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나를 단련하실 때에!
욥기 23장 10 - 17절
10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11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12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구나
13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킬까 그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14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
15 그러므로 내가 그의 앞에서 떨며 이를 생각하고 그를 두려워하는구나
16 하나님이 나로 낙심케 하시며 전능자가 나로 두렵게 하시나니
17 이는 어두움으로 나를 끊지 아니하셨고 흑암으로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셨음이니라
인사(연결)와 서론(벧전2:9)
지난 시간에는 "나는 누구인가" 자기 정체성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당신은 누구십니까?나-는 000입니다 그이름 아름답구나)
오늘은 "하나님이 나를 단련하실 때에"라는 주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겠습니다.
구호;주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우스땅에 살았던 욥은 동방의 의인으로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하루아침에 열 명의 자녀, 양 7000마리, 낙타 3000마리, 소 500마리, 암나귀 500마리를 잃었습니다.
몸에는 병이 들었는데 얼마나 심각한지 친구들이 못 알아볼 정도였습니다.
특히 피부병이 심해서 기와 조각으로 몸을 긁어야 할 정도였습니다.
아내는 욥을 버렸고, 친구들은 욥을 찾아와서 하나님을 잘 믿는 것 같더니 이렇게 된 것을 보니 네 믿음이 가짜였구나,
네가 죄를 범했기 때문에 이렇게 고난을 당하는 것이다라고 정죄했습니다.
의인도 고난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게는 욥이 자랑거리였습니다.
사단은 욥을 참소했지만 하나님은 욥을 믿으셨습니다.
그런 그에게도 극한 고난이 찾아왔습니다.
하나님은 그 고난을 통과한 후에 욥을 다시 축복하셔서 전에 받았던 복의 꼭 두 배를 받게 하셨습니다.
사실 물질적인 복은 욥에게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두 배의 축복을 받기 전에도 가장 부자였고, 물질적으로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영적인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욥의 육체나 재산보다 욥의 영혼이 더 중요했습니다.
하나님은 욥이 고난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욱 알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도대로 욥은 귀로만 보던 하나님을 눈으로 보게 되었고,
자기 의가 충만하던 욥이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게 하셨습니다.
욥 23:10은 고난과 고난 후의 전 과정을 1절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자신은 하나님의 단련을 받아 정금 같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욥 23:10-17을 통해서 하나님의 단련이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의 단련을 받고 있는 분들이 있다면 욥의 고백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도록 하십시오.
1. 단련 중에도 정금이 되는 소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10절).(채석되어 다듬는 돌(고통)은-)
명품은 일반제품보다 장인의 손이 더 가야 만들어집니다.
천지창조기사를 봐도 인간은 하나님의 손길이 더 미쳤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의논하시는 내용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른 것들은 말씀으로 창조하셨지만, 사람은 하나님의 손으로 빚으셨고, 유일하게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셨습니다.
다른 피조물에게는 하지 않으신 다양한 복도 빌어주셨습니다.
이런 과정이 있었기에 인간이 만물을 다스리는 존재, 모든 피조물의 으뜸이 된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복을 누리려면 그만큼 하나님의 다루심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온 후에 바로 가나안으로 직행하지 않게 하시고 광야에서 돌려서 인도하셨던 것도 이런 과정입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 깊이 물들어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거룩한 땅 가나안을 누리기에는 너무나 애굽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광야 생활을 통해서 신앙의 날개를 강하게 만들고 가나안이라는 창공을 날수 있는 준비를 시키신 것입니다.
알프레드 윌리스라는 영국의 과학자가 하루는 나방이 누에고치를 뚫고 나오려고 애쓰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 힘겨워 보여서 윌리스는 고치를 잘 찢어주어 나방이 힘들지 않고 쉽게 나오게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고치에서 나온 나방은 날개만 파닥거릴 뿐 날지를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나방이 좁은 구멍에서 빠져 나오려고 애쓸 때 날개의 어깨부분에 몰려있는 영양분이 날개 전체에 퍼져 힘의 균형을
이루게 되고 그 힘으로 날 수 있는데, 쉽게 누에고치에서 빠져 나온 나방은 날개의 어깨에만 힘이 모여 있기 때문에 날지를 못했다는 것입니다.
윌리스는 나방이 반드시 이 고통스런 과정을 거쳤어야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돌과 섞인 금 덩어리가 정금이 되기 위해서는 불에 녹여 불순물을 없애는 과정을 몇 번이고 겪어야 합니다.
일제시대 때 한국에 금을 만드는 제련소가 충남 서천군 장항읍에 있었습니다.
그곳을 방문하면 금이 산출되는 것에 과정을 보여줍니다.
강원도에서 광석이 기차로 도착하면 기계 속에서 가루로 바뀌고,
용광로에 들어가서 돌을 빼내고,
아연을 빼내고,
은을 빼냅니다.
금을 얻기 위해 일곱 번을 용광로에서 정제되고 금이 나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합니다.
이렇듯 우리의 삶도 하나님의 단련이 없이는 진정한 신앙이나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영적인 인격이 만들어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연단의 과정을 거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욥은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는 극한 고난 중에도 자신이 정금 같이 될 것을 믿었습니다.
욥은 고난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졌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지금 하나님의 단련을 받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까?
환경적으로 가정적으로 육체적으로 캄캄한 터널을 통과하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까?
너무나 소망이 없어서 자신이 점금이 될 것이라고 확신하지 못하는 분들도 욥이 하나님의 단련을 받은 후에 자신이
정금같이 될 것을 믿었던 것처럼 여러분도 자신이 정금 같은 존재로 변화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환란이라는 남루한 의복을 걸치고 우리들에게 오지만 잘만 받아드리면 엄청난 축복을 선물할 것입니다.(이몽룡)
2. 단련 중에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가야 합니다(11절).
욥은 고난 중에도 믿음의 길을 갔습니다.
그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주님이 원하시는 길을 걸었습니다.
그래서 담대하게 말합니다.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내가 그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자신감 있는 고백입니까?
이 말씀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지뢰밭 예화를 사용해보겠습니다.
군인들이 지뢰밭을 통과할 때는 지뢰를 잘 제거할 수 있는 사람이 앞장섭니다.
대검이나 지뢰탐지기로 지뢰를 찾아서 제거하는데 대검을 45도 각도로 찔러서 제거합니다.
그러면 그 뒤를 따르는 사람들은 앞 사람이 간 그길로만 따라갑니다.
가능하면 앞 사람의 발자국을 그대로 밟으면서 좇아갑니다.
다른 곳을 밟았다가 지뢰를 밟으면 큰일 날 수 있기 때문에 앞 사람이 밟은 곳만 밟는 것입니다.
이 때 뒤 따르는 사람이 얼마나 신경을 쓰겠습니까?
대충 밟았다가는 큰일 날 수 있으니까 얼마나 조심하겠습니까?
욥이 그렇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고 그 길을 갔던 것입니다.
욥처럼 우리도 주님이 원하시는 길을 가야 하는데,
문제는 주님이 원하시는 길이 무엇인지 몰라서 그 길을 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알 수 있을까요?
첫째,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기록한 책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설교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설교는 성경을 풀어서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설교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설교를 잘 들으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 보일 것입니다.
둘째, 성령의 감동으로 알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성경을 대필하게 한 기록자들에게 감동을 주셔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신 것처럼
예수를 믿는 사람들 속에서 감동을 주시며 인도하십니다.
다메섹 도상의 바울이 주님의 음성을 들은 것이나
미디안 광야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처럼
귀로 들리는 음성은 아닐지라도 우리의 가슴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세미한 소리가 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양심을 신호등으로 삼아 말씀하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양심에 빨간불이 들어오면 하지 말아야 하고 파란불이 들어오면 해야 합니다.
셋째, 영적지도자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셨고,
한나에게는 엘리제사장을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은 목사나 교역자를 통해서 말씀하시고 심지어 셀리더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넷째, 말씀하시지 않아도 상식으로 아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과 동일하게 순종해야 합니다.
술을 먹어도 되는지 먹으면 안 되는지 물을 필요도 없습니다.
담배를 피워야 하는지 피우는 안 되는지도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건 상식으로 아는 일입니다.
이런 상식적인 것도 욕망이 들어가면 분별이 안 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안 된다고 해도 자신은 해도 되는 것으로 생각되어집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길을 가다가 어려움을 겪었던 두 사람을 소개해봅시다.
아브라함은 어쩔 수 없어서 하나님의 뜻을 불순종하고 자기의 길을 가다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으로 부르심을 받았고 순종해서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를 기다린 것은 가뭄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뭄을 견디지 못하고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애굽으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환경적으로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 결과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를 바로에게 빼앗겼고 부끄러움을 당하고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돌아왔습니다.
요나의 경우는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알았지만 순종하기 싫어서 자기가 원하는 길을 갔다가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앗수르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당시 앗수르는 이스라엘의 원수국가였습니다.
자기 나라를 사랑하는 요나는 원수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요나는 자기가 앗수르에 가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면 그들이 회개할 것이고 회개하게 되면 그들이 멸망 받아야 하는데
멸망 받지 않게 되니까, 앗수르에 가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욥바에서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게 됩니다.
욥바로 가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나게 됩니다.
요나는 자기의 길이 형통한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자기가 형통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요나가 탄 배는 폭풍을 만나게 되고, 요나는 바다에 던져집니다.
그리고 큰 고기 뱃속에 들어가는 어려움도 당하게 됩니다.
형통인지 알았더니 형통이 아니라불통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형통하면 다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형통이라고 다 형통은 아닙니다.
불통이 형통인 경우도 있고 형통이 불통인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않고 그 뜻에 순종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은 아직도 이렇게 어두운 것입니다.
부끄러운 사건을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서울 변두리 어느 복개천 공사장에서 밤이면 이상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소리는 복개천 밑에서 들려왔습니다.
순찰 중이던 순경이 하루는 이상한 소리를 듣고 밑으로 내려가 보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소리는 철근을 뽑기 위하여 콘크리트를 치는 망치소리였습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습니까?
복개천의 철근을 뽑아내면 그 위를 달리는 자동차가 무사할 수 있겠습니까?
순경은 두 사람을 끌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알아보니 한두 달가량 그렇게 철근을 뽑아 팔아먹었다고 합니다.
순경이 매일 밤 그랬느냐고 물었더니 수요일과 일요일 밤에는 안했다고 대답했답니다.
수요일 밤과 주일 밤에는 교회에 가야 하기 때문에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들은 자신들 속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 것일까요?
그들이 걸리지 않고 철근을 뽑아갈 때는 그것이 하나님의 도우심이었다고 생각했을까요?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는 교인들이었습니다.
그들처럼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교인들의 생활 속에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양심의 소리를 거부하고 자기의 욕망을 위하여 움직이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 안에 부담감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그 부담감에 순종할 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주한 미국대사를 역임한 레이니라는 분이 주님이 주시는 성령의 부담감에 순종했던 일화가 있습니다.
그는 에모리대학의 총장이었습니다.
그가 에모리대학교의 교수시절에 그는 30분 거리를 걸어서 출퇴근하였습니다.
그런데 노중에 혼자 햇볕을 쬐고 있는 한 노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무척 쓸쓸해 보였습니다.
레이니의 마음에는 노인을 섬기라는 성령의 감동이 왔습니다.
부담감으로 온 것입니다.
무척 바쁜데 어떻게 저 노인을 섬기라는 것인지 의심도 들었으나 성령의 뜻을 거스를 수 없어서 노인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만날 때마다 따뜻한 대화를 나누고 차도 같이 마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노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죽음 후에 알게 된 사실은 그 노인이 코카콜라 회사의 전 회장이었다는 것입니다.
노인은 세상을 떠나면서 자신의 주식의 3%를 레이니에게 남겨 주었습니다.
그것은 엄청난 금액이었습니다.
그 노인은 고마운 교수에게 은혜를 크게 갚았습니다.
레이니는 그 돈을 학교에 기부하였고 후에 이사회에서는 그를 총장으로 추대했습니다.
힘들어도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따랐던 사람에게 하나님은 귀한 것으로 갚아 주셨습니다.
3. 단련 중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귀히 여겨야 합니다(12절).
욥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다고 고백합니다.
사람은 음식을 먹지 못하면 힘이 빠지고 사는 재미가 없어집니다.
배가 고프면 참지 못하고 반드시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배고픈 것을 잘 참는 사람도 몇 끼를 굶으면 견디지 못합니다. 그
런데 영적인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몇 끼 정도가 아니라 며칠, 몇달을 굶어도 전혀 이상 없이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일정한 음식을 먹듯이 섭취해야 합니다.
단련 중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귀히 여겨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이 곤란 중에 위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단련 중에는 육체적으로 고통스럽습니다.
힘들 때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힘이 됩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기도생활을 하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새 힘이 솟아나는 경우가 많은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위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이 단련 중인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가장 잘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는데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를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때는 환경도 힘들지만 영적인 답답함이 더 힘들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시편 기자의 고백대로 내 길에 빛이요 내 발에 등이 됩니다.
어둠 밤 캄캄한 곳에서 전혀 길이 보이지 않는데 누군가가 등불을 켜준다면 얼마나 감사합니까?
보이지 않던 길이 보이고 어디로 가야할지를 알게 되니 얼마나 좋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그런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이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그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혼의 양식이 됩니다.
우리의 육체가 음식을 먹으면 음식을 통해서 에너지가 공급되고 육체에 새 힘이 솟는 것처럼
영혼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이 영혼에 에너지를 공급하여 영적으로 곤란한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입니다.
지금 어려움 중에 있는 분이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귀히 여기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십시오.
성경을 읽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마시고, 설교를 듣기에 힘을 쓰십시오. 말씀이 단련 중에 위로가 될 것입니다.
말씀이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줄 것입니다.
말씀이 그 상황에서 벗어날 새 힘을 줄 것입니다.
4. 단련 중에도 하나님이 작정하신 일을 이루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13-17절).
13-17절에 보면 욥은 하나님이 뜻하신 일을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을 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13절에서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돌이킬까”라고 하는데 이 말은 하나님의 뜻을 막을 자가 없다는 말입니다.
또 “그 마음에 행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라고 말하는데 이 말은 하나님은 자신의 듯을 반드시 이루신다는
말입니다.
14절에서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작정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신다고 말하고 있으며
15-17절에서는 그런 하나님을 생각할 때 두렵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작정하신 일은 욥을 변화시키는 일이었습니다.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눈으로 보게 하시는 것이며,
자기 의로 가득한 욥을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는 겸손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며,
지난날 누렸던 복보다 더 큰 복을 누리는 사람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단련하시는 것도 비슷한 목적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고 우리가 단련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작정하신
일을 이루실 것을 믿는다면 우리가 당하는 고난에 대한 반응이 달라질 것입니다.
그 반응은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첫째,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지 않을 것입니다.
고집 부려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알면 고집을 꺾을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이 엄마에게 엉뚱한 고집을 부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세히 관찰해 보십시오.
고집으로 엄마를 꺾으려고 하는데 엄마가 물렁하게 나가면 아이가 계속 고집을 부립니다.
반대로 엄마가 강하게 나가면 아이가 처음에는 고집을 부리다가 나중에는 고집 부려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자기 고집을 꺾습니다.
하나님 앞에 단련 받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둘째, 모든 단련을 감사함으로 받을 것입니다.
자신이 받는 단련의 결과가 아름다울 것을 알기 때문에 지금은 힘이 들어도 감사하게 됩니다.
직장생활 하는 사람들은 남이 주인인 회사에 가서 고생하면서 열심히 일합니다.
그 이유는 월급이 있기 때문입니다.
월급이 없다면 노동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갈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향하여 선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는데 그 계획을 알고 있기 때문에 좀 어려워도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셋째, 적극적으로 자신을 변화시키려고 할 것입니다.
조련사가 잘못된 습관을 가진 개를 훈련시키는 것을 보니 별 어려움 없이 고치는 것을 봤습니다.
예를 들어 오른쪽으로 도는 습관이 있는 그 개가 오른쪽으로 돌려고 하면 조련사는 그 개를 따끔하게 혼냅니다.
또 오른쪽으로 돌려고 하면 다시 따끔하게 혼을 냅니다.
이렇게 몇 번을 하게 되면 개는 자기가 오른쪽으로 도는 것을 조련사가 싫어한다는 것과
자기가 오른쪽으로 돌면 혼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조련사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개는 오른쪽으로 도는 습관을 고칩니다.
개에 비유해서 미안한데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미련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지만 자기 고집대로 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단련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단련을 받으면서도 자기 뜻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 따끔하게 혼이 납니다.
계속해서 자기 뜻대로 행동하고 하나님께 혼이 나는 일이 반복되면서 하나님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면 어떤 것이 지혜로운 일이지 알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은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신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적용 호소 결심 - 마치면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연단하시는 분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언제나 어려움 없이 형통하면 좋겠지만 하나님은 결코 그렇게 우리를 인도하시지 않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음식을 만드는데 단 설탕만 넣는다면 그 음식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달콤한 설탕도 필요하지만 잔 소금도 필요하고, 신 식초도 필요합니다.
그래야 제 맛이 나는 것입니다.
고난에도 뜻이 있습니다.
오늘 주시는 메시지를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단련을 통해서 정금이 됩니다.
우리는 단련 중에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가야 합니다.
단련 중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귀히 여겨야 합니다.
단련 중에도 하나님이 작정하신 일을 이루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마치 불로 연단한 금처럼 깨끗해 지고 세련된 상태로 시련의 문을 통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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