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성장(8) 마5:9 2011.3.13(일) 평화의 마음, 하나님의 자녀의 축복
아름다운 3월이 시작되었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렇게 아름답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들려오는 고통과 탄식의 소리 때문입니다. 일본에서는 사상 유례가 없는 지진이 나 일본 전체가 고통하고 있습니다. 리비아에서 일어난 민주화 시위는 사실상 내전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40여년을 독재해온 카다피는 어떤 일이 있어도 권력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무고한 국민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반정부 시위가 발생한 지금까지 적어도 최소 6천명 이상이 숨졌습니다.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세계 경제에 영향을 줄 석유시설까지 폭파하겠다고 공언하면서 세계를 향해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 사진은 목숨걸고 리비아를 탈출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사진). 지금까지 리비아를 탈출한 사람만 25만명, 튀니지로 13만, 이집트로 10만 이상, 그리고 알제리로 니제르로 각각 탈출했습니다. 나라마다 특별기와 선박으로 자국민을 탈출시켰습니다.
왜 사람들은 이렇게 전쟁하는 것일까요? 전쟁으로 얻는 것이 무엇입니까? 가인과 아벨 이후 세계의 역사는 곧 전쟁의 역사였습니다. <전쟁의 연구>라는 책에 의하면 지난 500년만해도 인류는 400번 이상의 전쟁을 치뤘습니다. 크고 작은 전쟁을 빼면 인류 역사에 전쟁이 없었던 기간은 3년도 채 안된다고 합니다. 20세기만 해도 제1차, 2차 대전, 한국전쟁, 월남전쟁, 걸프전쟁, 아프간전쟁, 이라크전쟁, 그로 인해 죽은 사람만 약 5천만명이라고 합니다. 과연 인류에게 전쟁을 막고 평화롭게 사는 방법은 없는가? 20세기의 그 많은 전쟁과 그 고통을 보면서 어떤 신학자가 세 가지로 요약했습니다. 첫째 인류에게 최종적으로 소중한 것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자유다. 둘째 아무리 정의로운 전쟁이라 해도 정의롭지 못한 평화보다 못하다. 셋째. 전쟁은 죄에서 나오며 전쟁은 곧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다.
과연 우리는 평화를 원하는가? 하나님은 평화에 대하여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는가? 예수믿는 우리는 어떻게 평화를 이루며 살 수 있을까?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마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여러분은 정말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평화의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까? 전쟁과 테러가 만연한 이 땅에 평화를 이루며 살려고 노력하며 살겠습니까? 이를 위해 먼저 평화가 어디에서 오는지 알아야 합니다.
평화는 청결한 마음에서 옵니다.
우리가 평화에 대해 가진 생각중에 하나는 “평화는 운동이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 있는 비극적인 전쟁을 막는 것이다. 결국 전쟁의 반대가 평화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평화는 처음부터 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극히 작은 마음으로부터 시작합니다. 평화는 밖에서 들어오는 운동이 아니라 마음에서 생긴 삶의 태도입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평화를 말씀하신 위치가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자, 9절에서 예수님이 평화를 말씀합니다. 그러기 전에 8절에서 예수님은 마음의 청결을 말씀합니다. 마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요”, 그리고 9절에서 평화를 말씀하신 후 10절로 가면 “의”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마5: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자, 그러면 평화의 위치는 어떻습니까? 앞에는 마음의 청결이 나고 뒤에는 의가 나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평화는 마음의 청결에서 나오고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 있다는 말입니다. 8절,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이것이 평화의 시작입니다. 10절, “의를 위해 박해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것이 평화의 목적입니다. 이것이 산상수훈이 말한 평화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합니까? 많은 사람이 평화는 평화운동 하는 사람이 하는 어떤 특별한 사회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평화는 지식인, 의식있는 사람, 선구자, 깨어 있는 사람이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평화는 운동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누구나 그 마음을 가지면 평화의 사람이 됩니다. 마음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평화의 마음을 갖는 것이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의 유일한 자격입니다. 공부를 많이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의식이 있고 애국자가 되어야 평화를 위해 일하는 것 아닙니다. 평화의 마음을 갖는 사람이 평화를 위해 일할 사람입니다.
문제는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이냐가 중요합니다. 8절,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청결한 마음입니다. 깨끗한 마음입니다. 지난 주에 말씀드린 청결한 마음은 다른 말로 하면 죄가 없는 마음입니다.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 우리 마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이 우리를 더럽게 합니다. 그것이 곧 죄입니다. 결국 죄는 우리 마음에서 하나님과의 평화를 깹니다. 평화를 깨는 첫 번째는 전쟁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의 죄입니다.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랐습니다. 이사야가 말합니다. 사59: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같은 이사야가 말합니다. 사48:22,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평강은 나라와 나라사이의 전쟁 때문에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우리 마음의 죄악 때문에 없습니다. 악한 환경 때문에 평강이 없는 것이 아니라 악한 마음 때문에 평강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적 평화를 이해하기 위해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약3:17절입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여기에서 야고보가 강조한 순서에 주목해야 합니다.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이 순서가 중요합니다. 화평은 다름아닌 성결에서 온다는 말입니다. 마음이 깨끗하고 청결해야 화평하다는 말입니다. 이 순서가 바뀌어서는 안됩니다. 히12:14절도 중요합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여기에 “화평함”과 “거룩함”이 같이 나타납니다.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다시 말하면 평화와 청결은 분리할 수는 없습니다. 평화와 의를 떼어놓을 수도 없습니다. 의로워야 평화롭습니다. 시85:10절 말씀도 중요합니다. 시85:10,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의는 깨끗함입니다. 성결이요 청결입니다. 죄가 없는 것입니다. 그 의가 화평과 입맞춥니다. 다시 말하면 의로워야 화평합니다. 성결해야 평화롭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평화의 시작입니다.
실제 세상에 일어난 전쟁을 보면 그것이 어떻게 호도되고 미화되었어도 그 배후에 는 반드시 죄가 있습니다. 기본적인 죄는 물론 탐욕입니다. 소유욕입니다. 욕심입니다. 남의 것을 뺏으려만 나쁜 마음입니다. 독일의 히틀러가 유대인 600만을 학살했습니다. 왜 그랬을까? 겉으로 내세운 이유는 게르만족의 위대성입니다. 게르만족은 위대하다. 그런데 유대인이 방해거리다. 이것이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겉으로 내세운 그럴싸한 명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에릭슨이라는 심리학자가 히틀러의 과거를 추적했습니다. 그랬더니 히틀러의 아버지는 유대인 여자에게서 사생아로 태어난 사람이었습니다. 히틀러의 할아버지는 한 유대인 여자를 만나 아들을 낳았는 데 아들을 낳고 떠났습니다. 반이 유대인인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제대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그를 돌보지 않은 것에 대한 분노와 자기를 버린 유대인인 어머니에게 분노를 품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은 기존세대에 대한 불만으로, 어머니에 대한 미움은 유대인에 대한 미움으로 변했습니다. 그 원망과 미움의 독이 어린 히틀러에게 쏟아졌습니다. 아버지는 그의 모든 분노를 그 아들에게 쏟아부었습니다. 히틀러는 어릴 때부터 이 기성세대에 대한 불만과 유대인에 대한 증오를 함께 가지고 자랐습니다. 결국 결과는 끔찍한 것이었습니다. 유대인 600만을 포함하여 2천만이 죽은 2차대전의 주범이 되었습니다. 결국 2차대전, 600만 유대인 학살의 배후에 개인적인 죄가 있었습니다. 히틀러 할아버지의 죄, 히틀러 아버지의 죄, 그리고 히틀러 자신의 죄, 그 마음속에 있던 모든 죄가 결국 끔찍한 전쟁을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평화를 위한 예수님의 방법이 탁월합니다. 고후5장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며 우리에게는 화목하게 하는 사명이 있다고 말합니다. 고후5: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여러분에게는 이 세상을 화목하게 하는 사명이 있음을 믿습니까? 그런데 화목하게 하는 사명이전에 먼저 있는 것이 있습니다. 17절입니다.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무엇입니까? 처음 것이 죽고 다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첫번째 사람은 죽고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났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을까요? 예수님이 죄로 인해 하나님과 막힌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은 것입니다. 평화는 본래 담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는 담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 가로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습니다. 이것이 평화의 시작입니다. 그러니까 평화의 순서가 이렇게 됩니다. “우리는 죄 때문에 하나님과 평화하지 못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어 우리 죄를 씻고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했다. 그것을 믿고 죄씻음받아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 마음에 평화가 임했다. 그래서 우리가 평화를 위해 일한다”. 이해가 됩니까? 평화의 사람이 되어야 평화를 위해 일합니다. 세계 역사를 보면 이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노벨평화상을 보십시오. 1902년 처음으로 노벨평화상이 수여되었는 데 스위스의 뒤낭이 가장 먼저 수상했습니다. 작년까지 기관으로 상을 받은 경우를 제외하고 개인으로 받은 사람이 모두 106명이었습니다. 그 중 유대인 몇 명, 아랍인 몇 명, 그리고 달라이 라마, 아웅산 수지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이 기독교인입니다. 80명이상 됩니다. 알버트 슈바이쳐, 함마슐드, 마틴 루터 킹, 테레사, 넬슨 만델라, 빌리 브란트, 지미 카터, 김대중, 예수님안에서 그 죄를 씻김받고 먼저 자기 안에 평화를 이룬 사람, 그들이 평화를 위해 일한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평화의 일을 하기 위해 부름받은 여러분은 먼저 예수님안에 죄씻음받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까? 하나님과 막힌 죄를 벗어버리고 예수님안에서 은혜로 청결한 사람이 되었습니까? 마음이 청결해야 평화를 이룹니다. 이것이 성경적 평화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나오는 중요한 두 번째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평화한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예수님이 평화를 말씀하면서 평화의 마음을 가진 사람을 무엇이라고 부르냐가 중요합니다. 마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여러분, 화평케 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아들은 누구입니까? 화평케 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평화한 사람을 최고의 칭호로 불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고 하나님의 딸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목숨을 걸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들과 딸입니다. 요즘 “무조건”이란 노래가 있습니다. 어쩌다 들었는 데 가사가 귀에 들어왔습니다. “내가 필요할 때 나를 불러줘 언제든지 달려갈게 낮에도 좋아 밤에도 좋아 언제든지 달려갈게 다른 사람들이 나를 부르면 한참을 생각해 보겠지만 당신이 나를 불러준다면 무조건 달려갈 거야 당신을 향한 나의 사랑은 무조건 무조건이야. 특급사랑이야”. 어떻습니까? 어디서 많이 듣던 가사 아닙니까? 여기서 당신이 우리 남편이고 아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아내나 남편은 잘 안되지 않는 데 잘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녀들입니다. 자녀들에게 대해서 우리는 무조건입니다. 특급 사랑입니다.
미국에서 실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한 젊은 여성이 속도위반으로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경찰은 속도위반 딱지를 떼었고 그는 곧 즉심에 회부되었습니다. 즉심에서 판사는 위반내용을 읽고 위반했는지 안 했는지를 물었다. 그녀는 속도를 위반했다고 솔직히 말했습니다. 그 판사는 망치를 두드리며 선고했습니다. “100달러의 벌금에 처한다”. 그런데 다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판사가 법복을 벗더니 밑으로 내려와서 법원 서기에게 100불을 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요즘도 그렇게 착한 판사가 있나?” 사람들은 감동했습니다. 그런데 판사가 그렇게 할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판사는 그 여성의 아버지였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딸의 벌금을 대신 내준 것입니다. 아버지라고 딸의 죄를 그냥 덮어 줄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100달러 벌금은 선고했지만 딸이기 때문에 자기가 돈을 내준 것입니다. 이것이 무조건 사랑입니다.
어떻습니까? 하나님도 저와 여러분을 그렇게 사랑할까요? 그렇습니다. 무조건, 무조건입니다. 작년에 서울시 아동복지센터에서 중학생 이하 자녀 6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습니다. “부모에게서 가장 듣고 싶은 말이 무엇이니?“ 가장 듣고 싶은 말로 “사랑해”가 뽑혔습니다. 38.4%, 언제나 들어도 좋은 말, “사랑해”. 두 번째는 “용돈 줄까?”. 28.2%. 세 번째, “엄마와 아빠는 너를 믿어”. 네 번째 “괜찮아, 넌 할 수 있어”(6.0%), 다섯 번째 “우리 아들. 딸 다 컸네”. 반면에 듣기 싫은 말이 있습니다. 1위, “제발 공부 좀 해라”. 2위, “누구 누구 반만 닮아라”. 셋째, “너는 왜 그렇게 생각이 없니?”. 넷째 “너 나중에 커서 뭐가 될래?”. 어떻습니까? 하나님도 자녀인 여러분에게 좋은 말을 하실까요? 물론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그 자녀에 대한 사랑은 무조건입니다. 특급사랑입니다. 말3:17입니다. “만군의 여호아가 이르노라. 나는 내가 정한 날에 그들을 나의 특별한 소유로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 하나님에게 우리는 특별한 소유입니다. 여기서 소유는 보석을 말합니다. 하나님에게 우리는 보석입니다. 그만큼 아끼고 사랑합니다. 시16:3절입니다.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하나님에게 우리는 존귀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기쁨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엡2:10절입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만들었다는 이 말은 작품이란 말입니다. 본래 뜻은 “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시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했으면 시라고 했겠습니까? 요10:28-29절입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하나님이 한번 자녀로 부르시면 절대 빼앗기지 않습니다. 한번 손으로 붙잡으면 절대 놓치지 않습니다. 마지막 요한 계시록 3:21입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리라”. 아, 우리는 마침내 하나님과 함께 앉을 사람들입니다. 땅에서는 이런 저런 고생을 하고 살지만 머잖아 하늘에 오르면 하나님과 함께 앉습니다. 무조건, 무조건입니다. 특급 사랑입니다.
더구나 오늘 말씀에 나오는 “아들”은 헬라어에서 특별한 말입니다. 아들을 나타내는 말로 "테크논“이 있습니다. 이 말은 사랑만 받는 아주 어린 아들을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 나오는 아들은 ”휘오스“입니다. 이 단어는 나이가 들어 자녀의 권리와 신분을 갖춘 아들을 말합니다. 아버지가 죽으면 재산을 물려 받고 가문을 이어받을 그런 장성한 아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다만 어린아들처럼 사랑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아들에 걸맞는 대우와 존귀를 주시는 분입니다. 아버지의 재산과 영광과 존엄을 물려 줍니다. 아버지가 가진 하늘과 땅의 권세를 받습니다. 그 아들이 오늘의 아들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그 아들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아무나 하나님의 아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통해 십자가에서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 죄를 씻고 청결케 되고 마음의 평화를 얻은 사람들, 그들을 하나님은 그의 아들이요 딸이라 불렀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화목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입니다.
화평케 한 사람만 하나님의 아들로 불립니다
그런데 중요한 구분이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과 하나님의 아들로 불러주는 것은 다릅니다. 예수님은 통해 죄씻음 받고 하나님과 화목하면 누구나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는 은혜로 아들의 신분과 자격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조금 더 나아가야 합니다. 아들과 아들다운 사람은 다릅니다. 아들의 이름을 가진 자와 아들답다는 말을 듣는 사람은 다릅니다. 아들의 이름은 예수님안에서 하나님과 화평한 사람 누구나 받습니다. 그러나 아들도 아들 나름입니다. 하나님과 평화는 이루었으나 평화를 위해 살지 않으면 하나님의 아들로 일컬어지기 어렵습니다. 아들은 아들인데 충분한 아들이 아닙니다. 다시 9절을 보십시오. 마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화평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화평케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자기만 하나님과 화평한 사람은 자기만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아직 남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닙니다. 평화는 거저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중세의 문학가 단테가 한번은 묵상과 기도를 위하여 수도원 문을 두드렸습니다.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안에서 수도승이 물었습니다. “이 늦은 밤에 당신은 무엇을 원하시오?” 단테가 대답했습니다. “예, 평화를 찾으러 왔습니다.” 그러나 수도승은 밤이 늦어 받아 줄 수 없다며 문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단테가 고민하다가 다시 문을 두드렸습니다. 수도승이 물었습니다. “당신은 무엇을 원하길레 또 문을 두드리시오?“ 단테가 말했습니다. ”예, 평화를 주고 싶습니다“. 그때 문이 열렸습니다. 그렇습니다. 평화는 찾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도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을 지어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평화를 주노라.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아니하니라”. 평화를 찾기만 해서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내가 가진 평화를 줘야 합니다. 어디 특정한 장소에 평화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는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에 평화가 임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마10:34에서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잘못 이해하면 오해가 됩니다. 예수님이 평화가 아닌 칼을 주러 왔다니. 반대로 말씀하신 것 아닌가? 그러나 이 말씀은 이런 뜻입니다. 평화는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라 대가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평화에는 희생이 필요합니다. 현상 유지에 급급해서는 진정한 평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괜히 사람들을 기분 나쁘게 하지마. 잘못하면 긁어 부스럼이야. 그냥 좋은 게 좋은 것 아니야?” 이것은 좋은 평화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평화를 만드신 방법을 알기 원합니까? 그것은 자기 몸을 십자가에 못박는 방식입니다. 엡2:14절 말씀입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이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다같이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두 가지 평화가 있습니다. 로마식 평화와 성경적 평화입니다. 로마식 평화는 자기를 위하여 남을 죽이는 평화입니다. 그래서 로마는 천년동안 팍스 로마나, 로마의 평화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신 방식은 남을 위해 자기를 죽이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로마는 무력으로 남을 정복하고 힘으로 거짓 평화를 만들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기를 죽이고 남을 살리는 진정한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평화는 모두 로마식입니다. 2차 대전때 독일, 일본이 그렇게 했습니다. 과격파 이슬람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김일성, 김정일이 그렇게 했고 가다피가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이런 평화는 언젠가 무너집니다. 휴전과 평화는 다릅니다. 휴전은 잠시 전쟁이 없는 상태고 평화는 서로 잘 지내는 것입니다. 다만 전쟁이 없다고 평화로운 것은 아닙니다. 자기를 죽여 남을 살리는 희생이 있어야 진정한 평화입니다. 바울 사도도 말했습니다. 엡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힘써 지킨다는 말은 로마 시대에 원형극장에 모여 피를 흘리며 싸우는 검투사에게서 나온 말입니다. 그때 검투사들은 죽기 아니면 살기 로 싸웠습니다. 이것을 “힘써 지킨다”고 말합니다. 평화는 그냥 오는 것이 아닙니다. 만들어야 하고 힘써 지켜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승리는 평화를 만들고 지키는 데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미국 카네기 공대를 졸업하고 성공한 사람들을 추적한 결과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을 성공시키는 데 전문적인 지식이나 기술이 15%밖에 영향을 주지 못했으나 좋은 인간관계가 85% 영향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좋은 직장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직장에서 성공하는 것은 전문성보다 관계입니다. 그런데 자동적으로 좋아지는 관계는 없습니다. 관계는 만들어야 하고 지켜가야 합니다. 그 속에 예수님의 자기 부정과 자기 희생이 있습니다. 누구나 결혼할 수 있으나 행복한 결혼은 만들어지고 지켜져야 합니다. 자동적으로 행복한 가정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자기를 죽여 남을 살린 예수님의 화평케 하신 정신이 가정에 들어가야 가정이 평화롭습니다.
세상 사는 모든 원리가 이 평화의 원리입니다. 미국 미시간대학의 심리학자 브라운 박사가 말했습니다. “베푸는 사람이 오래 산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자기만 아끼고 남을 돕지 않는 사람은 남을 돕는 사람보다 일찍 죽을 가능성이 2배 이상 높다.” 그는 무작위로 약 400쌍 이상의 장수하는 노인들을 대상으로 5년 간 조사했습니다 그랬더니 여성 중 72%, 남성 중 75%가 아무런 대가 없이 가사나 육아 등의 봉사로 이웃들과 친구들을 도우면서 살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브라운 박사는 “장수하는 사람은 도움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남을 도와주는 사람이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예수님의 평화의 원리가 여기에도 적용됩니다. 자기 몸을 깨뜨려 평화를 만들고 평화를 지키신 예수님, 우리가 예수님 방식대로 살면 행복하고 장수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영원한 과제인 통일은 어떻습니까? 어느날 갑자기 오겠습니까? 누군가 통일을 만들어 놓으면 그때 참여하겠습니까? 요즘 살기가 어렵다고 통일에 대한 생각이 현저하게 떨어졌습니다. 옛날에는 “반드시 통일되어야 한다” 35%, “가급적이면 통일되었으면 좋겠다” 47%, 대략 80%가 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60% 미만입니다. 누가 통일을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닙니다. 통일의 영웅이 나오기를 기대해서도 안됩니다. 우리가 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우리가 염원하고 우리가 탈북자를 돕고 우리가 노력해야 합니다. 얼마전에 한 탈북자 단체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탈북자 한 사람이 북한을 떠나 남한에 정착하는 비용이 대략 3백만원이랍니다. 그,러면서 도와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회원이 되었습니다. 300만원이면 한 사람의 동포를 살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구체적인 통일운동입니다.
마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영원한 진리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미 예수님 때문에 평화를 얻었습니다. 이제 화평을 위해 일합시다. 그러하여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시기 바랍니다.
영적 성장(8) 마5:9 2011.3.13(일) 평화의 마음, 하나님의 자녀의 축복
사진(리비아 난민들)
마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평화는 청결한 마음에서 옵니다.
마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요”
마5: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사59: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사48:22,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약3:17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히12:14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시85:10,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고후5: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하나님과 평화한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마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말3:17, “만군의 여호아가 이르노라. 나는 내가 정한 날에 그들을 나의 특별한 소유로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
시16:3,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엡2: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10:28-29,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계3: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리라”.
화평케 한 사람만 하나님의 아들로 불립니다
마10: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엡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이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엡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마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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