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2:42-47 2012.2.19(일)
목장전도, 이렇게 합시다
여러분은 교회의 가장 큰 사명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영혼구원입니다. 어떤 사람이 삶이 너무나 힘들어 자포 자기한 상태로 길을 걷고 있었답니다. 한참 가다보니까 교회가 나와 자기도 모르게 교회를 들어갔습니다. 마침 주일이었는 데 설교말씀이 꼭 자기에게 하는 것 같았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지는 데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그날 그는 생각지 않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눈물로 예배를 마치고 교회를 나가면서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 나쁜 사람들. 그 좋은 예수를 혼자만 믿고 나한테 말하지 않다니”.
여러분, 교회의 가장 큰 사명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전도입니다. 사도행전 교회는 전도하는 교회였습니다. 성령이 임하자 말씀이 선포되고 말씀이 선포되자 회개가 일어나고 회개한 사람들로 인해 교회가 생겨났니다. 그리고 그 교회가 한 가장 중요한 일이 전도였습니다. 오늘 말씀 47절입니다. 행2: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여기서 중요한 말은 “구원받는 사람”입니다. 문법적 시제로 볼 때 이것은 진행형입니다.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하면 “주께서 구원받고 있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입니다.
교회는 계속 구원받고 있어야 합니다.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 10년이고 20년이고 그 자리에 혼자 앉아 자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끊임없이 들어와 구원받고 있어야 교회입니다. 교회는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모인 곳이 아니라 구원받기 위해 모인 곳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것이 교회 못 오는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교회 오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수가 날마다 더해갔습니다. 47절에서 중요한 단어는 두 가지입니다. ”구원받는 사람이“, ”날마다 더하니라“. 사람들은 계속 교회로 들어와 수가 더해졌고 그들은 교회에 들어와 구원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아주 재미있는 것이 있습니다. 수는 더해졌는 데 전도했다는 말은 없습니다. 다시 47절을 보십시오. 행2: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어떻습니까? 사람들이 전도했다는 기록이 있습니까? 사람들이 밖에 나가 “예수믿으세요”하고 소리쳤습니까?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을 찬미하고 백성의 칭송을 받았을 뿐입니다. 어떻게 된 것입니까? 그들은 전도를 안 한 것이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전도한 것입니다. 먼저는 하나님을 찬미하고 다음은 이웃들에게 칭찬받았습니다. 그랬더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 하게 했습니다. 다같이 “주께서”. 전도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백성의 칭송을 받는 일입니다.
이것을 조금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없을까 생각하고 있는 데 마침 책 한 권을 만났습니다. 부산에 있는 어떤 목사님이 쓴 책입니다. 그 책에서 최진영이라는 집사님의 간증을 읽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는 평범한 직장인입니다. 서울출신인 그는 어느날 부산으로 발령을 받았고 친구의 소개로 부산 어느 교회를 나갔습니다. 교회에 가자 마자 새가족공부를 마치고 또 성경공부에도 참여했습니다. 그동안 대충 교회 다닌 것을 후회하며 이왕 하는 것 열심히 하자 했습니다. 특히 1박 2일 수양회를 통해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때부터 아침 큐티를 시작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성경을 읽고 받은 은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목장에서 추천받아 예비목자로 훈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망설였으나 제대로 해봐겠다고 생각으로 열심히 목자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목자로 임명되었습니다. 목장은 예상보다 재미있고 행복했습니다.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 같았습니다. 목장모임에서 서로 마음을 열고 가까워지고 기타에 맞춰 찬양을 하면서 은혜도 받았습니다. 부부목장이었는 데 무뚝뚝한 남자들이 술 안먹고도 이렇게 이야기를 잘할 수 있나 깜짝 놀랐습니다. 옛날에는 화제가 주로 정치 이야기, 직장 이야기, 사업, 골프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목장은 모이면 은혜받은 이야기, 직장 동료 전도한 이야기, 아침에 읽은 성경 이야기였습니다. 목장이 즐거워 지자 사랑이 깊어 지기 시작했습니다. 매주 금요일 밤, 모인 사람들이 늘어나고 강원도 횡성에서까지 참석하는 교인도 생겼습니다. 목원중 서울에서 내려온 윤집사가 갑자기 비염, 맹장 수술을 받게 되었는 데 최집사가 직장만 끝나면 병원으로 달려가 정성껏 보살폈습니다. 목원중에 서울로 발령나 주말만 내려온 분이 있었는 데 최집사가 서울에 갈 때는 꼭 그를 서울역에서 만나 차를 나눴습니다. 그러다 평소에 전도하기로 마음 먹은 거래처 사장이 안 보였습니다. 알아보니 갑자기 임파선 암이 생겨 서울 삼성 병원에 입원했다는 것입니다. 하루 휴가를 내서 서울 삼성병원에 갔습니다. 사장이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어떻게 오셨어요?” “사장님이 입원하셨는 데 어떻게 제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둘이 손잡고 기도하다가 사장은 퇴원후 교회에 나왔습니다.
목원중 이름만 걸치고 교회에 잘 나오지 않은 집사가 있었는 데 그의 부친이 완도에서 돌아가셨습니다. 또 하루 휴가를 내서 완도까지 갔습니다. 그 분이 감동받고 열심히 교회 나왔습니다. 최집사는 매주 목장소식지를 만들어 예배 참석하지 못한 목원들에게 교회소식을 전하고 중보기도도 계속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최집사가 4년간 전도한 사람이 135명이었습니다. 목장 하나가 12개가 되었습니다. 제가 최집사 이야기를 읽으며 현대판 사도행전을 본 듯 했습니다. 사도행전 성도들도 그렇게 믿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모두 최집사처럼 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도 행복한 만남, 목장교회를 이루며 전도하며 살 수 있을까? 크게 세 가지 과정이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오면 반드시 바라볼 세 방향과 관련됩니다. 첫째는 위를 바라 봅니다. 둘째는 옆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셋째는 안을 바라봅니다.
먼저 교회오면 위를 바라 보아야 합니다.
부산의 최집사는 전도하기 전에 먼저 성경공부를 했습니다. 새가족과정부터 시작하여 1박 2일 수양회, 목자훈련까지 받았습니다. 왜 이것이 중요합니까? 교회에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42절을 보실까요? 행2: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교회에서 우리가 무엇보다 먼저 할 일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42절에 사도의 가르침이 나옵니다. 43절에 기사와 표적이 나옵니다. 44-45절에 이웃과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46절에 교회와 가정에 모여 떡을 떼고 사랑합니다. 그 결과 46절에 구원받는 사람이 날마다 더합니다. 그 중에 가장 먼저가 사도에게 가르침받는 일입니다. 만일 사도의 가르침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43절, 기사와 표적, 잘못될 수 있습니다. 말씀없이 기적만 강조하면 어떻게 됩니까? 체험주의, 미신주의, 신비주의로 갑니다. 타종교라고 기적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말씀이 없으면 그 체험이 신비가 되고 사람을 살리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이단이 되고 사이비가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42절, 사도의 가르침이 없기 때문입니다.
44-45절에 가난한 이웃에게 물건도 나눠주고 필요한 것을 공급했습니다. 그러나 만일 42절, 사도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까요? 교회는 다만 빈민구제소로 전락되었을 것입니다. 교회는 두말할 것없이 세상을 섬기는 곳입니다. 그러나 빈민구제업소는 아닙니다. NGO 단체도 아닙니다. 빈민구호단체는 쌀만 주지만 교회는 복음을 줍니다. NGO 단체는 양식도 주고 약도 주고 집도 지어주지만 교회는 진리의 말씀과 함께 그것을 줍니다. 오래전에 제가 지방에서 목회할 때 “사랑의 식구”라고 배고픈 사람들에게 매주 두 번씩 밥을 먹였습니다. 그 수가 점점 불어나 500명까지 되었습니다. 가난하고 배고픈 사람들에게 밥을 준 일로 지역에서는 교회에 대한 평판이 높아졌고 저도 뿌듯했습니다. 얼마후에는 교통비까지 주었습니다. 어느날 제가 시내에 나갔는 데 고속버스 터미널 근처에서 사람들이 웅서 웅성합니다. 그래서 무슨 일인가 보았더니 사람들이 두 패로 나뉘어 싸움을 합니다. 그때 제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 사람들은 다름아니라 몇 시간전에 우리 교회에서 밥먹고 돈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교회에서 준 돈으로 술먹고 취하여 싸움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마4:4,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그때부터 밥만 주지 않고 예배도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날짜도 평일에서 주일로 옮겼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변했습니다. 제가 교통사고로 병원에 있을 때, 제가 목회를 위해 서울로 올 때 가장 많이 운 사람들이 그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밥을 주면 배고픔은 면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는 영혼의 허기를 면하지 못합니다. 사도의 가르침이 먼저입니다.
그러면 “사도”는 누구입니까? 사도는 본래 예수님의 삶과 죽음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지금 문자적인 의미에서 “사도”는 없습니다. 아마 카톨릭같으면 사도직을 계승한 교황이나 추기경, 주교같은 사람들을 생각할 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성경적 입장에서 보통 사도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도의 가르침을 받았다”는 말은 곧 “교회의 가르침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교회로부터 배우고 가르침 받습니까? 혹시 오늘날 교회가 좀 문제가 있어서 믿을만하거나 배울만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분도 있습니까? 제가 그랬습니다. 저는 3-4대가 믿는 모태신앙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자라면서 점점 교회에 대하여 비판적인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교회 지도자들이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제 눈에 그들은 거의 위선자였습니다. 세상은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 데 교회는 늘 제자리 걸음이었습니다. 제 안에 있는 젊음의 유혹도 한 몫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대하여 비판적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때마침 죽이 맞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이 친구하고 이야기하면 몇 시간동안 이야기해도 끝이 나지 않습니다. 오랜 세월을 영적 순례 끝에 저는 하나님께 돌아왔고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그 긴 순례를 통해 교회에 대하여 네 가지를 발견했습니다.
먼저 교회는 우리에게 어머니와 같다는 것입니다. 어릴 때 어머니는 천사같고 하나님같습니다. 그러나 자라면서 보면 어머니도 단점 투성이입니다. 그렇다고 어머니를 비난할 수 없는 것이 어머니는 나를 낳았고 또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인간 어머니는 단점이 많지만 그래도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모든 사람이 어머니 품에서 자란 것처럼 모든 신자는 어머니인 교회 품에서 자라납니다. 어거스틴도 칼빈도 교회를 어머니라고 불렀습니다. 교회는 우리 어머니입니다. 그 어머니가 없었으면 지금의 우리도 없습니다. 교회를 어머니로 보기 시작하자 교회가 사랑스러워집니다.
두 번째는 교회는 예수님 몸이라는 것입니다. 몸은 여러 지체가 있습니다. 손과 발, 오장육부, 여러 장기가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가 예수님의 몸이라는 것은 거기 속한 우리 자신이 곧 교회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판하는 객관적인 교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몸이기 때문에 나를 제외한 다른 교회가 있지 않습니다. 교회가 잘못되었다면 바로 내가 잘못된 것입니다. 교회는 문제가 많은 데 나는 괜찮은 것이 아닙니다. 내가 교회입니다. 교회가 문제가 있다면 내 가슴을 쳐야 합니다.
세 번째는 교회는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면서 동시에 예수님 자신입니다.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데 예수님이 불렀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 그런데 사울은 예수님을 핍박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교회를 핍박했을 뿐입니다. 갈1:13절입니다.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왜 나를 핍박하느냐?”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 자신이 교회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비판할 때 예수님 자신을 비판할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합니다. 신문에 나온 교회가 있고 성경에 나오는 교회가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교회가 진짜 교회입니다.
하나 더 있습니다. 이것은 제가 오랜 경험을 통해 깨달은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나 목회자를 비판하면 반드시 신앙의 병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의 영적 생명과 교회의 생명이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마음에 안들고 목회자가 마음에 안들면 우선 교회 잘 나오지 않습니다. 잘 나오지 않으면 예배와 기도생활이 약해지고 약해질 뿐 아니라 그 속에 다른 무엇이 끼어듭니다. 마귀가 그 기회를 가만히 놓아둘 리 없습니다. 목회자가 마음 안들면 설교가 들려오지 않습니다. 그러면 영이 죽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래서 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영혼을 위하여 경험적으로 말합니다. 생명의 문을 막지 마십시오. 교회는 생명의 문이요 생수의 통로입니다. 아무리 좋은 동기로 교회를 비판해도 나에게 영적으로 손해입니다. 교회가 부족하다고 느낀다면 더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인 나를 바로 세워야 합니다. 어머니가 늙고 병들었다고 버릴 수 없지 않습니까? 더 다가가 안아줘야 효자입니다. 42절, 행2: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우리의 모든 삶이 교회를 통해 공급됩니다. 교제도 기도도 봉사도 세례도 좋은 인간관계도, 교육도, 지성도 꿈도 비전도, 교회로부터 옵니다. 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위를 보았으면 이제 옆을 보아야 합니다.
옆이 무엇입니까? 44, 45절입니다. 행2:44-45,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며”. 교회에 와서 위를 보았으면 이제 옆을 보아야 합니다. 옆을 보면 함께 예배하는 형제, 자매가 보입니다. 눈을 더 크게 뜨고 보면 교회 밖에 있는 이웃들, 불신자들도 보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가가야 합니다. 앞에서 말한 부산의 최집사가 그랬습니다. 교회에서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말씀으로 훈련됨과 동시에 눈이 열려 다른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보니까 어느날 전도하려고 마음 먹은 사장이 안 보입니다. 알고보니 암 수술차 서울로 간 것입니다. 이틀 휴가내고 서울로 왔습니다. 이름만 신자인 사람의 부친이 돌아가시자 전남 완도까지 또 휴가를 내서 갑니다.
사도행전 성도들이 그랬습니다. 그 시대는 참 가난했습니다. 로마의 세금과 헤롯의 착취 때문에 가난했고 잦은 기근, 흉년때문에 가난했습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안 보였습니다. 그러다가 사도의 가르침받고 은혜를 받다 보니 사람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처음에는 자기 것을 단순히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아예 자기 것을 팔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만큼 주기 시작했습니다. 구약에도 가난한 자, 고아, 나그네를 대접하라는 율법이 있습니다. 율법은 해도 좋고 안해도 좋은 것이 아니라 안하면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초대교회 보다 약 100년 전부터 유대 광야 쿰란에도 그렇게 살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법으로 일체의 사유재산을 금하고 물건을 함께 쓰도록 규정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사람들은 율법 때문에 자기 것을 나누지 않았습니다. 규정 때문에 자기 것을 팔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했습니다. 그 스스한 능력이 성령님에게서 온 것이었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욕심이 사라집니다. 다 내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하나님이신 성령님이 내 속에 들어오자 내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다 주인이신 하나님의 것입니다. 속에서 주인이 “내 것을 주라, 거저 주라” 말씀합니다. 그래서 주었습니다. 이것이 섬김이요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전도에 대해 가진 오해를 버려야 합니다. 이런 오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전도는 혼자 하는 것이다. 둘째 전도는 한번에 된다. 셋째 전도는 나와 관계없는 사람에게 하는 것이다. 넷째 전도는 내가 말로 설득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전도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하는 것입니다. 전도는 한번에 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농사와 같습니다. 봄에 심으면 여름을 거쳐 가을에 거두는 것입니다. 전도는 나와 관계없는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오랫동안 관계를 맺는 사람에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도는 말로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섬김과 사랑으로 삶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전도가 나와 관계를 맺는 사람에게 오랜 시간 나누는 섬김과 사랑의 관계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주 많습니다. 여수경찰서의 민 집사가 그 사람입니다. 그가 어느 무기수와 인연 맺어 13년간 편지를 주고 받은 끝에 그 무기수가 작년 말에 세례를 받았다는 신문기사를 읽었습니다. 민 집사가 무기수를 안 것은 1992년, 경찰서 수사계장시 유치장을 관리하면서 강도, 살인 혐의로 구금된 그를 만날 때라고 합니다. 당시 여수경찰서 기독신우회 회장이었던 그는 살인죄를 저지르고 들어온 그에게 그성경을 주며 전도했지만 그는 버럭 화를 내며 의자를 발로 찼습니다. 그 후 그가 무기징역을 받고 대구교도소로 이감되면서 두 사람의 관계도 끊어진 듯 했습니다. 그러나 민집사의 마음에 무기수의 얼굴이 지어지지 않았습니다. 기도할 때마다 떠오릅니다. 그래서 편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무려 13년을 편지를 썻습니다. 또 시간만 나면 면회를 갔습니다. 수없이 편지하고 찾아가고 드디어 그가 예수님 영접하고 세례받았습니다. 여러분, 13년을 변함없이 기도하고 편지를 보냈다면 변화되지 않겠습니까? 전도는 오랜 사랑의 아름다운 열매입니다. 한꺼번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설득력이나 말보다 중요한 것이 사랑입니다.
실제로 1,400교회 새신자를 대상으로 조사했습니다. “어떻게 교회를 오게 되었습니까?” 통계가 이렇습니다. 자발적으로 왔다 2-3%, 전도지 보고 1-2%, 교회학교 프로그램 때문에 2-3%, 목사님 명성, T.V보고, 3-4%, 나머지 약 90%가 누군가에 이끌리어 왔다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누구겠습니까? 친구나 친척, 교인, 옆집, 앞집, 뒷집사는 사람, 전도자, 그들이 나를 위해 사랑으로 섬겨주고 오랫동안 기다려줘서 왔다는 것입니다. 물론 지나가다 전도해도 교회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많은 것은 어느 분이 나에게 오랫동안 친절하게 대해주고 사랑해줘서 나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전도 못할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직장에 직원이 수십명이 되지 않습니까? 그 중에 적어도 몇 명에게도 사랑을 줄 수 있지 않습니까? 학교에 학생, 교사가 수 백명 있지 않습니까? 그 중에 몇 명은 정말 사랑해 줄 수 있지 않습니까? 사장 여러분, 직원들에게 조금만 잘해도 전도가 되지 않겠습니까? 아파트 주민 여러분, 매일 만나는 옆집, 아랫집, 윗집 사람에게 인사만 잘 해도, 우리 애와 같은 반 엄마에김치만 갖다 줘도, 우리 미용실에 온 사람, 친절하게만 대해줘도, 우리 가게에 오는 분에게 물건값만 조금 깍아줘도, 우리 아파트 통장에게 문화센터 자료주고, 병원에 입원중인 친구, 목사님 책 한 권만 선물해도 좋은 친구 되지 않겠습니까? 다시 47절 보십시오. 행2: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다같이 “주께서” 영혼을 구원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내가 할 일은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바로 나의 VIP입니다. 누구나 사랑하면 전도합니다. 그래서 전도는 쉽습니다.
위를 보고 옆을 보았으면 안을 보아야 합니다.
부산의 최집사가 전도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만의 힘이 아니었습니다. 그와 함께 친구가 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목장식구들이었습니다. 46절입니다. 행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결혼생활과 교회 생활은 혼자 할 수 없다는 것을 아십니까? 함께 할 때 즐겁고 함께 할 때 잘 됩니다. 모든 교인과 다 함께 할 수 없어서 목장이 있습니다. 목장은 가까운 사람들끼리 삶을 나누는 작은 교회입니다.
목장에서 전도하는 일은 네 가지로 합니다. 먼저 기도합니다. 서로 서로 전도하려는대상을 목장모임때마다 내 놓고 기도합니다. 여러분, 반드시 기도가 필요하고 기도하면 영원구원됩니다. 두 번째는 관계입니다. 목장은 전도하려는 대상을 위해 가장 효과적으로 관계를 맺는 곳입니다. 한 사람이 친절하게 대해주는 것보다 두 사람, 네 사람이 함께 섬겨주면 더 좋습니다. 어려운 일도 도와주고 음식도 함께 나누고 아플 때 심방도 가 줍니다. 관계맺기입니다. 세 번째가 초청입니다. 불신자는 처음에 교회 오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먼저 목장에 초청합니다. 이때 제일 좋은 것이 간증입니다. 누구나 처음부터 예수 잘 믿은 사람은 없습니다. 믿다가 낙심한 후 다시 돌아온 사람도 있습니다. 간증은 남의 입을 통해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따뜻한 사랑을 베풉니다. 때로 필요하면 같이 소풍도 가고 등산, 여행도 함께 갑니다. 같이 쇼핑도 하고 아이도 봐줍니다. 그래서 그들이 교회 오기전에 교회를 경험하게 해줍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교회 나오게 합니다. 등록하게 하고 새가족과정부터 양육받게 합니다. 교회 각종 훈련에 참여하여 믿음이 성장하도록 도와줍니다. 부산의 최집사도 그렇게 해서 4년만에 135명 전도했습니다. 사도행전 교인들도 그렇게 해서 그들이 섬긴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다만 진심으로 이웃을 사랑했을 뿐인데 하나님은 그들에게 날마다 사람을 더하게 했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도행전적 방법을 따릅시다.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쉽습니다. 오직 사랑 하나면 됩니다. 위를 바라보고 주님을 사랑하고 옆을 바라보고 이웃을 사랑하고 안을 바라보고 목장을 사랑하면 모든 일은 가능합니다. 이 놀라운 비전, “우리가 백성을 사랑함으로 칭송을 받아 주께서 구원받은 사람을 날마다 더하시는 비전”, “사도행전의 목장교회 비전”, 그 비전으로 우리 삶에 놀라운 은혜와 기적이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추천 설교 > 이윤재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행3:11-20 2012.3.4(일)믿음의 치유 (0) | 2016.06.28 |
---|---|
행3:1-10 2012.2.26(일)일어나 걸으라 (0) | 2016.06.28 |
행2:37-41 2012.2.12.(일)회개, 그 은혜와 능력 (0) | 2016.06.28 |
행2:14-24, 36 2012.2.5(일)예수, 우리 주 그리스도 (0) | 2016.06.28 |
행2:1-13 2012.1.29(일)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0) | 2016.06.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