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성장(9) 마5:10-12 2011.3.20(일) 핍박받는 마음, 승리의 축복
요즘 세계의 모든 눈과 귀가 일본을 향하고 있습니다. 일본 원전이 잘못되면 일본 뿐 아니라 전 세계가 큰 피해를 당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폭발직전에 있는 원자로에 누가 바닷물을 부어 폭발을 막느냐입니다. 이미 3호기 서쪽에서는 피폭 한도량의 400배에 상당하는 방사선 수치가 계측되었습니다. 심각한 방사선 누출이 염려되는 4호기는 너무 위험해 접근조차 못하고 있습니다. 만일 이곳에 사람이 접근하면 마치 전쟁에 죽으러 나가는 자살부대와 같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일을 자청하고 나선 사람들이 있습니다. 도쿄전력에서 일하는 230명의 직원입니다. 일명 원전 사수대라고 불리는 이들은 마치 조국을 위해 전쟁터로 나가는 비장한 각오로 이 일을 자원했습니다. 이들은 일이 잘못되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압니다. 오래전 러시아의 체르노빌 원전사고때도 수습을 위해 투입된 사람들이 모두 고통가운데 죽었습니다. 그 중 28명은 방사능에 노출돼 3개월 만에 숨졌고, 19명은 방사능에 의한 피부 손상과 이에 따른 감염으로 사망했고 나머지는 오랫동안 백혈병과 혈액암으로 시달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죽음의 현장으로 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애국심일 것입니다. 일본의 운명이 이들의 어깨에 달려 있습니다. 남달리 애국심이 강한 이들은 마치 2차대전의 가미가제처럼 자신의 목숨이라도 바쳐 조국을 구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역사는 이들은 의로운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언제나 역사에는 의로운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의로운 사람은 대를 위해 소를 버리는 사람입니다. 조국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고 옳은 일을 위하여 소아를 버립니다. 우리 나라 강재구 소령이 그런 사람입니다. 그는 1965년, 파월장병을 위해 슈루탄에 덮쳐 부하들을 구해냈습니다. 그는 의로운 사람입니다. 천안함의 한주호 준위도 그런 사람일 것입니다. 2010년, 백령도 앞바다에 전우 한 명이라도 더 구하려고 수심 25미터 바다로 뛰어들었다가 끝내 죽고 말았습니다. 의로운 행동입니다. 고대생 이수현도 그런 사람일 것입니다. 2001년, 도꾜의 한 역에서 술에 취해 떨어지던 한 일본인을 구하고 죽었습니다. 안중근, 유관순, 주기철, 우리 나라 역사에만도 수많은 의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두운 역사의 구석 구석을 정의와 사랑으로 비췄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가르친 산상수훈 8복의 마지막 시간에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마5: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자“. 이것은 예수님이 가르친 8가지 복의 마지막입니다. 항상 마지막이 중요합니다. 마지막은 다만 시간의 마지막이 아니라 지금까지 말한 것의 결론이요 종합입니다. 무엇인가 중요하기 때문에 마지막에 말씀하는 것입니다.
다른 복은 다 ”복이 있나니" 한 번씩만 말했습니다. 그런데 “의를 위해 사는 복”은 두 번이나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10절에 “복이 있나니”, 또 11절에 “복이 있나니”. 다른 복은 다 한 절씩 말했습니다. 그런데 의를 위해 사는 복은 세 절입니다. 10절, 11절, 12절. 왜 이렇습니까? 지금까지 말한 모든 복이 이것때문이라는 것입니다. 3절, 심령이 가난해야 합니다. 왜 가난해야 합니까? 가난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의롭게 살기 위하여 가난해야 합니다. 4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왜 애통해야 합니까? 매일 울고 살라는 것입니까? 매일 울고만 산다면 어떻게 그것이 복이겠습니까? 의롭게 살기 위해 애통하는 것입니다.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들을 통해 결국 우리가 “의를 위하여” 살기 때문입니다. “의”가 8복의 최종 목적지입니다. 그러면 의롭게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의롭게 살면 어떻게 될까요? 왜 의롭게 사는 것이 복입니까?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위해 삽니다.
의롭게 살기 위해 우리가 먼저 알 것은 “의”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의”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보통 “의” 하면 도덕적 선행을 떠올립니다. 어떤 사람이 의롭다 하면 보통은 “아, 그 사람이 남을 위해 옳바른 일을 했나 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의는 도덕적 개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본래 성경이 말하는 ”의“가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의“는 ”인간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의의 본질이요 모든 의의 시작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의롭습니다. 하나님만 죄가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의는 거기에서 나옵니다. 스스로 의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C.S.루이스가 말한대로 우리는 하나님앞에 무기를 내려놓고 투항해야할 반역자들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모두 썩었습니다. 우리는 조금 노력하면 더 나아질 존재들이 아닙니다. 만물보다 부패하고 심히 악한 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reform, 개선되어야 할 존재들이 아니라 transform, 변화되어야 할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냈습니다. 롬3:24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여기에 “말미암아“가 나옵니다. 스스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라는 말이 나옵니다. 우리가 노력해서 의로워진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의롭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의롭다고 인정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의“는 행위적 ”의“가 아니라 관계적 ”의“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의로운 것입니다. 그 분과 관계를 맺을 때만, 그 분이 주시는 의때문에만 우리도 의로워지는 것입니다.
“의”는 마치 빛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빛입니다. 그 빛이 우리를 비춥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세 가지 반응이 일어납니다. 첫째는 노출, 둘째는 동화, 셋째는 반사입니다. 하나님의 빛앞에 서면 우리는 노출됩니다. 몸에 묻은 때, 옷에 묻은 먼지, 마음의 숨은 죄, 다 드러납니다. 혼자 있을 때는 모릅니다. 자기가 완전한 줄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앞에 서면 얼마나 더러운 존재인지를 압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빛이 계속 비추면 내가 그 빛에 동화됩니다. 마치 장작불속에 부지깽이가 오래 있으면 부지깽이도 함께 달구어 지듯이 우리가 하나님앞에 오래 있으면 하나님의 빛이 우리에게 들어와 우리도 발갛게 달아오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불은 아닙니다. 불이 우리에게 붙어 전달된 것뿐입니다. 그래도 그 빛이 우리안에 계속 있으면 우리도 모르게 빛이 나갑니다. 이것이 우리의 의입니다.
처음부터 의인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빛을 많이 받으면 의인이 됩니다. 처음부터 순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불을 많이 받으면 내 속에 있는 불이 순교로 나갈 뿐입니다. 그래서 마5:16절이 중요합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의”는 착한 행실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착한 행실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속에 들어와 착하게 된 것뿐입니다. 우리에게 본래 빛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빛이 들어와 우리가 빛이 비추게 된 것 뿐입니다. 우리의 의는 하나님의 의에서 나옵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우리속에 들어오면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의속에 살 수 없게 됩니다. 우리도 모르게 하나님을 위해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1879년, 우리 나라에서 가장 먼저 세례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백홍준이라는 사람입니다. 그가 이것을 보여줍니다.
1876년, 언더우드, 아펜셀러가 들어오기 9년전, 우리나라에 들어와 선교한 스코트란드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존 로스라는 선교사였습니다. 그가 압록강을 건너와 중국인을 데리고 장사하는 방식으로 선교를 시작했는 데 조선인이 호기심을 끌 만한 물건을 공짜로 주면서 성경과 전도지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좋아했던 것은 양초였습니다. 죤 로스는 양초를 주면서 성경도 나눠 주었는 데 그때 양초와 성경을 받은 사람중에 의주 사람 백씨가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도 양초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집에 가져온 책이 무슨 책인지 아들에게 읽어 보라고 했습니다. 그 아들이 백홍준이었습니다. 백홍준이 그 책을 읽다가 점점 심취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친구들을 모아 성경을 읽고, 만주에서 은밀히 들어온 기독교서적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3년이 지나자 백홍준은 이 진리야 말로 내가 목숨걸고 믿을만한 구원의 진리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압록강건너 매킨타이어 선교사를 찾아가 그 친구 세명과 함께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때가 1879년, 한국교회 최초의 세례교인이 태어난 역사적인 날이었습니다.
세례받은 백홍준은 그때부터 삶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그가 하는 모든 일을 그만 두고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친구들을 모아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는 아직도 서슬이 퍼런 대원군 시대였습니다. 이미 천주교를 믿는다고 수많은 사람이 죽은 후였습니다. 그 위험한 때 그는 진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그 마음속에 들어온 하나님의 빛이 더 이상 그를 어둠속에 있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잡혀가 평양감옥에서 3년간 감옥살이를 하게 됩니다. 감옥에 있을 때도 전도를 쉬지 않았고 감옥에서 나온 후에도 사람들을 가르치고 전도하기를 쉬지 않았습니다. 그후 그가 죽을 때까지 수많은 핍박과 감옥과 고난을 받으면서도 그는 하나님의 의를 이 실천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훗날 그에게서 배운 서상륜은 언더우드를 도와 새문안교회를 창립했고, 한석진은 마펫 선교사를 도와 평양교회를 세웠습니다. 남과 북에 최초의 교회를 세운 사람들이 그의 제자들이었습니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자랑스러운 역사입니다. 평범한 사람을 위대하게 만드는 능력, 어둠속에 있던 사람을 빛의 사람으로 만드는 능력, 그것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누구나 하나님의 빛이 들어가면 누구도 빛의 사람이 됩니다. 우리의 의는 하나님의 의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의 의를 위해 살면 핍박을 받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위해 살면 반드시 핍박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어둠은 빛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요3: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사람의 본성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속에 산다는 것이요 또 하나는 어둠을 비추면 누구나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의인들은 다 핍박을 받았습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애굽으로 팔렸습니다. 형들보다 의롭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은 사자굴에 던져졌습니다. 항상 옳은 말만 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동족에 의해 지하 감옥에 던져졌습니다. 그리고 끝내 죽고 말았습니다. 에레미아가 한 말이 사람들의 마음을 찔렀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은 헤롯에 의해 못베어 죽임을 당했습니다. 자기 동생 부인을 빼앗은 일을 세례요한이 지적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와 다르게 사는 사람을 보면 경계합니다. 그러다가 그 사람 때문에 자기의 죄가 드러나면 그를 가만두지 않습니다. 그래야 자기 악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로마에 가면 카타콤이 있습니다. 로마의 지하에 총45개의 묘지가 있고 그 길이를 합치면 총 900킬로나 됩니다. 그 깊은 지하 묘지에 300년 동안 죽은 그리스도인들이 600만이나 됩니다. 왜 로마는 초대교회 성도들을 그렇게 많이 죽였습니까? 종교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 큰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옳고 의롭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싫어 수많은 성도들을 죽였습니다. 옛날 소련에서는 엄청난 방법으로 성도들을 죽였습니다. 성직자들은 팔, 다리를 자른 채 생매장했고 어떤 사람은 끓은 가마솥에 넣어 죽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스스로 무덤을 파게 해서 들어가면 흙으로 묻어 죽였고 감방에서 손을 뒤로 묶고 동물 사료같은 음식을 개처럼 햩아서 먹게 하다 굶겨 죽이기도 했습니다. 중국에서는 모택동 사진앞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세워 놓고 양쪽 어깨에 벽돌 3장을 얹고 20분마다 벽돌 한 장씩이 추가했습니다. 그러다 만일 벽돌을 떨어뜨리면 총살을 시켰습니다. 어느날 공산당이 목사 한 사람을 꽁꽁 묶은 채 긴 밧줄에 매달았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그래도 예수믿겠느냐?” 그래도 그가 신앙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하자 격분한 공산당은 기중기에 그를 높이 달아 허공위로 끌어올렸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한번 더 신앙을 버릴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때 그 목사가 “아니요. 나는 절대 나를 구원하신 주님을 배반할 수 없소”라고 외쳤습니다. 그때 허공에 떠 있는 밧줄을 놓았고, 목사는 땅 아래로 곤두박질쳐졌습니다. 공산당은 목사가 죽었나 확인했고 아직도 숨이 붙어 있자 다시 공중으로 올렸다가 떨어뜨렸습니다. 결국 목사는 죽었습니다.
최근의 통계를 보면 북한에도 기독교인이 있고 많은 기독교인이 핍박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국제 선교단체인 “오픈 도어스”에 의하면 북한 교인 수는 적으면 20만, 많으면 50만에 달하는 것으로 보고 있고 그 중 5만에서 7만 5천은 신앙을 이유로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이 기관을 통해 북한의 지하교회 교인들이 당국의 눈을 피해 몰래 성경을 읽는 사진이 공개되기도 하고 북한 내 지하교회 교인 5-6명이 좁은 방에 앉아 희미한 손전등 아래서 숨을 죽이고 성경책을 읽는 모습이 공개되기도 했습니다. 이들이 예수믿는 방법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경우도 있고 탈북을 통해 중국등을 여행하면서 기독교인을 은신처를 제공받고 복음을 접한 후 북한으로 돌아와 가족과 친척, 지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작년에 탈북한 한 사람이 직접 저에게 말한 것을 들었습니다. 북한 평남 순천에서 살았던 그는 자기가 살던 순천에도 예수믿는 사람들이 있었는 데 보안당국이 그들을 김일성 주체사상을 믿지 않고 예수를 믿은 죄를 물어 반동분자라고 선고하자 제대군인 7-8명이 5명을 무참하게 때려죽였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죽은 시체를 거적때기로 덮어 달구지에 싣고 갔는데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저는 북한에도 성도가 있으며 그 성도들은 많은 핍박 가운데 그들의 신앙을 이어가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어떻습니까? 우리의 사랑하는 동포들이 북에서 못 먹고 못 살면서 죽음도 불사하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지 않습니까? 동시에 우리는 아무 핍박도 없고 편하게 믿을 수 있는 데도 불구하고 제대로 믿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해 마음이 아프지 않습니까? 제대로 예수믿으면 언제나 핍박을 받습니다. 그리고 핍박받을만큼 믿어야 합니다. 딤후3:12절입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타협하면 핍박받지 않습니다. 적당히 믿으면 핍박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믿으면 핍박받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와 하나님 나라 가치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중국에 윈 형제라고 있습니다. “하늘에 속한 사람”, “백투 예루살렘”을 쓴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중국에서 얼마나 핍박을 많이 받았는지 30회 이상을 체포되고 수없이 감옥에 갔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뜻이 있어 탈출하여 독일로 갑니다. 거기서 중국 교회의 선교 비전인 “백 투 예루살렘”(Back To Jerusalem) 운동을 펼치고 있는 데 처음 유럽교회를 보았을 때 너무 실망했답니다. 그가 보았던 유럽 교회가 어쩌면 우리 한국교회같아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유럽교회가 실망스러운 것은 우선 사람이 없답니다. 젊은이는 다 떠나고 머리칼이 센 할머니들 몇 사람 남아 있답니다. 유럽교회가 실망스러운 또 하나는 교회마다 웅장한 건물과 고가의 장비와 호화로운 카펫과 최첨단 음향 시설으로 치장했는 데 영적 능력은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고 보았더니 다 있는 데 하나님의 말씀이 없습니다. 유럽 교회에 수많은 설교자가 있고 찬란한 역사가 있고 심오한 신학이 있고 성경을 가르치는 녹음 테이프와 비디오 테이프가 범람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유럽교회를 침체에 빠뜨렸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유럽교회에 없는 것은 순종입니다. 신앙은 아는 것이 아니라 순종입니다. 믿음은 구호가 아니라 순종입니다. 본회퍼 목사가 “나를 따르라”에서 말한 것이 이것입니다. “오직 믿는 자만이 순종하고 순종하는 자만이 믿는다”(본회퍼, 나를 따르라). 그런데 유럽교회는 순종이 없다는 것입니다. 말은 있고 신학은 있고 책은 있고 예식은 있는 데 순종이 없다는 것입니다. 순종이 없으니 말씀대로 살지 않고 말씀대로 살지 않으니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구분이 없고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 똑같으니 핍박이 없고 핍박이 없으니 편안하고 편안하니 게으르고 게으르니 잠자고 있고 잠자고 있으면 교회가 텅텅 비었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남의 이야기가 아니잖습니까? 우리가 유럽교회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철저한 순종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믿는 자만이 순종하고 순종하는 자만 믿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깨어야 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중국교회처럼 부흥합니다. 그래야 북한에 숨어서 믿는 우리의 동포, 사랑하는 형제들을 다시 만날 수 있습니다. 묻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다른 사람에게 핍박받을만큼 믿습니까? 억지로 핍박받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면서 믿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반사회적으로 믿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말씀대로 믿으라는 것입니다. 100% 순종하며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핍박도 받지만 핍박받으면 우리의 믿음도 자랍니다. 2천년 교회사는 핍박을 먹고 자랐습니다. 순교는 교회를 자라게 한 생명의 씨였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건강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는 중요한 신앙고백이 이것입니다.
핍박을 받으면 최후의 승리를 얻습니다
하나님을 재대로 믿으면 핍박을 받지만 동시에 최후의 승리도 얻습니다. 오늘날 예수믿는 우리에게 요구되는 믿음은 당당한 믿음입니다. 어떻게 우리는 당당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 시대에 당당하지 못한 제자가 하나 있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이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요19:38,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하여 그것을 숨기더니”. 요셉이 예수님의 제자만 아니었더라면 좋을 뻔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를 “예수의 제자이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두려움 때문입니다. 요셉은 무엇이 두려웠을까? 무엇이 그로 하여금 두렵게 했을까? 그가 두려울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다른 성경에 보면 그는 부자였습니다. 부자도 상당한 부자였습니다. 그는 공회의원이었습니다. 공회의원은 입법, 사법, 행정, 삼권을 가진 예수님 시대의 이스라엘 지도자였습니다. 대단히 높은 사회적 지위요 명예입니다. 그러니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 믿으면 잃을 것이 많았습니다. 언제나 잃을 것이 많으면 예수믿기 어렵습니다. 초대교회로부터 지금까지 예수 잘 믿은 사람은 잃을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 잘 믿으려면 먼저 시간을 잃어야 합니다. 많은 시간을 주님께, 교회에 바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 잘 나오는 사람은 목회자에게 하는 인사가 다릅니다. 일주일에 한번 교회 나온 사람은 예배 마치고 나갈 때 이렇게 인사합니다. “목사님, 안녕히 계십시오. 다음 주에 또 뵙겠습니다”. 그런데 하루에도 몇 번씩 오는 사람은 이렇게 인사합니다. “목사님, 안녕히 계십시오. 집에 잠깐 다녀오겠습니다”. 예수 잘 믿으면 물질도 잃어버려야 합니다. 헌금도 해야 하고 구제, 장학, 선교도 해야 합니다. 예수 잘 믿으려면 세상 재미도 잃어야 합니다. “세상은 넓고 재미는 많은 데” 교회 나가면 재미가 없습니다. 교회 나갈 시간에 등산가고, 낚시가고, 여행가고, 데이트하고, 골프가는 것이 더 재미있습니다. 교회 나가면 모든 것을 잃어야 합니다. 세상 친구 잃지요. 시간 잃지요. 물질 잃지요. 세상 재미 잃지요.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은 고약한 성질 잃지요. 적당히도 못살지요. 삥땅도 못하지요. 거짓말도 못하지요. 부부싸움도 못하지요. 아내가 모르는 애인도 못 만나지요. 기분 나쁜 사람 멱살도 못잡지요. 그러니 어떻게 예수를 잘 믿을 수 있겠습니까? 잃을 것이 많아서 예수 못 믿는 것입니다. 가진 것을 잃을까 봐 두려워 예수 못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리마대 요셉이 어느날 이것을 극복했습니다. 막15:43입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하니“.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어제까지만 해도 유대인이 무서워 머리 카락도 안보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당당해졌습니다. 빌라도에게 가서 죽은 예수의 시신을 달라고 요구합니다. 당돌하게 요구했다고 말합니다. 언제부터 아리마대 요셉은 당당해졌을까요? 답은 하나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은 모든 것을 잃고 모든 것을 얻은 분이었습니다. 십자가는 빌라도에게 한 가지를 깨닫게 했습니다. ”잃어야 얻는다“. 십자가에서 주님은 건강을 잃었습니다. 인간적 체면과 존엄을 잃었습니다. 사회적 지위와 명예도 잃었습니다. 무엇보다 생명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눅17:33,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예수믿는 것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믿고 당당해진 것입니다. 공개적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숨어서 적당히 예수님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땅굴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두려움의 터널에서 컴밍 아웃하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왜 우리는 예수믿으면서 두려워 합니까? 십자가앞에 우리 죄를 못박았는 데 무엇을 더 두려워 합니까? 우리가 믿는 분이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라면서 무엇을 두려워 합니까? 왜 우리는 불신자앞에서 우리가 크리스쳔이라는 사실을 당당하게 말하지 못합니까? 우리는 왜 불신자들과 식사하면서 눈을 감고 당당히 기도하지 못합니까? 우리는 왜 회사동료들과 회식하면서 “나는 한신교회 집사입니다” 라고 당당히 술을 거절하지 못합니까? 왜 우리는 왜 직장에서 부정한 일에 연루될 때 “사장님, 나는 교회집사이기 때문에 이번 일은 못합니다” 라고 당당하게 말하지 못합니까? 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다면서 남이 던진 한 두 마디 때문에 그렇게 오랫동안 상처받고 괴로워합니까? 우리가 아무리 우리를 예수믿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도 세상은 우리 얼굴만 봐도 우리가 목사인지, 장로인지, 권사, 집사인지 다 압니다. 주일날 골프치러 가면 말은 않지만 사람들이 “저 사람, 교회 안수집사인데 교회는 안 가고 골프치러 왔네” 다 압니다. 금요일날 어디가서 한잔하면 “저 사람, 교회 집사인데 홀짝 홀짝 잘도 마시네” 말합니다. 우리는 산위에 있는 등불이요 포도원에 심겨진 무화과나무입니다. 어차피 세상 어디 가도 우리가 예수믿는 것 숨기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당당한 것이 좋습니다. 이왕 예수믿을 바에야 “당신 예수에 너무 미친 것 아니요?” 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믿어야 합니다. 이왕 예수믿는다면 “저 사람, 맨날 교회에 살아”라는 말 정도는 들어야 합니다.
끝까지 믿는 자가 구원받습니다. 핍박받을 정도로 믿어야 축복받습니다. 빅토르 휴고가 쓴 “레미제라블”에서 회개하고 새 사람된 장발장의 말에 좋은 것이 있습니다. “죽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한 번도 진정으로 살아 본 적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그렇습니다. 끝까지 믿읍시다. 말씀과 순종으로 주님을 따릅시다. 잃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한번도 제대로 소유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죽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죽기 전에 한번도 제대로 예수님을 믿어보지 못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의를 위해 핍박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찬국이 저희 것임이요”.
영적 성장(9) 마5:10-12 2011.3.20(일) 핍박받는 마음, 승리의 축복
마5: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위해 삽니다.
롬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마5: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하나님의 의를 위해 살면 핍박을 받습니다.
요3: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딤후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오직 믿는 자만이 순종하고 순종하는 자만이 믿는다”(본회퍼)
핍박을 받으면 최후의 승리를 얻습니다
요19:38,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하여 그것을 숨기더니”.
막15:43,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하니“.
눅17:33,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죽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한 번도 진정으로 살아 본 적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빅토르 휴고, 레미제라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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