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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눅15:11-24 탕자의 비유

눅15:11-24 탕자의 비유

 

당신은 복덩어리입니다.

찬양교회에 없어서는 안 될 식구이며 일꾼입니다.

천하보다 비싼 사람들께서 예배에 참석하셨습니다. 환영합니다.

 

가수 진성씨가 부른 ‘안동역’이 인기가 있습니다. 가사 내용이 이런 것입니다. 두 남녀가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깊은 사연의 내막은 잘 모르지만 두 사람은 헤어지면서 첫 눈이 내리는 날에 경북 안동시에 있는 안동역 앞에서 만나자고 약속했습니다. 드디어 기다리던 첫 눈이 내렸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만나려고 안동역으로 갔습니다. 먼저 가서 기다리는데 오지를 않습니다. 새벽부터 눈이 내려 무릎까지 쌓여서 못 오는 건지, 아니면 안 오는 건지 몰라 마지막 기차 기적이 끊어진 깊은 밤까지 기다립니다. 기다리면서 눈과 함께 마음까지 녹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 오는 걸까요? 못 오는 걸까요? 가사를 통해 내린 결론은 안 오는 쪽 같습니다. “바람에 날려버린 허무한 맹세였나, 어차피 지워야할 사랑은 꿈이였나” 그러면서도 안 오는 것이라고 100% 확신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기다림이 성경에도 있습니다.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기다림.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기다림. 나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기다림입니다. 오늘 11시 주일 예배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기다리셨습니다. 그래서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인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좋은 만남 계속 이어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을 ‘탕자의 비유’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입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한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철없는 둘째가 아버지 품을 떠나려는 강렬한 욕망 때문에 멀쩡히 살아 계신 아버지께 상속을 요구합니다. 참 철이 없고 이기적입니다. 아버지의 아픔은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자기의 욕심만, 기분만 채우면 그만입니다. 결국 아버지를 이겨 먹고 자기 몫의 유산을 받아 챙겨 먼 나라로 떠납니다. 아버지의 품을 떠나 대단한 일을 할 것 같아도 결국 하는 것이 ‘허랑 방탕’ 이었습니다. 결국 유산으로 받은 돈을 다 탕진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흉년을 만나 돼지보다 못한 비참한 인생이 되어서 굶주려 죽게 되는 밑바닥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제야 그는 아버지가 생각나고 자신의 잘못을 깨달게 됩니다. 그는 살기 위해 큰 결심을 하고 용기 내어 아버지께로 돌아옵니다. 날마다 기다리는 아버지는 아들이 오는 것을 먼저 보고 달려가서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아들이 눈물로 아버지께 고백합니다.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21)

 

그러나 아버지는 제일 좋은 옷을 입혔습니다. 손에 가락지를 끼워 주었습니다. 새 신을 신겼습니다. 종이 아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아들, 잃어다가 다시 얻은 아들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아 동네 사람들을 불러서 큰 잔치를 열었습니다.

설명해 드린 이 탕자의 비유를 통해 몇 가지를 생각하며 은혜를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어디가 더 행복합니까?

 

둘째 아들이 아버지 곁에, 가정에 있을 때가 행복하게 보입니까? 유산을 받아 아버지 품을 떠나 먼 나라에 가 자기 맘대로 허랑방탕함이 행복하게 보이십니까? 죄가 있는 곳에는 달콤함이 있습니다. 그 순간의 달콤함을 행복이라고 착각하면 안 됩니다. 순간의 달콤한 뒤에는 양심의 가책, 불편함, 괴로움, 후회가 있는 법입니다. 끝이 좋지 못합니다. 뻔한 답이 아니겠습니까? 그가 밑바닥에서 깨닫고 아버지에게 돌아와 잘못했습니다. 고백하며 아버지 품 안에 있을 때, 나로 인해 다른 이들이 마음 아파하지 않고 기뻐하고 기뻐할 때, 거기에 행복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복을 위해 세운 기관이 둘 있습니다. 하나는 가정이고 하나는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가정과 교회를 통해 가장 큰 행복을 느끼고 누릴 수 있습니다. 자꾸 밖에서 행복을 찾는다면 방향이 잘못된 것입니다. 방향을 바꾸어 가정과 교회 안으로 들어오셔서 진정한 행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요즘 많은 가정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정 회복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만 소개하겠습니다. ‘가족 칭찬의 날’이 있습니다.

온 식구들이 일주일에 하루를 가족 칭찬의 날로 정합니다. 그리고 그 날만이라도 절대로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고 칭찬을 합니다. 편지를 써도 좋습니다. 에디슨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내가 칭찬을 한번 받으면 한 달이 즐겁다.” “칭찬은 귀로 먹는 보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주일에 하루씩 식구들에게 보약을 먹이는 날로 삼아야 합니다. 여러분도 한 번 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아내가 예뻐 보일 때라는 글이 있습니다.

20대 후반은 남편을 위해서 예쁜 아기 낳아줄 때 아내가 예뻐 보이고,

30대 후반은 좋은 집에 못산다고 불평하지 않고 잘 참아주는 아내를 볼 때 예뻐 보이고,

40대 후반은 “당신 건강해요. 건강해야 되요” 하면서 보약 다려줄 때 예뻐 보이고,

50대 후반은 “당신은 참 훌륭한 사람이야”라고 칭찬해 줄 때 예뻐 보이고,

60대 후반은 ‘당신과 살아온 생은 참 행복한 삶이었어요. 라고 과거를 회상하면서 싱긋이 웃어줄 때 예뻐 보이고,

70대 후반은 조용히 “우리가 죽거든 양지바른 곳에 함께 묻힙시다.” 하면서 주름 잡힌 얼굴로 쳐다볼 때 아주 예뻐 보인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남자는 20대부터 70대까지 내내 여자에게 자신의 자존심을 지켜달라는 당부를 잃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존심을 건드리면 아파합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여자는 남자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을 때 예뻐 보인다는 것입니다. 남자는 단순합니다. 몇 가지 욕구만 채워주면 됩니다. 남자는 존경, 여자는 사랑 먹고 산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신앙생활을 쉬었던 분들은 모두 교회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시면 마음의 편안함과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제는 주 밖에 있지 마시고 주 안으로, 주 품으로 들어오셔서 주 안에서 행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모습 그대로-78)

 

 

2. 아버지의 마음을 아십니까?

 

아버지를 떠나고 싶어 하는 둘째를 보면서, 그리고 떠나는 아들의 뒤 모습을 보면서 마음 아파하시는 아버지입니다. 무엇이 부족하다고 아픔을 주고 간 자식에게 아버지의 마음은 향해 있을까요? 아들 나간 날부터 돌아오기를 오매불망 기다리며 아버지의 마음과 눈이 집 나간 자식에게 향해 있습니다. 매일 기다리는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게 아버지의 마음이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많은 기다림 끝에 기다리는 자식 거지가 되어 돌아오자 그를 먼저 보고 느끼는 아버지의 감정이 무엇입니까? 측은히 여김입니다.(20) 내장까지 일렁일 정도로 마음이 아파서 견딜 수없는 애끓는 사랑입니다. 그 마음으로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며 소리칩니다. 제일 좋은 옷을 입혀라.(아들로서의 권위와 지위), 손에 가락지를 끼워주라.(상속자로서의 자격), 신을 신기고(주인 됨을 인정),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하자 내 아들이 살아왔다. 내 아들을 찾았다 합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내가 울면 업어 줄께 울지 마라 달래고, 밥 먹지 않으면 먹으면 돈 줄께 하며 달래어 먹이며, 집 나가면 애타게 찾고 그 자식 비유 맞추고 뜻 받아주어 돌아오게 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나를 사랑하는 부모님입니다. 거지 되어 돌아오는 아들을 위해 잔치를 해 줄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버지입니다. 이런 사랑이 결국 그를 돌아오게 한 것입니다. 살다보면 부모 자식 간에 형제간에도 섭섭함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좋지 않는 섭섭함은 다 잊어버리시고 부모님께 사랑 받은 좋은 기억만 생각하며 그 사랑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부모님에게, 아니면 그 누군가에게 소중한 사랑 받은 기억이 있다면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 사랑이 나로 힘든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 하나로 잘못한 자식, 아픔 주고 집 나간 자식을 기다립니다. 사랑 하나로 거지 되어 돌아온 자식 무조건 용서합니다. 그리고 제일 기뻐하며 그를 위한 잔치를 합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24) 죽음 앞에서 섭섭함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돈도 덜 소중합니다. 아들의 존재만으로, 살아 같이 하늘 아래 있는 것만으로 아버지는 너무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이 시간 부모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마음을 아시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3. 끝이 아름다워야 합니다.

 

떠나는 아픔이 있었지만 돌아오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상처 난 아픔만 있는 것이 아니라 회복되는 잔치가 있었습니다. 끝이 좋았습니다. 시작보다 끝이 중요합니다. 어제보다 내일이 중요합니다. 탕자의 가정은 결국 돌아옴으로 끝났습니다. 회복으로 끝났습니다. 인생도 노년이 아름다워야 합니다. 젊어서는 고생을 사서도 하지만 노년에 고생하면 안 됩니다. 아름답지 못합니다. 모든 일에도 끝이 아름다워야 합니다. 과정에 다툼도, 소난도, 실수도, 있을 수 있습니다. 잘 풀어 끝을 아름답게 하면 더 좋아지지만 풀지 못하여 끝이 좋지 않게 되며 문제가 됩니다. 헤어질 때도 축복하면서 보내야 합니다. 다시 안 볼 것처럼 하면 안 됩니다. 사람 일은 모르지 않습니까? 모든 일에 끝을 아름답게 마무리할 줄 아는 지혜와 능력이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주여 이 죄인이-58)

출처 : 목포하늘비전교회
글쓴이 : †^머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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