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주일 (요18:38-19:9) 2011.4.17(일)
이 사람을 보라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이 나귀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주일입니다. 이날부터 한 주간을 고난주간이라 부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주간입니다. 이 뜻깊은 주간에 여러분은 누구를 바라봅니까? 인도의 테레사는 일생동안 가난한 자를 위해 살았습니다. 영국의 BBC기자가 데레사 수녀를 찾아 그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었습니다. 테레사의 일생을 다루기 때문에 기자는 테레사에게 많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어떻게 캘커타에 오게 되었습니까? 어떻게 버려진 아이들, 고아들, 죽어 가는 사람들을 위해 살게 되었습니까? 소감은 어떻습니까? 테레사 수녀는 묻는 말에 다 답변한 후에 기자에게 조용히 물었습니다. “나는 이 일을 스스로 한 것이 아니라 나를 고용하신 분의 지시에 따라 한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왜 나에게만 묻고 고용하신 분에 대해서는 한번도 묻지 않는 겁니까?” 기자는 깜짝 놀랐습니다. 기자는 테레사 다큐멘터리이기 때문에 테레사에게만 물으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테레사의 말은 더 자세한 것은 하나님에게 물어봐야 안다고 말한 것입니다. 테레사가 가난한 자, 병든 자를 위해 산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왜 테레사를 유고에서 인도로 보냈습니까? 누가 보냈습니까? 그 많은 일중에서 왜 하필 가난한 자를 돕는 일을 했습니까? 누가 시켰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그 일을 했습니까? 모두 하나님에게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매사에 하나님의 주인이심을 믿습니까? 이 고난주간에 예수님을 보내고 십자가에서 구원의 사역을 이루신 하나님을 바라봅니까? 그래서 테레사는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사람을 세 종류로 나누었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시키신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 둘째 하나님이 주신 일을 즐거워 하고 기뻐하는 사람, 셋째 하나님때문에 행복해 하고 즐거워 하는 사람. 여러분은 어디에 속합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이 주간에도 등장 인물이 참 많습니다. 대제사장 안나스, 가야바, 서기관, 사두개인, 바리새인, 로마 총독 빌라도, 헤롯 대왕, 예수님의 12제자, 특히 베드로, 가롯 유다, 그리고 많은 여인들이 등장합니다. 누가 주인공입니까? 이들 중에 우리는 누구를 주목해야 하겠습니까? 빌라도는 역사상 가장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이스라엘총독으로 있을 때에 예수님을 재판하여 그를 십자가에 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이 사도신경을 외울 때마다 그의 이름을 부릅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빌라도는 예수님의 죽음을 위한 불행한 배역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그가 잘 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십자가의 주인공 예수님을 보라고 소리친 것입니다. 물론 믿음으로 그렇게 한 것은 아닙니다. 재판하다가 우연히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함으로써 십자가와 부활의 주인이 예수님이고, 더 나아가 인류 전체의 주인이 예수님인 것을 재확인했습니다. 빌라도는 두 번이나 “이 사람을 보라”고 소리쳤습니다. 한번은 예수님을 백성들 앞에 데리고 나오면서 “이 사람을 보라”. 또 한번은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내 주면서 “이 사람을 보라”. 빌라도가 예수님을 재판하면서 우연히 한 이 말이 우리가 고난주간에 예수님을 바라보며 할 말입니다. 우리는 왜 예수님을 바라 보아야 합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어떤 면을 바라 보아야 합니까?
죽음앞에 침묵한 예수님을 바라 보십시요
빌라도가 “이 사람을 보라” 말한 첫 번째는 예수님의 침묵입니다. 어떻습니까? 사람이 정당한 재판을 받으려면 자기 소명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예수님의 재판은 불법 재판입니다. 유대인의 법에 밤에 재판하지 말아야 하는 데 밤에 재판했습니다. 증인과 변호인이 있어야 하는 데 증인도 변호인도 없습니다. 아직 유죄가 확증되지도 않았는 데도 구타합니다. 세상에 이런 재판이 어디 있습니까? 이런 재판을 받으면 당연히 재판이 잘못되었다고 말해야 합니다. 변호인을 사서 조목 조목 재판의 부당성을 지적해야 합니다. 그것도 안되면 소리라도 쳐야 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어의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재판의 당사자인 예수님이 아무 말씀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9절입니다. 요19:9,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께 말하되 너는 어디로부터냐 하되 예수께서 대답하여 주지 아니하시는지라”. 참 안타까운 장면입니다. 증인도 없고 변호인도 없으면 자기라도 변호해야 하지 않습니까? 바울 도 그랬습니다. 그는 변호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변호했습니다. 천부장앞에서 왕앞에서 총독들앞에서 자신을 변호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도무지 자신을 변호하지 않습니다. 변호하지 않은 것은 물론 아예 침묵으로 일관합니다. 이런 답답할 노릇이 어디 있습니까? 아무 죄없이 그나마 변호인도 없이 재판받으면서 자신이 자신마저 변호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답답한 것은 오히려 빌라도였습니다. 그래서 10절에서 말합니다. 요19:10, “빌라도가 이르되 왜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이 말은 말만 잘하면 내가 놓아줄 수도 있는 데 말을 안하니 어떻게 해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이때가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대제사장이 재판할 때도 똑같이 침묵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대제사장앞에 세웠습니다. 그리고 거짓증언으로 그를 고발했습니다. “이 사람이 성전을 헐면 사흘만에 지으리라고 했나이다”. 말도 안되는 증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된 자신의 육체를 두고 한 말이었습니다. 대제사장이 이것을 확인하기 위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마26:62, “대제사장이 일어서서 예수께 묻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그그러면 그때 예수님이 말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성전을 헐라고 말한 본래 뜻을 설명해야 합니다. 그래야 죽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어떻게 했습니까? 마26:63입니다. “예수께서 침묵하시거늘”. 아, 그 결정적인 시점에 침묵하시다니. 예수님은 왜 이렇게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것입니까? 했다는 것을 안했다고 말하라는 것이 아니라 안한 것을 안했다고 말하라는 것이 왜 그리 어렵습니까?
현대를 일컬어 “PR 시대”라고 합니다. 피할 것은 피하고 알릴 것은 알리는 시대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피할 것은 피하지 않으면서 알릴 것만 알립니다. 어떻게 하든지 자기를 변명하고 드러내고 과장하려고 애씁니다. 어떤 사람의 책을 보았더니 그 사람의 약력만 책 한 면입니다. 무슨 무슨 회장, 이사부터 어디 어디 부회장, 감사, 너무 많아서 다 읽기도 어렵습니다. 어떤 부흥회 포스터를 보니까 ”40일 금식을 두 번이나 하신 불의 종“이라고 썻습니다. 제가 생각했습니다. 오직 죽을 지경이었으면 40일 금식을 두 번이나 했을까? 그것도 자랑이라고 할까? 금식했으면 하나님이 받으시면 됐지. 그것이 왜 사람에게 자랑일까. 모두가 목숨걸고 자기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참으로 예수님으로 말하면 자랑할 것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 분이 입을 열면 그 앞에 누구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는 순간까지도 자기 PR을 하지 않습니다. 대신 말하면 안될 말을 합니다. 대제사장이 묻습니다. 막14:61, “네가 찬송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 이 말을 이스라엘적 개념으로 말하면 “네가 메시아냐? 내가 유대인의 왕이냐?” 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그렇지 않다고 말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에게 그렇다고 하면 돌에 맞아 죽습을 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다고 말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막14:6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바로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지금 “네가 그리스도냐?”고 물어서 그렇다고만 대답해도 큰 일날 상황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내가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 우편에 앉을 것이며 때가 되면 세상을 심판하러 구름타고 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될 말입니까? 왜 예수님은 유리할 때는 침묵하고 불리할 때는 말씀합니까? 단호하게 “아니요”하고 말해야 할 때는 “그렇다"고 말하고 ”그렇다“고 말해야 할 때는 침묵합니까?
예수님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 살 길만 찾아 갑니다. 조금이라도 나에 대하여 불리한 말이나 손해볼 일이 있으면 못 참습니다. 어떤 분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몇 가지 표지”라는 글을 썻습니다. 예수님을 닮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이런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먼저 불평없이 고생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고생하면서 불평합니다. 어떤 놈이 나에게 이것을 시켜 내가 죽을 지경이라고. 누가 나에게 이런 고생을 시켰느냐고.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 지면서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예수님 닮은 사람은 불평없이 고생하는 사람입니다. 둘째 예수님 닮은 사람은 해명없이 오해받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오해받을 때처럼 괴로운 것은 없습니다. 사실이 아닌 오해를 받을 때는 더 괴롭습니다. 사람들이 오해를 풀기 위해 대개 하는 것은 긴 해명입니다. 이것도 안되면 스스로 목숨을 끊어 결백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일본의 “하꾸인”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오래전에 일본에 “하꾸인”이라는 사람이 살았습니다. 어느날 같은 동네에 살던 처녀가 임신을 했습니다. 아버지가 다그치자 딸은 하꾸인의 아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버지가 아이를 하꾸인에게 주면서 말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을 저질렀는가? 자네 아이니 자네가 키우게”. 그때 하꾸인이 한 마디 했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하꾸인은 그 일로 명예가 실추되었고 졸지에 아버지까지 되었습니다. 그렇게 아이를 키우던 중 여자가 병들었습니다. 그가 죽어가면서 아버지에게 하꾸인이 아이의 아버지가 아니라 생선가게 총각이 아버지라고 말했습니다. 아버지가 하꾸인을 찾아가 백배사죄했습니다. 그때 하꾸인이 또 한 마디했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그리고 아이를 돌려주고 자기 길을 갔습니다. 이것이 해명없이 오해받는 사람입니다.
셋째. 예수닮은 사람은 보상 없이 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남에게 무엇을 주면 그만큼 받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다 주고 아무 것도 받지 않았습니다. 오래전에 한신교회에서 저를 장학생으로 외국에 보냈습니다. 장로님들이 이중표 목사님께 물었습니다. “이윤재 목사에게 장학금을 주면 공부마친 후에 한신교회로 돌아옵니까?”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그가 우리 교회로 돌아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를 위하여 훌륭한 일꾼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알아서 인도할 것입니다”. 이중표 목사님은 저를 보상없이 유학을 보냈습니다. 때가 되어 저는 한신교회로 돌아왔고 지금 작은 보상을 목사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도 우리에게 보상없이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피와 물을 주시고 겉옷도 속옷도 주셨습니다. 십자가는 그야말로 아낌없는 주는 나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금까지 모든 것을 되돌려 받지 못했습니다. 되돌려 받지 못하고 주기만 한 사랑이 진짜 사랑입니다.
넷째. 예수닮은 사람은 울분없이 무시당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특히 어렵습니다. 무시를 당했는데 어찌 울분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여기에서 모든 나쁜 일이 일어납니다. 예수님도 채찍에 맞았지만 울분을 토로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에게 침밷고 뺨을 때리는 사람에게 예수님이 같이 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예수님 닮은 사람은 다섯 번째가 오해받으면서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언제나 좋은 일은 오해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해받는다고 그 일을 중단하면 안됩니다. 교회안에서 문제가 있는 사람과 친하면 오해받을 수 있습니다. 교회안에서 남들이 안하는 일 하면 오해받을 수 있습니다. 오해받아도 옳은 일은 해야 합니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오해받을만큼 예수 믿어야 합니다. 선한 일을 할 때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때가 이르면 거둡니다. 예수님 닮은 사람은 이런 사람입니다. “이 사람을 보라”. 우리는 이런 예수님을 바라 보아야 합니다.
죄없이 스스로 죽은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요
빌라도가 “이 사람을 보라” 말한 두 번째는 예수님은 죄가 없슴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죽었다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로마 총독입니다. 총독으로 그가 얼마나 충분한 교육을 받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는 그는 어려서부터 로마에서 자라법과 법치의 중요성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로마식으로 말하면 죄에는 반드시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죄에는 내면적인 죄와 외면적인 죄가 있겠지만 처벌이 가능한 죄는 오직 사람들에게 해를 깨친 외적인 죄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빌라도는 더군다나 이스라엘의 치안을 책임짓는 로마황제의 대리인입니다. 그가 만일 어떤 이스라엘 사람이 분명한 죄를 지었는 데도 그를 다스리지 않아 결과적으로 로마황제에게 부담을 주었다면 그는 곧 소환되어 혹독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로마법의 체계에 따라 예수님 사건을 자세히 살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에게 어떤 죄를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고발한 죄는 유대 종교와 율법에 관한 죄요 기껏해야 자기들끼리 물고 뜯는 갈등의 문제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로마의 실정법에 따라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 실정법적 죄를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증인이 있다고 하나 허술한 증인이요 정치적 악의와 종교적 편견으로 가득찬 증인이었습니다. 오히려 빌라도가 볼 때는 바라바가 죄인이었습니다. 바라바는 강도요 민란을 꾸민자요 사람을 죽인 살인자였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애썻고 죄가 없다고 공개적으로 세 번이나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입니다. 재판장은 죄가 없다고 하는 데 죄수가 자원하여 벌을 받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이런 일은 없습니다. 법치 국가인 로마에서 이것은 오히려 부정의에 해당되는 일입니다. 죄가 있다고 해도 죄없다고 주장해야 하는 데 재판장이 죄가 없다고 세 번이나 선언했는 데도 예수님은 죄인처럼 스스로 죽으려하고 있습니다. 왜 죄없다고 하는 데도 예수님은 아무런 법적 대등없이 십자가에 죽으려 하는 것입니까? 미국을 일러 흔히 소송국가라 합니다. 미국은 웬만한 것은 다 법으로 합니다. 변호사가 적을 때는 웬만한 것은 넘어 갔습니다. 변호사가 많으느까 웬만한 것은 법적으로 합니다. 요즘 한국교회가 법의 힘을 하나님의 힘보다 더 의지하는 것 같이 마음이 아픕니다. 오랫동안 검사였다가 변호사로 일하는 친구의 말을 들으면 요즘 법원에 쌓인 교회관련 소송이 엄청나게 늘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교회와 교회간의 소송, 교인과 교인간의 소송, 어떤 교회는 한 교회안에 20여건의 소송이 진행중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주일날 예배는 같이 드립니다. 교회 연합기관들이 서로 옳다고 앞을 다퉈 소송을 합니다.
소송이란 나는 옳은 데 상대방이 잘못되었으니 법적으로 옥석을 가려 달라는 것인데 도대체 이 사람들이 예수믿는 사람 맞습니까? 도대체 이 사람들이 죄가 없으면서도 아무런 법적 대응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침묵으로 십자가에 죽었던 예수님의 제자 맞습니까 ? 나는 옳은 데 당신은 틀렸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발상이 과연 성경적입니까? 어떻게 당신만 옳고 상대방은 틀릴 수 있습니까? 당신이 예수님보다 나은 사람입니까? 한국교회 성도, 교회, 교회 지도자들에게 호소합니다. 여러분이 정말 이번 사순절을 무릎꿇고 보내고 있습니까? 이번 고난주간을 정말 예수님 따르는 기회로 삼기 원합니까? 그렇다면 다음 주 부활주일 까지 당신이 제기한 모든 법적 소송을 취하하십시오. 하나님이 세상 재판장보다 의롭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세상 판사보다 믿을 수 없습니까? 왜 당신은 예수안에 죽고 다시 살았다면서 남을 죽이는 일을 하고 있습니까? 살고자 하는 자는 죽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산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알고 있습니까? 예물드리다가 형제에게 원망들을만한 일이 있거든 먼저 가서 화해하고 예물을 드리라는 말씀도 알고 있습니까? 왜 알고 있는 데 순종하지 않습니까? 왜 예수를 믿는다면서 예수님의 방식은 따르지 않고 있습니까? 죄없이 스스로 죽은 분이 우리가 믿는 구주입니다. 그 분처럼 사는 것이 예수믿는 것입니다. “이 사람을 보라”. 죄없이 스스로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자기를 죽여 남을 살린 예수님을 바라 보십시오
빌라도가 “이 사람을 보라”고 외친 마지막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자신을 죽여 남을 살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더 이상 살릴 수 없슴을 알게 된 빌라도는 마지막 카드를 꺼내 들었습니다. 그것은 백성들앞에 죄수 두 사람을 세우고 한 사람을 선택하려는 방법이었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해방된 절기로 이 절기에 맞게 생긴 관습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죄수 하나를 석방하는 관습이었습니다. 그것은 몇 가지 조건이 맞을 때 이루어졌습니다. 첫째는 반드시 유대인이어야 했습니다. 이방인은 해당되지 않았습니다. 둘째는 정치범이어야 했습니다. 일반죄수는 해당되지 않았습니다. 셋째는 유월절 전날 석방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바라바는 이 조건에 딱 들어 맞았습니다. 첫째 그는 유대인이었고 또한 정치범이었습니다. 유월절은 가까웠고 사람들은 유월절 축제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두 사람을 백성들 앞에 세우고 말했습니다. “자, 이 사람들을 보시오. 유월절 관례에 따라 둘중의 하나를 석방할까 라는 데 누가 좋겠소?” 사람들은 즉각적으로 소리쳤습니다. “바라바요.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죽이시오”. 힘없는 빌라도는 결국 민중의 힘에 의해 정의도 사법적 진실도 버렸습니다. 그가 두려운 것은 정의가 아니라 성난 백성들의 아우성이요 그로 인해 보존될 총독 자리였습니다. 나약한 사법적 진실은 불의한 민중의 함성에 무릎을 꿇었고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주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무엇입니까? 개인적으로 보면 죄없이 죽은 의로운 죽음이었습니다. 관계적으로 보면 다른 사람을 살려낸 속죄적 죽음이었습니다. 그는 죄없이 죽었으나 혼자 죽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죽음으로 다른 사람을 살려 냈습니다. 그가 바로 바라바였습니다. 바라바는 강도이며 민란을 꾸며 세상을 어집힌 자요, 항상 주머니에 단도를 치고 다니면서 로마사람을 살해하던 상습 살인범이었습니다. 그가 그 죄를 짓고 사는 방법은 없었습니다. 그는 마땅히 죽고 예수님은 마땅히 살아야 하는 데 예수님은 죽고 바라바는 살았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두 사람이 닮은 점이 있는지. 아무리 봐도 바라바는 살 자격도 살 가능성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었기 때문에 대신 산 것입니다.
구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나와 예수님이 운명을 바꾼 사건입니다. 죽어야 할 나는 예수님 때문에 살고 살아야 할 예수님은 나 때문에 죽은 사건입니다. 내가 가야 할 골고다에 예수님이 가고 그가 돌아가야 집에 내가 돌아갔습니다. 구원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신적 교환입니다. 바라바와 예수님이 교환된 사건입니다. 나와 예수님이 맞바꿔진 사건입니다. 내가 받아야 할 형벌을 예수님이 받고 나는 용서받았습니다. 내가 받아야 죽음을 예수님이 받고 나는 생명을 얻었습니다. 내가 받아야 할 저주를 예수님이 받고 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내가 받아야 할 거절을 예수님이 받고 나는 하나님께 환영을 받았습니다. 자기를 죽여 남을 살린 예수님의 삶은 언제나 우리가 실천하고 살 삶의 모범입니다. 지난 1월 한 학교버스 기사가 미끄러져 내려오는 통학버스를 온 몸으로 막아 학생들을 구하고 자기는 그 자리에서 죽은 안타까운 일이 있었습니다. 경기도 광주에 사는 운전기사 김씨의 이야기입니다. 사고 당시 버스 안에는 학생 8명이 타고 있었는 데 갑자기 버스가 내리막길을 미끄러져 내려오자 김씨는 이를 온몸으로 막다 바퀴에 깔려 숨진 것입니다. 다른 위해 자기를 죽인 기사는 예수님을 닮은 삶을 보여주었습니다.
2008년 중국 쓰촨성 대지진때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갑자기 집이 무너져 수십 톤의 무게가 한 어머니를 눌렀습니다. 그때 그 어머니는 두 살짜리 딸을 가슴에 안고 젖을 먹이며 24시간 동안 흙속에서 사투를 벌였습니다. 나중에 흙더미 속에서 죽은 어머니품에 살아 있는 딸이 발견되었고 그 사이에 후대전화가 발견되었습니다. 그 전화에는 이렇게 새겨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보배야. 만약 네가 살아남는다면 꼭 기억해다오 엄마가 널 사랑했다고". 엄마는 죽음으로 딸을 살린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은 위대한 모성입니다. 특별한 사람만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 하고 이렇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볼 것은 오직 예수님입니다. “이 사람을 보라”. 로마 총독 빌라도가 한 이 말이 우리 모두의 신앙적 방향이 되어야 합니다. 죽음앞에 침묵한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리고 우리도 덜 우리를 변호하며 삽시다. 죄없이 스스로 죽은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죽었으니 남과 다투며 살지 맙시다. 자기를 죽여 남을 살린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우리도 나를 죽여 남을 살립시다. 이 아름다운 사순절에, 우리 신앙과 삶의 좌표인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이 사람을 보라. 이 사람을 보라”. 아멘.
종려주일 (요18:38-19:9) 2011.4.17(일)
이 사람을 보라
죽음앞에 침묵한 예수님을 바라 보십시요
요19:9,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께 말하되 너는 어디로부터냐 하되 예수께서 대답하여 주지 아니하시는지라”.
요19:10, “빌라도가 이르되 왜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마26:62, “대제사장이 일어서서 예수께 묻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마26:63, “예수께서 침묵하시거늘”.
막14:61, “네가 찬송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
막14:6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바로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몇 가지 표지
(1) 불평없이 고생할 수 있는 사람
(2) 해명없이 오해받는 사람
(3) 보상 없이 줄 수 있는 사람
(4) 울분없이 무시당할 수 있는 사람
(5) 오해받으면서도 사랑하는 사람
죄없이 스스로 죽은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요
자기를 죽여 남을 살린 예수님을 바라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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