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2:1-13 2012.1.29(일)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새해를 맞아 간절한 소원이 있습니다. 능력있는 삶을 살고 싶다는 소원입니다. 지난 2주동안 이것을 절감하며 살았습니다. 어떻게 지치지 않는 능력으로 활기찬 삶을 살 수 있을까? 한번 시작한 일을 중단하지 않고 끝까지 이루는 힘은 없을까? 뛰고 달려도 피곤치 않는 삶은 무엇일까? 이것이 새해 우리가 바라는 소원입니다.
그래서 한 소녀가 어느 공장에 취직했답니다. 실만드는 방직 공장인데 수습기간을 거쳐 드디어 일을 시작했습니다. 반장이 와서 기계 작동법을 가르쳐 주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일을 배웠지만 그래도 일하다 보면 고장이 날 때가 있을 거야. 그 때마다 일을 멈추고 즉시 나에게로 달려와. 내가 도와줄께”.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녀가 일하다가 어려움이 생겼습니다. 올이 풀리고 실이 얽혀 기계가 엉망이 되었습니다. 몇 시간을 낑낑 거렸지만 고칠 수 없어 반장을 찾아갔습니다. 반장이 물었습니다. ”언제부터 고장났지?“ 소녀가 말했습니다. “몇 시간전에요”. “그런데 왜 이제 왔지?” 소녀가 말했습니다. “제가 고쳐 보려고요. 그런데 잘 안되었어요”. 반장이 말했습니다. “너의 할 일은 어려움을 당했을 때 고치는 것이 아니라 즉시 내게로 달려 오는 거야”.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어려움이 생겼다고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도 안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즉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최선은 우리에게는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가는 것입니다.
중세시대의 성녀 아빌라의 테레사가 있었습니다. 그가 신앙생활의 네 단계를 말했습니다. 첫째 단계는 물동이로 물을 긷는 단계입니다. 이 단계는 힘든 단계입니다. 모든 것을 내가 해야 합니다. 해도 한계가 있습니다. 기껏해야 물동이에 물을 채우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펌프로 물을 품는 단계입니다. 이 단계도 힘듭니다. 그러나 물은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내가 활동을 멈추면 아무 것도 안됩니다. 세 번째 단계는 수로에서 물이 흘러오는 단계입니다. 이것은 내가 하지 않습니다. 저수지에서 물이 스스로 흐릅니다. 쉽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단계가 있습니다. 하늘에서 소낙비가 쏟아지는 단계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습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비가 쏟아집니다. 그것도 소나기가 쏟아집니다. 내가 할 일은 가만히 서 있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위에서부터오는 은혜의 폭포수로 나를 적십니다. 이것이 신앙의 마지막 단계입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되고 싶지 않습니까? 하루 하루 물동이 이고 힘들게 펌프질하는 신앙으로는 힘들지 않습니까? 뭔가 하늘에서 쏟아지는 은혜를 받고 싶지 않습니까? 그래서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흠뻑 옷이 젖는 은혜를 받고 싶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능력을 구하는 일입니다. 능력을 사모하는 일입니다.
오늘 말씀 1절을 보실까요? 행2: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그래서 사도행전 교인들이 모였습니다. 능력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믿는 것을 인정받지 못한 상황에서 그들은 너무 힘들게 살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을 “나사렛 이단 예수를 믿는 이단들”이라고 핍박했습니다. 가정에서 예수믿는다고 미움받고 직장에서는 예수믿는다고 쫓겨났습니다. 영적으로 물질적으로 너무 힘든 상황에서 사도행전 교인들은 힘이 필요했습니다. 핍박과 박해속에서도 넉넉히 살아갈 능력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들이 믿은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눅24: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약속은 하늘로부터 능력을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하늘로 오는 능력이 약속되어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우리는 능력이 없어서 힘없이 사는 것이 아니라 능력을 받지 못해서 힘없이 삽니다. 우리는 저마다 이 힘을 갈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것은 사실은 힘을 갖기 위함입니다. 공부를 잘해야 더 좋은 위치에 올라가지 않습니까? 우리가 돈을 버는 것도 사실은 이 힘때문입니다. 물질의 힘입니다. 권력도 힘이요 명예도 힘이요 지식도 힘이요 과학도 힘이요 오락도 힘입니다. 그러나 모든 힘이 다 좋은 힘은 아닙니다. 좋은 힘은 나를 살리고 남도 살리는 힘입니다. 그 힘은 위에서 내려옵니다. 나쁜 힘도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선악과 따먹었습니다. 이유는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서입니다. 나쁜 힘입니다. 결국 그 힘 때문에 그들은 망했습니다. 이스라엘 왕 사울도 힘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 힘으로 평생 다윗을 쫓아다녔습니다. 나쁜 힘입니다. 결국 그 힘 때문에 그가 망했습니다. 좋은 힘이 필요합니다. 좋은 힘은 하늘에서 내려옵니다.
하늘의 힘은 약속으로 주어지고 기도로 받습니다. 약속과 기도가 함께 갑니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약속이고 우리 입장에서는 기도입니다. 약속+기도입니다. 약속을 믿고 기도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힘을 받습니다. 한 믿음좋은 기업의 총수가 어느날 시간을 내서 교회에 갔습니다. 자신이 시작한 사업이 꼭 성공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한참 기도하고 있는 데 거지 하나가 들어오더니 큰 소리로 소리칩니다. “하나님, 오늘 저에게 10만원을 주옵소서. 오늘 꼭 주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굶어 죽습니다”. 하도 큰 소리로 기도하는 바람에 총수의 기도가 방해를 받았습니다. 총수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습니다. “이봐요. 내가 10만원 줄테니 어서 나가세요”. 거지의 기도는 즉각 응답되었습니다. 때로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도 응답합니다. 거지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우리 기도도 들으십니다. 눅11:13입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이 말씀을 믿습니까? 기도하면 약속대로 응답받고 기도하면 능력받습니다.
제가 작년 이태리 피렌체에 갔습니다. 거기에 한 위인 한 사람이 살았는 데 사보나롤라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루터 이전의 종교개혁자라고 부를만큼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설교했다는 성 마가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그가 기도하고 설교할 때 수많은 군중들이 몰렸습니다. 하루는 강단에 올라가 설교하는 데 갑자기 자신에게 능력이 없슴을 깨달았습니다. 즉각 설교를 중단하고 골방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능력이 임할 때까지 5시간을 기다렸습니다. 놀랍게도 예배 참석한 사람중 한 사람도 자리를 뜨지 않고 같이 기도했답니다. 5시간 후에 능력이 임했습니다. 그가 다시 일어나 설교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능력이 임했습니다. 위대한 시대, 위대한 교회는 언제나 위대한 능력이 필요합니다. 목회자나 평신도나 이런 믿음이 필요합니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지 않으면 설교하지 않으리라”. 평신도는 “나는 하나님의 능력과 함께 교회를 섬기고 하나님의 능력과 함께 세상에서 살아가리라” 다짐해야 합니다. 능력이 먼저입니다.
오순절 날에
그러면 그 능력이 언제 임했습니까? 1절을 보십시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사도행전 사람들은 오순절에 모였습니다. 왜 하필 오순절입니까? 오순절에 모였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스라엘은 매년 세 번의 절기가 있습니다. 4월에 있는 유월절, 5-6월에 있는 오순절, 11월에 있는 장막절입니다. 이 세 절기는 모두 역사와 관련되고 농사와도 관련됩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해방된 절기입니다. 그리고 곡식이 막 자랄 때입니다. 오순절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온지 50일만에 시내산에 올라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절기입니다. 그리고 농사로 말하면 밀, 보리등 첫 곡식을 수확할 때입니다. 장막절은 가을에 익은 모든 곡식을 수확하여 창고에 저장하는 절기입니다. 초막절이라고도 하고 수장절이라고도 합니다.
그 중에서도 사도행전의 역사가 오순절에 일어났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순절은 50일이라는 뜻입니다. 언제로부터 50일?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난 유월절로부터 50입니다. 그 50일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두 가지 일이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는 시내산에 올라갔고 또 하나는 첫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이것은 신약의 오순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약에서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자 베드로가 처음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처음 설교는 곧 처음 전도였습니다. 처음 설교, 처음 전도가 이루어지자 처음 교회가 생겨났습니다. 처음 신자 3천명이 생겨났습니다. 이것이 처음 곡식입니다. 그런데 곡식은 어떻게 익었습니까? 때가 되어 익었고 햇빛이 비춰 익었습니다. 이스라엘은 3월부터 더워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5월, 6월 되면 섭씨 40도를 오르내립니다. 그 뜨거운 햇빛아래 보리와 밀이 익습니다. 그래서 보리를 먼저 수확하고 다음 밀을 수확합니다. 그 절기가 오순절입니다.
구약시대 오순절은 백성들이 시내산에 올랐습니다. 시내산에 오를 때 두 가지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는 하늘의 불이 임했고 다음은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출19:18절입니다. “시내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아께서 불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 가마 연기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시내산에 오를 때 하늘의 불이 먼저 임했습니다. 하나님이 역사할 때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이 불입니다. 불은 하나님 자신,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불이 임하자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었습니다. 출20:1입니다. 출20:1,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되”. 순서가 있습니다. 백성이 시내산에 오르자 하나님의 불이 임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이것이 구약의 오순절입니다. 신약의 오순절은 어떻습니까? 백성이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며 다락방에 모였습니다. 다락방은 신약의 시내산이었습니다. 그리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때가 되자 약속하신 성령이 임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그래서 생긴 것이 초대교회였습니다. 초대교회는 말하자면 하나님의 첫 곡식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아름다운 열매임을 아십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그의 첫 열매로 부르기 위해 먼저 성령을 주시고 다음 하나님의 말씀을 주신 것을 믿습니까? 열매는 아무 때나 수확하지 않습니다. 때가 있고 준비가 필요합니다. 1절에서 “오순절이 이르렀다”는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이르렀다”는 말은 헬라어로 “쉼플레로오”입니다. 이 말은 “가득 채워졌다”는 뜻입니다. 가령 큰 물통에 물을 한 바가지씩 퍼담다가 어느 순간 가득 차서 물이 밖으로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과 같습니다. 그것이 “이르렀다”, “쉼플레로오”라는 말입니다. 언제 곡식이 익습니까? 물통에 물이 가득차야 합니다. 때가 되어야 합니다. 언제 성령받고 하나님의 좋은 열매가 됩니까?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의 양이 차야 합니다.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차야 합니다. 그 때까지 세 가지 준비가 필요합니다. 첫째 영적 시내산에 올라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불인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이 임해야 합니다. 그러면 물통에 물이 차면서 밖으로 흘러 넘칩니다. 그래서 생긴 것이 열매입니다. 2-3절을 좀 더 자세히 봅시다.
하늘로부터
행2:2-3,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이 말씀은 하나님의 성령이 초자연적으로 임했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자 세 가지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먼저 소리가 나타났습니다. “하늘로부터 급하고 바람같은 소리”였습니다. 다음 눈에 무엇인가 보였습니다.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모습입니다. 마지막으로 이상한 말이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4절,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이상한 소리가 들리고 , 이상한 모습이 보이고, 이상한 말이 들렸습니다. 세상에서는 듣지도 보지도 말하지도 못한 것이었습니다. 소리가 났는 데 분명 바람은 아닌 데 바람소리 같았습니다. 무엇인가 보였는 데 분명 불은 아닌 데 불의 혀같은 것이었습니다. 말이 들렸는 데 분명 우리 말은 아닌데 이해가 안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확실히 초자연적인 것인데 우리의 감각기관에 체험되었습니다. 분명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데 그렇다고 이해가 안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성령의 현상, 성령의 나타남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로 부터 나왔습니다. 2절, “하늘로부터”. 다같이 “하늘로부터”.
여러분은 모든 좋은 것이 하늘로부터 나온다고 믿습니까? 여러분은 약1:17을 믿습니까? “모든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모든 좋은 것은 위로부터 나옵니다. 구원도 능력도 거룩도 권세도 다 위로부터 나옵니다. “내 주여 내 발붙드사 그곳에 서게 하소서. 그곳은 빛과 사랑이 언제나 넘치옵니다”. “위”는 공공간적 “위”만이 아니라 빛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영이신 하나님, 곧 성령이 계신 곳이 “위”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거듭납니까? 위에 계신 성령님이 임할 때 우리가 거듭납니다. 요3:5절에서 예수님이 “거듭나라” 말씀합니다. “거듭나다”는 말은 헬라어로 “겐네테 아노텐”라고 합니다. 이 말은 “위로부터 나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위에 계신 성령님의 은혜때문입니다. 구원을 어떻게 받습니까? 딛3:5절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구원도 위에 계신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은혜로 됩니다.
우리는 어떻게 거룩해집니까? 거룩에 대하여 2천년 교회사에서 끊임없이 논의된 두 생각이 있습니다. 하나는 모방설이고 또 하나는 이식설입니다. 모방설은 우리가 거룩하게 되는 것은 끊임없이 예수님을 닮아갈 때 온다는 것입니다. 거룩에 대한 우리의 인간적 노력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예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모방해야 합니다. 토마스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서”가 대표적인 책입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이식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거룩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안에 거룩의 능력이신 성령님이 들어와 그 분의 다스림을 받을 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분들은 “죄인인 우리가 예수님을 닮으면 얼마나 닮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유전인자속에 죄의 유전인자가 있는 데 우리가 노력한다고 얼마나 거룩해지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속에 implant, 될 때 나도 모르게 거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식설”이라고 합니다. 이식이냐 모방이냐? 어느 것이 맞는가 할 때 제가 내린 결론은 둘이 같이 간다는 것입니다. 먼저는 이식되고 다음은 모방됩니다. 자, 먼저 하나님의 성령님이 우리 속에 임합니다. 그것은 초자연적인 역사입니다. 초자연적인 소리와 모양과 언어로 우리에게 임합니다.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하나님의 강권하는 역사로 우리 안에 성령님이 임합니다. 그러면 그 분의 통치가 시작됩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내가 내 안에 계신 예수님께 순종하고 그를 닮아갑니다. 먼저 임하고 다음 닮습니다. 이것이 거룩의 순서입니다.
이것을 성령세례와 성령 충만과의 관계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말은 비슷하지만 내용은 다릅니다. 세례는 일생 한 번 받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세례를 세 번 받았다고 자랑하는 데 그 사람은 어디 가서 한신교인이라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례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시작된 것입니다. 성령님이 우리안에 임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뒤에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을 더 의지하고 사랑합니다. 그 분을 닮아가려고 무진 애를 씁니다. 날마다 기도하고 사모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능력을 부어 주십니다. 그것이 성령충만입니다. 성령세례가 관계를 위해 주어진다면 성령충만은 능력을 위해 주어집니다.
이것을 결혼의 비유로 말하면 성령세례는 결혼과 같고 성령충만은 사랑과 같습니다. 결혼은 일생 한번 합니다. 여러번 결혼하는 것은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결혼은 사랑하는 님과 딱 한 번 합니다. 그러나 사랑을 한번만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랑은 많을수록 좋습니다. 결혼은 사랑의 시작이지 끝이 아닙니다. 결혼했다고 자동적으로 사랑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노력해야 합니다. 결혼하는 순간부터 부부는 매일 사랑의 연습을 해야 합니다. 성령세례와 성령 충만도 이와 같습니다. 성령세례는 단 한 번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받은 후 우리는 더 성령님을 사모합니다. 지속적인 사랑이 부부를 행복하게 하듯 지속적인 성령 충만을 간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주십니다. 4절을 보십시오 행2: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을 받고”. 사도행전 사람들은 오순절날 처음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받은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오순절날 간절히 기도함으로 성령충만을 받은 것입니다. 성령충만은 계속 받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는 세 번이나 성령충만했다고 말합니다. 첫 번째가 행2:4입니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그속에 베드로가 있었습니다. 두 번째가 행4:8입니다. “이에 베드로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베드로가 잡혀가기 전입니다. 마지막이 행4:31입니다.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더 성령으로 충만하여” 베드로는 성령충만을 계속 받습니다. 성령세례는 한번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관계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성령충만은 계속해서 받고 하나님 자녀의 능력을 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성령으로 세례받았습니까? 그랬기 때문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세례받고 교회에 나왔습니다. 이제 할 일은 성령으로 충만한 것입니다. 성령충만은 과연 어떤 상태입니까? 성령충만하면 어떻게 됩니까? 엡5:18은 성령충만을 술취한 것과 비교합니다. 엡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여러분중에 술마신 분 있습니까? 취할 때까지 마셔 본 분 있습니까? 어떤 분이 술취한 것과 성령충만을 몇 가지로 비교했습니다. 첫째 술취하면 말수가 는다. 그렇습니다. 성령충만해도 말수가 늡니다. 입을 열면 쉴새없이 하나님 이야기, 성경이야기, 은혜받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둘째 술취하면 노래한다. 그렇습니다. 성령충만하면 노래합니다. 심방을 했더니 하루 종일 찬송을 부른다는 권사님이 있었습니다. 성령충만의 한 모습입니다.
셋째 술취하면 운다. 그렇습니다. 성령충만해도 웁니다. 자기 죄 때문에 울고 은혜에 감격해서 울고 예배드리다가 울고 찬양하다가 울고. 바보처럼웁니다. 넷째 술취하면 용감해 진다. 그렇습니다. 성령충만하면 용감해집니다. 평소에 전도 “전”자도 모르던 사람이 자기도 모르게 전도하고 핍박도 받고 심지어 순교도 합니다. 다섯째 술취하면 남에게 권한다. 그렇습니다. 성령충만하면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누군에게 말을 걸고 싶고 누구에게 주고 싶습니다. 여섯째 술취하면 정신이 몽롱해진다. 그렇습니다. 성령충만하면 정신이 몽롱해집니다. 세상과 나는 간데없고 구속한 주만 보입니다. 일곱째 술취하면 냄새를 풍긴다. 그렇습니다. 성령충만해도 냄새를 풍깁니다. 냄새를 풍기되 예수님 냄새를 풍깁니다. 마지막 술취하면 중독된다. 그렇습니다. 최고의 중독은 하나님 중독입니다. 성령충만하면 하나님 없이는 못살게 됩니다. 성령충만, 우리 신앙생활의 능력이요 행복입니다. 구하면 주십니다. 그것이 능력입니다. 아멘.
새로운 언어
그 중에서 성령이 임할 때 나타난 중요한 현상이 있었습니다. 4절입니다. 행2: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다른 방언”이란 평소 쓰는 말과는 다른 말입니다. “방언”이란 헬라어로 “글롯사”입니다. 이 말은 “혀”란 뜻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혀를 통해 말합니다. 성령이 임하자 사람들은 혀를 통해 다른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거기 모인 사람들에 같은 말을 쓰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9절부터 11절데 보면 적어도 16개 나라에서 온 사람들입니다. 행2:9-11을 보십시오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포타미아, 유다와 갑바도기야, 본도와 아시아,브르기야와 밤빌리야, 애굽과 및 구레네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이들은 모두 주전 6세기, 바벨론 포로때 전 세계로 흩어진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입니다. 이들이 사는 곳이 달랐다면 언어도 각각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들이 제자들의 방언을 각각 자기의 언어로 들었다는 것입니다. 11절 뒷부분을 보세요.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분명 자기 나라 말은 아닌데 자기 나라 말로 알아듣는 사람들, 제자들은 대부분 무식한 갈릴리 사람들로 외국어를 공부한 적이 없는 데 어떻게 16개 나라 사람들이 그 말을 알아 들었을까? 신비합니다.
여러분은 성령을 체험했습니까? 방언도 하십니까? 저는 중학교 1학년 부흥회때 방언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방언을 하냐 못하냐가 아닙니다. 진짜 방언의 의미는 이것입니다. 성령의 의미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새 언어입니다. 지금까지는 나만을 위해서 말했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면 전혀 다른 말이 시작됩니다. 남을 위해 말하기 시작하고 하나님의 말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 말을 통해서 11절, “하나님의 큰 일을 나타내기 위해” 말합니다. 성령이 임해서 달라지는 첫 번째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깨끗하고 좋은 말, 덕스럽고 아름다운 말, 무엇보다 사람을 살리는 말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말이 곧 전도의 말입니다. 전도는 내 입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나도 모르게 하나님의 말을 합니다. 사도행전에 열아홉 번의 설교가 나온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 중 여덟 개는 베드로가 한 것이고, 아홉 개는 바울이 했고 스테반과 야고보가 각각 한번씩 했습니다. 설교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전도입니다. 전도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입에 넣어주신 새 방언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하면 전도 안하기 쉽지 않습니다. 대신 전도가 어렵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이 내 입에 말을 넣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살리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이 능력입니다. 성령님이 우리 모든 능력의 원천입니다. 평생 예수믿는 데 평생 물동이 이고 힘들게 신앙생활 할 수 없습니다. 힘들게 펌프질하며 감질난 인생을 살 수 없습니다. 하늘에서 소낙비가 쏟아져야 합니다. 쏟아지는 소낙비아래 서면 온 몸이 적셔지는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성령의 은혜입니다. 강물같이 흐르는 성령의 은혜, 하늘에서 내리는 단비같은 은혜, 생명 시내 흘러 마른 땅을 적시는 은혜, 그 은혜가 넘치게 하소서. 일생 성령으로 충만하시기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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