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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이윤재목사

행2:37-41 2012.2.12.(일)회개, 그 은혜와 능력

2:37-41 2012.2.12.()

 

회개, 그 은혜와 능력

하나님의 믿는 우리에게 늘 중요한 것은 우리는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다른 교회 집사중 택배하는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이 설날 전후해서 급하게 서현역쪽으로 가게 되었답니다. 물건을 급하게 배송해야 하는 데 문제는 주차할 공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참을 배회하다가 비상등을 켜고 별 수 없이 불법 주차를 했습니다. 양심에 조금 꺼리기도 하고 또 스티커를 발부받을 까 봐 염려도 되고 해서 이렇게 메모를 써 놓았답니다. “10분간 이 근처를 돌다가 어쩔 수 없이 주차합니다. 주차 안 하면 제가 실직할 것 같아 주차 합니다. 내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그런데 웬일입니까? 10분 있다가 돌아와 보니 스티커가 붙어 있는 것입니다. 경찰이었습니다. “그러면 그렇지했는 데 메모도 한 장 붙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씌여 있었습니다. “10년간 이 근처를 돌고 있습니다. 스티커를 발부하지 않으면 제가 실직할 까 봐 어쩔 수 없이 스티커를 발부합니다. 시험들지 마옵시고 악에서 구하옵소서.” 둘 다 다 기독교인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택배하다가 주차할 곳이 없어서 내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하고 주차하고, 다른 하나는 경찰로서 단속하다가 시험에 들게 마옵소서하고 스티카를 끊고,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제가 속으로 웃었습니다. 웃으며 생각했습니다. “, 인간은 누구나 한계속에 사는 존재이구나. 택배하는 사람은 불법인지 알면서도 주차하고 경찰 아저씨는 사정을 알면서도 스티카를 끊고”.

 

그렇습니다. 인간은 한계를 가진 존재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인간의 가진 가장 큰 한계는 인간은 죄인이라는 한계입니다. 이것만큼 본질적인 한계는 없습니다. 다른 것은 노력하면 됩니다. 그러나 죄인이라는 한계는 쉽게 극복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 도와줘야 하고 상당 기간 죄와 싸워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죄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성령이 역사합니다.

37절을 볼까요? 2:37,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떻게 할꼬 하거늘”. 우리는 지난 주 베드로가 설교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오순절에 임한 성령 때문에 사도들이 술에 취한 듯 이상하게 행동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술에 취했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일어나서 말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술취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성령에 취했습니다. 성령은 성경에서 약속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약의 요엘 선지자를 통하여 말세에 내가 성령을 부어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우리는 그 약속하신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령은 예수님이 주신 것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부활하고 승천하면서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 우리에게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중심은 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33년 사시고 마지막에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사흘만에 부활하시고 지금도 살아 하늘나라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십자가에 죽은 예수님을 하나님은 우리의 주님과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 분이 하나님이고 우리는 그의 증인입니다”.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37절 다시 봅니다. 2:37,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왜 사람들은 마음에 찔렸을까? 사람들이 마음에 찔린 이야기를 하려면 상당히 자극적인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다른 이야기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이야기를 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 차분히 설명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마음이 찔렸습니다.

 

여기서 찔렸다는 말은 헬라어 카타뉘소입니다. 이 말은 본래 말발굽에 움푹 패인 상태를 의미합니다. 말이 발을 힘차게 내 딛으면 땅이 움푹 패입니다. 나무를 차면 나무 살점이 뚝 뚝 떨어집니다. 엄청난 힘입니다. 그 발로 사람을 차면 거의 살 수 없습니다. 엄청난 충격을 줍니다. 그것이 카타뉘소”, “찔린다는 말입니다. 베드로가 다른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 이야기를 전했을 뿐입니다. 폭포수같은 웅변을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단순한 설교를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은혜를 받고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변화시키기 위해 가장 많이 사용하시는 방법이 말씀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만 이라는 단어가 3번 나옵니다. 오늘 말씀 37,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40절 볼까요? “여러 말로 확증하여 권하여”, 41절입니다.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하나님은 베드로가 선포한 말을 통해 역사하셨습니다. 베드로가 바울처럼 지식인이 아닌 것 여러분도 아시죠? 베드로가 갈릴리 어부로서 공부 많이 못한 것 여러분도 아시죠? 그런데도 하나님은 베드로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대단한 것이 아니라 베드로가 선포한 말씀이 대단한 것입니다. 왜 말씀은 대단한 것입니까?

 

지금부터 약 150년전, 영국의 어느 시골에 엄청난 눈이 왔습니다. 그날이 마침 주일이었는 데 너무 많이 눈이 오자 목사님을 비롯한 사람들이 거의 교회를 나오지 못했습니다. 모두 13명이 왔는 데 그 중에는 그날 처음 교회 나온 어린이 한 명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집사는 존 에글렌 딱 한 명이었습니다. 그래도 모였으니 예배는 드려야 하는 데 아무도 설교 준비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별 수 없이 집사인 에글렌은 단상에 올라갔습니다. 올라가서 그야말로 10분간 횡설수설,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10분이 지나자 그에게 갑자기 힘이 생겼습니다. 갑자기 이사야 40장을 펴라고 하더니 31절을 크게 읽었습니다. 40:31, “오직 여호아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그러면서 하늘을 가르키며 소리쳤습니다. “여러분,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위를 바라보십시오 오직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것만이 우리의 살 길입니다”. 그리고 예배를 마쳤습니다.

 

그 후 30년 후 한 유명한 목사님이 만명이 이상이 모인 교회에서 간증을 시작했습니다. 자기 나이 13살 때 눈이 많이 오는 어느 주일날, 처음으로 교회를 나갔다는 것입니다. 그때 한 집사님이 설교하고 있었는 데 그가 사40:31을 읽더니 갑자기 하늘을 가르키며 말했습니다. “여러분,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위를 바라보십시오 오직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것만이 우리의 살 길입니다”. 그때 그는 그 소리가 천둥소린인줄 알았답니다. 갑자기 하늘이 열리면서 하나님의 영광이 그에게 임했습니다. 그때 그가 무릎꿇고 하나님께로 돌아왔고 그때부터 하나님이 그는 사용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1850년에 태어나 영국 부흥운동을 이끌었던 위대한 설교자 챨스 스펄젼입니다. 그 눈이 많이 오던 날, 한 집사님의 어눌한 설교가 한 세기, 영국의 위대한 부흥운동을 가져올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것이 말씀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을 말한 사람 때문에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안에서 역사하는 성령의 능력 때문에 능력이 있습니다. 성령님은 말씀이 선포될 때 임하고 말씀은 성령님과 함께 선포됩니다. 성령은 말씀을 통해 역사하고 말씀은 성령이 임하는 통로입니다. 말씀안에 역사하는 성령님, 성령으로 역사하는 하나님의 말씀, 그것이 우리 능력의 비결입니다. 아멘. 말씀을 들을 때 말을 듣지 말고 성령의 음성으로 들으십시오. 지금 우리 앞에서 말하는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임을 믿으십시오. 그때 능력이 나타납니다.

 

성령의 말씀은 우리를 회개하게 합니다.

그러면 성령의 말씀이 선포될 때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38절입니다. 2: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할 때 성령님이 원하신 첫 번째는 회개입니다. “회개란 한자로 뉘우칠 “, 뉘우치고, ”“, 고치는 것입니다. 헬라어로는 메타노이아“. ”길을 바꾸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까? 40절을 보십시오 행2:40,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여기 패역이란 말이 나옵니다. 패역은 헬라어로 스콜리오스“, 이 말은 곧다의 반대 개념으로 비뚤어졌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비틀어진 길을 가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자신이 비틀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비틀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비틀어져 있습니다. 세상이 어둡기 때문에 어두운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둡기 때문이 어두운 것입니다.

 

오래전에 이스라엘에서 사람들을 모시고 성지순례를 하다가 어느 동굴에 들어갔는 데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보통 동굴이도 보일 것은 보이는 데 이상했습니다. ”왜 안 보이지?“ 했더니 사람들이 말합니다. ”목사님, 선글라스 썻잕아요?“ 합니다. 내가 어두운 선글라스 썻으니 어두운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 속에 있는 죄를 그냥 두고는 역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우리는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성령이 임하면 우리는 몇 가지로 회개하게 됩니다.

 

1) 하나님앞에 회개합니다.

우리는 어떤 죄를 짓든지 그 죄가 하나님께 지은 죄임을 알아야 합니다. 가끔 이것은 하나님께 지은 죄가 아니라 사람에게 짓는 죄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죄도 본질적으로 하나님께 지은 죄입니다. 다윗이 그랬습니다. 다윗이 밧세바에게 죄를 지었습니다. 그를 범했을 뿐 아니라 그의 남편을 전쟁터에 내보내 고의적으로 죽게 했습니다. 훗날 다윗이 무엇이라고 회개합니까? 51:4절입니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다같이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사실 다윗은 밧세바와 그 남편에게 죄를 범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가 지은 모든 죄는 하나님께 지은 죄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지은 죄가 아니라 하나님께만 지은 죄입니다”. 모든 죄는 하나님께 짓는 것입니다. 죄는 죄를 지은 당사자에게 용서받아야 용서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죄를 지었으니 하나님께 용서받아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의롭다 말씀하시고 하나님이 순전하다 해야 사죄가 됩니다. 이것이 회개의 기본입니다.

 

2) 사람에게 지은 죄는 사람에게 용서받아야 합니다.

모든 죄가 하나님께 지었지만 사람에게 지은 죄도 있습니다. 그 죄는 반드시 그 사람에게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구약의 제사중 속죄제가 있고 속건죄가 있습니다. 속죄제는 하나님께 지은 죄입니다. 이 죄는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면서 회개하면 됩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지은 죄는 반드시 그에게 가서 용서를 빌고 보상을 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남의 것을 훔쳤습니다. 그러면 그는 물건 주인에게 찾아가 물건을 돌려주며 용서를 빕니다. 그리고 보상합니다. 15장 탕자의 비유를 아십니까? 아들이 아버지를 떠나 밖에 나가 죄를 지었습니다. 그가 돌아오면서 어떻게 고백합니까? 15:21,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다같이 하늘과 아버지”.

 

어떤 죄든 죄는 하늘의 아버지께 지은 것입니다. 그러나 탕자의 경우는 하늘의 아버지뿐 아니라 육신의 아버지에게도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도 회개해야 하지만 아버지에게도 용서를 빌어야 했습니다. 삭개오가 또 하나의 예입니다. 여리고 세무서장 삭개오는 남의 것을 많이 속여 취했습니다. 예수님 만나고 보니 그것이 죄였습니다. 어떻게 고백합니까? 19:8, “만일 뉘것을 토색한 것이 있거든 사 배나 갚겠나이다”. “토색은 속여 뺏은 것입니다. 부정으로 먹은 것입니다. 지위를 남용하여 가로챈 것입니다. 이 경우 레위기는 빼앗은 것에 1/5를 더해서 갚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네 배를 갚겠다고 말합니다. 22:1절에 보면 남의 것을 도둑질한 사람은 4배를 쳐서 갚아야 합니다. 삭개오는 도둑질한 것이 아니라 남의 것을 속여 빼앗았기 때문에 1/5만 더해서 갚아도 되지만 그는 자신의 죄를 도둑질로 보고 네 배나 쳐서 갚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철저한 회개와 보상을 한 것입니다.

 

3) 죄는 계속 회개해야 합니다.

구원파가 신자들을 미혹하는 주장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한번 용서하면 다시는 회개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죄사함을 받은 후 스스로 죄인이라고 말하면 지옥에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럴싸한 주장입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주장은 아닙니다. 성경은 계속적인 회개를 가르칩니다. 요일1:8-9을 봅시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해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여기서 죄의 자백을 한번만 하라고 되어 있지 않습니다. 죄는 계속 자백하는 것입니다. 죄는 지을 때마다 자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이 용서해 줍니다. 하나님이 용서했다는 의미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한 것이지 우리가 하나님처럼 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한번의 용서로 우리가 천사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죄의 능력이 약해서 우리가 다시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사죄의 은총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또 죄를 짓기 때문에 회개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7:3-4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이 말씀은 우리에게 죄를 지은 사람이 우리에게 용서를 구하면 언제라도 용서하라는 말입니다. 사람에게도 계속 회개하고 계속 용서하는 데 하물며 하나님에게는 오죽 하겠느냐가 이 말씀의 초점입니다. 다같이,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한번이 아닙니다.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일흔번을 일곱이라도 용서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숫자는 7번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시는 숫자는 일흔 번을 일곱 번 곧 490번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이 회개해도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시는 것이 적다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을 아십니까?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만일 구원파처럼 한번 용서받았기 때문에 다시 회개할 필요가 없다면 이 주기도문은 평생 한번만 외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기도문은 매일 외웁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라고 가르쳤습니다. 28:13이 중요합니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하나님이 형통한 자라고 말한 사람은 죄를 안 짓는 사람이 아닙니다. 죄를 숨기지 않는 사람입니다. 죄를 아예 짓지 않으면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에 우리가 할 일은 죄를 숨기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은 죄를 고백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일은 죄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 성자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평생 기도만 하고 사는 성자가 하루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답니다. “하나님, 제 평생 소원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평생 죄를 짓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게만 하는 은혜를 주옵소서”. 그때 하나님이 말씀했답니다. “네가 한번도 죄를 짓지 않고 산다면 나는 누구를 용서하고 산단 말이냐?” 그러기 때문에 죄를 지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용서를 빌고 용서해주는 관계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말입니다. 평생 죄를 짓지 않기 위해 삽시다. 그러나 그것이 힘들다면 평생 죄를 숨기지 말고 삽시다. 그것이 오히려 더 계속 은혜를 받는 길입니다.

 

4) 우리의 실수와 잘못을 고백하는 습관을 가져 합니다

회개에 대하여 우리가 실제적으로 적용할 진리는 우리는 늘 생활속에서 자신의 실수와 잘못을 고백하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를 고백하는 생활을 말할 때 카톨릭교회의 고해성사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카톨릭신자들은 죄를 지으면 신부에게 죄를 고해합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이 제도는 죄책감에 눌려 있는 사람들을 잠시 편안하게 하는 것 외에 어떤 성경적 근거나 죄를 용서받는 본질적 방법도 아닙니다. 고해성사가 카톨릭교회에서 법제화된 것은 1215년에 열린 제4차 라테한 공의회였습니다. 이때부터 모든 신자는 적어도 1년에 한 번 이상 신부에게 가서 고해 성사를 해야만 했습니다. 고해성사의 신학적 기초는 이렇습니다. 죄에 대한 심판을 두 가지로 봅니다. 죄에 대한 책임과 죄에 대한 보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한 것은 우리의 죄의 책임을 사해 주신 것입니다. 죄를 사해도 남는 것이 있는 데 그것은 죄의 보상입니다. 죄의 책임을 면제받고 구원도 받지만 연옥에서 고통받지 않고 천국으로 직행하려면 땅에서 죄에 대한 보상을 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그 보상을 위해 고해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부에게 가서 죄를 고백하면 죄의 정도에 따라 보상을 명령받습니다. 금식 열흘, 성경 50장 읽기, 사회봉사 20... 굉장히 책임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질문이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의 구원이 불완전한 구원이란 말입니까? 예수님의 용서가 충분치 않아서 사람의 보상이 또 필요하다는 것입니까? 그래서 악용된 것이 중세시대의 면죄부입니다. 면죄부를 사기만 하면 죄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진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의 구원의 완전성과 용서의 충분성을 말합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우리 죄과를 멀리 옮기셨나니”. 5:24,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예수님 죽음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받았습니다. 더 이상 받아야 할 심판이나 책임이나 보상도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래도 고해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어떤 고해? 하나님께 죄를 용서받았으나 매일 사람들에게 자신의 실수와 잘못을 고백하는 생활속의 고해입니다. 성경적 근거도 있습니다. 5:16,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야고보사도는 두 번이나 서로를 말합니다.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 기도하라”. 다같이 서로”. 우리 삶에 늘 이 말이 필요합니다.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내 탓입니다”. 우리가 서로 죄를 고백하면 우리 죄를 무기로 서로 원수관계를 맺도록 조종하고 유혹하는 마귀의 권세가 무너집니다. 내가 누구에게 죄를 지었습니다. 마귀는 갖은 방법으로 내가 잘못했다고 말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것은 네 실수가 아니라 우연이야. 환경때문이야. 상대방이 원인을 제공했어. 설령 네가 잘못했다고 해도 네가 실수를 인정하는 순간부터 너는 나쁜 놈이 되고 말아. 그래도 잘못했다고? 너는 자존심도 없니? 너는 이 교회 목사가 아니냐? 네 잘못했다고 고백하면 사람들은 너를 목사로 인정 안할 거야. 네가 명색이 장로인데 장로가 잘못했다고 하면 사람들이 너를 존경하겠냐? 가만히 있는 것이 수야. 그러다가 상대방이 잘못했다고 하면 못 이긴 척하면 용서해 줘. 그것이 최고야“. 그런데 어느날 기도하다 , 내가 죄를 지었구나. 내가 고백해야지하고 김집사에 찾아가 집사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내가 실수했습니다하고 고개를 숙이면 어떻게 될까요? 마귀가 떠나갑니다. 죄를 고리로 둘의 관계를 원수관계로 묶어 놓았던 마귀가 묶음을 놓고 도망갑니다. 이것이 회개의 능력입니다. 우리 평생에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실수했습니다를 달고 사시기 바랍니다.

 

회개하면 세례받고 성령이 임합니다.

마지막으로 회개가 주는 축복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매일 회개하는 삶을 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놀라운 축복을 약속합니다. 다시 38절을 보십시오. 2: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회개하면 적어도 두 가지가 축복을 받습니다. 첫째 세례받고 죄사함받습니다. 둘째 성령을 선물로 받습니다. 먼저 세례를 생각해 볼까요? 세레는 무엇입니까? 세례받을 때 우리는 물로 들어갑니다. 물로 들어간다는 것은 우리가 죽었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사고에서 물은 죽음입니다. 바다에는 용이 산다고 믿었습니다. 물속에 들어간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앞에 죽었기 때문에 그것을 고백하기 위해 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물에서 나오는 순간 다시 삽니다. 이것이 6:8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세례는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어 물속에 들어가고 내가 예수님과 함께 살아 물속에서 나옵니다. 물로 들어갈 때 옷을 벗습니다. 자기 죽음을 상징합니다. 물에서 나올 때 새 옷을 갈아 입습니다. 부활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성찬에 참여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살아 생명의 잔치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도 세례받고 물에서 나올 때 비들기같은 성령이 임했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의 공식이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합니다. 그러며 우리가 회개합니다. 회개하면 그 고백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세례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살게 됩니다. 세례를 통해 죄씻음 받을 때 성령이 임합니다. 그러면 그 성령의 은혜로 교회에 들어와 주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성도의 삶을 삽니다. 이것이 반복됩니다.

 

이것을 대표적으로 보여준 사람이 성 어거스틴입니다. 어거스틴은 주후 4세기, 교회사의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이태리 밀란에 가면 어거스틴이 회개한 교회가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오랫동안 방황하며 살았습니다. 그가 밀란으로 올 때도 성공의 기회를 잡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거스틴을 위하여 한 사람을 예비하셨습니다. 그가 암부로우스였습니다. 암부로우스가 설교할 때 하나님은 말씀으로 어거스틴을 감동했습니다. 어느날 어거스틴이 자기 죄를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솟아 올랐습니다. 그는 더무지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밖으로 뛰어 나갔습니다. 거기 무화과 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 데 그 앞에 도착했을 때 눈에서는 홍수 같은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너무 작고 보잘 것 없는 일에 목숨걸고 산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그 눈물은 강물처럼 흘러 내렸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집어서 읽어라. 집어서 읽어라”. 처음에는 아이들의의 음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는 눈물을 그치고 일어나 성경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잡고 펼쳤습니다. 눈에 처음 들어온 말씀을 읽었습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13:13-14절 말씀이었습니다. 회개한 어거스틴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 날 이후 어거스틴은 성령의 능력에 붙잡혀 살았습니다. 위대한 신학자, 목회자, 교부가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최고의 복은 회개의 눈물입니다. 주여, 우리에게 눈물을 주옵소서. 우리가 죄인이라는 깨달음의 눈물을, 눈물이 메마른 이 시대에 회개의 눈물을 어거스틴처럼 홍수같이, 강물같이 부어 주옵소서. 그리하여 정화되고 깨끗한 심령에 성령을 부어 주옵소서. 회개의 은혜와 능력이 평생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