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2:14-24, 36 2012.2.5(일)
예수, 우리 주 그리스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은 바람과 같습니다. 요즘 바람이 많이 붑니다. 어느 초등학교에서 선생님이 물었습니다. “여러분, 태국기가 나부낄 때 어떤 생각이 나는지 말해 봐요”. 아이들이 여기 저기서 손을 들었습니다. “예, 선생님. 애국심이 생각나요. 순국선열이요. 국가에 대한 고마움이요“. 그때 맹구가 손을 들었습니다. ”선생님, 국기가 흔들릴 때 생각나요. 아, 바람이 부는구나“. 정답이었습니다. 국기가 괜히 흔들리는 것이 아닙니다. 바람이 부니까 흔들리는 것입니다. 성경은 성령을 ”숨, 호흡, 바람“이라고 말합니다. 바람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붑니다. 인류 역사상 누구도 바람을 본 사람은 없지만 그렇다고 바람이 없다고 말한 사람은 없습니다. 바람은 바람자체를 보고 아는 것이 아니라 바람에 의해 움직이는 물체를 보고 압니다. 성령님도 우리가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면 움직입니다. 성령이 임할 변하는 우리의 생각, 우리의 영혼, 우리의 삶을 보고 성령을 압니다.
아이들이 들판에서 연을 날리고 있었습니다. 바람이 세게 불어 연이 높이 높이 날았습니다. 이때 아빠가 왔습니다. “애들아, 뭐하니?” “연 날리고 있어요”. “연이 안 보이는 데. 너희들 어떻게 연 날리는 것을 아니?” “아빠, 느끼잖아요. 와서 줄을 만져봐요. 팽팽하잖아요?” 아빠가 가서 줄을 만져보았더니 줄이 팽팽합니다. 높이 나는 연과 연결된 줄이 팽팽하게 손에 느껴졌습니다. 연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연과 연결된 줄을 통해 연의 존재를 알았습니다.
성령님은 능력입니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연결하는 능력입니다. 그가 우리에게 임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가 우리에게 임하여 우리가 능력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여러분은 성령님을 믿습니까? 모든 능력이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을 믿습니까? 1968년 웁살라에서 세계교회협의회 총회가 열렸습니다. 이때 모인 분들이 성령에 대한 신앙고백을 이렇게 했습니다. “성령이 없으면 하나님은 멀리 계시고 성령이 없으면 그리스도는 과거에 머물고 성령이 없으면 복음은 죽은 문자이며 성령이 없으면 교회는 조직에 불과하며 성령이 없으면 권위는 군림에 지나지 않고 성령이 없으면 선교는 선전에 지나지 않고 성령이 없으면 예배는 공연에 불과하고 성령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노예적 도덕일 뿐이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동의하십니까?
예수님이 중심입니다
지난 주 우리는 오순절에 성령이 임한 것을 보았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며 기도하는 데 하늘이 열리고 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성령이 임했습니다. 그때 세 가지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바람과 불과 음성입니다. 바람같은 소리가 들리고 불같은 환상이 보이고 자기도 모르는 말이 입에서 튀어나왔습니다. 그것은 분명 초자연적인 역사였습니다. 말로 설명할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초자연적인 역사가 사람들에게 체험되었습니다. 분명히 초자연적인 일인 데 인간의 귀로 들리고 눈으로 보이고 입으로 말하고 있었습니다. 성령이 임하자 기쁨이 충만하고 행복해졌습니다. 그래서 얼굴이 밝아지고 기분이 좋아지고 황홀해졌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말합니다. 13절입니다. 행2:13,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사람들은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마치 술취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제 정신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일어났습니다. 베드로였습니다. 14절-15절입니다. 행2:14-15,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혀 이르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때가 제 삼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성령을 이해하는 데 14절, 15절이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성령받은 사람들이 제 정신이 아닌 줄로 알았지만 베드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 것입니다. “너희는 지금 우리가 술마시고 취한 줄로 생각하지만 지금이 몇 시냐? 3시 아니냐?” 3시면 이스라엘 시간으로 12시, 정오입니다. 술을 마시면 밤에 마시거나 적어도 오후에 마시지 대낮부터 술을 마시겠습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는 지금 술마시고 취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지금 멀쩡하다“. 그러면서 두 개의 성경을 인용합니다. 17절부터 21절, 구약 요엘 선지자의 말씀과 25절부터 28절, 시편에서 다윗이 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두 구절을 중심으로 설교를 시작하는 데 그 주제가 예수님입니다. 22절부터 36절까지 베드로는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을 이야기합니다. 22절, 예수님이 3년간 하신 일입니다. 23절,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24절,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33절, 예수님이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결론입니다. 36절, 행2: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여러분은 이 말씀의 내용을 아시겠습니까? 사람들은 성령체험한 사도행전 사람들에게 그 체험이 어떤 것인지 묻고 싶었습니다. 자기들이 봐도 신기한 체험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느낌을 말하지 않습니다. 기분이 어떠했는가를 말하지 않습니다. 놀랍게도 그는 성경을 말합니다. 요엘서와 시편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그리고 예수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여러분,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분명 초자연적인 체험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그러나 성령은 다만 체험을 위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아십니까? 성령은 체험되지만 체험주의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성령받으면 기쁨이 샘솟고 우리가 행복해지지만 우리를 기분좋게 하려고 성령님이 임한 것은 아닙니다. 술은 기분 좋으라고 마시지만 성령은 기분 좋으라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14절 이하에서 베드로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이번 오순절에 우리에게 일어난 일로 인해 우리를 이상하게 보는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가 술을 먹고 취한 것이 아닌가 하고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이 낮 12시인데 누가 술에 취하겠습니까? 우리가 성령받은 것은 성경이 이미 그렇게 말씀했기 때문입니다. 요엘선지자가 그렇게 말했고 다윗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성령받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약속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약속의 말씀의 중심에는 예수님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고 승천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이 하나님께 받아서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성령받은 우리를 바라보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 보셔야 합니다. 예수님이 주인입니다. 그 분이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성령이 임했습니다. 우리는 다만 이 일에 증인일 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주님이요 그리스도입니다”. 이해가 됩니까?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신앙생활하면서 하나님을 체험하기 원합니까? 체험을 사모하면 체험합니다. 그러나 체험을 위한 체험은 아닙니다. 체험은 좋은 것이지만 체험주의에 빠져서는 위험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베드로가 구약의 두 말씀, 요엘과 다윗의 말씀을 인용했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대단하지 않습니까? 신앙은 “오직 성경으로”입니다. 어느 때나 성경으로 돌아가야 진짜 신앙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예수님이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늘 조심하고 주의할 것은 성경과 예수님을 떠나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되 성경에서 예수님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핵심을 놓치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봉사하되 일보다는 예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래야 시험들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갖되 믿음의 목표를 내 행복에 두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 닮는 거룩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해석를 하되 해석의 중심을 예수님께 두어야 합니다.
이단을 경계해야 합니다
요즘 이단들이 판치고 있습니다. 이단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성경과 예수님을 벗어난 것입니다. 성경의 중심인 예수님을 왜곡하거나 이탈하는 것입니다. 바른 복음을 믿는 것이 아니라 다른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월간 <현대종교>에 의하면 우리 나라에는 약 100개의 이단이 있고 거기에 빠진 사람도 200만이나 됩니다. 돌아가신 고 탁명환 소장에 의하면 우리 나라에는 자칭 메시아, 재림주, 하나님이 37명이있고자신을 “보혜사 성령”, “천부님”, “새 하나님”, “심판주”라고 부르는 사람도 13명이 있다고 합니다. 외국에서 온 이단도 있고 국내에서 생긴 이단도 있습니다. 외국에서 온 이단은 여호와의 증인, 말일성도 예수그리스도의 교회(몰몬교), 안식교등입니다. 국내에서 생긴 이단은 통일교 문선명, JMS 정명석, 평강제일교회 박윤식, 영생교, 승리제단, 조희성, 구원파등이 있습니다. 구원파에는 박옥수의 “기쁜 소식교회”가 가장 대표적입니다. 그 외 한국예루살렘교회, 이초석, 성락교회, 김기동, 만민중앙교회, 이재록도 이단입니다.
그중에서도 요즘 가장 극성을 부리는 집단이 신천지입니다. 신천지는 무료성경신학원이라고도 하며 정식 명칭은 세계 신천지증거장막입니다. 교주는 이만희입니다. 과천에 본부를 두고 있는 신천지는 전국 교회에 소위 “추수꾼”을 파송하여 한국교회 미혹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곳곳에 “무료성경신학원”, “시온기독교신학원”, “평신도 신학원”등 다양한 이름의 학교를 두고 성경에 의문을 품은 자, 교회에 불만을 가진 자들에게 다가가 무료로 성경을 가르쳐주겠다며 학교에 입학하게 해서 교육을 시킨 다음 기성교회로 파송하여 교회의 온갖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고 있습니다.
몇 년전입니다. 한 청년의 어머니에게 급한 전화가 왔습니다. 아들이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아들이 얼마전부터 시간만 나면 다방에 가서 어떤 여학생과 큐티를 하는 데 최근에는 무슨 성경학원에 원서를 내겠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 청년을 잘 알기 때문에 급히 만나자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안 만나주다가 얼마후에 만났습니다. 이 청년은 그때 신천지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었더니 자기가 가정적으로 어려울 때 선배 한 사람이 성경공부 잘 가르치는 사람 하나를 소개해주겠다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신앙도 회복할 겸 만났는 데 여학생이었답니다. 그래서 이 여학생과 매일 다방에서 큐티 형식으로 성경을 배우는 데 처음에는 좋았다는 것입니다. 기존 교회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것을 가르쳐 줘서 좋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이 여학생이 성경학원에 입학하라고 원서를 가져왔답니다. 이 학교는 다른 학교가 아니라 신천지에서 운영하는 무료성경학원이었습니다. 이 학원에서 몇 달 공부하면 이 청년은 지역교회 추수꾼으로 파송될 예정이었습니다. 다행히 제가 만나 그를 설득하고 성경을 가르쳐 그곳에 가지 않게 되었는 데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아찔합니다.
또 하나 사례가 있습니다. 한 집사님이 있는 데 그는 요즘 많은 문제로 심신이 피곤했습니다. 어느날 이웃에 사는 다른 교회 집사님을 만났는 데 그가 말하기를 제가 집사님을 위하여 기도하는 데 요즘 이상한 꿈을 자주 꾼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좋은 꿈인 것 같은 데 자기는 그 꿈을 잘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꿈 잘 해몽 하는 목사님 소개할 줄테니 가보겠느냐 하더랍니다. 그래서 갔더니 그 목사님 말이 “내가 보니 그 꿈은 사명자가 되라는 꿈이다. 그러니 이제 신학원에 들어가라” 하더랍니다. 그래서 무엇도 모르고 들었갔는 데 그것이 신천지 무료신학원이었습니다. 그 집사님도 다행히 그 단계에서 발견되어 신천지를 끊었습니다만 우리 주변에 이런 일이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단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성경을 자의적으로 푼다는 것입니다. 이단 연구가 최삼경목사에 의하면 신천지의 교주 이만희는 자신을 알파와 오메가라 부릅니다. 자신을 인치는 자라고 부릅니다. 또 자신을 보혜사라고 하며 자신을 삼위일체중 하나인 성령이라고 합니다. 그는 자신을 직통계시자라고 하며 더 나아가 자신을 재림주라 합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을 믿어야 구원받으며 자신을 믿지 않으면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이쯤 되면 더 말할 것이 있습니까? 문제는 처음부터 그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천지는 성경이 비유와 상징으로 되어 있다면서 성경을 비유로 풀어야지 문자로 풀어서는 안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어떻게 성경이 비유로만 되어 있습니까? 성경의 나오는 인물들을 실재한 인물들이며 성경은 이스라엘의 지리와 역사와 문화적 상황에서 실제적으로 쓰여진 것입니다. 성경에 비유가 나오지만 그것마저도 이스라엘적 상황에서 해석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성경을 해석했길레 이만희가 성령이 됩니까? 성령님이 사람입니까? 어떻게 성경을 해석했길 레 이만희가 구세주가 됩니까?
여러분, 이단에 빠진 사람들의 80퍼센트가 기존 교회에서 신앙생활하던 사람들입니다. 몰몬교, 여호와의 증인, 구원파, 신천지, 대부분 교회 다니던 신자들입니다. 왜 속고 있습니까? 고후11:14절 아십니까?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이단들은 가장합니다. 벧후3:16절을 아십니까?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이단들은 성경을 억지로 풉니다. 성경의 역사적 배경과 문자적 의미, 신학적 배경을 모르고 억지로 풀면서 그것이 영적 해석이라고 착각합니다. 혹시 교회안밖에서 무료로 성경공부 하자는 사람 있습니까? 어디 성경 잘 가르치는 사람있다고 말하는 사람 있습니까? 무슨 꿈 해몽을 잘 해 주는 사람 만나게 해주겠다는 사람있습니까? 공연히 기존교회를 비난하고 담임목사 설교가 은혜가 있네 없네 교회가 비리가 있네 없네 하면서 불평하는 사람 있습니까? 그런 사람있으면 목자를 통해 바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평생 신앙생활할 때 이단만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초대교회 성자 아가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한번은 아가톤의 명성을 듣고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시험해 보려고 일부러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바로 자주 간음을 일삼는 아가톤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저는 간음자입니다”. 또 물었습니다. “당신이 그 교만하다는 아가톤입니까?” “그렇습니다. 저는 교만한 사람이요”. 마지막으로 물었습니다. ”그러면 당신이 이단자입니까?” 그러자 아가톤은 정색을 하고 말했습니다. “아니요. 나는 이단자는 아니오.” 그들이 물었습니다. “당신은 간음자요 교만자라고 말하면서 왜 이단자라는 아니라고 말합니까?” 그가 말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단자는 하나님과의 분리된 자이기 때문이요. 나는 자주 죄를 짓고 간음도 하고 교만도 하지만 하나님과 분리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절대 이단자가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다가 실수할 수 있습니다. 간음할 수 있고 교만할 수 있습니다. 게으를 수 있고 기도를 안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단자는 되지 말아야 합니다. 이단자는 하나님과 분리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평생 이단과 상관없이 살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믿어야 이단이 아닙니까?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을 잘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 잘 믿는 것이 전도의 시작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베드로는 세 가지로 말합니다. 첫째 우리를 위해 죽으신 분, 둘째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하신 분, 셋째 승천하셔서 지금도 살아 계신 분입니다. 먼저 23절입니다. 행2:23,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우리가 가장 먼저 믿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쩔 수 없이 잡혀 죽은 분이 아니라 스스로 죽으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완전히 구원하신 분입니다. 이단이 나오는 첫 번째가 예수님의 구원의 완전히 믿지 못하거나 자기가 예수님이 다 이루지 못한 구원을 위해 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통일교는 예수님이 완전한 구원을 이루지 못해서 문선명이 왔다고 주장합니다. 말하자면 문선명은 예수님의 구원을 완성하러 왔습니다. 이단입니다. 구원파에서는 한번 회개하면 다 용서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바울도 이미 구원받았지만 지기는 죄인중 괴수라고 말합니다. 예수님도 성전에서 가슴을 치며 회개하는 세리를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루신 구원이 불완전해서 또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남아 있는 죄 때문에 또 회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에 대하여 믿는 또 한 가지는 예수님은 부활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24절입니다. 행2:24,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어 있을 수 없음이라”. 여기에 “고통”이란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의 헬라어 “오딘”은 사냥꾼의 덫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사냥꾼의 덫에 걸린 동물이 살아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누군가가 덫에서 풀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이 그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를 사망의 덫으로부터 우리를 풀어 주신 것입니다. 죽음의 두려움에서부 터, 죽음의 형벌로부터 우리를 풀어 주셨습니다. 부활은 승리입니다. 부활의 승리는 예수님이 신성을 가진 하나님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의 신성을 믿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호아증인입니다. 여호아증인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몰몬교도 예수님의 신성을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인성을 인정하는 데 신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이단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부활했습니다.
또 하나 믿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로 승천하고 지금도 하나님의 보좌에서 세상을 다스립니다. 33절입니다. 행2:33, “하나님이 예수님을 높이시매”.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여러분은 요한계시록을 믿습니까? 핍박의 시대에 사도 요한이 눈을 들어 보니 하늘이 열리고 예수님이 보좌에 앉아 계셨습니다. 계4:2, "그 보좌에 앉아 계신 이가 있는 데“. 계4:3, ”앉으신 이의 모양이". 계5:7,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앉아있다”는 말은 문법적으로 현재형입니다. 헬라어에서 현재형은 “현재진행형”을 의미합니다. 지금 앉아 계신다는 말입니다. 계시록5:6절입니다.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 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보좌는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 분이 어떤 모양을 하고 있습니까? ”일곱 뿔“과 ”일곱 눈“입니다. 일곱은 완전함을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뿔은 힘을 상징하고 눈은 지식을 상징합니다. “일곱 뿔”은 “하나님의 전능”이요 “일곱 눈”은 “하나님의 전지”입니다. 다 하시고 다 아십니다. 보좌에 앉으신 어린양은 with all power, 모든 능력을 가지고, with all knowledge, 모든 지식을 가지신 분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전능하신 분이요 전지하신 분입니다. 우리는 그 분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은 말하자면 십자가에 죽어 우리를 위해 완전한 구원을 이루시고, 하나님의 신성으로 부활하셨으며, 지금도 하늘 우편에 앉아 세상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그 분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것입니다. 행2:36절입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우리의 신앙은 이 예수님께 붙잡혀 있습니다. 모든 것이 예수님으로 부터와서 예수님께로 돌아갑니다. 예수님은 성경과 교회와 우리 삶의 중심입니다. 우리는 기독교를 따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따릅니다. 우리는 자신을 선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선포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대하여 설교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설교합니다. 우리는 사람을 교회로 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 오라고 말합니다.
이 믿음을 굳게 붙잡는 것이 신앙입니다. 예배는 이 신앙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교육은 이 진리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전도는 이 사실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가장 좋은 전도는 내가 무엇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믿느냐입니다. 말 잘 하기 보다 내가 잘 믿는 것이 전도입니다. 내가 잘 믿으면 말하지 않아도 전도가 됩니다. 2천년 교회사는 예수님을 잘 믿었던 사람들의 역사였습니다. 로마에 가면 카타콤이 있습니다. 거기에 주전 1세기부터 4세기 초까지 600만의 기독교인이 죽었습니다. 무려 그 길이가 900킬로가 됩니다. 그들은 말로 전도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믿음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그들을 보고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주후 2세기 서머나의 감독 폴리캅의 순교가 있습니다. 예수믿으면 팝박받던 시절, 어느날 로마군인들이 폴리캅의 집에 들이 닥쳤습니다. 폴리캅은 미리 알았지만 피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붙잡혀 경기장앞으로 끌려 갔습니다. 그가 경기장에 도착했을 때 하늘에서 큰소리가 크게 들렸습니다. “담대하라. 폴리캅, 네가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보여주어라”. 하나님의 소리였습니다. 이때 총독이 다그쳤습니다. “폴리캅, 손을 들어 시저의 이름으로 맹세하라”. 폴리캅이 말했습니다. “나는 누구의 이름으로도 맹서하지 않습니다”. 총독이 소리쳤습니다. ”나에게는 맹수가 있다. 만일 네가 돌이키지 않는다면 맹수의 밥이 되리라“ 폴리캅이 말했습니다. ”나는 맹수를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만 두려워 합니다“. 총독이 다시 말했습니다. ”나는 불이 있다. 내가 너를 불구덩이에 집어 넣겠다“. 폴리캅이 말했습니다. ”불은 잠깐 타다 꺼지지만 지옥불은 영원히 탑니다“. 별 수 없이 총독은 폴리캅을 화형에 처했습니다. 장작더미가 쌓고 폴리캅을 묶은 채 장작위에 올렸습니다. 그리고 불을 붙였습니다. 그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 폴리캅을 아취 모양으로 감쌋습니다. 이번에 칼로 찌르라고 명했습니다. 칼로 찌르자 비둘기가 나왔습니다.
제가 몇 년전 터키 서머나에 있는 폴리캅 기념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폴리캅이 장작더미위에서 순교하는 장면이 그림으로 그려져 있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그림 속에 한 이상한 남자가 폴리캅옆에서 수갑차고 서 있었습니다. 그가 누군가 보았더니 그 그림을 그린 프랑스의 레이몬드 페레입니다. 그는 100년전 이 그림을 그리다가 자기도 오직 예수님만 믿으며 살겠다고 다짐하며 이 그림에 자기 모습을 그려 넣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최고의 전도는 우리가 예수님 잘 믿고 확고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성경적 믿음, 예수님 믿음으로 벗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만 우리의 믿음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감정이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변화됩니다. 체험은 좋은 것이지만 체험주의는 위험한 것입니다. 성령받으면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예수님 믿게 됩니다. 다른 믿음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 잘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이단을 경계합시다. 예수님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만 영원합니다. 죠지 맥도날드가 쓴 책에 나오는 기도문입니다. “나의 생명이신 그리스도여, 나를 온전히 소유하소서. 나를 취하시고 작은 그리스도가 되게 하소서”. 그 축복이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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