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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눅16:19-31 한 영혼이라도 더 살리고 싶습니다.

눅16:19-31  한 영혼이라도 더 살리고 싶습니다.

 

예수님 당시 백부장은 나름 권력을 가진 자입니다. 그런 한 백부장에게 아픔이 생겼습니다. 종 하나가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종이기에 무시해 버릴 수도 있었지만 그는 낮은 자세와 마음으로 예수님께 살려 달라 간청을 하였습니다. 왜 그리했을까요? 성경은 백부장이 그 종을 사랑했기 때문이라 했습니다.(눅7:2)

 

느헤미야는 나라 잃고 포로로 잡혀간 바벨론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는 불행 중에 성공하여 왕의 술 맡은 관원장이 되었습니다. 고위 공직자가 되어 부도, 명예도, 권세까지 있었습니다. 부족함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마음 아파 금식하며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있었던 예루살렘의 슬픈 소식을 듣고 마음 아파서 그런 것입니다. 그는 왜 무시하거나 무관심 할 수 없을까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육체는 편한 삶이었지만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로 불편하게, 아프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사랑이 그로 금식하며 기도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죄인들을 공의로 심판하시면 그만이십니다. 그러나 사랑 때문에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사랑 때문에 낮아져 오시고, 참으시고 죽으셨습니다. 생명까지 아낌없이 다 내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이고 사랑의 힘인 것입니다.

 

돌아온 탕자 이야기를 잘 아실 것입니다. 철없는 둘째가 아버지의 유산을 받아가지고 먼 나라로 떠났습니다. 가서 허랑방탕한 생활로 다 허비하여 빈털터리가 되었습니다. 돼지보다도 못한 신세로 전락하여 저 밑바닥 생활을 하면서 그는 거기서 아주 귀중한 것을 깨닫고 죄를 뉘우치면서 아버지께로 돌아왔습니다. 아버지는 그 아들을 보고 너무 기뻐 안고 동네 사람들을 불러 잔치를 하며 기쁨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아버지가 이처럼 기뻐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큰 아들에게 설명을 해 줍니다. 들어 보세요.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눅15:32)

 

여러분, 하나님 아버지의 이 마음을 아십니까? 아신다면 한 영혼을 구원하고 살리기 위해 기도하며 전도합시다. 한 영혼의 가치는 예수님의 생명과 같은 가치입니다. 그래서 천하보다 비싸다 하는 것입니다. 한 영혼을 전도하면 천하를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하인을 사랑하는 백부장의 마음, 민족을 사랑하여 금식하고 기도하는 느헤미야의 그 심정,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의 그 사랑이 우리 안에 있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내용은 이런 것입니다.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며 사는 부자와 그 부자의 대문 앞에서 ‘종기나 궤양’을 앓고 있어 부자의 상에서 떨어진 음식으로 연명하는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입니다. 그런 사연 가지고 살다가 거지 나사로가 먼저 죽어 아브라함 품에 안겼고, 부자 역시 죽음을 피하지 못하고 죽어 음부에 떨어져 고통을 받게 되었습니다. 음부, 지옥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보내서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해 달라.”고 간청하나 아브라함의 대답은 너와 우리가 있는 곳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있어서 서로 왕래 할 수 없다고 거절합니다. 그러자 부자는 나사로를 ‘내 아버지 집’에 보내서 다섯 형제들이 이 곳 음부에 오지 않도록 증언 해 달라고 합니다. 그 요구에 아브라함의 대답은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음으로 그들에게 들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부자는 죽은 사람이 살아나서 말해 준다면 회개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눅16:31)

 

설명해 드린 본문 말씀을 통하여 큰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어느 날 찾아온 죽음을 위해 천국 보험을 들어 놉시다.

 

어느 날 나사로에게도, 부자에게도 죽음은 찾아왔습니다. 천년만년 살 것 같았는데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영혼을 거두시면 모두 죽는 것입니다. 그 때 어느 노래 가사처럼 아직은 젊어서 못 간다고, 할일이 아직 남아 있어 못 간다고 저항해도 소용없습니다. 아직은 쓸 만해서 못 간다고 해도, 알아서 갈 테니 재촉 말라 해도, 좋은날 좋은 시에 내가 정해 알아서 갈게요 해도, 자존심 상해서 못 간다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죽음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가난한 나사로가 먼저 죽었습니다. 가난하니 제대로 못 먹고 병들었으니 그의 죽음은 당연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좀 다르지 않겠습니까. 몸에 좋다는 약과 음식을 다 먹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었습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공평하게 찾아옵니다.

 

옛날 옛날에 왕을 위하여 열심히 일해 온 광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광대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러 왕의 노여움을 사고는 사형에 처해지게 되었습니다. 왕은 그동안 광대가 자신을 위해 노력한 것을 감안하여 마지막으로 자비를 베풀기로 하고는 "너는 큰 실수를 저질러 사형을 면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간의 정을 감안하여 너에게 선택권을 줄 것이니 어떤 방법으로 죽기를 원하느냐?" 라고 물었습니다. 광대가 깊은 생각 끝에 왕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냥 늙어서 죽고 싶사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죽기를 원하십니까? 어떻게 죽는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죽음 후입니다. 죽음 이후 어떻게 되는가? 입니다. 먼저 죽은 나사로를 보겠습니다.

“이에 그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천사들이 와서 영혼을 천국으로 데려갔다는 말입니다. 나중에 죽은 부자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지옥, 음부에 가서 영원한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죽음이 인생의 끝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잘못된 지식입니다.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생각하실까요? 성경은 끝이 아니라 내세의 시작이라 말합니다. 천국에서 시작이냐, 지옥 불에서 시작이냐는 것입니다. 히브리서9:27절에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육신이 죽으면 심판이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 심판은 지옥에서 영벌을 받느냐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느냐 심판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죽은 뒤에 어떤 일이 있는지 모르거나 대책이 없이 산다는 것입니다. 그들을 그냥 내버려두면 부자처럼 지옥행입니다. 그러니 예수님 믿고 확실한 천국보험 들어두라는 것이 복음이고 전도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 받고 구원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죽어도 천국이 보장되는 것입니다.

 

 

2. 지옥은 실제 존재합니다.

 

지옥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최악의 고통이 있는 곳입니다. 그곳의 고통을 오늘 성경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24절입니다.

"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눅16:24)

 

얼마나 고통스러우면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혀를 서늘하게 해 달라할까요? 올 여름 한낮 불볕더위 기억나시죠? 얼마나 더웠습니까? 숨이 막히고 정말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나마 그늘로, 에어컨 밑으로 피하면 살만 했습니다. 그러나 지옥은 피할 수도 없는 곳입니다. 한 번 들어가면 영원토록 나올 수가 없는 무자비한 곳입니다. 그 곳에는 어떤 은혜도 없습니다. 어떤 소원도 이루어지지 않는 곳입니다. 아무리 애원하고 눈물로 호소하여도 기도가 통하지 않는 곳입니다. 손가락에 물 한 방울 찍어 달라는 요청도 거절당하는 무자비한 곳입니다.

 

은혜의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살 동안은 신자든 불신자든 동일하게 비를 주시고 땅의 열매를 주시고 은혜를 베푸시지만 지옥은 다릅니다. 지옥이 더 고통스러운 것은 천국에서는 지옥이 안보이지만 지옥에서는 천국이 다 보인다는 것입니다. 주님 품에서 즐거움을 누리면 영생한 것을 보면서 고통을 당하는 곳입니다. 배가 고픈데 먹을 것이 눈앞에 보이지만 먹지 못한다면 얼마나 더 힘들겠습니까? 안 보이면 그나마 더 낫을 것입니다. 천국에서 누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지옥은 더욱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그 고통은 이루 말로 헤아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 고통의 지옥에 들어가지 못하게 살려내는 것이 전도입니다. 그러므로 가족들은 물론 친척, 친구, 동료, 지인들, 모두에게 예수 복음, 천국 보험을 전하여 한 영혼이라도 건지고 살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살아 있는 자의 사명이 전도입니다.

 

본문에는 지옥 간 부자의 호소가 있습니다. 27~28절입니다.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그는 지옥의 고통 속에서 형제 다섯을 생각했습니다. 형제가, 가족이 중요한 것입니다. 아직 세상에 살아 있는 자기 형제들에게 나사로를 살려 보내어 이 사실을 전해 주고 이 지옥 불에 들어오지 않게 해 달라 합니다.

 

성경은 그에게 어떤 대답을 해 줍니까? 29절을 보세요.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났다 하여도 믿지 않는 사람은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가서 말해도 안 듣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살아났는데도 사람들이 안 믿는데 하물며 거지 나사로가 살아난다고 믿겠냐는 것입니다. 그들이 있는 곳에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듣고 믿으라는 것입니다. 전도는 살아 있는 자들의 몫이라는 것이지요. 살아 있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말을 듣고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전도는 살아 있는 자의 사명입니다. 여기에 전도자가 귀 기울여 들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했습니다. 그러니 무조건 전해야 합니다. 전하여 그들로 들게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외침입니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10:14)

 

열심히 전해야 합니다. 듣게 해야 합니다. 더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

 

복음을 들을 때 믿음이 생깁니다. 혹시 여러분에게도 믿지 않는 다섯 형제가 있지 않습니까? 그들에게 전하여 듣게 해야 합니다. 죽기 전, 살아 있을 때, 지옥 불에 들어가기 전에 예수님을 믿고 천국을 가게끔 복음을 부지런히 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교회는 구제 기관이 아닙니다. 복지기관이 아닙니다. 교회는 영혼을 구원하는 기관입니다. 교회는 지옥에 떨어지는 영혼들을 건져내는 곳입니다. 사람들에게 지옥이 있다는 것을 경고하고, 그곳에 가지 못하게 막는 것이 전도입니다. 한 명이라도 더 건지고 살려내야 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여러분과 저의 사명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상징적인 장소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죽어서 실제적으로 가는 곳입니다. 누구든 절대 가지 말아야 할 곳입니다. 그 길과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누구든지 구원을 받아 지옥이 아닌 천국에 입성할 수 있습니다. 나부터 믿고 가족들에게, 형제들에게, 친구들에게, 불신자들에게 이 복음을 힘써 전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 영혼이라도 더 살리고 싶은 심정으로 50일 동안 작정하시고 온 힘을 다하여 전도하여 천하를 하나님께 드리는 주님의 기쁨이 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목포하늘비전교회
글쓴이 : †^머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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