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추천 설교/박영일목사

[스크랩] 눅15:11-24 탕자의 비유(2)

눅15:11-24 탕자의 비유(2)

 

[최고의 작품-520번]

 

당신은 최고의 작품입니다. - 당신은 복덩어리입니다.

찬양교회에 없어서는 안 될 식구입니다. - 찬양교회에 없어서는 안 될 일꾼입니다.

천하보다 비싼 사람들께서 예배에 참석하셨습니다.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지난 주간에 교도소 수감 중인 3명으로부터 3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한 통의 편지를 그대로 읽어드리겠습니다.

 

박영일 목사님 귀하

9월의 마지막 날 경건한 마음으로 성경책 한권의 제 마음을 의지해 봅니다. 답답했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져 저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거 같습니다. 이제는 저의 몸 상태가 정상으로 돌아와 일상생활을 하는데 지장이 없어 더더욱 몸 관리를 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목사님께서도 첫째도 건강 둘째도 건강이니 체력을 위해서 운동을 꾸준히 하십시오. 제가 가까이 같이 있었으면 매일 운동을 같이 하며 체력을 관리했을 텐데... 목사님 예전에 제가 했던 말 기억 하실련지 모르겠습니다. 자꾸 고향이 생각이 나고 가고 싶다는 애기 말입니다. 이제는 다른 곳이 아닌 고향 그늘 아래서 안정적인 사업을 영위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받들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기존의 사업도 하며 고향에서 좋은 일들도 많이 하면서 목사님과 함께 하고 싶습니다. 이곳에서 지내면서 제 미래의 대한 구상과 계획의 실천을 위해서 준비하고 있습니다. 가족의 곁으로 돌아가면 가족들과 함께 목포로 내려가 정착하려는 마음은 결정한 상태이며... 목사님께서 많이 도와 주셔야 합니다. 저 또한 목사님 그늘 아래 전도도 열심히 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려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목사님 인연이라는 게 정말 저의 마음을 헤아려 주기에 힘을 얻는 거 같습니다. 제가 어려서 목사님을 뵙기 시작해 어언 세월이 많이 흘러 지금의 시간에 이르렀습니다. 저에게 주어진 지금의 시간들이 최악이라 생각하지 않고 지금껏 앞만 보고 달려온 저에게 뒤를 되돌아보는 계기를 삼게 해 준거라 생각하며 앞으로 똑같은 실수를 하지 않도록 많은 반성과 계기가 된 거 같습니다. 일 년 가까이 시간이 지나며 많은 심경 변화를 가지며 제 스스로에게 약속을 한가지씩 하고 있습니다. 다는 지켜지지는 않겠지만 약속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려 합니다. 제가 이렇게 하나님을 조금씩 알아가게끔 매일 매일 주셨던 말씀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매일 매일 말씀을 책자로 만들어 다시보고 또 다시보고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주신 말씀 매일 받으며 저의 마음가짐도 다 잡을 수 있었다는 말씀을 목사님께 꼭 드리고 싶었습니다.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날씨가 많이 선선해졌으니 특히 감기 걸리지 않도록 유의하세요. 오늘은 이만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2014. 9. 30 화성에서 목사님을 존경하는 00 올림

ps. 제 자신을 알게 해준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편지를 읽으면서 가슴 뭉클했습니다. 진심을 느낄 수가 있었고 행복했고 감사했습니다. 요즘 제가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선한 일을 하며 살자. 거기에 보람과 의미와 행복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주님의 일은 선한 일입니다. 전도도, 남을 위한 기도도, 금식도, 희생도, 선한 돕는 손길도, 위로도 모두 좋은 일입니다. 성도 여러분, 선한 일 하며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은 얼마 전에 했던 탕자 이야기를 한 번 더하고자 합니다. 본문의 내용은 이런 것입니다.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큰 아들은 장남답게 성실했습니다. 둘째가 문제아입니다. 아버지 품을 떠나겠다고 아버지를 찾아와 받을 상속을 요구합니다. 철이 없는 자식이고 불효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아픔은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자기의 욕심만, 기분만 채우고자 합니다. 여기에 성숙과 미숙이 있습니다. 남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으면 성숙이고 자기만을 항상 먼저 생각하면 미숙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결국 아버지를 이겨 먹고 아버지께 자기 몫을 받아 먼 나라로 떠났습니다. 자기 뜻대로 되었고 그가 말하는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품을 떠나 대단한 일을 할 것 같아도 결국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허랑 방탕’입니다. 모든 돈 다 탕진하고 흉년 만나 돼지보다 못한 비참한 인생 되어 굶주려 죽게 되었습니다. 그 때서야 아버지가 생각났고 자신의 잘못을 깨달게 됩니다. 그는 살기 위해 큰 결심을 하고 용기 내어 아버지께로 돌아갑니다.

 

 

탕자에게 배울 점

 

철없는 탕자에게서 배울 점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①밑바닥에 내려가 자신을 보게 된 것입니다. 고난이 주는 유익입니다. 힘들 때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교만한 마음 사라지고, 욕심 비우고 없는 상태에서 진정한 자신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인생을 배웁니다. 우리식으로 표현하자면 철이 좀 든 것입니다. 성숙해져 가는 것입니다. ②그는 밑바닥에서 희망을 찾았습니다. 절망의 끝인 자살을 선택하지 않았고 아버지라는 희망을 찾아 그 희망을 향해 용기 내어 일어섰다는 것입니다. ‘자살’을 뒤집으면 ‘살자’입니다. 밑바닥에서 작은 희망이라는 것을 찾아 노래하며 일어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 믿는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인생의 해답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돌아오고 가까이 하는 자는 결코 실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희망을 노래하게 될 것입니다. 저와 함께 주 안에서 먼저 희망 품고 희망을 심고 희망을 노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고난 속에 핀 꽃 -261번)

 

 

불쌍히 여기는 마음

 

 

나간 자식 돌아오기를 오매불망 기다리는 아버지는 거지가 되어 돌아온 자식을 발견하고 그 자식을 보고 제일 먼저 느끼는 아버지의 감정이 무엇입니까? 측은히 여김입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서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20)

 

내장까지 일렁일 정도로 마음이 아파서 견딜 수없는 애끓는 사랑으로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며 소리칩니다. 제일 좋은 옷을 입혀라.(아들로서의 권위와 지위), 손에 가락지를 끼워주라.(상속자로서의 자격), 신을 신기고(주인 됨을 인정), 살진 송아지 잡아 잔치하자 합니다.

 

여러분, 이 장면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 사랑 아니고는 이해가 불가능합니다. 사랑으로만 이해되는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그의 형, 장남은 이 장면을 이해가 안 됩니다. 그래서 기뻐하지도 않고 대문 밖에서 화를 냅니다. 왜 화가 납니까?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 버린 정신 못 차린 동생, 불효자를 위한 잔치라니 이해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안에는 시비지심만 있을 뿐 측은지심이 없습니다.

 

이 세상을 옳고 그릇만으로 판단하고 비판해서는 안 됩니다. 옳고 그릇만 판단하는 마음을 시비지심이라 합니다. 형의 마음입니다. 분명 동생이 잘못한 것이 맞습니다. 정신 못 차리고 아버지 유산을 허랑방탕하게 다 탕진했으니 얼마나 한심합니까. 그런데 왜 아버지는 다릅니까? 측은지심 때문입니다. 측은히 여기고 불쌍하게 보는 마음 때문입니다. 이 마음이 저와 여러분에게 충만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형의 마음으로 삽니까? 아버지의 마음으로 삽니까? 어느 것이 더 아름답습니까? 어느 것이 더 성숙하게 보입니까?

 

이제 옳고 그릇만 따지고 판단하지 마시고 품고 끌어안고 이해하고 덮어주며 용서해 줄 수 있는 따뜻한 마음,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옳고 그릇만 전부가 아닙니다. 그 이상이 있는 것입니다. 맞고 틀리고만 지적하는 마음보다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품고 끌어안아 주는 큰마음, 예수님의 마음이 여러분에게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맹자가 말한 사단(四端)이 있습니다. 仁·義·禮·智(인,의,예,지)의 단서가 되는 4가지 마음씨를 말한 것인데 ➀惻隱之心(측은지심) “남을 측은이 여길 줄 아는 마음”이 곧 仁의 발로고 ➁羞惡之心(수오지심) “불의를 보면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이 義의 발로요 ➂辭讓之心(사양지심) “남에게 사양할 줄 아는 마음”이 곧 禮의 발로이며 ➃是非之心(시비지심) “옳고 그름을 가릴 줄 아는 마음”이 곧 智라 했습니다.

 

예수님도 산상수훈을 통해 팔복을 말씀하시면서 “긍휼이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5:7)라고 하셨습니다.(심령이 가난한 자는-123번)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을 통해 친히 보여 주셨습니다. 마9:36절입니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마9:36) “보셨다”는 말씀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 보셨다는 말은 그냥 지나가다가 힐끗 보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자세히 관찰하셨다.”는 말입니다. “주목하셨다.”는 말입니다. 이들의 필요가 무엇인가? 이들의 문제가 무엇인가? 이들의 아픔이 무엇인가? 이들의 현실적인 고뇌가 무엇인가? 그것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강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이들을 “불쌍히 여기셨다.”라고 강조합니다. 여기 불쌍히 여긴다는 헬라어는 “가슴으로 아파한다.”는 뜻입니다. 창자가 꼬일 정도로 아파하는 가슴을 말합니다. 마치 엄마가 자기 아이가 몸살을 앓고 아파할 때 엄마가 애타하는 그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동의보감을 쓴 허준이 의과 시험을 보러 갈 때 가장 도전 받았던 질문이 의원의 기본자세가 무엇이냐? 는 것이었습니다. 허준의 대답은 환자를 불쌍히 여기는 ‘긍휼’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예수님처럼 불쌍히 여기는 눈과 고통을 함께 느끼는 가슴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큰 긍휼을 받아 구원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없었다면 잘못했다는 죄인으로 하나님의 지옥형벌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로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어 우리 죄를 대신 십자가에 짊어지고 피 흘려 죽게 하시고 죄의 값을 지불하게 하여 이제는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긍휼을 먼저 받은 자들이 우리인 것입니다. 먼저 받았으니 긍휼히 여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여리고로 내려가다 강도 만나 거반 죽게 된 자를 누가 살려줍니까? 누가 다가가 돌봐줍니까? 그를 불쌍히 여기는 사마리아인입니다.(눅10:33) 내 일처럼, 내 아픔처럼 느낄 때 도울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희망을 품고 만나는 이들에게 희망을 심고 어디서나 어떤 환경에서도 희망을 노래하는 선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축원합니다. 상처 입은 이웃의 고통을 예수님처럼 보고 느끼고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을 가지고 따뜻하고 감동을 주는 큰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 닮기 원합니다. 찬송가 463장 4절)

출처 : 목포하늘비전교회
글쓴이 : †^머슴^†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