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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성장(10) 마5:13-16 2011.4.3(일)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

영적 성장(10) 5:13-16 2011.4.3()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

아름다운 봄입니다. 겨우내 얼어붙은 나무에서 노란 개나리, 산수유가 피는 것은 보면 참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시인 정호승이 이렇게 썻습니다. “꽃씨 속에 숨어있는 꽃을 보려면 고요히 눈이 녹기를 기다려라”. 그렇습니다. 봄은 꽃입니다. 그런데 그 꽃은 작은 꽃씨에서 옵니다. 그나마 그 꽃씨는 오랜 겨울을 기다려야 합니다. 이것이 봄이요 자연입니다.

 

올해 우리는 풍성한 생명으로 자라게 하소서라는 표어로 출발했습니다. 풍성한 생명은 오직 예수님안에 있습니다. 결국 풍성한 생명으로 자라기 위해서는 우리는 예수님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의 교훈, 예수님의 삶을 배우고 있습니다. 지난 10주 동안은 마태복음 5, 8복에 나타난 예수님을 배웠습니다. 8복은 예수님의 성품을 보여줍니다. “심령으로 가난하라, 애통하라, 온유하라, 의에 주리고 목마르라, 긍휼히 여기라, 마음이 청결하라, 화평하라, 의를 위해 살아라”.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노력할 뿐이지 이것이 우리 자신의 성품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성품이 그렇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성품은 우리 삶의 생명의 꽃씨입니다. 모든 꽃은 꽃씨에서 나옵니다. 아동문학가 안오일이 이렇게 썻습니다. “꽃씨는 알까요? 아주 조그마한 자기 몸이 딱딱한 땅을 뚫게 되리란 걸/ 꽃씨는 알까요? 아주 조그마한 자기 몸이 세상을 물들이는 꽃이 되리란 걸/ 꽃씨는 알까요? 정말 정말 조그마한 자기 몸이 꽁꽁 닫힌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 주는 열쇠가 되리란 걸/ 그렇습니다. 모든 꽃이 작은 꽃씨에서 오듯이 우리의 삶도 예수님의 생명의 씨 때문에 자라고 열매맺습니다.

씨가 중요합니다. 언젠가 어떤 분이 수박에 대해 쓴 글을 보았습니다. 수박을 자세히 관찰해 보았더니 수박씨 하나가 자기 보다 20만 배나 더 무거운 땅을 뚫고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수박씨 하나에 얼마나 큰 힘이 있는지. 수박씨가 또 하나 신비한 것은 씨 자체는 검은 색인데 그 검은 색안에 푸른 싹도 있고 빨갛게 익은 수박 살점도 있고 그리고 시원한 물도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작은 검은 씨 하나에 다양한 것들이 있는지 정말 신비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씨의 신비입니다. 그래서 랠프 에머슨도 말했습니다. “수천 그루의 나무가 있는 울창해진 숲도 한 톨의 작은 도토리로부터 시작되었다”. 곡식도 마찬가지입니다. 곡식 한 알을 심으면 적어도 140알에서 180알을 거둔답니다. 물고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연어가 한번 알을 낳으면 700개에서 7,000개의 알을 낳는 답니다. 모든 것이 씨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의 영적 생활도 예수님의 생명의 씨에서부터 시작된 것을 아십니까? 말하자면 마5장의 8복은 우리 삶의 영적 씨앗입니다. 그것들은 평소에 작고 보잘 것이 없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우리 삶과 신앙의 생명의 씨입니다.

 

그런데 씨는 속에만 있지 않습니다. 반드시 밖으로 나와 열매맺습니다. 5:13절을 보시겠습니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 지금까지는 8복에 대한 말씀을 했습니다. 8복은 예수님의 성품입니다. 그것은 신의 성품이요 우리는 은혜로 그 성품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은 우리가 쟁취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온 것입니다. 우리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은혜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꽃씨는 떨어졌습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밖으로 자라야 합니다. 밖은 세상입니다. 12절까지 우리를 예수님의 생명안에 있게 하신 하나님은 13절부터 우리를 세상으로 보냅니다. 그래서 13절부터는 세상에서의 우리 삶에 관한 말씀입니다. 우리안에 떨어진 생명의 씨가 자라고 열매맺어야 할 세상에 대한 말씀입니다.

 

세상은 무엇인가?

우리가 세상에서 어떻게 열매맺고 살아야 할까를 생각할 때 먼저 생각할 것은 세상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세상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을 정리할 수 있습니다. 해답은 예수님의 말씀안에 있습니다.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예수님이 세상과 우리와의 관계를 비유한 것이 소금과 빛입니다. 이 둘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 무엇이고 그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보여줍니다. 먼저 소금은 음식을 전제합니다. 음식이 없으면 소금도 필요없습니다. 빛은 어둠을 전제합니다. 어둠이 없으면 빛도 필요없습니다. 소금은 음식이 있는 곳에 있고 그나마 음식이 부패하지 않기 위해 있습니다. 음식이 부패해 있지 않다면 소금도 필요없습니다. 빛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 태양이 밝게 빛난다면 빛은 필요없습니다. 어두우니까 필요합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은 부패했고 어둡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전제한 세상입니다. 여러분도 세상은 부패하고 어둡다는 것을 인정합니까? 세상이 하나님 없이도 잘 돌아간다면 왜 예수님이 와야 했겠습니까?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을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없는 세상은 썩고 어두울 뿐입니다. 역사가 윌 듀런트는 말했습니다. “인류 역사에 전쟁이 없었던 햇수는 고작 29년간이었다”. 그리고 전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미국 대사 로버트 사이플은 1994년 르완다 인종 학살을 목격하고 이렇게 글을 썻습니다. “르완다의 비극은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공포였다. 누군가가 야수성이라는 말을 사용했지만 그것은 짐승에 대한 모욕이다. 아무리 잔인한 짐승도 먹이를 위해 사냥할 뿐이지 죽이기 위해 죽이지 않는다. 그나마 짐승은 한 번에 한마리의 먹이를 죽일 뿐 인간처럼 아무 이유 없이 한꺼번에 수백만의 목숨을 죽이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은 짐승보다 더 악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래부터 세상이 그랬을까? 본래부터 세상은 악하고 상처받고 어둡고 잔인한 것이었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두 가지 입장이 있습니다. 하나는 다른 종교의 입장이요 또 하나는 성경의 입장입니다. 다른 종교의 입장은 한마디로 운명주의입니다. 다른 종교는 세상에 본래 악이 존재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본래 고통가운데 태어났고 고통가운데 살다가 고통과 함께 죽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고통이 본래부터 있었기 때문에 고통은 없앨 수도 없고 없애려고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고통에 대하여 할 수 있는 것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제일 좋은 것은 고통을 잘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순명입니다. 다음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고통의 원인이 되는 마음을 닦는 것입니다. 수양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것도 저것도 안되면 고통이 없는 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도피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입장은 전혀 다릅니다. 성경은 고통은 본래부터 있던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은 본래 좋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엿새동안 세상을 창조하고 계속 좋았다고 말씀합니다. 그가 지으신 에덴은 죄와 악과 고통이 없는 낙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부터 고통이 들어어왔습니다. 왜 들어왔나 보았더니 죄 때문에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가시와 엉겅퀴가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비유하면 이렇습니다. 여기 아름다운 잔디가 있습니다. 주인이 잔디를 만들고 꽃을 심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출입금지라는 푯말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보니까 어느 학교에서 어린이들이 단체로 소풍을 와서 잔디밭에 들어와 뛰고 구르며 놉니다. 주인이 말했습니다. “애들아, 너희들, 팻말 보지 않았니? 이 잔디 주인은 아저씨인데 왜 아저씨 허락도 없이 들어와 잔디를 망치니? 어서 나가라”. 아이들은 슬금 슬금 눈치를 보며 나갑니다.

 

며칠 후에 또 사람들이 들어와 잔디밭에서 소리를 지르며 놉니다. 자세히 보니 사냥꾼들인데 사냥을 하고 지나가다 잔디에 들어와 술을 먹고 춤을 추고 있습니다. 총을 들고 있는 것이 무서웠지만 주인이 가서 말했습니다. “여보세요. 잔디에 쓰인 팻말을 보지 않았습니까? 이것은 제 잔디밭인데 왜 허락없이 들어와 잔디를 밟습니까?” 사냥꾼들이 술에 취해 말을 듣지 않습니다. 어떤 사냥꾼은 시비를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할꺼요?” 주인이 단호하게 말합니다. “나가주세요. 나가지 않으면 경찰을 부르겠습니다”. 그래도 소란을 피우자 주인은 경찰을 불렀습니다. 경찰이 오자 사냥꾼들은 하나씩 둘씩 도망갔습니다.

 

, 이 이야기에서 무엇을 말합니까? 잔디밭에는 주인이 있습니다. 주인은 잔디밭을 만들고 꽃을 심고 매일같이 돌보고 가꿉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들어와 이 잔디밭을 어지럽힙니다. 그래서 잔디를 죽이고 꽃을 망칩니다. 그것은 주인의 뜻도 아니고 그렇게 되어서도 안될 일이었습니다. 본래부터 잔디밭은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만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잔디밭에 들어온 아이들이나 사냥꾼은 마땅히 들어와야 할 사람들이 아니라 불청객들이었습니다. 주인의 허락없이 들어온 사람들은 불법침입자들이요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불법거주자들입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의 주인이 하나님이신 것을 믿습니까? 그 분이 창조하고 의도한 세상은 본래 악이 없고 고통이 없는 세상이라는 것을 믿습니까? 거기 들어와 잔디와 꽃을 망치는 모든 악이나 어두움은 본래 불법침입자임을 아십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마땅히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서 행복을 누리며 살 권한이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하나님이 지으신 아름다운 세상에 불법이 들어오고 악이 들어오면 우리는 마땅히 주인이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들을 내쫓을 권세도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악은 우리의 운명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불청객입니다. 우리가 어쩌다 악과 함께 살 수 있으나 그것은 정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 이름으로 된 집에 남이 불법으로 살도록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세상을 망치는 불법침입자들을 예수님은 강도라고 말하고 도적이라고 말합니다. 10: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도적은 자기 것이 아닌 남의 것을 빼앗는 자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악은 주인이신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강도요 도적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오늘의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13,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조금 분명해지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가졌던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하나님이 주인이신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주인이시고 주인이신 하나님은 아름답게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불법침입자인 죄가 들어와 그 나라를 부패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상처투성이입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신 나라에 어둠이 불법침입했습니다. 그래서 온 세상이 캄캄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저와 여러분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보고만 있겠습니까? “본래부터 악은 있었으니 너무 염려할 필요는 없어하겠습니까? “고통은 없앤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야하면서 운명으로 알고 살겠습니까? 어쩌다 고통이 심하면 그때는 산으로 가든지 아니면 죽어 버리면 돼하고 살겠습니까? 그것이 우리안에 떨어진 예수님의 생명의 씨를 가진 사람의 삶입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 말씀대로 해야 합니다. 13, “그 맛을 잃으면”, 소금의 맛을 내야 합니다. 16, “너희 빛을 모든 사람앞에 비추게 하라”. 빛을 비춰야 합니다.

 

먼저 소금이 되라

성경은 먼저 소금이 되라고 말합니다. 순서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보통 빛과 소금이라고 부르지만 성경은 소금과 빛입니다. 13, 소금, 14절에 빛입니다. 왜 예수님은 우리에게 먼저 빛이 되라고 말씀하지 않고 소금이 되라고 말씀했을까? 성경에서 소금이라고 말할 때 잊을 수 있는 것이 사해 바다입니다. 왜냐하면 예나 지금이나 사해바다에서 가장 많이 소금이 나고 예수님이 사셨던 갈릴리에서도 가깝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사해를 염해”, “소금 바다라고 부릅니다. 바다 전체가 소금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해바다가 현재의 모습을 갖춘 것은 지질학적으로 대략 12,000년 전이라고 합니다. 남북으로 75킬로, 동서로 17킬로, 가장 깊은 곳은 약 400미터입니다. 작은 바다가 아닙니다. 그런데 거기에 고여 있는 물이 매우 짭니다. 얼마나 짠가하면 보통 바다물의 농도가 3%라면 사해바다는 30%입니다. 보통 바다보다 열배이상 짭니다. 물을 손에 떠 혀 끝에 대보면 짠 것이 아니라 씁니다. 오랜 세월 물이 흘러 들어오기만 하고 밖으로 나가지는 않은 데다 40도 이상의 햇빛이 내려쬐어 수분이 증발하기 때문에 소금이 생깁니다. 이 소금이 돈 덩어리입니다. 이 소금은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온갖 화학물질이 포함된 보화입니다. 각종 의약품, 화장품, 광물질이 이 소금에서 나옵니다. 염화 나트륨, 염화 칼슘, 염화 칼륨, 칼슘, 포타시움, 마그네슘, 유황, 브로마인등이 소금에서 나옵니다. 이것들을 정제해서 필요한 화학제품을 만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해바다죽음의 바다로 불렀지만 지금은 이스라엘의 보고입니다. 그 속에 있는 수많은 광물질이 다 값비싼 것들입니다. 옛날에는 이스라엘의 온갖 쓰레기가 들어가서 쓸모없는 바다라 불렸지만 지금은 해석이 다릅니다. 모든 것을 다 받아들였기 때문에 바다입니다.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면서 수많은 세월을 속에서 썩고 또 썩었더니 소금이 되었습니다. 소금은 썩은 세상을 치유하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소금이 되기 위해 가장 먼저 할 것은 자신이 먼저 썩어야 합니다. 오랜 세월, 사해 바다 저 깊은 곳에서 이것 저것 다 받고 참고 인내하고 자기를 죽이고 때를 기다리지 않았다면 소금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자기가 먼저 죽어야 남도 살립니다. 자기가 먼저 썩어야 썩은 것도 고칩니다. 소금의 사명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소금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지난 주 월요일에 제가 작은 수술을 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청각이 좋지 못해 가끔 고생했습니다. 참고 견디다가 드디어 수술했습니다. 고막을 재생시키고 두 귀를 막아 놓았습니다. 가끔 아프고 머리도 흔들립니다. 무엇보다 잘 안들려 답답합니다. 지금 제가 말하는 말도 웅얼웅얼 잘 안들립니다. 의사는 두 어달 후에는 좋아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침묵의 시간, 병원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돌아보니 바쁘게 살았습니다. 저는 유달리 바쁘게 산 것 같습니다. 바쁘게 산 것이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요 부름받은 자의 사명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열심히 산 것과 바쁘게 산 것은 다릅니다. 사명을 따라 산 것과 분주하게 산 것도 다릅니다. 저는 가끔 자만심 때문에 분주하게 산 것 같습니다. 중요한 인물로 부각되기를 원해서 분주하게 산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분주하게 살면서 진실하게 기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활동적이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일하면서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쫓기면서는 기도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기안에 자기로 가득차서는 진정으로 기도할 수 없슴을 알았습니다. 그렇게 기도해서는 자기가 죽지 않는 것도 알았습니다. 소금이 되기 위해서는 사해바다 깊은 곳에 죽어야 합니다. 밖으로 나오면 소금이 될 수 없습니다. 성경이 말한 바와 같습니다. 46:10,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30:15, “너희가 돌이켜 조용히 있어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어늘”. 소금의 영성은 곧 자기 죽음의 영성입니다. 속에서 보이지 않게 죽고 썩어져야 합니다. 귀가 잘 들리지 않는 병상에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 내가 너무 하나님의 소리보다 세상의 소리를 더 들었구나. 안에서 들리는 소리보다 밖에서 들리는 소리를 더 많이 들었구나“. "내 내면의 소리보다 사람들이 한 말을 더 들었구나. 그래서 내가 죽지 못하는구나”. 먼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또 들어 내가 먼저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소금이 되면 세상은 자연히 달라집니다.

 

사순절 아침 마다 묵상합니다. 며칠전에도 성경읽다가 갑자기 사도신경이 생각났습니다. 우리 말에는 없지만 영어 성경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신 후 음부로 내려 가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음부지옥입니다.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후 음부 곧 지옥까지 가셨을까? 신학자들의 해석이 분분합니다. 제가 단순하게 묵상했습니다. “,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기를 죽이는 것도 모자라 지옥까지 내려가셨구나”. 하나님의 아들이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었는가?“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또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그렇게 까지 자기를 낮추시고 죽였으니 우리는 얼마나 낮아져야 할까? 그가 음부까지 낮아졌기 때문에 하늘까지 높아진 것입니다. 시인 복효근이 이렇게 썻습니다. ”잘 익은 상처에선 꽃 향기가 난다“. 그렇습니다. 잘 익어야 향기가 납니다. 먼저 내가 죽지 않고는 남을 살릴 수 없습니다. 내가 아파해 보지 않고는 남의 아픔을 치유할 수 없습니다. 상처에 대한 두 가지 진실이 있습니다. 첫째, ”상처가 나를 만든다“. 둘째, ”상처가 상처를 치유한다“. 내가 소금이 되어야 남을 살립니다. 내가 맛없는 소금이어서는 세상을 살릴 수 없습니다. 내가 소금이 되면 세상은 자연히 치료됩니다.

 

빛을 비추어라

세상을 변화시키는 또 하나의 방법이 빛입니다. 14절입니다. 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소금의 원리와 같이 빛의 원리도 하나님의 빛이 내게 비추면 반드시 나를 통해 빛이 흘러 갑니다. 소금이나 빛은 영향력에 관한 말씀입니다. 영향력을 영어로 "influence"라 합니다. 이 말은 ”flu" “흘러가다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in flu 하니까 안에서 흘러가고 안으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독감이란 단어가 그래서 나왔습니다. “influenza”라는 단어는 in flu, 안으로 흘러가는 것에서 나왔습니다. 무엇이 안으로 흘러갑니까? 감기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빛이라고 할 때 우리가 우리의 빛을 비추라는 것이 아닙니다. 빛의 원형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내 안에 있는 빛이 흘러가게 하라는 것입니다. 빛을 많이 받으면 많이 비춥니다. 빛을 강하게 받으면 강하게 비추고 희미하게 받으면 희미하게 비춥니다. 성경과 세상에서 세상에 빛을 비춘 사람들에게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빛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빛입니다. 9: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그는 참빛입니다. 1: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 빛이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빛입니다. 세상의 어둠을 비추는 빛입니다. 한국교회 역사를 보면 한국교회가 한국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은 믿음의 선배들이 이 나라에 예수님의 빛을 많이 비췄기 때문입니다. 가장 먼저 비췬 것이 치료의 빛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언더우드, 아펜셀러가 온 것은 1885년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해전인 1884년 우리나라에 온 최초의 의료선교사가 들어왔습니다. 알렌입니다. 그가 우리 나라에 들어온지 얼마 안돼서 갑신정변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많은 사람이 다치고 죽었습니다. 어느날 알렌이 왕진을 끝내고 부인과 함께 산보하고 돌아와 막 잠을 청하는 데 누가 대문을 두드립니다. 나가보니 많이 사람이 다치고 죽어 있었는 데 그 중에 한 사람이 피를 흘리고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칼끝이 경정맥과 심장을 비켜나가 목숨은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당시 수구파의 거두 민영익이었습니다. 이 우연한 일로 알렌은 고종 황제와 조정의 신임을 받게 됩니다. 이로 말미암아 한국최초의 신식병원 광혜원이 생겨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빛은 신학문을 통해서도 비추었습니다. 1885, 서울 정동 언덕에 두 개의 학교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는 배재요 다른 하나는 이화였습니다. 아펜셀라가 시작한 배제는 이겸라, 고영필이라는 두 학생으로 초라하게 시작했으나 고종이 격려하면서 나라에 쓸 유익한 인재를 키워내라는 뜻으로 배제라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스크랜턴 선교사가 시작한 이화여학교는 좀처럼 배우려는 학생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얼마후에 한 여학생이 찾아왔는 데 이 학생은 너무 가난해서 그 어머니가 먹여주고 입혀주고 가르쳐 준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와서 맡긴 아이였습니다. 그렇게 초라하게 시작한 이화는 그 다음 해 46명이 되었고 명성황후는 그 이름을 배꽃, “이화라 지어주었습니다.

 

한국사회에 들어온 예수님의 빛은 각계 각층에 비추었습니다. 초기 독립운동의 대부분의 지도자가 기독교인이었습니다.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감옥에 갇혔는 데 그중의 하나가 월남 이상재였습니다. 그는 감옥가기전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감옥에 있던 무료한 날, 기독교 서적을 읽다가 하나님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한번은 자다가 꿈을 꾸었는데, “위대한 임금이 보낸 사람”’이라는 기인이 그에게 나타나 호통을 쳤습니다. “내가 네 목숨을 보전하여 옥중에 두어 기회를 주었건만 네가 뉘우치고 믿지 않는다면 이보다 더 큰 죄가 있겠느냐?” 이상재가 깜짝 놀라 감옥에 잇는 성경을 빌려 세 번 읽고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YMCA를 세웠습니다. 그 뒤 1907년에 대부흥운동이 일어나면서 신자가 30만으로 늘고 사회의 구석진 곳에 더 많은 하나님의 빛이 비춰졌습니다. 우상, 조혼, 첩제도가 타파되고 학교가 더 생기고 병원이 생기고 그리고 삼일운동, 독립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후 한국교회, 많은 빛을 비춰왔습니다. 사회복지도, 북한돕기도, 심지어 일본돕기도 기독교가 가장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계속 비춰야 합니다. 초기 한국교회는 구원받는 교회였습니다. 다음 한국교회는 성장하는 교회였습니다. 이제 한국교회는 영향력을 깨쳐야 할 시기입니다. in 내 속에 있는 것이 flu, 흘러가야 합니다. 내 속에 예수님처럼 자기를 죽인 소금이, 내 속에 예수님 비추신 생명의 빛이 흘러가야 합니다. 소금으로, 빛으로, 빛으로 소금으로 flu. 흘러가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예수님의 생명의 씨가 떨어진 곳마다 아름다운 봄꽃피어 이 세상이 부활의 동산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성품으로 안으로 자란 풍성한 생명이 밖으로, 세상으로 자라게 하옵소서.

 

 

 

영적 성장(10) 5:13-16 2011.4.3()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세상은 무엇인가?

10: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먼저 소금이 되라

46:10,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30:15, “너희가 돌이켜 조용히 있어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어늘”.

 

빛을 비추어라

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9: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1: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