만은 나 여호아는 심장을 살피느니라“.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사람을 깨끗케 하십니까?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하나님을 통하여 깨끗케 하십니다. 모든 깨끗한 것의 비밀이 십자가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질 때 그 몸에서 두 가지를 쏟으셨습니다. 물과 피입니다. 19:34절입니다.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렸던 피와 물은 우리를 깨끗케 하시는 하나님의 두 가지 방법입니다.

 

먼저 피입니다. 성경은 인간을 깨끗케 하기 위해 피를 사용했습니다. 피는 하나님이 인간을 깨끗케 하기 위해 사용하신 성화의 방법이었습니다. 아벨이 피흘리고 죽었습니다. 그 피가 가인으로 인해 더러워진 땅을 깨끗케 했습니다. 모리아산의 숲에 갈린 양이 피흘렸습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이삭이 죽었을 것을 그가 대신 죽어 이삭을 죽음에서 건졌습니다. 출애굽때 어린 양이 피흘렸습니다. 그들이 피흘림으로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죽음에서 건져냈습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은 이 피를 사람의 구원하는 제도로 발전시켰습니다. 그것이 성막입니다. 성막에 가면 누구나 양이나 소를 잡아 자기 죄를 씻을 수 있었습니다. 훗날 다윗과 솔로몬은 예루살렘에 사람의 죄를 피로 씻는 성전을 세웠습니다. 구약의 모든 사건, 광야의 성막, 솔로몬의 성전은 단 하나의 진리를 나타냅니다. 9:22,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피는 인간의 죄를 씯는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죄를 지을 때마다 소나 양을 잡아야 한다면 얼마나 많은 소나 양을 잡아야 하겠습니까? 이 세상의 모든 소나 양을 다 잡아도 충분하겠습니까? 소나 양이 없는 나라에서는 무엇을 잡아야 합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흘리신 후에 누구도 다시 피흘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염소나 송아지의 피가 아니라 자신의 피를 흘려 한번에 우리의 죄를 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단번에, 한번에 예수님이 죽어 피흘렸다면 다시 제물이 필요없습니다. 또 다른 피가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때 우리가 받은 것은 죄를 씻는 은혜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우리가 죄를 씻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우리를 깨끗케 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은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가 더 있습니다. 물입니다. 물은 씻는 것입니다. 한번만 씻고 마는 것이 아니라 계속 씻는 것입니다. 물은 계속적인 성화를 나타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4:14,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님이 흘리신 물은 계속해서 솟아나는 성화의 샘입니다. 그 물은 성령의 생수입니다. 성경 의 말씀입니다. 7:38-39,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그러니까 두 가지 성화가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피로 우리의 죄를 깨끗케 하는 성화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들어갑니다. 이를 신학은 초기 성화, 위치적 성화, 혹은 칭의라고 합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성화가 있습니다. 성령의 생수를 통하여 우리를 날마다 깨끗케 하시는 성화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게 되고 악을 이기고 선을 행하며 보다 더 하나님을 닮은 삶을 살게 됩니다. 이를 신학은 점진적 성화, 성결, 온전한 삶이라고 부릅니다. 이 두 가지가 같이 갑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여기에 결혼한지 50년된 부부가 있습니다. 이 분들은 이미 50년전에 결혼 서약을 하고 부부가 되었습니다. 혼인 신고도 했고 아이도 낳았습니다. 묻습니다. 이들이 결혼 50년이 되었다고 해서 처음 부부가 될 때보다 더 법적인 부부가 됩니까? 어떻습니까? 50년 지났다고 더 법적입니까? 아닙니다. 법적 관계는 50년이 지나도 똑 같습니다. 50년이 지났다고 이들이 맺은 혼인신고가 더 가치 있는 것도 아닙니다. 50년 아니라 100년이 지나도 결혼의 법적 관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50년이 지나면 달라지는 것이 있습니다. 관계입니다. 혼인 신고서는 동사무소에 그대로 있지만 관계가 달라지고 자라났습니다. 신분은 동일합니다. 50년 되었다고 50년전에 예식장을 떠날 때보다 더 분명한 법적 관계를 가진 것은 아니지만 이들은 더 서로를 아는 부부가 되었습니다. 결혼식은 변함이 없지만 결혼관계는 계속 자랍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결혼은 이미 완성되었다. 그러나 결혼관계는 계속 자란다”.

 

,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럴까요? 그렇습니다. 이미 우리는 예수님이 흘린 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그 피로 죄사함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연조가 10년 되고 30년 된다고 하나님과의 관계 자체가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와 맺은 법적 관계는 여전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더 가까워 집니다. 성령님이 우리를 생수로 씻기 때문입니다. 이미 깨끗하여 졌지만 계속 말씀과 기도와 성령으로 우리의 마음을 씻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달라질까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달라집니다. 하나님을 더 깊히 알아갑니다. 하나님과 더 친밀해 집니다. 다시 정리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깨끗하여 자녀가 된 우리를 계속해서 깨끗하게 하십니다.

 

가정에서 자녀를 키워 본 분은 압니다. 가령 어느날 딸을 데리고 공원을 갔습니다. 딸이 모래밭에 뛰어 놀고 있는데 아이스크림 장수가 왔습니다. 하나 사서 주고 싶어 딸을 보았더니 입에 모래가 가득합니다. 그렇다면 아이스크림을 줄 수 없습니다. 입속에 흙을 넣어도 딸이요 입속에 흙이 있다고 내 딸이 아닌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이스크림을 줄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딸을 사랑해도 입에 흙이 있는 데 아이스크림을 주는 부모는 없습니다. 부모는 입에 흙이 있어도 딸을 사랑하지만 아이스크림은 흙이 없어야 줍니다. 딸이 입에 흙이 있는 데도 아이스크림 안 사준다고 울어도 안 줍니다. 딸을 데리고 물가로 가서 입을 씻긴 후에야 아이스크림을 줍니다. 딸과의 관계는 영원히 깨지지 않지만 아이스크린 깨끗해야 줍니다.

 

하니님과 우리와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안과의사에 의하면 우리 눈은 하루에 약 25천 가량 깜빡거린다고 한다. 그때마다 눈물샘에서 눈물이 나와 안구를 청결케 합니다. 어쩌다 감동받아 한번 눈물 흘릴 수 있지만 한번 눈물 흘렸다고 눈이 깨끗해지지 않습니다. 계속 눈물이 나와야 먼지를 닦습니다. 마음에 쌓인 먼지도 마찬가지입니다. 계속 씻어내고 닦아야 합니다. 그래야 깨끗해집니다. 딤전4: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깨끗해집니다. 피는 우리를 위해 내주신 예수님의 몸이요 물은 우리 안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시는 성령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역은 두 가지입니다. 우리를 위해 행하시는 사역과 우리안에서 행하시는 사역입니다. 우리를 위한 사역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어 피흘린 일입니다. 우리안에서의 사역은 우리안에 계신 성령이 우리를 날마다 씻는 일입니다. 첫 번째는 끝났지만 두 번째는 계속 됩니다. 그래서 도널드 블로쉬라는 신학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죄인을 위한 그리스도의 사역은 완성되었지만 죄인 안에서 이루어지는 그분의 사역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시간 확인해 봅시다. 여러분은 이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린 피로 정결케 된 것을 믿습니까? 그리하여 하나님의 자녀의 삶이 시작된 것을 믿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계속 성령의 생수로 우리 마음을 씻으시고 깨끗케 하고 계심을 믿습니까? 한번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하고 계심을 믿습니까? 말씀과 기도가 그것을 하게 하는 것을 믿습니까? 여러분은 이미 깨끗하여 졌고 앞으로도 계속 깨끗해져야 함을 믿습니까?

 

마음이 깨끗하면 하나님을 봅니다

문제는 깨끗한 마음을 가지면 하나님을 본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오늘 말씀, “마음이 청결한 자는할 때 결하다는 말의 본래의 뜻은 마음이 나뉘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언제 우리 마음이 나뉘어집니까? 죄가 있을 때입니다. 죄가 있으면 죄책감이 생깁니다. 죄책감은 우리를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나눕니다. 죄책감이 얼마나 무서운지. 오래전에 미국 국방부에 한 사람이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10달러 수표와 함께 이렇게 썻습니다. “저는 제2차 대전에 참여했던 참전용사입니다. 그때 남의 담요 한 장을 훔쳤는 데 그 대금 10달러를 보냅니다. 그 일로 저는 40년이나 고통가운데 살아 왔습니다. 너무 늦어서 미안합니다.” “퇴역군인이라고 서명한 그 편지에는 이런 추신이 있었습니다. “이제야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마친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전쟁에 나가 우연히 남의 담요 한 장 훔친 것이 40년 동안이나 양심을 괴롭게 해서 이제 나이 많아 죽어가면서 그것 하나를 털어 버려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우연히 훔친 담요 10불이 40년이나 마음의 짐이 된 것입니다. 마음이 죄로 나뉘이면 행복하지 못합니다. 모든 불행이 여기서 시작됩니다.

 

마음이 나뉘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안에 있는 영과 혼과 육이 서로 싸우는 것입니다. 가장 행복한 것은 영과 혼과 육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다스림받는 곳이 하나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영을 다스리면 영은 혼을 다스리고 혼은 육을 다스리면 됩니다. 그러면 갈등이 없습니다.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각자 따로 다스림받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영은 하나님의 지배를 받습니다. 혼은 인간적 생각의 지배를 받습니다. 육은 세상적 욕심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나뉘입니다. 나뉘이면 어떻게 됩니까? 서로 싸웁니다. 그래서 내부적인 갈등이 생깁니다. 이 내부적인 갈등을 심리학자는 자기 분열이라고 부릅니다. 모든 정신병이 자기 분열에서 옵니다. 정신과 몸이 따로 노는 것이 정신 분열입니다. 몸과 영혼이 따로 노는 것이 질병입니다. 영혼과 몸이 따로 노는 것이 귀신들린 것입니다. 나뉘지 않아야 힘이 있습니다. 나뉘지 않아야 행복합니다. 나뉘지 않으려면 하나님 한 분이 우리안에 계시면 됩니다. 하나님 한 분의 다스림을 받으면 영과 혼과 육이 하나가 되어 우리 자신이 행복합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면 우리 밖의 세계에 대하여 우리 영과 혼과 육이 함께 공조하기 때문에 우리가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공합니다. 우리 말로 이것을 정신일도 하사불성, 정신이 하나되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고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성경적입니다.

 

우리안에서 한 분 하나님의 지배를 받아 영과 혼과 육이 하나가 되면 세상을 바라보는 것도 하나입니다. 나뉘이면 영은 주일날 예배드리고 싶은 데 혼은 공부하고 싶고 육은 골프치고 싶습니다. 그러면 헷갈리는 것입니다. 하나가 되면 한 마음입니다. 영이 하자는 대로 혼이 따르고 육이 따릅니다. 그래서 분열이 없습니다. 그래서 행복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려 우리안에 죄가 점점 사라지고 깨끗해지면 하나님과 통합니다. 그때부터 예배가 잘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충만히 느낍니다. 하나님이 우리안에 계서 날마다 깨끗해지면 기도를 해도 늘 응답받습니다.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있는 것을 느낍니다. 24시간이 기도시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안에 있어 우리가 날마다 거룩해지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삽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능력과 그 뜻을 준행하는 능력을 같이 받습니다. 이것이 성도의 거룩한 삶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여기 달려 있습니다.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요”. 예수님의 피로 이미 깨끗해진 여러분, 성령의 생수로, 기도와 말씀으로, 회개와 순종으로 계속해서 깨끗해지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영적 성장(7) 5:7 2011.2.27() 깨끗한 마음, 하나님을 보는 마음

성 소피아 사원(사진).

최후의 심판(그림).

예수님 (동영상).

20:27, “사람의 영혼은 여호아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요”.

 

마음이 청결해야 깨끗해집니다.

7: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으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7:21-23,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하나님은 마음을 깨끗케 하십니다

17:9-10,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만은 나 여호아는 심장을 살피느니라“.

19:34,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9:22,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4:14,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7:38-39,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딤전4: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도널드 블로쉬, “죄인을 위한 그리스도의 사역은 완성되었지만 죄인 안에서 이루어지는 그분의 사역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마음이 깨끗하면 하나님을 봅니다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