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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마20:29-34 * 주여! 긍휼히 여겨주소서!

마20:29-34   주여! 긍휼히 여겨주소서!

 

14살짜리 소녀가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을 찾아와 그 발아래 꿇어 엎드려 울부짖었습니다. “폐하 용서하여 주세요. 제 아버지를 용서해 주세요.” “너의 아버지는 누구며 너는 누구냐?” 그러자 소녀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제 이름은 라이얼 라이입니다. 그리고 제 아버지는 사형선고를 받고 지금 감옥에 갇혀 계십니다. 나폴레옹이 말합니다. “귀여운 소녀여 나는 너를 위해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구나. 네 아버지가 반역죄를 범한 것이 이번이 두 번째나 되는구나. 그러자 그 소녀는 황제에게 이렇게 감동적인 말을 합니다. “폐하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저는 정의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긍휼을 탄원하는 것입니다. 폐하 간청합니다. 제 아버지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나폴레옹 황제는 잠시 갈등을 하다가 어린 소녀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주면서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그래 애야, 정의나 법으로는 안 되지만 내가 너를 위해서 너의 아버지에게 긍휼을 베풀어 석방해 주마.”

 

한 나라의 왕도 긍휼을 호소하는 아이의 탄원을 들어주는데 사랑과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성도들이 긍휼을 호소하면 들어주시지 않겠습니까? 반드시 불쌍히 여겨 주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사람일수록 긍휼을 호소합니다. “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말 부족하고 부끄럽습니다. 그러니 부족한 만큼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가 필요합니다. 주여 나에게 긍휼과 은혜를 베푸소서.” 또한 축복 받은 인생을 사는 사람들일수록 긍휼을 호소하는 신앙을 갖고 있습니다. 예컨대, 다윗은 인생의 숱한 시련을 겪으면서도 끝까지 견디고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이 바로 긍휼을 호소하는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어떻게 하나님께 긍휼을 호소하고 있는지 성경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소서....”(시57:1) 다윗은 기도할 때 마다 오직 하나님께 긍휼만을 애절하게 호소했습니다. 왜 다윗은 긍휼만을 구합니까? 그에게 이런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6918절 보세요.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선하시오니 내게 응답하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게로 돌이키소서.”(시69:16)

주님은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시고 긍휼히 풍성하다는 것을 다윗은 믿었습니다. 또 무얼 믿었습니까? 시119:58절입니다.

“내가 전심으로 주의 은혜를 구하였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시119:58) 전심으로 구하는 자에게 은혜와 긍휼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인생의 수많은 과오와 시행착오에서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긍휼을 호소하는 신앙인 것입니다.

 

성경 ‘사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신다. 민망히 여기신다. 측은히 여기신다. 긍휼히 여기신다는 말이 자그마치 35번에 걸쳐 반복되고 있습니다. 성경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성품 중 가장 많이 나오는 성품이 바로 긍휼과 자비입니다. 무려 500번 이상 반복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많이 강조되는 것은 인간에게는 그만큼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필요하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필요한 긍휼을 베푸시는 예수님과 어떻게 하면 그 소중한 긍휼을 받을 수 있는가를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1. 긍휼을 호소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두 사람은 앞을 못 보는 맹인입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그 중 한 사람이 ‘바디매오’였다고 소개합니다. 바디매오라는 이름 자체가 얼마나 불행한 이름입니까? 맹인의 아들이란 말입니다. 아버지도 맹인이었고 아들도 맹인이었으니 얼마나 불행한 사람입니까? 그런데 어느 날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이 살고 있는 여리고 지역을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게 됩니다. 그들은 인생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길목에 있다가 예수님께 간곡하게 호소합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그들은 이 짧은 기도를 통해 긍휼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긍휼의 응답을 받은 그들의 기도를 살펴보겠습니다.

 

①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 즉 메시아(Messiah)로 불렀다는 말입니다. 나를 구원하실 메시아, 나의 아픔을 치료하고 고쳐주실 메시아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었기에 아무런 교육 혜택을 누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장애 복지가 지금처럼 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점자로 책을 읽을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아버지도 맹인이요. 아들도 보지 못하는 사람이니 무슨 교육을 받았겠습니까? 그런데 이들은 배우지 못했지만 예수님에 관해서는 한 가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다윗의 자손, 메시아라고 정확하게 알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나의 구원자임을 믿으시고 나의 치료자가 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② 자기들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호소했습니다.(have mercy on me.)

그들은 긍휼이라고 하는 한 단어만을 가지고 반복하여 기도합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주여!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구약 성경에는 다윗의 자손인 메시아에 대해 수없이 예언을 하고 있는데 그 분은 긍휼히 풍성하신 하나님이었습니다. 사35장에서는 메시야의 긍휼 사역을 이렇게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픔을 치유해 주시는 분, 슬픔을 극복해 주시는 분, 질병을 정복해 주시는 분, 사막을 초지가 되게 하시고 광야에서 샘물이 솟아나게 하시고, 무능한 자에게 힘을 주시고, 울고 있는 인생을 노래하게 하시고 슬픔과 탄식을 즐거움과 기쁨으로 환원시켜 주시는 분”

그들은 바로 이 메시아에게 긍휼을 호소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그들을 직접 만져주시면서 그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가슴에 긍휼로 차고 넘치신 예수님께서는 내 상처와 아픔을 아십니다. 내 고뇌를 아십니다. 가슴에 쓰라림도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시고 민망히 여겨주시고 오늘 이 아침에도 나의 멍든 가슴을 어루만져 주실 줄로 믿습니다.

 

19세기 여류 시인이요 작가였던 패니 크로스비(Fanny Crosby), 그녀는 태어난 지 6주 만에 실명을 하여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자가 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도 여의고 가난한 가정에서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95세까지 장수하며 9천 편 이상의 시를 쓰는 멋진 인생을 살았습니다. Fanny Crosby가 불행의 조건들을 행복으로 바뀌었던 비결이 뭘까요? 그는 평생, 끊임없이 외쳤던 것이 주님께 긍휼을 호소하는 기도문을 썼습니다. 날마다, 주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긍휼히 여겨달라고 하나님께 긍휼을 호소하는 수많은 기도문과 시를 쓰다 보니 그녀는 장수인생을 살았고 그 때마다 하나님이 영감을 주셔서 수많은 시를 쓰게 되었는데 그가 작사했던 많은 찬양들을 지금도 애창하고 있잖습니까?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 하셨네, 여러분들은 이 찬송을 아무런 감정 없이 부르는지 모르지만 Fanny Crosby는 맹인이었기 때문에 더욱 더 하나님의 긍휼을 호소하면서 자신의 갈 길을 인도해 주시기를 위해 기도하며 찬양한 것입니다. 나는 앞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주님이여, 내 평생 가는 길을 주님이 인도하여 주옵소서. 그녀가 일평생 동안 가장 많이 가슴 뭉클하게 불렀던 찬양이 있습니다. (337장 인애하신 구세주여)

인애하신 구세주여, 내 말 들으사, 죄인 오라 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주여, 주여 내가 비오니 죄인 오라 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만복 근원 예수시여 위로 하소서, 우리 주와 같으신 이 어디 있을까

주여, 주여 내가 비오니 죄인 오라 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얼마나, 얼마나 좋은 찬양입니까? 주의 긍휼하심이 필요하시면 이 찬양을 조용히 불러 보세요. 주님의 위로하심이 임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도 오늘 이 자리에서 주님의 긍휼을 호소할 때 주님은 가던 걸음도 멈추어 주시고 손을 내밀어 나를 붙잡아 주실 줄로 믿습니다.

 

2. 사모하는 마음으로 호소할 때 긍휼히 여겨주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은혜를 목말라하며 사모하는 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십니다. 절규하는 기도에 귀를 기울여 주십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세요. 예수님께서는 두 사람의 적극적인 신앙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어떤 신앙입니까?

 

①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 동네를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고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맹인 두 사람이 길 가에 앉았다가”(30) 앉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지나가실 길가에 미리 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수군수군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시기 위해 이 여리고를 통과하신다는 소문을 듣고 그들은 미리 가서 거기서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시간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갈망하고 사모했습니다. 예수님의 은총을 목말라 하며 그들은 사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연을 기다린 것이 아니에요. 그냥 막막하게 언젠가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오셔서 고쳐주시겠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미리 가서 주님 지나가시는 그 길목에서 어쩌면 한 나절을 어쩌면 온 종일 기다렸을 것입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갈망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사모하며 기다렸어요. 한 평생 하나님만을 사모하며 살았던 다윗은 이런 간증을 합니다. “그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시107:9) 사모하는 자에게 주님이 긍휼이 여겨 주사 만족하게 하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좋은 것으로 채워주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모함이 있어야 합니다.

 

② 그들은 볼 수는 없었지만 부르짖을 수는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세요. 언제나 우리가 어떤 일을 시도하고 신앙적으로 살려고 하면 방해 세력이 있어요. 드디어 그들이 기다리는 곳에 예수님이 오셨어요. 그래서 예수님께 달려 나가 불쌍히 여겨 달라고 간청을 했더니 31절 보니까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31)고 방해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어떻게 대응합니까? 그 방해소리보다 더 큰소리로 부르짖습니다. 자기들에게 시끄럽다고 핀잔하고 꾸짖는 그 소리보다도 더 큰 소리로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19세기 하버드의 시인이었던 롱펠로(Longfellow, Henry Wadsworth)는 이들의 절교를 아름답게 시적으로 설명했습니다. “예수님의 폐부를 찌르는 크나큰 외침이었다.” 예수님의 가슴을 찌르는 크나큰 외침이었다. 오늘 우리에게 이런 적극적인 부르짖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그들의 기도에 감동을 받으시고 두 가지를 축복해 주십니다.

 

① 가던 발걸음을 멈추시고 찾아오셔서 그들을 만나주시고 대화하시며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십니다.

본문을 보세요. 32절 보세요.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32) 가던 길을 멈추셨습니다. 불러주시지요. 바디매오야! 그리고 대화를 하시지요. 무얼 원하니? 저와 여러분이 긍휼을 호소하며 부르짖을 때 주님은 내 삶에 찾아와 주십니다. 내 이름을 불러 주십니다. 내 가슴의 애환과 절규를 귀 기울여 들어주십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얼 해주기를 원하느냐?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그리고 우리의 소원을 들어 주십니다.

여러분, 지금 예수님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십니까? 예수님께서 지금 여리고를 통과해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가시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 마음도 착잡합니다. 예수님의 마음도 복잡합니다.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예수님도 죽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길, 이 고난의 길을 내가 가야하는가? 예수님도 지금 번민하고 있는데 그런데 이들이 예수님을 향해 얼마나 절규하며 부르짖었던지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그랬더니 예수님은 가시던 걸음을 멈추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절규하며 주님께 긍휼을 호소하며 부르짖으면 우리 주님은 그 어떤 것보다 나에게 집중하여 주실 줄로 믿습니다. 내 기도에 집중해 주십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주님께 긍휼을 호소하여 찾아와 주시고 소원을 이루어 주시는 이런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누릴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② 애절하게 부르짖는 그들에게 긍휼의 기적을 베풀어 주십니다.

34절을 보세요.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져주시니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34) 주님은 말씀 한 마디로도 고쳐주실 수 있었는데 친히 눈을 만져주십니다. 만져 주시면서 얼마나 답답했니? 얼마나 힘들었니? 얼마나 불편했니? 얼마나 고통스러웠니? 긍휼히 여기시면서 주님은 그 따뜻한 손으로, 치료의 손으로, 그 은혜의 손으로 그들의 눈을 만져주시면서 고쳐주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도 주님은 내 아픔을 만져주십니다. 내 상처를 만져주십니다. 나에게 손을 내밀어 주시는 그 주님을 바라보는 이아침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이 은혜, 이 긍휼, 이 기적, 이 축복이 오늘 저와 여러분의 것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목포하늘비전교회
글쓴이 : †^머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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