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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일을 행하는 습관을 기르자 행 10:38

선한 일을 행하는 습관을 기르자

행 10:38

 

   근자에 소비문화가 변하고 있답니다. 소비행태를 연구하는 분들은 소비문화의 변화를 시대로 구분해서 설명합니다.

   우선 소비 1.0시대가 있었답니다. 외제 물건을 선호하고 명품을 사려고 하던 소비문화시대를 말합니다.

   다음으로 소비 2.0시대가 있답니다. 인터넷이 보편화되면서 소비자들이 가격과 품질을 한 눈에 비교해 볼 수 있게 됐습니다. 소비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 있게 됐습니다. 그래서 공동구매, 해외직구와 같이 초특가 구매문화가 대세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최근 소비 3.0시대가 열리고 있답니다. 한 마디로 ‘착한소비’ 문화가 대세를 이루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착한소비란 한 마디로 착한 일에 동참하는 소비를 말합니다. 환경보호에 앞장서고, 근로자 복지에 힘쓰고, 공정한 거래를 하고, 기부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윤리적 경영을 실천하는 착한 기업의 제품을 사주는 소비를 말합니다.

   최근 대한상공회의소가 ‘윤리적 소비에 대한 소비자 인식’을 조사해서 발표했습니다. 현재 착한소비를 염두에 두고 물건을 구매한다고 답한 사람이 57.9%나 됩니다. 그리고 가격이 조금 비싸더라도 착한 기업의 제품을 살 용의가 있다고 답한 사람이 60%나 됩니다. 그리고 착한소비는 소비자의 의무라고까지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76%나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그래도 선한 일을 해 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보이지 않게 선한 일을 하며 사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사회는 아직도 희망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선한 일을 하되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선한 일은 남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의 선한 일은 도대체 어떤 점에서 달라야 할까요?

 

사명으로 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중요한 사명 가운데 하나가 바로 선한 일을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엡 2:10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이유가 선한 일을 하게 하기 위해서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지으심을 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믿고 고백하게 될 때 우리는 선한 일을 사명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딛 2:14에서는 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어주심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실 뿐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선한 일을 하게 하기 위해서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게 될 때 우리는 선한 일을 사명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갈 5:22을 보면 성령의 열매를 아홉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여섯 번째 열매가 ‘양선’입니다. 이 양선이란 말은 ‘선을 베푸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우리에게 충만하게 임하시면 우리는 선을 베푸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성령이 충만할 때 선을 행하는 사명을 깨닫고 실천해야 합니다.

   선을 행하는 것을 사명으로 깨닫고 산 사람들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으로 요셉을 들 수 있습니다.

   창 50:19 이하를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요셉은 어린 나이에 형들의 시기와 미움 때문에 애굽에 종으로 팔려옵니다. 남부럽지 않은 집의 사랑 받는 아들이 하루아침에 타국에 종으로 팔려왔습니다. 그것도 자기 형들이 자기를 팔아넘긴 것입니다. 얼마나 분하고 억울했겠습니까? 그후 종살이 하며 죽을 고생을 합니다. 모함에 걸려 죄수로서 옥살이도 했습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형들에 대한 복수심이 불타오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기회가 왔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로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됐습니다. 온 천하에 흉년이 들어 형들이 애굽으로 양식을 구하러 왔습니다. 13년 만에 자기를 이렇게 만든 형들을 다시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야말로 원수를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것입니다. 형들이 지금 자기 앞에 무릎을 꿇고 있습니다. 원수 갚을 절호의 기회가 온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결코 저들에게 원수를 갚으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들에게 선을 행하려고 작정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었을까요?
   우선 이 모든 일이 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됐기 때문입니다. 형들이 자기를 애굽에 종으로 팔아넘긴 일은 분명히 악한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악한 일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자기를 먼저 애굽으로 보내셔서 장차 야곱의 가족들을 구원하셔야 했기에 저들이 저지른 악한 행동을 도구로 쓰셔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이루신 것입니다. 요셉은 이 사실을 깨닫게 됐습니다.

   다음으로 하나님께서 지금 자기에게 저들에 대해 선하게 행동하라는 사명을 주셨다는 사실을 알게 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가족들을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역사를 이루어 가고 계십니다. 그런데 만일 요셉이 복수하기 위해 형들을 죽인다면 하나님의 구원 역사 역시 큰 차질을 빚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형들이 저지른 악을 선으로 바꾸셨는데 이제는 요셉이 하나님께서 행하신 선을 원수 갚는다고 악으로 바꾸게 됩니다. 요셉은 지금 자기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선을 선으로 마무리하는 사명이 있음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선을 행하는 것을 사명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비록 세상이 우리에게 악을 저질렀다고 해도 우리는 같이 악으로 대응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할 때 하나님의 선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선을 행할 사명이 있음을 깨닫고 살아야 합니다.

 

은밀하게 행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선을 행할 때 은밀하게 행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 6:2-4을 보면 예수님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우리가 선을 행할 때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는 점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선을 행할 때 남이 알게 하려고 하지 말고 남들에게 자랑하려고 하지 말라고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를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자기가 선한 일을 하면서 스스로 대단한 일을 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때 가능합니다. 우리가 자식에게 용돈을 주면서 남에게 알리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남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그것을 대단한 일이라고 스스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한 일을 할 때 이렇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유대 탈무드를 보면 재미있는 대목이 나옵니다. 어려운 이웃을 도울 때 뒤로 돌아서서 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 때문입니다. 하나는 구제 받는 사람이 누구에게 구제 받는지 모르게 해서 부끄러워하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하나는 구제하는 사람이 자신이 누구를 구제하는 모르게 해서 자신을 자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게다가 유대인들은 사람들이 선한 일을 하는 여러 가지 상황을 단계로 정리해서 가르쳤습니다. 바로 ‘자선의 황금단계’입니다.

 

1. 주고 나서 후회하는 단계

2. 주기는 하지만 받는 이의 형편을 감안하지 않고 주는 단계

3. 주기는 하지만 요청하지 않을 때는 주지 않는 단계

4. 주기는 주되 받는 사람 기분 나쁘게 하며 주는 단계

5. 받은 사람은 준 사람을 알지만 준 사람은 받은 사람을 모르는 단계

6. 준 사람은 받은 사람을 알지만 받은 사람은 준 사람을 모르는 단계

7. 준 사람도 받은 사람도 둘 다 모르는 단계

8. 미리 자비를 베풀어 빈곤을 면하게 하는 단계

 

   그렇습니다. 선을 행한다고 다가 아닙니다. 선을 행할 때 어떻게 하느냐가 참 중요합니다. 은밀하게 해야 합니다. 받는 사람이 모르게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도 모르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이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 아시도록 해야 합니다.

 

  한 번은 진 프레드릭 오버린이라는 독일의 목사님이 모처럼 겨울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여행을 하던 도중 심한 눈보라를 만나 길을 잃게 되었고, 꼼짝없이 얼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마차를 타고 가던 어떤 사람이 이 목사님을 발견하고는 마차에 태워 인근 마을까지 데려다 주었습니다. 게다가 편히 쉴 수 있는 따뜻한 방까지 마련해 주었습니다. 오버린 목사님은 무척 고마워하면서 그 사람에게 이름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당신은 목사님이시죠? 그렇다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름을 아시나요? 저는 목사님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름을 아실 때까지 제 이름을 밝히지 않겠습니다."하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선한 일이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름이 밝혀져 있지 않은 것처럼 우리의 이름이 밝혀지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기억하십니다. 만일 우리의 선한 일 때문에 우리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그 이름을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선한 일을 하되 은밀하게 해야 합니다.

 

습관이 되게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곳곳을 다니시면서 선한 일을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름 붓듯 부어주신 성령과 능력으로 선한 일을 하시며 곳곳을 다니셨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기록한 누가는 눅 22:39을 보면 “예수께서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예수님께서 기도하기 위해 감람산으로 가신 것을 습관을 따라 그렇게 하셨다고 기록한 것입니다. 누가의 이런 표현을 본문에도 적용해 보면 예수님께서는 습관을 따라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습관을 따라 공생애 기간을 지내셨습니다. 기도하는 일이 습관이 되어 그 습관을 따라 늘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그 습관을 따라 늘 선한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런 본을 받아서 선한 일을 하는 습관을 길러야 하겠습니다.

   습관을 따른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한 마디로 몸에 밴 것을 말합니다. 생각해 보니까 선한 일을 해야 할 것 같아서 막상 선한 일을 실행하려면 쉽지 않습니다. 갑자기 감동을 받아서 선한 일을 하려고 해도 막상 선한 일을 실제로 하려고 하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몸에 배어있으면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습니다. 늘 하던 일이기 때문입니다.

   눅 10장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서 가진 것 다 빼앗기고 옷도 벗겨지고 죽도록 매 맞고 길에 버려졌습니다. 이 사람을 그대로 두면 얼마 못 가서 죽게 될 지경입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지나가다가 이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한 레위인도 지나가다가 이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이 사람도 똑같이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고 되어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강도 만난 사람을 무슨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본 것처럼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두 가지를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혹시 죽었다면 시신을 만지면 부정해 지기 때문에 제사장과 레위인은 피하도록 교육을 받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죽은 것을 확인해 보지도 않고 그저 피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괜히 이 일에 연루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먹을 것도 주어야 하고 치료해 주어야 하고 가족도 찾아주어야 하고... 그렇지 않아도 바쁜 길을 가고 있는데 엮기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이 사람들은 평소에 남을 돕는 선한 일을 해본 적이 별로 없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늘 이런 저런 핑계로 남을 도와야 할 때 그 자리를 피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달리 한 사마리아 사람이 이 강도만난 사람을 보았습니다. 이 사람은 강도만난 사람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피하지 않고 가까이 갔습니다. 응급처치를 했습니다. 자기 짐승에 태워서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게다가 자기가 바빠서 더 돌볼 수 없게 되자 주막 주인에게 돈을 주면서 이 사람을 돌보아 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만난 사람 돕는 것이 능숙합니다. 망설임도 없고 실수도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평소에 많이 하던 일이기 때문입니다.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에게 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선한 일을 하며 살라고 가르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에게 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선한 일을 하는 것을 습관으로 기르라고 가르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선한 일을 습관을 따라 행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선한 일을 습관을 따라 행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선한 일을 행하는 습관을 기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평소에 선한 일을 행하며 살아가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한 가지 제안을 드려보려고 합니다. 매일 한 가지씩 선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의식적으로 매일 한 가지 선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집에서 일터에서 길거리에서 교회에서 누군가를 돕고 누군가를 배려하는 생활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한 일이 몸에 배이도록 해 보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선한 일을 위해 지으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선한 일을 하도록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선한 일을 하도록 성령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점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선한 일을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선한 일을 하는 것을 습관이 되게 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