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22:39-46 2011.4.10(일)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여러분은 일생 가장 절박하게 기도하신 적이 있습니까? 그때가 언제입니까? 우리가 일생 가장 열심히 기도했던 때를 돌아보면 두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가장 많이 기도할 때는 우리가 가장 많은 고통을 받고 있을 때라는 것, 그리고 우리가 가장 많이 기도할 때 가장 행복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떨까요? 예수님의 일생을 돌아볼 때 가장 특징적인 것은 예수님의 일생은 기도하는 일생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에 대하여 말하기를 좋아하지만 예수님은 직접 기도하기를 좋아하셨습니다. 우리는 고통이 있을 때만 기도하지만 예수님은 고통이 있거나 없거나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로 문제 해결의 수단으로서 기도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과 교제하기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일생 기도하며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세례받은 후 기도하셨습니다. 그때 하늘이 열리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에게 기도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통로였습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시험받을 때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도 시험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그때마다 기도로 물리치셨습니다. 기도는 예수님에게 시험을 이기는 능력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매일 아침 한적한 곳에 가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 기도는 매일 매일의 거룩한 습관이었습니다. 아침마다 예수님은 일보다 기도를, 사역보다 하나님을 더 먼저 선택했습니다. 예수님은 기도로 제자들을 양육하셨습니다. 밤새 산에서 기도하시고 제자를 선택하시고 일생 기도로 제자를 훈련하셨습니다. 말로 기도를 가르치지 않고 기도로 기도를 가르쳤습니다. 가끔 제자들을 데리고 변화산으로, 감람산으로 올라가시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에게 기도를 가르치시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일생 어떤 단어중 가장 많이 사용하셨을까요? 성경은 “아바, 아버지”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아바, 아버지”라는 단어를 쓴 것은 4복음서에만 170번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입만 열면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그가 평소에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던 습관은 십자가에까지 이어졌습니다. 눅23:34,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우리는 죽는 순간 무엇이라고 말하고 죽을까요? 평소에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는 데 갑자기 죽을 때 “아버지”라는 말이 튀어나올까요? 사업에 미친 한 사람이 죽게 되었습니다. 그가 아들, 딸들 다 불러 모으고 하나씩 점검하기 시작합니다. “큰 애, 왔느냐?” “예, 아버지, 여기 있습니다”. “둘째는?” “예, 여기 있습니다”. “딸은?” “예, 아버지, 여기 있어요”. 그때 그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말했습니다. “그럼, 가게는 누가 보고?”. 죽어가면서까지 가게만 생각하던 사람은 죽어가면서도 “가게는 누가 보고?”하고 죽습니다. 평소에 할렐루야 많이 해야 “할렐루야” 하고 죽습니다. 평소에 “감사합니다” 많이 해야 “감사합니다” 하고 죽습니다. 이중표 목사님은 “할렐루야”하고 돌아가셨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하고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에 “아바, 아버지”하고 숨을 거두셨습니다.
여러분도 숨질 때 되도록 하나님을 이름을 부르고 싶습니까? 내 목숨의 마지막 순간까지 기도하다 하나님께 가고 싶습니까? 예수님의 일생에서 가장 장엄하고 드라마틱한 기도가 오늘의 기도입니다. 내일이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날,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절규하며 기도하셨습니다. 지금도 겟세마네 동산에 가면 예수님이 간절히 기도하시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습니다(사진). 저는 이 사진을 무척 좋아합니다. 이 사진을 너무 사랑하여 제 방에 붙여 놓고 자주 묵상합니다. 보십시오. 얼마나 예수님이 간절히 기도하는지. 그의 온 몸을 기도에 실고 있습니다. 얼마나 간절했든지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떨어지고 있습니다. 그는 이 한 기도를 위해 자기 온 목숨을 바치고 있습니다. “아버지, 할 수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물러 가게 하옵소서”. 그는 같은 기도를 세 번이나 그렸습니다. 얼마나 그 기도가 중요했으면, 얼마나 그 기도가 절박했으면 세 번이나 같은 기도를 반복했을까요? 예수님은 왜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신 것입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 무엇을 배웁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일생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일생 붙잡은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요6: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의 일생은 철저히 하나님의 뜻에 맞춰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을 지배한 원리는 이것이 나에게 유익하냐 그렇지 않느냐가 아닙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냐 아니냐 입니다. “나에게 유익이 되지 않아도 하나님의 뜻이면 하고 나에게 유익이 되어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안하겠다“. 이것이 예수님의 삶이었습니다. 말도 그렇습니다. 내가 지금 하는 말이 옳으냐 그르냐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내가 하는 말이 하나님의 뜻에 맞느냐 그렇지 않느냐 그것이 판단 기준이었습니다. 요7:1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요7:18,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그 기준으로 말하고 삽니까? 지금 내가 하는 일의 기준이 내가 잘 되느냐 못 되느냐입니까? 하나님의 뜻이냐 아니냐가 기준입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인과 자주 부딛쳤습니다. 유대인의 행동의 기준이 율법에 맞느냐 안맞느냐. 사람들이 정한 유전과 규율에 맞느냐 안 맞느냐 였는 데 반해 예수님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냐 아니냐를 물었기 때문입니다. 가령 안식일에 사람이 병으로 고생합니다. 율법은 안식일이 사람 고치는 일이 노동이기 때문에 절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떨까요? 그 자녀가 아파서 너무 힘드는 데 안식일이기 때문에 고치지 말라고 할 부모가 있을까요? 부모도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은 어떻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고쳤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것만큼은 확실히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었던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에 죽는 것입니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자신을 세상에 보낸 것은 바로 그것 때문이라고 믿었습니다. 마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심기려 하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이 정말 멋있는 분인 것은 그가 왜 세상에 나왔는지를 알았다는 것입니다. 정말 행복한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가 세상에 보낸 이유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목표를 향해 일직선으로 달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처음부터 십자가에 집중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가장 용감할 때는 십자가지러 예루살렘에 올라갈 때입니다. 눅9:51절입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여러분, 죽으러 가는 데 굳게 결심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사람들은 살려고 굳게 결심하는 데 예수님은 죽으려고 굳게 결심합니다. 마10:32절 말씀도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그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그들이 놀라고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님은 제자들보다 저 만치 앞서 가셨습니다. 하도 성큼 성큼 앞서 가시기 때문에 제자들도 따라 갈 수 없었습니다. 그 길이 어떤 길인데 그렇게 했습니까? 죽음의 길입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면 죽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제자들 보다 빠른 걸음으로 앞으로 나아 갑니다. 평소 예수님을 잘 안다고 생각했던 제자들도 예수님의 그 모습이 놀랍고 두렵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예루살렘에 올라가 십자가 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과 그 뜻에 순종하는 것은 같습니까? “나는 이 땅에 한 알의 밀알로 왔다”는 것을 알았다고 해서 쉽게 한 알의 밀알로 죽을 수 있습니까? “나는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이 땅에 왔다“는 것을 알았다고 해서 자신의 목숨을 선뜻 대속물로 내놓을 수 있습니까? 아는 것과 순종하는 것은 다릅니다. 믿음은 순종이지만 믿는다고 다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는 것과 순종하는 것, 믿는 것과 순종하는 것 사이에는 많은 간격, 많은 고뇌, 많은 괴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랬습니다. 세상을 위해 죽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그것을 위해 일생 달려왔지만 막상 죽음을 눈앞에 둔 겟세마네에 와 보니 그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마음이 이러했습니다. 마26:37-38, ”베드로와 세배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 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왜 예수님이 고민하고 슬퍼했습니까? 십자가에 죽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아는 것이 힘든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것이 힘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할 수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늘 어려운 것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기도의 필요성이 있습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 사이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머리로 압니다. 하나님앞에 순종하는 것은 몸으로 합니다. 그런데 머리로 하는 아는 것은 되는 데 몸으로 하는 순종은 어렵습니다. 왜 그럴까요? 순종을 방해하는 자아가 우리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아는 것과 순종하는 것 사이에서 우리를 주저하게 하는 것은 우리의 육신입니다. 삶에 대한 애착입니다. 더 본질적인 것은 우리의 의입니다. 우리가 예수믿어도 끝까지 우리를 떠나지 않는 것이 있슴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자아입니다. 우리의 의, 우리의 사랑, 우리의 뜻, 우리 소욕입니다. 이것 때문에 우리가 순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가 무엇입니까? 기도는 우리안에 있는 자아를 깨뜨려 하나님앞에 복종하게 하는 것입니다. 겟세마네동산에서 예수님이 하신 기도는 자기의 의를 깨뜨려 하나님앞에 복종시킨 기도였습니다.
기도를 통해 얻는 최고의 복은 자기를 깨뜨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큐 에스트라는 신학자가 말했습니다. “기도란 나의 의를 하나님의 의와 바꾸는 영적 과정이다”. 자기 의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의를 덧입은 과정이 기도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은 입에서 청산유수같은 기도를 쏟아내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 의를 상대화하고 하나님의 의를 절대화하는 사람입니다. “자기는 하나님앞에 늘 옳지 않은 존재이며 하나님만 언제나 옳은 존재라는 것”을 목숨걸고 믿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오래전에 제가 이스라엘에 있을 때 한 집사님이 성지순례를 왔습니다. 그는 상당히 큰 사업을 하다가 부도를 만난 데다가 설상가상으로 암으로 자기 아내까지 잃었습니다. 너무 큰 상처를 받고 마음을 달래기 위해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제가 모시고 겟세마네동산으로 갔는 데 그가 오래된 올리브 나무 앞에서 무엇인가를 골똘하게 바라 보고 있었습니다. 한참을 바라보더니 갑자기 울기 시작했는 데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품에서 우는 것처럼 서럽게 울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그가 바라 보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영어로 이런 시가 쓰여 있었습니다. "Father, I do not understand you, but I still trust you". "아버지, 내가 당신의 뜻을 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내가 당신을 신뢰합니다“. 예수님의 기도였습니다. 겟세마네동산에서 예수님이 너무 힘들어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한 것입니다. ”아버지, 할 수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님도 머리로는 하나님의 뜻을 알았지만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understand 와 trust는 다릅니다. 하나님을 머리로 understand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을 trust 하려면 순종이 필요합니다. 지식은 understand로 얻지만 신앙은 trust로 나아갑니다. 그런데 순종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기도는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를 깨뜨려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누구나 기도하기 까지는 하나님앞에 온전히 순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순종하기 어려웠는 데 우리가 무슨 수로 순종할 수 있습니까? 히5:7을 보시겠습니까? ”그는 육체에 계실 때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하나님이신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기 위해 통곡하며 기도했는 데 피조물인 우리가 어찌 기도없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겠습니까? 그래서 기도의 사람 앤드류 머레이가 말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이 내 안에서 그리고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드리는 것이다” (Prayer opens the way for God to do His work in and through me).
그렇습니다. 신앙은 순종입니다. 그러자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면 성령이 역사하여 순종하게 됩니다. 모든 순종은 기도로 이루어집니다. 새벽에 일어나기 원합니까? 기도하셔야 합니다. 말씀대로 살고 싶습니까? 기도해야 합니다. 더 좋은 가정, 더 행복한 삶을 살고 싶습니까?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자기의 의가 깨지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게 됩니다. 겟세마네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앞에 순종하는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은 고통앞에 용감하기 위해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순종을 위해 땀방울을 흘리며 기도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 준비된 것은 고통스러운 십자가였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는 인류가 발명해낸 최악의 사형방식이었습니다. 십자가는 단순히 죄수를 죽일 목적으로 사용한 사형방식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죽이기만 하려면 목매달아 죽이면 간단합니다. 그러나 죄수를 죽이되 가장 잔인하고 고통스럽게 죽이기 위해 십자가가 고안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은 금방 죽지 않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면 우선 몸이 축 늘어집니다. 그러면 몸의 무거운 무게 때문에 횡경막에 무리가 와 점점 숨을 쉬지 못하게 됩니다. 죄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몇 시간동안 사투하다가 고통가운데 죽어 갑니다. 머리에 씌운 가시관, 옆구리에 찔린 창 때문에 온 몸에서 쉴새없이 피가 나옵니다. 몇 시간이 지나면 죄수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해집니다. 그리고 극심한 탈수증이 나타납니다. 그나마 중동의 태양은 머리위에서 뜨겁게 내려 쪼입니다. 숨을 쉴 수 없고 피는 쏟아져 목은 마른 데 뜨거운 태양으로 인해 정신은 혼미해지고 고통은 쉴새없이 몰려 옵니다. 예수님은 그런 고통을 6시간이나 당하셨습니다. 이렇게 고통당하면 누구도 견딜 수 없습니다. 누가 이런 십자가를 앞두고 두려워 하지 않겠습니까? 마26:38에 나타난 심정이 바로 그 심정입니다.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기도는 바로 이러한 고통의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언제나 절박한 기도는 고통가운데 일어나고 간절히 기도하면 고통은 사라집니다.
여기서 나오는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계획을십자가를 통해 이루셨을까? 십자가없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는 없었는가? 이에 대해 오스왈드 챔버스는 그의 책 “주님은 나의 최고봉”이란 책에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나님의 뜻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님의 작정(God's order)이라는 뜻과 하나님의 허용하시는 뜻(God's pemissive will)이다”. 하나님의 작정은 하나님이 가지신 큰 계획입니다. 가령 “내가 예수를 통해 인류를 구원하겠다”. 이것이 하나님의 작정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작정은 하나님이 허용하신 많은 작은 계획들로 이루어집니다.
자, 보세요.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시기 원하신다”. 그래서 가장 먼저 고통당한 사람이 마리아입니다. 마리아는 처녀의 몸으로 임신함으로 인간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인류구원을 위해 마리아에게 허락한 고통이었습니다. 요셉도 고통당했습니다. 결혼도 안 했는 데 약혼자가 임신했다는 것입니다. 요셉의 심적 고통은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위해 요셉이 감당해야 할 몫이었습니다. 때로는 악역도 있습니다.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하나님의 허락하신 뜻가운데 일어난 일입니다. 그렇다고 가롯 유다가 잘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때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고통을 하나님의 작정의 한 부분으로 우리가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당하는 고난을 큰 그림에서 보게 합니다. 하나님의 작정이라는 그림입니다. 그리고 그 고난을 우리가 받아들이게 합니다. 또 고난을 이겨내게도 합니다. 마리아는 자기에게 찾아온 고난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눅1:38,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마리아가 이렇게 고백할 때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가운데 기도했겠습니까? 마리아는 자신이 당한 고통을 하나님의 작정을 위하여 자기에게 허용된 고난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많은 기도가 필요했습니다. 그는 결국 기도했고 드디어 승리했습니다. 요셉도 자기가 당한 고통을 기도로 받아들였습니다. 베드로도 통곡으로 기도하며 이겨냈습니다. 그런데 가롯 유다는 이겨내지 못하고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베드로와 가롯 유다의 차이는 실수의 차이가 아니라 기도의 차이였습니다.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십자가는 예수님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위하여 예수님이 감당해야 할 고난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는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자신의 고난으로 받고 담대하여 그것을 이겨냈습니다. 이것이 겟세마네 기도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예수님에게 십자가의 고난이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허락된 고난이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내가 받는 고난은 그 자체로 힘들지만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다면 내가 기꺼이 받겠습니다“ 하며 기도합니까?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도 인류 구원을 위해 기도로 십자가를 통과하셨다는 것을 아십니까? 우리의 문제는 고난이 아니라 기도라는 것을 아십니까? 우리는 고난이 없기를 기도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위해 우리의 고난을 잘 감당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까? 예수님이 겟세마네동산에서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탄식하는 고난이 우리의 삶에서 매일 일어난다는 것을 아십니까? 따라서 우리는 고난이 없기를 기도할 것이 아니라 고난이 올 때 예수님의 겟세마네기도처럼 기도로 물리치고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가 상황을 바꾼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 말이지만 더 좋은 말이 있습니다. “기도는 먼저 나를 바꾼다. 그리고 바꿔진 나를 통해 상황이 바뀐다”. 이것이 더 정확한 말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끊임없이 두려움이 몰려옵니다. 용기는 두려움을 피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능력입니다. 용기는 두려움이 없게 해달라고 비는 기도가 아닙니다. 두려움을 그대로 두고 그것과 맞서는 능력입니다. 십자가를 앞두고 두려웠던 예수님이 기도를 마친 후에 어떻게 달라졌는지 보시겠습니까? 마26:41,42절입니다. “세번째 오사 저희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이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의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놀라운 변화입니다. 기도하기 전에 예수님은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너무 나약하여 우리가 자칫 시럼들뻔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무릎꿇고 세 번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변했습니까? 42절, “일어나라 함께 가자.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놀라운 변화 아닙니까? 아직 아무 것도 바뀐 것이 없습니다. 그를 잡으러 오는 사람들은 점점 가까이 다가 오고 십자가는 골고다에서 여전히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동산에서 기도했다고 가롯 유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예수님이 피땀 흘려 기도했다고 군병들이 뉘우치고 예수 잡는 것을 포기하지도 않았습니다. 상황은 그대로 있는 데 바뀐 것은 예수님이었습니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예수님이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이 바뀌자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겟세마네 기도의 능력을 말할 때 요한복음이 최고입니다. 요한복음 18장을 보면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마치고 일어서자 군병들이 다가섰습니다. 예수님이 물었습니다.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그들이 “나사렛 예수”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내가 그니라” 한 마디 했습니다.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요18:6을 그대로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저희가 물러 가서 땅에 엎드려 지는지라”. 여러분, 어떻게 된 것입니까? 예수님이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그들을 위협하지도 않았고 손으로 밀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군병들이 땅에 엎드려 졌습니다. “엎드려졌다”는 이 말을 원문으로 옮기면 fell to earth입니다. 이 말은 “땅으로 고꾸라 졌다. 땅에 덜썩하고 넘어졌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기도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말 한마디 한 것밖에 없는 데 그 한 마디가 완전무장한 군병들을 땅에 고꾸라지게 한 것입니다. 무슨 힘이 그에게 있었을까요? 예수님이 무슨 마술을 한 것입니까? ”예수께서 저희에게 내로다 하실 때에 저희가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기도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미 승리했습니다. 영적 전쟁은 겟세마네동산에서 일어났고 나머지는그 실현일 뿐이었습니다.
겟세마네는 예수님이 기도했던 정원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겟세마네에 임했던 문제와 고통은 우리가 매일 겪고 있는 고통이요 문제입니다. 그 문제들을 우리가 다 이해할 수도 없고 다 이길 수도 없습니다. 오로지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기도입니다. 기도가 능력입니다. 우리도 기도하면 예수님처럼 능력있는 자가 됩니다. 엡3:12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 기도하면 이렇게 됩니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기도하면 이렇게 됩니다. 기도외에는 이같은 류가 나갈 수 없습니다. 겟세마네동산에서 매일 기도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눅22:39-46 2011.4.10(일)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눅23:34,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겟세마네 동산 조각(사진).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기도했습니다.
요6: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요7:1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요7:18,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마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심기려 하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눅9:51,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마10:32,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그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그들이 놀라고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마26:37-38, ”베드로와 세배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 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더큐 에스트, “기도란 나의 의를 하나님의 의와 바꾸는 영적 과정이다”.
"Father, I do not understand you, but I still trust you".
히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앤드류 머레이, “기도는 하나님이 내 안에서 그리고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드리는 것이다”
예수님은 고통앞에 용감하기 위해 기도했습니다.
마26:38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나님의 작정과 하나님의 허용하시는 뜻
눅1:38,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마26:41,42, “세번째 오사 저희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이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의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요18:6,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저희가 물러 가서 땅에 엎드려 지는지라”.
엡3:12,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
'추천 설교 > 이윤재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활절(요20:11-18) 2011.4.24(일) 부활, 최후의 승리 (0) | 2016.05.26 |
---|---|
종려주일 (요18:38-19:9) 2011.4.17(일)이 사람을 보라 (0) | 2016.05.26 |
영적 성장(10) 마5:13-16 2011.4.3(일)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 (0) | 2016.05.26 |
영적 성장(9) 마5:10-12 2011.3.20(일) 핍박받는 마음, 승리의 축복 (0) | 2016.05.20 |
영적 성장(9) 마5:10-12 2011.3.20(일) 핍박받는 마음, 승리의 축복 (0) | 2016.05.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