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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마9:35-10:1 * 치유하시는 하나님

마9:35-10:1 치유하시는 하나님(*치유-치료하여 병을 낫게 함)

 

중국 전국시대 제(齊)나라 환공이 어느 날 명의 편작(扁鵲)이 제나라를 지나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편작을 불러들였습니다. 편작은 환공을 배알하자마자 시진(視診)을 한 후 이렇게 아뢰었습니다. "폐하께서는 피부 바로 밑에 질병이 숨어 있사오니 지금 치료하지 않으면 차츰 병이 깊어지실 것입니다." 이에 환공은 웃으면 말했습니다. "과인의 건강에는 문제가 없소" 환공은 멀쩡한 사람을 환자라 하는 편작이 괘씸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닷새 후 편작은 다시 환공을 찾아와서 "폐하, 이제 질병이 혈맥(血脈)에 들어가서 치료를 서두르지 않으면 큰일 납니다." 이에 환공은 매우 언짢아하며 언성을 높였습니다. "과인에게는 병이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다시 닷새가 흘렀을 때 편작은 또 환공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환공의 얼굴을 보자마자 명의 편작이 말없이 달아나 버렸습니다. 환공은 편작이 말없이 달아난 까닭을 알고자 사람을 보냈습니다. 편작이 환공이 보낸 사람에게 이렇게 대답을 하였습니다. "질병이 인체의 피부에 있을 때는 별 것이 아니므로 탕약으로 치료하면 되고, 혈맥에 머무를 때는 침과 뜸이 효력을 미칠 수 있으나 질병이 골수에 들어가면 아무리 뛰어난 명의라도 방법이 없습니다. 오늘 폐하를 뵈오니 이미 병은 골수로 들어갔으니 아무 말 없이 물러난 것입니다." 그 후로 또 닷새가 지났을 때 환공은 몸져누웠습니다. 그제야 환공은 편작을 애타게 찾았으나 그는 이미 제 나라를 떠난 뒤였고, 결국 환공은 죽고 말았습니다. 환공은 치료의 시기를 놓쳐 죽고 말았는데, 이 때 편작이 제 나라를 떠나면서 남긴 "육불치(六不治)"가 있습니다. 이를 편작의 육불치(六不治)라 하는데 중국 전국시대의 전설적인 명의였던 편작도 못 고치는 여섯 가지 병이라는 뜻으로 사마천 사기 <편작열전>에 기록된 말입니다.

여러분, 들으시고 큰 교훈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첫째, 환자가 교만하고 방자하여 내 병은 내가 안다고 주장하는 환자.(一不治, 驕恣不論於理 일불치, 교자불론어리) 내 병은 내가 안다고 하면서 주관적인 판단만 중요시하고, 정확한 의사의 진료와 충고를 따르지 않는 교만한 사람은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둘째, 자신의 몸을 가벼이 여기고 돈과 재물을 더욱 소중하게 여기는 환자.(二不治, 輕身重財 이불치, 경신중재) 몸은 세상에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돈과 명예를 중시하여 몸을 가벼이 부린다면 이것 또한 불치병이라는 지적입니다.

셋째, 음식을 제대로 가리지 못하는 사람은 고칠 수 없다.(三不治, 衣食不能適 삼불치, 의식불능적) 옷은 추위를 견딜 정도면 적당하고, 음식은 배고픔을 채울 만하면 적당한 것인데 지나치게 음식을 탐하고 편안한 것만 쫓는 환자는 어떤 명의라도 고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환자는 약의 흡수를 방해하는 음식을 조절해야 하는 것입니다.

넷째, 음양의 평형이 깨져서 오장의 기가 안정되지 않는 사람은 고칠 수 없다.(四不治, 陰陽竝藏氣不定 사불치, 음양병장기부정) 음양이 장기를 장악하여 혈맥의 소통이 단절되면 기가 불안정해져서 돌이킬 수 없다는 상태로 진행된다는 것입니다.(과색과 과욕을 멀리하라.)

다섯째,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서 도저히 약을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五不治, 形羸不能服藥 오불치, 형리불능복약) 어떤 명약을 쓰더라도 그 약을 받아들일만한 기본 체력이 없다면 이것 또한 고치기 힘든 병이라는 겁니다.

여섯째, 무당의 말만 믿고 의사를 믿지 못하는 환자.(六不治, 信巫不信醫 육불치, 신무불신의)

 

오늘 본문 말씀과 사복음서 그리고 성경 전체를 통해 고쳐주신다는 말이 자주 반복되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고쳐주시는 주님, 치료해 주시는 주님, 낫게 해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죄를 용서 받는다는 사죄의 복음을 확신하듯 병을 고치시는 치유의 복음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연약함을 간단하게 진단합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사53:6, 마9:36) 양은 잘 다치고 상처를 받습니다. 쉽게 병들고 아픕니다. 양은 방향감각이 없습니다. 그래서 쉽게 길을 잃고 쉽게 놓치고 쉽게 다치고 엉겅퀴에 쉽게 메여 헤어 나오지 못하고 맹수의 밥이 되기도 합니다. 성경은 인간이 바로 그렇다고 양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금세기 훌륭한 목회자요 신학자인 존 오트버그(John Ortberg)“현대인은 고슴도치와 같은 존재”라고 말합니다. 고슴도치가 얼마나 웅크리고 자기 방어적입니까? 고슴도치처럼 현대인들은 피해의식 속에서 쉽게 외로움을 느끼고 상처 속에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별말 아닌데도 한 두 마디 때문에 상처를 받습니다. 영성신학자이며 상처 치유의 권위자인 헨리 나우웬(Henri Jozef Machiel Nouwen)“인간이란 존재는 원래가 상처 받은 존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외로워하고 왜 그렇게 피해의식을 가지고 왜 그렇게 상대방에 대해서 방어적인가? 본디 상처를 입고 사는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원인을 규명해 주고 있습니다. 상처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또 상처 받지 않을 사람도 없습니다. 사람은 상처를 쉽게 주기도 하고 또 쉽게 받기도 합니다. 상처투성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상처를 치유하시는 사랑의 목자로 양들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오셔서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마9:35) 오늘도 주님은 우리의 병을 고쳐주십니다. 육체의 질병뿐만 아니라, 현대인들의 영혼의 상처도 고쳐주십니다. 깨어진 인간관계, 부부사이의 앙금, 주님은 얼마든지 회복시켜 주십니다. 과거의 실패로 인한 많은 상처와 열등감도 치료해 주십니다. 상한 감정도 치유해주십니다. 망가진 영성까지도 치유해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는 한마디로 전인치유입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낫게 해 주십니다. 내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오늘 이아침 이 자리에서 여러분의 영혼과 육체가 나음 받고 치유되는 기적의 현장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12명의 제자를 세우시고 내가 사역하는 것처럼 너희들도 내가 하는 것을 보고 그대로 하라 본을 보여주시고 사명으로 주셨습니다. 이아침 예수님이 보여 주신 본을 배워 사명으로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1. 상처 입은 이웃을 바라보는 눈을 가지라.

 

36절입니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마9:36) “보셨다”는 말씀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무리는 어떤 무리입니까? 양과 같이 쉽게 상처받고 쉽게 무너지고 쉽게 병들고 쉽게 다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기 보셨다는 말은 그냥 지나가다가 힐끗 보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자세히 관찰하셨다.”는 말입니다. “주목하셨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고 있는 현 시대가 외로워하는 사람들, 힘들어 하는 사람들, 아파하는 사람들, 고독한 사람들, 상처 속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시대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처럼 우리 눈에도 보여야 합니다. 보는 눈이 복될 줄 믿습니다.

 

샘소나이트사(Samsonite Corporation)는 여행용 가방, 서류 가방 등을 만드는 미국의 기업입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가방이 샘소나이트입니다. 이 가방 회사를 세운 사람은 유대인 출신 제시 슈웨이더(Jesse Shwayder)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동유럽에 살다가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 장사를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하는 장사가 주로 보석상과 야채상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유대인들은 원래부터 나그네로 살고 여차하면 보따리를 싸서 또 어느 나라로 피신하고 도망가야 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환금성(換金性)의 장사를 좋아했습니다. 현금 가지고 돈 장사 하고, 그리고 보석상하고 또 언제든지 그날 벌어서 그날 딱 정리하고 내일 아침에 미련 없이 떠날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야채장사였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따라 이민을 와서 슈웨이더가 야채장사를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가게에 손님이 찾아왔는데 물건을 고르는 손님의 가방이 다 찢어져서 안에 있는 물건들이 샐 것 같았습니다. 그때부터 그들을 도와 줄 방법을 찾으면서 가방에 대해서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때마침 슈웨이더가 살던 곳이 미국 서부 도시 덴버에서 멀지 않는 곳이었기 때문에 로키산맥을 찾아오는 여행객들을 많이 접하게 되었습니다. 거친 로키산맥을 여행 온 사람들이 여행을 마치고 갈 때 대부분 가방이 터지고 찢어지는 것을 보면서 저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고생하지 않도록 도와줄 것인가? 생각하면서 가방을 연구하다 튼튼하게 가방을 만들어 삼손(Samson)의 이름을 가방에 붙였고, 1941년 "샘소나이트(Samsonite)"라는 브랜드명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듯 보는 눈이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을 깊이 배려하고 안타깝게 보는 눈,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겨 도와주려는 눈과 마음이 야채가게를 접고 세계 최고의 가방회사를 이루는 기업가가 되게 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처럼 상대방의 아픔과 외로움을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이 열리는 이아침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상처 입은 이웃의 고통을 느낄 수 있는 가슴을 가지라.

 

36절을 다시 보시면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마9:36) 주님은 자세히 관찰해 보셨습니다. 주목하여 보셨습니다. 이들의 필요가 무엇인가? 이들의 문제가 무엇인가? 이들의 아픔이 무엇인가? 이들의 현실적인 고뇌가 무엇인가? 그것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강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이들을 “불쌍히 여기셨다.”라고 강조합니다. 여기 불쌍히 여긴다는 헬라어는 “가슴으로 아파한다.”는 뜻입니다. 창자가 꼬일 정도로 아파하는 가슴을 말합니다. 마치 엄마가 자기 아이가 몸살을 앓고 아파할 때 엄마가 애타하는 그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동의보감을 쓴 허준이 의과 시험을 보러 갈 때 가장 도전 받았던 질문이 의원의 기본자세가 무엇이냐? 는 것이었습니다. 허준의 대답은 환자를 불쌍히 여기는 ‘긍휼’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예수님처럼, 허준처럼 아파하는 마음, 고통을 같이 나누고자 하는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큰 긍휼을 받아 구원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없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마귀의 종으로 살다 지옥형벌을 받을 것입니다. 긍휼을 먼저 받은 자들로서 긍휼히 여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여리고로 내려가다 강도 만나 거반 죽게 된 자를 누가 살려줍니까? 누가 다가가 돌봐줍니까? 그를 불쌍히 여기는 사마리아인입니다.(눅10:33) 내 일처럼, 내 아픔처럼 느낄 때 도울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상처 입은 이웃의 고통을 예수님처럼 느낄 수 있는 가슴을 가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상처 입은 이웃을 섬기는 사역을 하라.

 

여기서 말하는 사역은 함께 삶을 나누는 것입니다. 모든 삶의 현실을, 애환을 공감하면서 함께 듣고 함께 나누고 함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신 이유와 목적이 어디 있습니까?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10:1절을 보시면 상처를 입고 고통 중에 있는 양떼들, 그 상처를 쉽게 받는 양들에게 목자 곧 치유자가 되도록 만드시는 것이 주님의 의도입니다. 우리는 먼저 믿은 자들로서 주님의 뜻을 헤아려 사명으로 받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귀한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이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3-45) 사명 감당의 키는 “섬김”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①먼저 섬기라. ②낮은 마음으로 섬기라. ③희생적으로 섬기라는 것입니다.

 

마더 테레사가 인도 캘커타에서 평생을 헌신하며 살았습니까? 키가 1m 50㎝도 안 되는 그 단신의 여인이 평생 고아를 돌보면서 사는 것이 소문이 나니까 미국 의회가 테레사를 초청을 했습니다. 그래서 의사당에서 연설을 하도록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이 오척 단신이며 그나마 허리가 구부러진 여인이 의사당 단상에 서서 딱 한 마디하고 내려갔는데 미국 역사상 모든 국회의원들에게 성대한 기립 박수를 받았습니다. 그가 한 딱 한 마디의 말이 이겁니다. “섬길 줄 아는 자가 다스릴 자격이 있습니다.”

 

섬길 줄 아는 자가 다스릴 자격이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그 원리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건강한 교회, 건강한 성도가 되기 위해서는 보는 눈이 열리고 느끼는 가슴이 열리고 그리고 내가 먼저 섬기고자 하는 내 인격이 열릴 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치유자로, 아픔을 공유하는 사람으로 상대의 상처를 회복해주고자 하는 섬김의 자세로 사역을 하면 주님이 그 사람에게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주십니다. “권능을 주신다.”(마10:1) 나의 권능을 줄 테니 섬기라는 것입니다. 권능을 줄 테니 모든 사람을 회복케 하고 낫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걸 그대로 실천한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베드로가 평상시도 예루살렘 성전을 많이 드나들었지만 미문에 앉아 있는 앉은뱅이에게 별 감동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령 받고 나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들어가다 그 문 입구에 평생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보았을 때.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주님처럼 사랑의 눈으로 그를 보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니 가슴에 뜨거운 아픔을 느끼고 그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 이름의 권세로 명령합니다. “일어나 걸으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먼저 내 자신부터 치유의 은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불쌍히 여기는 눈과, 불쌍히 여기는 가슴과 그들을 치유하고 섬기고자하는 사명을 갖고 치유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여러분에게 권능을 주셨고 더 주실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어지기를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목포하늘비전교회
글쓴이 : †^머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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