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절에 생각해 보는 나라사랑
시 146:1-10
오늘은 주일이면서 마침 삼일절입니다. 삼일절은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난 3.1 운동을 기념하여 지정된 국경일입니다.
3.1 운동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여 전 민족이 함께 한 항일독립운동입니다. 특히 3.1운동은 일제 강점기에 나타난 최대 규모의 민족 운동이었고, 그리고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에서 일어난 최초의 독립운동이었습니다.
3.1 운동이 일어나게 된 원인은 두말할 것 없이 일제의 폭압적인 식민통치입니다. 일본은 조선을 강점한 뒤 군사력을 앞세워 무단통치를 강행했습니다. 정치, 사회, 문화, 그리고 종교에 이르기까지 각 분야에서 폭력적인 억압과 수탈을 자행한 것입니다.
이런 일제의 폭압적인 식민지 지배에 대한 분노와 저항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해외에서는 애국 열사들이 국제 사회에 일제의 조선 강점의 불법성과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널리 알리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펼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국내에서는 일제에 독립을 요구하는 다양한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특히 민족 지도자들과 학생들이 독립요구 운동을 펼치게 되었습니다. 이를 위해서 일본정부에게 보낼 독립통고서를 작성했고, 대규모 시위와 함께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1919년 3월 1일 종로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됨으로써 3.1운동은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 3.1 운동은 수개월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도시와 같은 교통이 발달한 곳을 중심으로 시작되어 농촌 등지로 전파되며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되었습니다. 그리고 갈수록 참여하는 인원과 계층이 늘어났고, 국외로도 확산되어 만주, 연해주, 도쿄, 오사카, 필라델피아 등에서도 독립시위가 벌어졌습니다.
물론 일제가 가만히 있지는 않았습니다. 무력으로 무자비하게 진압했습니다. 만세 운동 현장에서 시위대에게 총격을 가하는 학살을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시위자들을 체포하여 가혹한 고문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 때 3개월 동안 시위진압 과정에서 7,509명이 사망했고, 15,961명이 부상을 입었고, 46,948명이 구금되었습니다.
이 3.1운동은 온 국민을 나라사랑으로 하나가 되게 하였습니다. 나라 안팎에 민족의 독립의지와 저력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독립운동이 보다 체계적으로 활성화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일제도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무단통치를 끝내고 문화통치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5.4운동, 인도 간디의 비폭력 불복종 운동 등 지구촌의 지역 민족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자랑스러운 발자취
3.1운동의 역사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 우리 기독교인들이 이 운동에 앞장을 섰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선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절반이 되는 16명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서명하지 않은 민족 지도자 48명 가운데 24명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다음으로 각 지역에서 시위를 주도한 사람들도 기독교인들이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전국에서 만세 시위가 일어난 곳을 살펴보면, 기독교가 주도한 곳이 78개 곳이고, 천도교가 주도한 곳이 66곳이고, 기독교와 천도교가 공동으로 주도한 곳이 42곳이나 되었습니다. 기독교가 시위를 주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실제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3.1 운동을 출범시켰던 사람은 의외의 인물이었다는 것입니다. 치밀한 계획 하에 3월 1일 종로 파고다 공원에서 만세 시위운동을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수많은 시민과 학생들이 파고다 공원에 모여들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민족 대표들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민족 대표 33인 중 29명이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일경에게 자수하여 체포되고 만 것입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정재용이라는 사람이 파고다 공원에 마련된 단상에 올라가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습니다. 그리고 함께 만세를 부르게 되면서 3.1운동이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정재용이라는 사람은 미션스쿨인 경신학교 출신이고,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던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기독교가 3.1운동에 앞장서자 일제의 탄압이 기독교에 집중되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총독부가 1919년 5월 3.1 운동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시기에 발표한 자료를 보면 이렇습니다. 교회당이 완파된 곳이 17교회, 반파된 곳이 24교회, 그리고 일부 피해를 본 곳이 42교회입니다. 교회의 재산 손해액이 당시 3만 불, 미션스쿨인 오산중학교의 피해액이 5천불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919년 6월 30일 3.1 운동으로 투옥된 사람이 기독교인이 2,190명으로 유교, 불교, 천도교인을 합한 1,556명 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교역자도 151명이 투옥되었는데 이것은 다음으로 많은 천도교 직원 72명보다 월등하게 많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당시 복음화율입니다. 당시 조선의 인구 1700만 명 중 기독교인은 고작 20여만 명 그러니까 복음화율이 1.5% 정도의 미미한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지금처럼 기독교가 한국의 주류 종교가 아니었습니다. 이제 막 전파되어 아직 뿌리를 내리지도 못한 새싹과 같은 종교인 기독교가 항일독립투쟁을 주도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다른 종교의 3.1운동 참여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동학혁명 이래로 민중 운동을 주도하던 종교는 천도교였습니다. 교세가 200만이 넘었습니다. 당연히 항일독립투쟁에 천도교가 앞장을 섰습니다. 그래서 민족지도자 15명을 내세웠습니다. 그러나 천도교의 열정도 교세가 1/10 밖에 안 되던 기독교의 열정을 당해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불교는 교세가 300만이 넘는 대중 종교였지만 민족 대표에는 2명만 참여하여 소극적 모습을 보였습니다. 또한 당시 유교는 조선의 국교이다시피 했지만 한 명도 민족 대표에 나서지를 못했습니다. 다만 만세운동에 후발주자로 참여했습니다. 역시 불교나 유교도 기독교의 주도적 역할을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목할 것은 당시 천주교입니다. 당시 교황청은 이태리의 무솔리니 정권과 독일의 히틀러 정권을 지지했습니다. 이태리와 독일과 일본이 군사동맹을 맺고 있기 때문에 교황청은 일본의 신사참배에 참여해도 된다는 전교를 내렸습니다. 그래서 천주교인들은 항일에 나서기가 어려웠던 것입니다. 기독교와는 완전히 다른 길을 걸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기독교는 복음화율 1.5%의 미약한 힘으로도 민족운동을 주도하는 빛나는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그래서 3.1 운동 이후 국민들로부터 존경 받는 종교로 발돋움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교세도 급격히 늘기 시작했습니다. 1920년에 32만 3천 명으로, 1922년에는 37만 3천 명으로 늘었습니다.
그리고 3.1 운동 이후 독립운동은 기독교인들이 주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도산 안창호를 비롯하여 상해임시정부를 이끌었던 김구,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펼쳤던 이승만, 헤이그에 밀사로 파견되었던 이준 등 모두가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그야말로 바다의 소금이 미량으로 바닷물을 짜게 만드는 것처럼 소수의 힘으로 항일독립운동을 주도했던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안에는 이 애국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빛나는 유산을 깊이 간직하고 나라사랑에 앞장 서야 하겠습니다.
믿음의 헌신
그러면 우리 기독교인들이 미약한 힘으로도 어떻게 3.1 운동에 앞장설 수 있었을까요? 도대체 무엇이 우리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나라사랑에 앞장서게 한 것일까요?
오늘 본문을 보면 시인은 7절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며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이시로다 여호와께서는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 도다” 시인은 하나님께서는 불의에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믿는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인은 하나님께서는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믿는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삼일운동 당시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이 시인의 믿음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불의한 일본을 정의로 심판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나라를 빼앗긴 조선에 자유를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을 보면 시인은 8절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맹인들의 눈을 여시며 여호와께서는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며 여호와께서 의인들을 사랑하시며” 시인은 하나님께서 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게 하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시인은 하나님께서 용기를 잃고 있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셔서 불의와 맞서게 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시인은 고난과 박해를 무릎 쓰고 의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사랑하신다고 믿었습니다.
삼일운동 당시 우리 믿음의 선배들 역시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새로운 역사가 펼쳐지게 될 것을 보았습니다.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용기를 내어 일제와 맞섰습니다. 어떤 두려움에도 물러서지 않고 의의 길로 나아갔습니다.
당시 기독교 대표를 대표해서 3.1 만세 운동을 주도해 나갔던 사람으로 남강 이승훈을 들 수 있습니다. 남강은 3.1 운동에 참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시대적 사명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길선주 목사님을 비롯한 많은 기독교인들을 설득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의 3.1 만세 운동에 참여토록 이끌었습니다.
남강은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투옥되었습니다. 그리고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재판도중에 총독부 판사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피고는 항상 일한 합병에 불평을 품고 조선독립을 희망하였는가?” 남강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렇다. 하나님이 가르치시는 바가 있으니 오색 인종 어느 누가 조국의 흥왕과 종족의 번영을 바라지 아니하며 더욱이 남의 나라에 합병된 자기 나라의 독립을 바라지 아니하겠는가?”
당시 여학생의 몸으로 잔다르크처럼 3.1 만세 운동에 온 몸과 마음을 다 바쳤던 분으로 유관순 열사가 있습니다. 유관순 열사는 독실한 믿음의 집안에서 자라던 중 선교사의 권유로 이화학당에 입학하여 공부를 하게 됐습니다. 3.1 만세 운동이 준비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6명의 학생과 함께 시위 결사대를 조직했고 3.1 만세 운동 현장에 참여하게 됐습니다.
일제가 3.1 만세 사건 이후 학교를 폐쇄시키자 고향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고, 유관순 열사는 고향에서 만세운동을 펼치게 됩니다. 치밀하게 준비하고 열정적으로 사람들을 설득하여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대대적인 만세운동을 벌이게 됩니다.
유관순 열사는 이 만세운동 현장에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일본 경찰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하는 장면을 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본인도 체포되어 투옥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지하 감방에 갇힌 채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믿음을 지켰고, 나라사랑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1920년 9월 28일 18살 꽃 다운 나이에 순국, 순교하게 됩니다.
유관순 열사가 남긴 말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코와 귀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믿음으로 나라사랑에 온 몸을 바쳤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물론이고 온 국민이 존경하고 사랑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선배들의 나라사랑을 받들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런 믿음의 선배들의 본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믿음으로 나라사랑에 앞장서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해야 하겠습니다.
연합과 일치
당시 신흥종교였던 기독교가 3.1 운동을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은 연합과 일치 때문이었습니다.
우선 기독교는 내부적으로 연합하는 일을 잘 수행했습니다. 당시 기독교는 지역별로 교인들의 성향이 달랐습니다. 조선에 와서 선교했던 선교사들이 사역지를 지역별로 분담했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으로 평양을 중심으로 서북지역에는 장로교가 강세였습니다. 그리고 서울을 중심으로 한 기호지역에는 감리교가 강세였습니다. 서북지역의 대표인 남강 이승훈이 주동이 되어 기호지역의 기독교 대표들과 긴밀한 협력을 추진했습니다.
그래서 33인 대표에 서북지역과 기호지역이 반반 참여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장로교와 감리교가 거의 반반 대등하게 참여하게 됐습니다. 서로 주도권 싸움을 한다든지 정치적인 갈등을 빚는 일은 전혀 없었습니다. 한 마디로 당시 조선 기독교가 나라사랑에 일치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3대 종교를 하나로 아울러 나갔습니다. 기독교를 대표하여 남강 이승훈은 천도교의 대표인 손병희와 긴밀하게 협력했습니다. 그리고 불교계를 대표하는 한용운을 설득해서 불교계의 참여를 이끌어냈습니다. 그래서 3.1 만세 운동은 기독교와 천도교, 그리고 불교 3대 종교가 연합한 항일독립운동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당시 난립해 있던 애국 세력들이 3.1 만세 운동을 중심으로 연합하는 대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가장 영향력이 있던 독립단체들은 상해에서 활동하고 있던 신한청년단이 있었습니다. 후에 상해 임시정부의 모태가 된 단체입니다. 그리고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동경유학생들을 중심한 대한인국민회가 있었습니다. 2.8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여 3.1 운동의 도화선 역할을 했던 단체입니다. 그리고 서울에서는 YMCA가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이 단체의 핵심 인사들이 대부분 기독교인들이었던 것입니다. 저들이 기독교 신앙으로 무장하여 곳곳에서 저마다 독립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단체들이 서로 의기투합하여 하나로 연합하여 놀라운 역사를 일으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특히 교회는 각 지역에서 모임의 구심적 역할을 했습니다. 모임의 장소를 제공했고, 교회의 등사시설은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는데 사용됐고, 교회의 종소리는 만세 시위의 신호탄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서구의 자유 민권사상을 가르치는 역할을 했습니다.
결국 기독교의 이런 연합과 일치의 역할 때문에 당시 조선의 애국독립운동 세력들이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가 되어 대대적인 만세운동을 펼쳐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연합과 일치의 아름다운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연합과 일치가 교회를 살리고 나라를 살리는 소중한 자산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기독교의 연합과 일치가 국민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의 기독교는 분열과 다툼의 상징처럼 되어버렸습니다. 교파가 갈라지고 교회가 분열되면서 기독교 내부의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른 종교와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고 반기독교 정서가 거세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국민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기 보다는 걱정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선배들이 물려준 이 연합과 일치의 아름다운 믿음의 유산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의 삼일절입니다. 믿음의 선배들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온 몸을 던졌던 뜻 깊은 날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선배들의 나라사랑의 빛나는 믿음의 유산을 받았습니다. 이 믿음의 유산을 잘 지켜야 하겠습니다. 선배들의 본을 받아 믿음으로 더욱 나라를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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