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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3:1-10 2012.2.26(일)일어나 걸으라

3:1-10 2012.2.26()

 

일어나 걸으라

3월을 앞둔 2월 마지막 주일에 이런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만일 여러분의 삶이 몇 달 밖에 남지 않았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누구나 이런 질문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누구도 이 질문에 대해 해답을 갖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질문을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누구도 이 질문앞에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이 질문에 대하여 생각해 보셨습니까? 이 질문을 실제 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중국인 이지안입니다. 그는 30의 젊은 나이에 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세계 100위안에 든 중국 대학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는 같은 대학교수인 잘 생긴 남편과 한참 재롱을 피우는 어린 아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몸이 안 좋아 병원에 갔다가 청천의 벽력같은 선고를 듣습니다. “말기암입니다”. 각고의 노력 끝에 이제 막 인생의 절정으로 올라간 젊은 여자 교수에게 말기암이라니 믿을 수 없었습니다. 이지안은 그날부터 칠흙같은 어둠과 싸워야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후, 폭풍이 할퀴고 산 폐허에서 일어나면서 이렇게 마음을 잡습니다. “그래. 내가 어차피 가야 한다면 내가 살아야 할 이유를 남기고 싶다”. 그래서 쓴 책이 오늘 내가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이 책에서 이지안은 짧은 자신의 생을 돌아보면서 이렇게 후회합니다. “뭔가를 이루기 위해 전속력으로 달리는 것보다, 곁에 있는 이의 손을 한 번 더 잡아보는 것이 훨씬 값진 일이 아닌가?” 그리고 바빠서 평소에는 안아주지 못했던 아들을 꼭 안으면서 이렇게 속으로 탄식합니다. “, 사랑은 나중에 하는 게 아니라 지금 하는 것, 지금 바로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에 하는 것인데.”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가끔 후회하며 사십니까? 이지안처럼 극적이지는 않지만 우리는 우리 삶의 여러 상황에서 후회하고 절망하고 그러다가 또 일어서고 그러다가 또 넘어지는 삶을 반복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과연 우리가 다시 후회하지 않을 삶을 살 수는 없을까? 100%는 아니지만 그래도 후회를 줄이며 만족한 웃음으로 하나님께 갈 수는 없을까?

저는 오늘의 말씀을 여러번 읽으면서 갑자기 그런 생각을 떠올랐습니다. “2천년전에 살았던 이 사람은 어쩌면 후회와 실패와 절망을 안고 사는 우리 자신과 다르지 않다. 오늘의 주인공은 옛날 사람이 아니라 우리와 동시대의 사람이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이 사람을 통해 우리가 배우는 교훈은 무엇일까?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이 사람처럼 안되고 어떻게 해야 이 사람이 받은 축복처럼 축복을 받을까?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먼저 내가 누군가 알아야 합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날 때부터 앉은뱅이며 거지였습니다. 그날도 그는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예루살렘 성전까지 왔습니다. 1-2절입니다. 3:1-2, “9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동쪽을 바라보고 세워져 있었습니다. 성전은 온통 황금으로 도금되어 있었는 데 아침에 해가 뜨면 성전은 눈부시게 빛났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에루샬라임 쉘 쟈하브라 불렀습니다. “황금의 예루살렘이란 뜻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비친 찬란한 황금빛 때문입니다. 이 성전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었습니다. 그 문을 사람들은 니키노르의 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이유는 주전 1세기에 알렉산더에 살던 유대인 니카노르가 성전을 위해 이 문을 봉헌했기 때문입니다. 성전은 온통 황금색입니다. 성전으로 들어가는 문은 강한 구리빛 청동입니다. 거기에 동쪽에서 태양이 비췄을 때 얼마나 눈부시게 아름다웠겠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이 문을 미문”, “beautiful gate” 라 불렀습니다. 정말 누가 봐도 아름다운 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문앞에 참으로 볼 품없는 사람 하나가 앉아 있었습니다. 오늘의 주인공 거지였습니다. 어쩌면 그는 앉아 있다기 보다 거의 엎어져 있었습니다. 오늘날 지하철앞에 엎드린 사람을 연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황금빛 성전앞에 엎드려 있는 앉은뱅이, 하늘높히 치솟은 구리빛 대문앞에 파리한 손을 벌여 구걸하는 거지, 이 둘은 얼마나 강력한 대조를 이루는 것입니까? 차라리 성전이 초라했다면 이 사람의 모습도 조금 덜 초라했는지 모릅니다. 이 사람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앞에 선 우리의 모습입니다. 다시 보십시오 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 어쩌다 사고로 못 걸은 것이 아닙니다. 나면서부터 못 걸었습니다. 얼마나 안됐습니까? 그나마 거지입니다. 아무 대책이 없는 사람입니다. 하루 하루 살아애 합니다.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무슨 꿈이 있겠습니까? 저는 이 사람을 보면서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우리도 날 때부터 죄인이었습니다. 여기 있는 우리 중 누구도 대단한 존재로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앞에서 죄인으로, 그리고 거지로 태어났습니다. 다윗의 말과 같습니다. 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며,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여러분, 이해가 됩니까?

 

제가 작년에 독일 비텐베르크를 갔습니다. 비텐베르그는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봉화를 높이 들며 카톨릭에 대항하여 95개조항을 써붙인 곳입니다. 지금도 교회 정문앞에는 루터가 써 붙였던 95개조 항이 동판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비텐베르그에는 또 루터 박물관이 있습니다. 루터가 죽을 때까지 35년이상을 실제 살면서 활동했던 곳입니다. 거기에 루터와 그 시대의 물품들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면죄부를 사고 돈을 넣었던 면죄금고통, 루터가 직접 설교했던 설교대, 루터가 입었던 수도복, 그가 처음 번역했던 성경, “내 주는 강한 성이요찬송가, 그의 부인 카타리나와 네 자녀들,

 

그러나 가장 감동적인 것은 루터가 죽으면서 했던 말입니다. 루터는 이렇게 마지막으로 말했습니다. “우리는 거지다. 그것은 사실이다”We are beggar, it is true“. 이 말속에 루터가 평생에 걸쳐 외치고 고백했던 모든 신학, 모든 신앙고백이 담겨있습니다. ”우리는 거지입니다“. 누구앞에? 하나님앞에. 거지가 무엇입니까? 아무 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하루 하루 사는 사람입니다. 남의 도움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날도 그 거지는 사람들에 의해 메워져 성전까지 나왔습니다. 사람들이 돕지 않으면 그는 한 발자국도 걸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의 생이 다하는 날까지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거지입니다. 하나님앞에 우리는 날 때부터 죄인이요 날 때부터 거지입니다. 우리는 그저 하루 하루 은혜로 삽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살고 하나님 떠나시면 우리는 죽습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이것이 남은 생을 사는 삶의 기본적 자세입니다.

 

가치있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앞에 거지임을 알았다면 우리의 삶은 당연히 거지처럼 제한되어 있습니다. 거지가 돈이 있습니까? 건강합니까? 문제는 그 제한된 삶속에서 어떻게 최선을 다하며 사느냐 그것이 문제입니다. 오늘의 거지를 보십시오. 이 거지는 사람들에게 떠밀려 성전까지 왔습니다. 성전까지 온 것까지는 좋았는 데 왜 왔느냐가 중요합니다. 왜 왔습니까? 3절을 보십시오. 3: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구걸하기 위해 왔습니다. 누구에게? 기도하러 온 베드로와 요한에게 구걸하기 위해 왔습니다. 거지가 구걸하기 위해 베드로와 요한을 바라보았습니다.

 

우리말로 보았다라는 말은 하나입니다. 그런데 헬라어에서는 여러 가지 단어가 있습니다. 여기서 보았다는 말은 에이도인 데 이 말은 집중해서 본다는 뜻이 아니라 습관적으로 본다는 뜻입니다. 늘 보던 대로 본다는 것입니다. 거지로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동냥을 구하기 위해 누구에게나 똑같이 바라 본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기 때문에 본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아니었어도 보았습니다. 특별한 목적없이 기계적으로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습니다. 돈때문입니다.

 

문제는 거지가 구한 것과 장소가 맞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거지가 성전에 와서 돈을 구했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만일 기도할 목적이었다면 성전에 온 것이 맞습니다.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돈을 구할 목적이었다면 다른 데로 갔어야 합니다. 그런데 거지는 돈을 구하기 위해 성전에 왔습니다. 돈을 구하기 위해 성전에 온 거지, 그 거지처럼 우리도 자주 이것을 실수합니다. 교회에서 너무 본질이 아닌 것을 구합니다. 한때 교회가 독립운동의 온상이었던 적이 있습니다. 일제시대입니다. 3.1운동, 신사참배 반대에 교회가 큰 공헌을 했습니다. 민중운동의 요람인 적도 있습니다. 70년대, 80년대 까지도 그랬습니다. 한때 지식인들이 찾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신문화의 요람인 적도 있습니다. 배고픈 시절, 교회가 밥을 퍼줘 배고픈 백성들을 먹이기도 했습니다. 유럽에서 보니까 평소에는 사람들이 안 모이다가 유명한 오키스트라, 음악회만 있으면 사람들이 교회로 모입니다. 다 필요합니다. 모두 교회가 해야 할 일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본질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필요하니까 합니다. 하다보면 필요를 뛰어넘어 의무가 됩니다. 무엇이 필요고 무엇인지 본질인지 모르게 됩니다. 6절을 보실까요? 3:6,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무슨 이야기입니까? 교회에서 은과 금을 찾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 중세시대가 그랬을 것입니다. 그래서 12세기에 그런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유명한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교황과 함께 성 베드로 성당을 둘러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교황이 금과 은으로 장식된 웅장한 베드로 성당을 가리키면서 말했습니다. “토마스, 교회는 더 이상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라고 말할 필요가 없어졌네. , 보게나. 교회가 은과 금을 가지고 있지 않나?” 이때 토마스가 대답했습니다. “교황님, 그런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은과 금 때문이 있기 때문에 교회는 더 이상 일어나 걸으라고도 말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가난한 자를 섬겨야 합니다. 그러나 더 좋은 것은 교회는 가난해 져야 합니다. 헌금이 줄고 교인이 없어서 가난해지란 말이 아닙니다. 은과 금을 쌓아 놓지 말고 계속 밖으로 내 보내라는 점에서 가난해지라는 말입니다. 교회는 재정이 남아 있을 틈이 없어야 합니다. 교회는 그날 수입된 것은 그날 지출해야 합니다. 은행 이자 좋아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는 돈놀이라는 데가 아닙니다. 교회는 선교하는 곳입니다. 마치 거름과 같습니다. 거름은 모아 놓으면 썩습니다. 그러나 사방에 뿌리면 삽니다. 목회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고 가난해져야 합니다. 부해지면 안됩니다.

 

교회와의 관계에서 거지를 볼 때 이런 은혜를 받지만 개인적으로 보면 더 큰 교훈이 있습니다. , 이 거지를 보십시오. 이 사람이 매일 하는 것은 성전에 와서 구걸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해는 됩니다. 몸이 약하니까 다른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구걸한다고 본인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몸이 아프다고 다 거지로 삽니까? 날때부터 거지였으니 평생 거지로 살아야 합니까? 그렇다면 날 때부터 못 듣고 말 못하고 못 보았던 헬렌 켈러는 태어나자 마자 인생을 포기했어야 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뇌성마비로 태어난 송명희는 아예 자살했어야 합니다. 불행한 인생을 타고 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불행하게 살아야 했다면 중학교 2학년때 축구하다 실명한 강영우 박사는 평생 맹아원에서 불행하게 살았어야 합니다. 아무 죄도 없이 12년이나 감옥에서 살아야 했던 영국의 존 번연은 감옥에서 인생을 한탄하며 살았어야 합니다. 본래 머리가 안 좋기 때문에 공부를 포기해야 한다면 초등학교 내내 지진아였던 아인쉬타인은 평생 실패한 인생으로 살았어야 합니다. 가난하게 태어났기 때문에 희망이 없다면 통나무집에서 태어난 아브라함 링컨은 평생 절망 가운데 살았어야 합니다. 오늘의 주인공 거지에게 없었던 것은 물질이 아니었습니다. 믿음이었습니다. 우리는 자주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다고 한탄하지만 우리에게 정말 없는 것은 믿음입니다. 열정입니다. 꿈입니다. 가난이 문제가 아닙니다. 병이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불행한 환경에서 태어났으면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노력하고 열심히 살았어야 합니다. 태어난 환경을 우리가 선택할 수는 없지만 행복과 불행은 우리가 선택하기 때문입니다. 거지의 문제는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태도의 문제였습니다.

 

환경을 따라 살지 말고 열망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얼마전 죽은 애플사의 스티브 잡스가 말했습니다. “돈을 위해 열정적으로 일한 것이 아니라, 일을 열정적으로 했더니 돈이 생겼다”. 그렇습니다. 이 순서가 바뀌어야 합니다. 로버트 슐러가 말한 대로 우리에게 안되는 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안된다는 생각만 있을 뿐입니다”. 안되는 과거를 바라보지 말고 되는 미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환경이 안 좋아서 안된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못한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핑계입니다. 성공한 사람의 하루는 25시간, 실패한 사람의 하루는 23시간이란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시간과의 싸움입니다. 시간관리란 곧 우선순위의 문제이며 우선순위의문제는 무엇인가를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포기해야 합니다. 이것 저것 다 하며 성공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좋아하는 말이 있습니다.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을 위하여 지킬 수 없는 것을 내어주는 사람은 바보가 아니다

 

인생은 시간과의 싸움입니다. 다 똑같이 24시간씩 주어졌는 데 문제는 어떻게 그것을 잘 사용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제가 보니까 시간의 법칙이 있는 것 같습니다. 첫째 우리의 시간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할 만큼 충분히 있다. 시간이 없는 것이 아니라 내가 조급한 것 뿐입니다. 둘째 그러나 모든 일을 다 할만큼 충분한 시간은 없다. 시간이 있지만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습니다. 셋째 그래서 가치있는 것에 집중하려면 다른 것을 포기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선택과 집중입니다. 넷째 가치 있는 일을 하려면 시간이 걸린다. 남의 것을 훔치거나 뺏는 것은 순간에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이루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우리는 어디에 남은 시간을 집중할 것이냐? 남은 가치있는 일에 집중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날마다 일어서야 합니다

어떻든 거지는 지금 성전에 있습니다. 돈을 구하러 성전에 왔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가장 좋은 선물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4절부터 보십시오 행3:4-6,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니”. 거지가 구걸하고 있던 곳에 베드로와 요한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거지를 바라보았습니다. 분명 무엇인가 구하고 있었는 데 그것은 본질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감사한 것은 베드로와 요한이 그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말했습니다. “우리를 보라”. 앞에서도 보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거지가 히끄무레하게 베드로를 바라 본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보다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거지를 바라본 것입니다. 이때 보다아테니조입니다. 이 말은 주목하다, 응시하다, 뚫어지게 쳐다보다라는 뜻입니다. 바라보는 촛점과 강도가 다릅니다. 거지는 희미하게 바라 보았고 베드로는 뚫어지게 바라보았습니다. 거지는 애처롭게 쳐다보고 베드로는 담대하게 쳐다보았습니다. give attention to, “차례하는 자세로 집중하여 보았습니다.

 

베드로는 왜 이렇게 남을 바라 보았을까요? 어느 때 사람은 이렇게 바라 봅니까? 자신있을 때입니다. 남에게 꿇릴 것이 없을 때입니다. 약점이 없고 흠이 없을 때입니다. 그러면 베드로는 항상 이렇게 남을 바라 보았습니까? 아닙니다. 베드로만큼 자신없는 인생을 살았던 사람도 없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밤새 그물을 던졌습니다.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그때 그는 어떤 눈으로 바다를 바라 보았을까요? 자신없는 눈입니다. 실패자의 눈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군병에게 잡혀가는 예수님을 따라 대제사장의 집에 갔습니다. 그때 그를 알아본 여자 아이 하나가 너도 예수 따라더니던 제자지?” 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손을 가로 저으며 말했습니다. “아니요. 난 예수를 몰라”. 그때 그는 어떤 눈으로 여자 아이를 바라보았을까요? 자신없는 눈입니다. 비겁한 자의 눈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다릅니다. 다시 4절을 볼까요? 3:4,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어떻습니까? 다르지 않습니까? “우리를 보라”. 볼테면 보고 말테만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보라”. “보라”. 자신만만 합니다. 감히 그 앞에서는 함부로 눈을 치켜뜰 수가 없습니다. 요즘말로 포스가 느껴집니다. 왜 이렇게 베드로가 담대해졌습니까?

 

성령의 능력

성령의 능력이 그 첫 번째 이유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하늘로부터 급하고 바람같은 성령이 임했습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자 베드로에게 세 가지가 임했습니다. 영어로 세 가지 p입니다. 첫째 presence,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성령이 임하자 하나님이 베드로속에 들어왔습니다. 하나님이 임하자 삶이 달라졌습니다. 둘째 purpose, 목적입니다. 성령이 임하자 베드로안에 거룩한 목적이 생겼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주인입니다. 주인이신 그 분이 우리안에 거하면 우리안에 삶의 분명한 목표와 꿈이 생깁니다. 목표가 분명해지면 삶이 단순해지고 삶이 단순해지면 용기가 생깁니다. 세 번째 power입니다. 성령님이 베드로에게 임하자 능력이 생겼습니다. 자신감이 생기고 할 수 없는 일이 없어졌습니다. 9:23,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여러분 속에는 이미 성령님이 계신 것을 믿습니까? 성령이 임할 때 우리안에 거할 때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목적, 하나님의 능력이 같이 임한 것을 믿습니까?

 

지속적 기도

베드로가 담대해진 두 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1절입니다. 3:1, “제 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 새”. 성령받은 베드로는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유대인의 관습을 좇아 하루 세 번씩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침 9, 정오, 오후 3, 그날도 베드로는 시간을 맞춰 오후 3시 기도에 나오던 중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삶을 능력있게 하는 비결중 지속적인 기도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아십니까? 우리의 모든 일상은 90%의 습관에 따라 움직입니다. 습관이 우리를 살리고 죽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다 한번 기도할 수 있습니다. 어쩌다 한번 새벽기도할 수 있고 어쩌다 한번 금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강력한 기도는 지속적인 기도입니다. 이것을 요즘 말로 영적 형성이라고 합니다. 다니엘도 하루 세 번 기도했습니다. 이 습관이 바벨론으로까지 가서 기도하면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도했습니다. 다니엘은 기도 때문에 고난받았지만 결국 기도 때문에 살았습니다. 예수님도 습관적으로 기도하셨습니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한적한 곳으로 가서 기도하셨고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하도 기도를 습관화하다 보니까 십자가에서까지 마지막으로 기도하셨습니다. 여러분도 지속적으로 기도합니까? 기도가 우리를 담대하게 합니까?

 

예수의 이름

베드로가 담대해진 세 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6절을 보시겠습니까? 3: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니”. 여기에 나사렛 예수란 말이 나옵니다. 나사렛 예수는 사도행전의 주제입니다. 사도행전에 20번이나 쓰이고 있습니다. 이 말을 영어로 하면 In the name of Jesus입니다. 이 말을 헬라어로 쓰면 엔 토 오노마 예수입니다. 이 말을 문자대로 풀면 예수의 이름안에서하는 뜻입니다. 이 말은 고대 사회에서 땅이나 부동산, 노예를 사고 계약을 맺을 때 누구 누구의 소유가 되다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하고 외치는 순간, 그는 나사렛 예수의 소유안에 들어옵니다.

 

물건도 누가 소유했느냐에 따라 값이 달라집니다. 물건 값의 원리는 물건 자체의 값이 아니라 그것을 쓴 사람의 값입니다. 나폴레옹의 칫솔이 2만 천 달러에 팔렸다고 한다. 누가 낡아빠진 칫솔을 2만 달러에 사겠습니까? 나폴레온 때문에 사는 것입니다. 케네디 대통령이 썼던 목재 골프채는 7725백 달러까지 값이 나갔답니다. 케네디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누가 여러분을 소유했는지 아십니까?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생명과 내 생명을 맞바꿨습니다. 벧전2:9, 우리는 그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 보십시오 베드로가 거지에게 소리쳤습니다. 3:6,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7, 3:7, “오른 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에 힘을 얻고”. 8, 3: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에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하나님이 그에게 소유된 백성이 하나님이 살리신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 병든 자가 낫고 귀신이 떠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된 우리를 살리시는 것입니다.

 

며칠전 우연히 이런 영상을 보고 감동받았습니다. 런던 올림픽에서 뛴 한 선수의 이야기입니다. (영상) 어떻습니까? 육신의 아버지가 넘어진 아들을 일으켜 세웠다면하늘의 아버지도 그의 자녀인 우리를 일으켜 세우지 않겠습니까? 넘어진 아들에게 달려간 아버지, “일어나라, 내가 너와 함께 뛰겠다”. “일어나라. 내가 너와 함께 가겠다”. 일어나십시오. 우리의 삶이 앉은뱅이처럼 불행하다가 우리의 삶이 거지처럼 안 풀린다고 운동장에 주저 앉아 있는 여러분, 일어나 걸으십시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